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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환>
날고 있다. 그 이외의 사실은 느껴지지 않는다.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약간의 속도감과 긴장감. 살며시 시야를 가리는 엷은 구름의 꼬랑지. 태양은 등지고 있다. 나아간다. 남자는 잠시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지체 없이 스위치를 눌렀다. 이제 저공비행은 끝이다. 구름 위로 날아야 한다. 위로, 위로, 저 멀리 위로….
남자는 눈을 떴다. 눈꺼풀에 들러붙은 습기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망막에 슬쩍 걸터앉아 있어선지 그다지 시야가 맑지는 못했지만 무척 낯선 환경에서 깨어났다는 사실만은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습기 찬 풍경은 아무리 보아도 일상의 건조한 천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습기 찬 것은 자신의 눈이 아니었다. 인간이란 늙을수록 안팎이 메말라 가는 법인지라 요즘은 운동을 해도 땀도 잘 나지 않고 - 물론 금방 관절에 무리가 와서 땀이 날만치 뛰지 못한다는 게 더 큰 원인일 터이다. - 눈물도 통 나지 않았다. 노인네가 주책없이 질질 짜고 다닐 일이 얼마나 있을까 만은 입을 쩍 벌리고 게걸스럽게 뿜은 하품마저 눈물 한 오라기를 뽑아내는 데 그쳤다. 현역 시절부터 피도 눈물도 없다는 악명이 자자하더니 은퇴한 지 십 수 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악명이 실현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눈에 고인 물기가 흐릿한 시야의 원인이 아니라면 눈앞의 풍경은 정말 흐릿한 것이리라. 안개다. 게다가 새벽이슬까지. 무성한 녹빛이 사방을 보드랍게 감싸고 시린 안개와 이슬이 살을 후벼 파고 들어왔다.
“여기는….”
혼잣말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늙어가는 퇴역 군인에게 혼잣말 같은 나약한 자위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마주하고 보니 절로 혼잣말 비슷한 중얼거림이 툭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괜히 스스로가 늙은 퇴물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자존심이 울컥 상하기도 했다만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사람은커녕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뵈는 거라고는 무성한 수풀. 높다랗게 뻗은 시원스런 나무들. 찝찝한 거미줄마저 영롱하고 투명하게 보이게 하는 맑은 숲을 가린 짙은 안개의 풍경. 게다가 머리끝까지 관통하는 으슬으슬한 기운. 영락없이 새벽의 숲속이었다.
어찌하여 이런 곳에서 잠을 자고 있었을까. 아니면 드디어 죽을 때가 된 것인가. 혹 벌써 죽어버린 것이 아닐까. 믿는 종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저승의 명확한 생김새 따윌 생각해 본 일은 없으나 이런 생기 넘치는 숲이 저승이라면 기묘한 아이러니다. 저승이란 말이 이미 ‘생기’를 상실한 공간이거늘 촉촉함이 묻어나오는 풀잎의 빛깔은 무어란 말인가. 이런 저승이 있다면 ‘지옥불’ 운운하는 자들에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포기했다. 이번에는 고갤 숙여 자신의 차림새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제 술이라도 마셨던가. 아니다, 그런 일은 없었다.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술을 마셨건 대마초라도 피웠건 잠들기 전에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사실만은 단언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낡은 군복을 다시 꺼내 입을 리 만무했다. 더군다나 어디서 구했는지 총까지 한 자루 차고 있었다.
허리춤을 더듬어 총을 꺼내었다. 기종은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복잡한 기종을 외우는 데는 재주가 통 없었다. 아랫것들이 알려주긴 했지만 그다지 외우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저 대충 아는 체 하였을 뿐이다. 그래도 꽤 오랜 세월 군인으로 살다보니 - 총과는 별로 인연이 없는 공군이었지만 - 몇 개 정도는 외우긴 했는데 그마저도 세월이 가면서 푸석하게 갈라진 피부만큼이나 간단히 스러져 지금은 가물가물했다. 그래도 막상 잡아보니 관절 마디마디에 딱 달라붙는 것이 손에 익은 물건이란 느낌을 주었다. 손끝에 스며드는 서늘한 쇳빛 향기가 저리다. 탄환을 확인해 본다. 공포 하나 없이 달랑 실탄이 하나 채워져 있다. 게다가 그 옛적에 몸에 익힌 낡은 조립 구조. 이런 총이 아직 나오기나 하는 건지 새삼 궁금해졌다.
늙은 퇴역 군인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더니 간신히 발을 내딛었다. 저승이건 꿈이건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다닐 만한 곳이라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공군이었지만, 전쟁이라면 단 한 차례 밖에 겪은 적이 없지만 총과 군복, 그리고 이런 고독이 어울리는 공간은 전장 혹은 전장의 그림자에 취해 있는 군대뿐이었다. 최소한 현실일 경우에는 말이다.
늙고 의심 많은 이 퇴역 군인은 아직도 눈앞의 상황을 자신이 알고 있던 현실이라 인정해줄 수 없다는 듯이 고집스럽게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정말 저승에라도 온 것일까. 혹은 꿈일까. 꿈은 아니다. 꿈은 꿈이란 단어를 떠올린 순간 산산이 부서지는 법이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시답지 않은 소설이나 읽더니 끝내 소설가가 된 동생이 언젠가 ‘자각몽’인지 뭔지 하는 걸 가르쳐 준 것 같긴 하다. 꿈일 수도 있는 걸까.
아니다. 꿈은 아니다. 확신의 근거는 아무 것도 없었다. 하지만 꿈은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몰랐다. 왠지 모르게 혈관을 바짝 쪼아오는 심상치 않은 감각은 도무지 꿈이라고 믿고 싶지 않은 짜릿한 것이었다. 묘한 긴장감. 현역 파일럿 시절, 중대한 임무를 맡을 때나 느끼던 감각이다.
늙은 군인은 총을 코끝에서 뿜어지는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바싹 얼굴 쪽으로 끌어당기고 조심스럽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무슨 액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자세가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그런 걱정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이웃들도 늙은이의 노망 정도로만 볼 터이고 부끄러울 가족도 없었다. 부인도, 자식도 없었다. 평생 하늘의 구름 꽁무니를 좇으며 살 줄 알았던 옛 시절을 추억할 틈도 없이 벌써 늙어버렸다. 관절이 쑤신다. 실탄은 한 발 뿐. 하지만 만약의 경우 위협 정도는 될 것이다. 허나 이 총이란 것도 꽤 오래 들고 있으니 팔이 저려왔다.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르는 적군 따위보다 무게감이 훨씬 컸다. 이쯤 되니 오래된 총기의 묵직한 반동에 칼슘이 가신 뼈가 무사할 지가 더 걱정이었다.
고양이처럼 민첩하게, 나비처럼 가볍게. 마음만은 그러하나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새삼스레 원시와 관절염과 고혈압과 비쩍 마른 팔뚝에 묻은 세월이 느껴졌다. 이것만 봐도 꿈은 아니다. 늙으면 잠이 없어지고 얕아진다고, 요즘 들어 종종 꿈을 꾸곤 했는데 이렇게 늙어 빠진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체감할 수 있는 꿈이라곤 없었다.
터벅.
군인이 내딛은 발자국의 소리가 아니었다. 인기척이다! 퇴역 군인은 다시 느슨해진 끈을 팽팽하게 당겼다. 위치가 노출되었나? 이런 숲속에서 교전 따위는 겪어본 일은 없었다. 하지만 만일을 위한 훈련 정도는 받았던 기억이 아스라이 남아 있다. 철컥. 탄환은 준비되었다. 하지만 정말 쏠 수나 있을지. 그는 의외로 결단력이 약했다. 만약 현 시대가 아직도 창칼을 휘두르며 전쟁을 치루는 때였다면 노인은 결코 군인 따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가 소장이었고 장남에 대해서는 한없이 엄격하고 충성이니, 국가니 해대는 철저한 보수주의자였다 해도 그는 기본적으로 제 손에 피 묻히는 광경을 목도하고 있을 정도로 독해질 수 있는 그릇이 못되었다.
그런 면에서 총은 조금 낫기는 했다. 어쨌거나 손에 직접 피 묻히는 무기는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총만 쥐어주면 얼마든지 살인귀로 변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만한 배짱이 없었다. 인체가 물에 젖은 종이처럼 손쉽게 찢기는 광경을 보고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느덧 일흔 줄을 바라보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아버지 때문에 군인이 되어야 할 운명이라면 그가 공군이 된 건 천운에 가까운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손쉬운 일이었다. 물론 비행은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니었지만 아래에선 버섯구름이 일건 피가 튀던 살점이 스러지던 그는 그저 구름을 좇고 있으면 되었다. 폭격이란 것이 잔인한 이유는 그것이 그저 대량 살상이고 강력한 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공격자에게 아무런 감흥을 안기지 않는다. 어쩌면 폭격의 가장 큰 파편은 조종자에게로 날아오는지도 모른다.
그런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정말로 늙어빠졌구나. 퇴역 군인은 군인다운 한탄을 했다. 스스로에게 군복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적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민간인으로 보낸 세월보다 군인으로 보낸 시간이 길었다. 숫기 없고 여린 애송이는 시간에 뒤덮이고 빳빳한 체 하는 군인만 몸에 배었다.
“거기 뉘시오?"
그 사소한 인사말(?)에 화들짝 놀란다. 냉큼 총구를 들이밀었으나 말을 건 사람이 누구인지 구별해낼 재간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 이 경악스런 공간의 일그러짐에 충격을 받아 어떤 사고도 할 수 없었다.
좀 전의 생기 넘치던 초록빛 숲은 이미 사라졌다. 단순히 회색이라는 말보다는 잿빛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잘 들어맞는 곳이었다. 도시인가. 좀 전의 우거진 숲과는 대조적인 잿빛 도시였다. 꽤 높다랗게 뻗긴 했지만 촌티가 역력한 구식 고층 건물, 외국어인지 외계어인지 분간할 길이 없는 희한한 글자가 새겨진 간판들, 생기는 없이 이기만 느껴지는 골목의 시장 바닥, 매캐한 공장 내음과 싸구려 가죽의 빳빳한 향내, 고구마 굽는 냄새가 뒤섞인 기묘한 풍경이 마냥 낯설지만은 않다.
늙은 퇴역 군인은 가만 생각했다. 자신이 이런 곳에 살았거나 자랐던 기억이 있는가. 전무하다. 전쟁 시절에 태어난 군인에게 평화로운 도시 생활이라니 당치 않았다. 얼추 자신이 어릴 적이랑 비슷한 시대라는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그는 대도시 출신으로 이런 어설프게 도시 냄새를 풍기는 곳에 얽힌 추억 따윈 없었다. 더구나 저 기괴한 글자는 무언가.
하지만 느닷없는 공간 이동과 기묘한 시간대에 던져진 상황 따위는 감히 별 것 아니라고 표현할 만치 충격적인 영상이 그의 동공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얼굴이 없다!
산전수전… 을 모두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많은 공중전을 겪어본 노장이었다. 별을 달아 보기 전에 은퇴했으니 노장이라 칭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경험 많은 군인임에는 분명했다. 군인이 아니더라도 70년을 살아온 노인이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축적한 데이터의 어디에도 얼굴 없는 인간의 존재를 인정해 줄만한 구석은 없었다. 게다가 어쩌다 한 명도 아닌 이 도시를 걸어 다니는 모든 자가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하나같이 회색 낯빛을 하고서 회색 정장 차림. 시멘트 빛깔의 도시. 색채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흑백사진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늙은 퇴역 군인은 차마 지나다니는 인간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이목구비가 전혀 없는 몽달 귀신들은 아니었다. 분명 인간의 형상을 갖추고 있는 것 같긴 한데 희한하게도 생김새랄 게 없었다. 다 똑같이 생겼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꿈틀대는 생물체일 뿐이었다.
“뭐야…… 여긴?”
늙은 군인이 조그맣게 지껄였지만 아무도 그의 말에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 새 좀 적응이 된 건지 쳐다보지도 못하더니 이젠 제법 얼굴 없는 세계의 인간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골고루 있다. 노인이 아주 많은 것도 아니요, 아이들만 징징거리는 곳도 아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남자들이 좀 적어보이긴 했으나 아직 벌건 대낮인지라 대강 짐작해볼 수는 있었다. 아마 건물에 틀어박혀 있겠거니.
다시 눈앞에 펼쳐진 도시의 전경 전체를 훑어본다. 이국적인 도시다. 지나다니는 인간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간간히 전통의상 쯤으로 보이는 이국적인 차림새, 처음 보는 작물에 처음 보는 조리법. 낯선 문자들이 즐비한 거리. 풍요로워 보이진 않지만 푸근해 보이긴 하는 서툰 손길이 스쳐간 도로. 역시 꿈속일까. 세상에 이런 기괴한 곳이 있다니.
꿈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며 이 풍경을 깨뜨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어보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견고하고 확고한 광경이었다.
이상한 것은 이 이국적이고 이질적인 도시가 괜스레 낯익은 듯한 기분이 든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그저 꺼림칙한 예감이나 불확실한 기분과는 달리 확신에 가까운 느낌이어서 그를 더욱 당혹케 했다.
그는 일단 얼굴 없는 자들에 섞여 길을 걸었다. 길게 뻗은 길에는 수레와 자전거, 오토바이와 사람들이 뒤섞여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이 똑같은 종착역이라도 준비된 듯한 모양새로 한 눈조차 팔지 않고,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오롯이 한 방향으로만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어딘지 상여라도 이면 어울릴 만한 장면 있었다. 말이라도 걸어보고 싶은 충동이 문득 고개를 쳐들어 손을 뻗어 어깨를 툭 건드렸다. 하지만 늙은 군인의 손은 얼굴없는 회색인에게 닿지 못했다. 늙은 군인은 거리감을 잃었는지 근시에 원시가 겹친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짜부러뜨렸으나 성과는 미약했다. 옷깃에 살짝 손이 닿은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꺼림칙한 냉기마저 풍기는 뒷모습이 다시 한번 무언가 말을 걸어 보려는 군인의 노력을 냉랭하게 거절하고 있는 것만 같은 인상을 주었다. 늙은 군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뭘하고 있는 건지. 말을 건다고 한들, 무엇을 물어볼 것인가.
호리호리한 회색인마니 가득하던 장중한 행렬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잠시 끼어들었을 뿐인 늙은 군인마저 중간에 감히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그 행진의 일관성은 실로 단단하였다.
답답하다. 갑갑하다. 먹먹하다. 막막하다.
이 얼굴 없는 잿빛 도시에 대한 감상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투박한 회색을 가만 보고 있자니 눈이 먼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몇 번이나 고개를 흔들어보고 눈을 비벼 보아도 도무지 색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늙은 군인의 눈에 이질적인 형상이 밟히었다. 작은 체구에 오동통한 볼 살. 분간할 수 있는 형상은 그 정도가 전부였으나 어린 아이임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대도시라 할 만한 수준은 아니어도 이만한 도시에 어린 아이 하나 없다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늙은 군인은 이런 곳에 어린애가 있다는 사실에 크나큰 위화감을 느꼈다. 얼굴 없는 아이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괴상망측함을 넘어 경악스러울 지경이었다. 아이다운 천진함과 냉기 어린 저승 같은 세계. 상극의 성질을 억지로 섞어놓으려니 거부감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구역질이 났다.
그러나 의외로 그 어린 아이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꽤 풀어졌다. 부인도 없고 자식도 없는, 당연하게도 손자 또한 없는 그에게도 아이란 존재는 꽤나 포근한 인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귀신같은 세계에서 만난 아이임에도 묘하게 그 아이에게만은 온기 비슷한 감촉이 손끝에 걸리어 왔다. 그 가녀린 온기를 좇아 노인의 손이 더듬더듬 허공에서 휘청대더니 이내 아이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아이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홱 돌아오는데 좀전에 스쳐지나가며 보았던 얼굴과는 사뭇 달랐다.
사내아이치고는 예쁘장하다 했더니 계집애다. 짧게 자른 머리 탓에 뒷모습으로는 분간하기 어려웠으나 좁은 어깨와 여린 체형, 살짝 솟아오른 가슴으로 볼 때 여자아이였다. 한 열 서너 살쯤 되었을까. 젖살이 마저 빠지지 않은 얼굴로 홱 돌아보는데 반듯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더군다나 이제까지 볼 수 없던 색채감이 은은하게 동공을 적셔 오는데 이 시시껄렁하고 당연한 일이 어찌나 감격스러웠는지 늙은 군인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왜 그래요?”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노병은 무엇부터 물어보아야 할지 미처 정리해놓지 못했다. 자신이 불러놓고도 말이 통한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선 어영부영하다가 엉겁결에 떠오르는 말을 멋대로 내뱉었다.
“어디로 가는 거냐?”
“잘은 몰라요. 그건 왜요?”
“내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넌 이유도 모르면서 왜 그렇게 길을 서두르는 게야?”
“할아버지도 별 이유 없네요, 뭘.”
당돌한 꼬마였다. 늙은 군인은 소녀의 역공에 말문이 턱 막혔다. 패기 넘치는 젊은 군인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관록이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소녀의 반응을 보자니 이건 영 아니올시다, 하는 자조가 퍼뜩 들었다. 스스로에 대한 조소를 지우고 싶었는지 늙은 군인은 황급히 다음 질문을 짜내었다.
“여긴 어디냐?”
이렇게 말하면 아무래도 수상한 사람으로 보일까. 하지만 아무렴 어떠냐. 정말 이곳이 어디인지를 모르는 걸. 도시 한 복판에서 길을 잃는다는 건 그리 드문 상황도 아닐 거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니 대개 길을 잃었다는 상황에서 던지는 질문은 ‘어디어디로 가고 싶은데 어떻게 가야할까요?’ 같은 식인지라, 밑도 끝도 없이 ‘여긴 어디냐’ 하고 따지고 든 자신의 질의는 참으로 별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여전히 제 갈 길 바쁜 회색인들은 물론 질문을 받은 소녀조차 별로 대수롭지 않은 양 행동하고 있는데도 늙은 군인은 괜히 헛기침을 해댔다. 그 사이 소녀가 입을 벌려 무슨 단어를 툭 던져주었다.
무슨 단어였는지는 잘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외국어, 하지만 마냥 낯설지 만은 않은, 기억의 틈새에 조심스레 자리 잡고 있는, 한때 매우 중요한, 반드시 기억하고 있어야만 했던,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잊고 싶은 기억이 된 그런 단어였다. 늙은 군인은 저도 모르게 천천히 소녀의 입모양을 따라 그 단어를 조그맣게 읊조렸다. 소녀는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해맑게 웃었다. 반면 노인의 얼굴에선 엷게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여유가 한꺼번에 소거되어 버렸다. 처음 이 도시에 던져졌을 때보다 훨씬 더 큰 경악이 안면 근육 전체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디라고?”
혹시나 하는 심경에서 다그치듯이 물었으나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같은 답변을 내주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낮은 뇌까림을 소녀는 듣지 못했다. 늙은 군인은 잠시 절규하듯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감싸 쥐더니 휑한 눈동자로 황망히 소녀를 쳐다보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생각인지 다급하게 소녀에게 구걸하듯 물었다.
“오늘 날짜가…. 아니, 오늘이 몇 년도, 몇 월, 며칠이냐? 아니, 아니. 지금이 몇 시, 몇 분 인지까지 말해다오. 초침 발자욱까지 남김없이 말해봐라.”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늙은 군인의 침 튀기는 질문에도 안색 한번 바뀌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 늙은 군인은 왠지 그 말이 잘 들리지가 않았다. 하지만 입모양을 보고 숫자를 대강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소녀의 목소리가 두골 안에서 쩌렁쩌렁 울려왔다. 그 목소리가 무슨 마취제라도 되는 양 늙은 군인은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볼 뿐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헤벌쭉 벌리고 섰다. 소녀는 갸우뚱하며 가던 길을 다시 밟았으나 그는 잡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이런데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은 이런 곳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사지의 감각은 멀쩡했고 통각조차 멎지 않았다. 이 세계가 꿈이건 저승이건 그저 환영일 뿐이건 현실이건 지금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도망쳐야 한다.
퇴역 군인은 황급히 회색인들이 성실히 걷고 있는 길에서 벽에 부닥친 농구공이 튕겨나오 듯 재빠르게 빠져나왔다. 도망쳐야 한다. 강박관념에 가까운 그 일념이 뇌리 곳곳에 스며서는 떨쳐지지가 않았다. 아무렴 어떠냐. 일단은 살고 봐야지. 고희를 맞은 노구를 이끌고 퇴역 군인은 아무래도 마음만 앞섰는지 이내 뜀박질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늙었다는 사실이 새삼 여느 때보다 확고하게 그의 전신에 자리잡았다. 하지만 멈출 수야 없었다. 여기 있다가는 꼼짝없이 죽는다. 조금만 있으면 이 도시는 사라진다. 4시간 후, 이곳은 무차별 폭격으로 사라진다.
“하필이면….”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 그래도 지껄일 여유가 생겼는지 이죽거리는 표정으로 불평을 토해냈지만 호흡이 가빠 와서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짧게 뱉은 ‘하필이면’ 다음의 말은 심중으로만 읊어야 했다.
하필이면 이런 곳으로, 하필이면 적지로 떨어지다니. 하필이면 폭격 당할 곳으로 떨어지다니. 손목을 쳐다보았지만 바싹 말라 핏줄이 우둘투둘한 휑한 팔뚝만 보일 뿐이었다. 아직 시간이 그리 많이 흘렀을 리가 없음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도무지 초조함을 떨칠 수 없었다.
그래, 아직은 시간이 많이 있다. 조금만 여유를 가지자. 힘껏 달리고 이렇게 한참을 쉬어서야 폭격의 범위에서 벗어날 수나 있을 지 걱정이었다. 퇴역 군인은 계속 스스로에게 노심초사하지 말자고 암시를 걸어보았지만 그게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던지 틈틈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담배를 찾았지만 휑한 주머니가 찬 손을 품을 뿐 잡히는 것은 없었다.
“제길.”
4시간 후다. 좀 전에 소녀에게 들은 것들이 정확하다면 딱 4시간 후였다. 예언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은 자신의 행동 동기가 될 수 없었다. 퇴역 군인은 유약하긴 했지만 의외로 확고한 현실주의자였다. 더구나 전쟁이란 걸 치르는 동안 시시한 미신 따위가 얼마나 덧없이 부스러지는 지를 누차 목격해왔다. 그런 그가 전력질주하게 만드는 이 ‘폭격’에 대한 예감은 결코 예언 따위가 아니었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예감 따위도 아니었다.
그것은 엄연한 ‘기억’이었다. 미래를 기억한다는 건 아무래도 주술 관계가 어색한 감이 있긴 했지만 사실이었다. 그의 기억에 의하면 이 도시는 오늘, 정확히 4시간 후에 폐허로 변한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폭격이 이루어지는 해, 날짜 뿐 아니라 시간까지. 그는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엄하신 왕명보다 훨씬 더 두려운 군명이었다. 어떻게 그런 중요한 작전을 들었는지 그 정황이나 심경 따위 자질구레한 것들은 쉽게 잊어버렸지만 그때 들은 명령의 구체적인 사항은 여태 잊질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높이 날았다. 언제나 구름 꽁무니를 좇는 게 그의 낙이었다. 물론 뜬구름에 취해 정해진 길을 이탈할 정도로 얼빠진 자는 아니었다. 무얼한다한들 그는 별 수 없는 현실주의자였다. 하지만 어디로 가도 구름은 있다.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지 않아도 구름은 항상 눈앞에 있었다. 때문에 그의 비행은 늘 구름을 좇는 것이었다. 훈련이든 실전이든 그에게 비행이란 구름을 좇는 일에 불과했다.
단 폭격을 위해 고도를 낮출 때에는 예외였다. 안정된 성층권의 대기에서 내려앉아 구름 아래로, 대류권에 슬쩍 걸쳤을 때에는 아주 기분이 묘해진다. 단순히 구름을 좇을 뿐 아니라 구름 속에 있는 상태인 것이다. 마약을 해본 일은 없지만 약에 취한 상태와 매우 흡사할 것이라는 짐작이 들었다. 술에 취한 상태와는 조금 다른, 차분하고 안정되면서도 기묘한 긴장감에 섞인 옅은 쾌감이 담배 연기처럼 깊이 빨려 들어온다. 분명 모를 일이긴 하지만 그 기분은 마약과 매우 흡사할 것이다. 약에 취한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스위치를 누를 수 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일 것이 분명한 스위치는 보드랍게 손가락 끝에 붙어온다. 조금은 딱딱한 소리를 내며 투하. 임무는 끝이다. 아래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모른다. 버섯구름 따위 거창한 것을 지켜보는 일도 없었다. 일단 폭격을 마치면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성층권으로 날아오르면 그만이었다.
이 도시를 파괴한 건 자신이었던가.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아닐 것이다. 자신은 분명 여기, 이곳에 있었다. 여기가 어디건 두 명의 나라니 가당치 않았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살해한다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를 살해하는 것 역시 내키지 않는 일이다. 무엇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소설가가 된 동생이 해준 도플갱어 어쩌고 하는 소리가 문득 떠올라버렸지만 고집스럽게 현실주의자로 늙은 퇴역 군인에게는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건 다른 누군가이건 이 도시가 박살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도망쳐야 한다.
그 일념 하나로 정신없이 걷다보니 어느덧 처음의 장소에 도달해 있었다. 이곳은 다시 숲이다. 회색의 전장 따위 벌써 아득해진 것인지 그 독특한 이국의 향내조차 가셔 있었다. 도시는 한낮이더니 숲은 여전히 새벽녘인 모양이다. 우거진 수풀과 옹골찬 이슬방울, 사방을 매우고 있는 안개. 안개와 나무뿌리가 각각 지면과 허공에서 구렁이처럼 기어올라 퇴역 군인의 몸에 똬리라도 트는 듯 조여오고 있었다. 이 꿈 같은 곳의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부분이 없긴 했지만 정말 기분 나쁜 숲이었다.
어쨌거나 이제 됐다. 폭격 범위에 이런 숲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그에 대한 기억은 확실치 않다. 이 지역에 대한 폭격을 들은 것은 분명하건만 수행한 것이 자신인지도 불확실할 뿐이었다. 게다가 수행했다하더라도 그는 목표 지점 옆에 있는 수풀 따위에 세세한 신경을 써줄 만한 사내가 아니었다. 하물며 구름에 취해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상공의 전투기에서 숲을 감상하고 있을 리 만무했다.
이제 되었다. 꿈이라면 깨고, 죽은 거라면 그냥 편하게 심판을 맞이했으면 마음이 편하겠다. 늙은 퇴역 군인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헌데 어쩐지 그 한숨은 그저 안도와 평안으로만 생겨먹은 것이 아니었다. 뱃속 깊은 데 있는 남모를 회한 같은 것이 흰옷에 묻은 벌건 양념처럼 눈에 띄게 들러붙어 있었다.
그 소녀는 어찌될까. 이 폭격 작전은 철저히 기밀에 붙여졌다. 꽤 큰 전쟁이었고 그는 세계 최고의 군대에 속해 있었다. 국제법 따위는 하잘 것 없는 일에 불과했다. 적국은 절대악에 불과하다. 여론이 잠시 끓어오를지 몰라도 금세 식어버릴 것을 경험 많은 이 군인은 알고 있었다. 그런 거야 어찌되든, 소녀는 어찌될까. 은밀히 진행된 이 작전이 민간인에게 새어나갔을 가능성은 없다. 일관되게 어딘가로 향하고 있던 회색인들의 움직임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그들의 동선에는 난민들에게서 볼 수 있는 다급함이나 절박함 따위 묻어나지 않았다.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피신하는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소녀는 어찌될까. 이 의문이 생각의 흐름을 끊어먹고 자꾸만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와 고래의 그것과 같은 긴 호흡을 뿜어댔다. 어찌되긴. 죽는 수밖에 더 있나. 스스로에게 답한 늙은 퇴역 군인은 왠지 걸음을 떼지 못했다. 얼굴 없는 회색인. 그 식겁하게 생긴 작자들이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이 낯선 세계에서 모처럼의 온기와 색감을 선사해준 그 소녀는 암만 무시하려 해도 마음에 걸렸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퇴역 군인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지금 다시 가면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시간 감각이 다소 둔해지긴 했으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건 그 도시에서 멀어질 수록 안전해진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구태여 다시 돌아가서 ‘폭격이 있을 것이니 어서 피해라!’ 따위 경고는 도박일 뿐이었다. 오히려 혼란만 가중할 것이다. 소녀를 폭격에서 피하게 할 수 있기는커녕 그 전에 급작스럽게 뒤엉킨 난민들의 발에 밟혀죽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소녀만 콕 집어서 대피하게 해줄 수도 없었다. 그 소녀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미지수였고 찾으러 다닐 만한 시간 따위 없었다.
하지만.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 소녀를 살릴 수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늙은 퇴역 군인은 가만히 앉아서 상상했다. 여태까지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살아온 자신을 부수고 내면에 침잠해 상상에 빠진다는 게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는지 몇 차례나 투박한 손으로 숱이 얼마 없는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구할 수 있다고 한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 역시 현실주의자인 퇴역 군인에게는 어떤 예감이라든가, 불길함 같은 감상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저 의무감에 가까운 당위의식에서 나온 생각에 불과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주민들을 대피시킬 수 있다. 혼란이 있기야 하겠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덜컥 폭격에 죽어나는 것보다는 인명피해야 훨씬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역시 동생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사학계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라는데 딱히 사학에 관심이 없는 퇴역 군인조차도 얼핏이나마 들어본 기억이 있으니 유명하다는 것만은 사실이리라. 확실히 역사에 만약은 없다. 하지만 정작 역사를 배우는 동안에는 수많은 ‘만약’을 부르게 된다.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면, 사라예보의 총성이 없었다면,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승리했다면, 한니발이 로마를 정복했다면. 만약, 만약, 만약. 허나 만약이 있다한들 만약에 대한 기대가 이루어질 거라고는 보기 힘들었다. 동생은 그 이유를 일일이 열거해주었지만 늙은 퇴역 군인의 머리에 지금껏 남아 있는 지식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명제 하나만큼은 가슴팍에 굳게 박혀 있었다. 그다지 거창한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학자들 사정이야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의 생각은 철저하게 참전했던 군인의 입장에서 나온 것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렇기에 여기서 내가 이 자를 살려준다 해도, 이 자가 살아남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다른데서 폭탄을 맞을 지, 총을 맞을 지, 화염에 휩싸일지, 불쌍하게 기어 다니다 아사해버릴 지. 그러니 이것은 반드시 자신의 책임만은 아니다. 지금 죽지 않는다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죽인다. 전장이란 공간에서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살인을, 더구나 수 차례의 폭격이라는 대량 살상을 행했던 늙은 군인이 항상 이런 사고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었으나 이후에라도 그런 식의 변명 아닌 변명을 흘리고 나니 마음이 좀 편했다. 그 이전에도 대단한 죄책감에 시달리지는 않았지만. 현대의 전쟁이란 그런 식이다. 어쩌면 기술의 발전이란 게 병사의 죄책감을 덜 수 있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는지도.
그런 거야 어찌되었든 역사에 만약은 없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둘러대고 나니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왔다. 그 소녀는 어찌될까.
죽겠지.
세 음절에 불과한 이 짧은 답을 위해 그토록 많은 생각을 거치며 돌아왔던가. 퇴역 군인은 씁쓸하게 웃었다. 뭐라 둘러댄들 그 사실만은 변함없었다. 죽이는 것은 아군. 죽는 것은 적군. 민간인들이기는 하지만 잠정적인 적이라 생각하면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전쟁이란 죽고 죽이는 게 아니겠냐. 적에게는 죽음을 주는 것이 전장에서의 본분이다.
헌데 이 당연한 답에 자꾸만 사족이 붙어왔다.
하지만, 만약에, 그래도, 혹시나….
늙었구나. 그런 한탄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퇴역 군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숲이 끝나 있었다.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고 큼직한 나무들이 허공에다 성기게 가지를 뻗어대고 있었지만 좀 전의 숲과는 달리 상당히 작위적인 모습이었다. 얼키설키 뻗은 가지의 모습이 울창한 숲에 어울리는 나무라기보다는 눈에 익은 평범한 가로수였다. 아니나 다를까 가로수를 향해 조금 다가가자 우둘투둘한 아스팔트가 커브라고 부르기엔 어중간한 모양새로 구부정하게 지평선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확실히 눈에 익다. 그러면서도 어딘지 아련한 데가 있는. 이를테면 추억 속의 장소일까.
“아!”
퇴역 군인이 조그맣게 탄식을 흘렸다. 지도에 표시된 기호와 작전에서의 암호로만 들은 회색 도시와는 달리 이곳은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곳이었다. 이곳은 그가 주둔하던 공군 기지의 뒷길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장소인데 어째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언뜻 평행선이지만 조금만 주의해서 보면 삐뚤빼뚤한 인도. 수차례 행인의 발끝에 걸려오는 깨어진 낡은 벽돌. 틈이 넓은 하수구. 어떻게 여길 잊을까.
그와 함께 군생활은 한 이들에게 이 길은 각별했다. 기지 뒤의 길로 언뜻 멀찍이 뻗어 있는 것 같은 이 길은 저편 중간쯤의 골목에서 끝난다. 그리고 그 골목에서 오른 쪽으로 틀어 벽을 따라 뺑 돌아오면 바로 기지였다. 보급로로 보기에도 힘들었고 사실상 폐쇄된 일차선 도로였는데 이런 곳을 기억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임무가 있는 날, 새벽에 이 흉하다면 흉한 길을 한 바퀴 돌고나면 그날 임무를 무사히 수행할 수 있다는 요상한 미신이 있었다. 현실주의자를 자처하던 퇴역 군인 또한 내심 불안한 데가 많았는지 남몰래 일어나선 몇 바퀴고 땀이 날 때까지 이 길을 뛰곤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리면 ‘자신’을 볼 수 있기라도 한 걸까. 거기까지는 좀 미심쩍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늙은 퇴역 군인은 그런 기대를 떨치기가 힘들었다. 봐서 무얼 하려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심장은 섣불리 답해주지 않았다. 그에게 답을 준 것은 어느 신체기관도 아닌 손에 꾹 쥐고 있던 쇳덩이, 한 자루의 시커먼 권총이었다. 그는 오른 손에 든 그 쇳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죽… 여?”
해괴하기 짝이 없는 상상일 뿐이었지만 그저 상상으로만 치부하기에는 강렬하고 짜릿한 상념이었다. 찰나의 망령이겠거니. 그렇게 여긴 퇴역 군인은 다시 의식의 행로를 틀었다. 그나저나 그 소녀는 어찌 되었을꼬. 어쩌다 떠올린다고 떠올린 다른 생각은 또 왜 이런 칙칙한 것인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의 눈앞에는 여전히 권총이 들려 있었다.
“쏠… 까?”
불현듯 튀어나온 말이었다. 누구를 쏜단 말인가. 이 길을 지나가는 군인을? 이 시점이 여전히 과거라면 길 저편에서 달려올 이들은 과거의 전우이자 현실에서 같이 늙어가는 처지일 뿐인 하잘 것 없는 졸병일 뿐이었다. 물론 그럴 듯한 직함을 주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명령하는 지위가 아니라는 사실은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왜? 쏠 이유가 없다. 이 권총이 왜 자신에게 주어졌는지,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다. 세상 모든 일이 필연이라면 그거야 말로 소설일 뿐이다. 이 총은 그저 우연히 주어졌을 뿐이다. 어쩌다 이런 흉흉한 물건을 여태 쥐고 있었을까. 이런 걸 들고 그 소녀와 대화했던 것일까.
그 소녀는 어찌될까.
이 질문은 어째 지칠 줄도 모르고 간헐적으로 퇴역 군인의 의식 전반으로 솟아올랐다. 그의 머릿속은 차곡차곡 쌓인 의문 투성이였다. 쏠까? 왜? 그 소녀는 어찌될까? 이 총은 왜 들고 다닌 거야?
“…."
레고라도 조립하는 양 단단하게 쌓여 있기만 하던 질문들이 차례로 늘어놓고 보니 답이 꽤나 일목요연하게 보였다. 시계가 있을 손목을 보았지만 바싹 마른 휑한 손목 뿐. 하지만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적의 도시와 아군의 공군 기지가 이렇게 가까울 리야 없지만 아무렴 어떠랴. 얼굴 없는 인간이 돌아다니는 잿빛 세계에서 과도한 현실감을 요구해봐야 헛된 일이었다. 늙은 퇴역 군인은 그런 것을 포기했다.
쏘자. 쏘면 된다. 오늘 이 시간에 이 길을 도는 이가 있다면 그건 틀림없이 좀 전의 소녀를 만난 도시에 폭격을 가할 자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딱 한 발 있는 탄환으로 그 자를 쏘면 폭격은 없다. 그리고….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이 이루어질까. 무언가 변할 수는 있는 걸까. 그의 탄환이 과연 나비 효과가 될 수 있을까.
터벅,
멀찍이서 들려온 발소리. 아니 멀지만은 않다. 의외로 가까운 곳일지도 모른다.
터벅,
다가온다. 발소리의 리듬으로 보건데 다소 느긋한 뜀박질. 탄력적인 발길질로 땅을 찬다.
터벅.
가까워 온다. 체중이 온전히 바닥을 때리지 않는 가벼운 걸음이다. 사정거리에 들어왔다. 늙은 퇴역 군인은 훈련병 시절 배운 그 자세 그대로 총을 눈높이까지 들어 왼손으로 받쳤다. 반동을 대비해 이를 악문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표적을 찾는다. 숨을 들이킨다. 사방을 기어 다니는 안개가 들이쉰 숨과 함께 콧구멍으로 이끌려 올라온다. 묘한 기분. 허파에 습기 찬 공기가 부풀어 오르는 기묘한 쾌감. 그래, 안개란 것도 구름이란 비슷하겠지. 약에 취한 이 기분. 역사에 만약은 없다. 하지만 만약에… 쏜다면….
표적이 왔다. 그의 낡아빠진 동공에 그 형상을 뚜렷이 드러내었다. 헬쓱한 얼굴에 마른 체형. 거무스름한 색에 부스스한 머리칼.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 짐짓 현실주의자인 체 했지만 남의 시선을 피해 몰래 미신적인 산책을 하러 나온 그 모습. 내심 다른 이이길 바랐건만 현실은 그의 그런 바람을 외면했다. 제길, 난 왜 현실주의자일 수 없었던 걸까. 늙은 군인, 그러니까 현재의 혹은 미래의 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불평했다. 미신 때문에 새벽을 달리는 현실주의자라. 그런 게 있다면 오늘은 역사에 만약 하나 쯤은 있어도 괜찮으리라. 그다지 논리적이라 생각지는 않았다. 상관없었다. 노인은 천천히, 하지만 확고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노인의 손가락 마디를 파고드는 방아쇠의 감촉이 어딘지 여리다.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화약 내음만이 진득하게 안개에 녹아들었다. 취한 듯한 이 감각. 눈이 감겨온다.
비명조차 들려오지 않는 안개의 너머. 늙은 군인의 탄환은 달려가던 자신을 쏘았고 역사에 만약을 찍었다.
늙은 군인은 꾹 감았던 눈을 떴다. 어둡다. 눈앞은 그저 암흑이다. 꿈일까? 꿈이라면 좀 전의 세계가 꿈이었을까? 그렇다면 꿈을 꾼 것은 총을 쏜 쪽인가, 총에 맞은쪽인가. 혹시 지금 눈앞의 어둠이야말로 꿈인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번에야 말로 죽어 황천에 온 것이 아닐까.
아무래도 좋았다. 꿈이건 죽음이건 이제야 말로 편히 잠들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노인은 다시 눈을 감았다. 평온한 어둠이 그의 시야를 덮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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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올린 <구원>이 난해하단 의견이 나올 때 한창 쓰고 있던 글입니다.
그래서 꽤나 고민했습니다.
그저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일 뿐이지만,
제 생각에는 구원보다 이 글이 훨씬 난해할 거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랄까...
첫댓글 와와- 할아버지 결국 죽은거에요?
그렇다고도 볼 수 있죠~_~
할아버지가 자신으로인해 다른사람들이죽는걸막으려구 자살한건가요??제가 자세히읽지않은건지, 아니면 머리가딸리는건지 수박 겉핥기밖에되질않네요ㅠ_ㅠ..
해석은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읽으시건, 그건 제가 이래라 저래라 할 일이 아니죠~_~ 정 궁금하신 부분이 있으시면 쪽지로 주세요^^
퍼 갑니다. 재미있게 읽겠습니다.
흠... 퍼가시는 건 괜찮은데, 어디로 가져가시는 지 정도만 알려주세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