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 로맹가리
그는 테라스로 나와서 다시 그 고독의 정경 속에 잠겨 들어갔다. 모래언덕, 대양, 모래 위에 죽어 있는
수천 마리의 새들, 한 척의 나룻배, 녹이 슨 그물망, 그리고 이따금씩 새로 나타나는 몇 가지 표시들,
가령 밀려온 고래의 뼈만 남은 해골, 발자국들, 구아노 석[鳥糞石]으로 된 섬들이 하얀빛을 발하며
하늘과 겨루고 있는 듯한 저쪽에 드문드문 염주처럼 떠 있는 고기잡이배들. 카페는 모래밭 한가운데
나무기둥 받침들을 딛고 서 있었다. 그곳에서 백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길이 지나가고 있었다.
길에서 나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계단 모양으로 된 가교가 바닷가로 내려가도록 나 있었다.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리마의 감옥에서 도망쳐 나온 두 사람의 죄수가 유리병으로 그를 후려쳐서
기절시킨 일이 있은 다음부터 그는 저녁마다 그 가교를 들어 세워두었다. 아침이 되어 그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두 죄수는 바 안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하여 쓰러져 있었다.
그는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고 첫 담배를 피우면서 모래 위에 떨어져 있는 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중에는 아직도 꼼지락거리는 놈도 있었다. 그 새들이 무엇 때문에 난바다의 섬들을 떠나 리마 북쪽
십 킬로나 떨어져 있는 이 해변에 와서 숨을 거두는 것인지 그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새들은 결코 그곳보다 더 북쪽으로도 남쪽으로도 가는 일이 없었다.
오직 정확하게 삼 킬로미터의 길이가 되는 이 좁은 모래펄에 와서 죽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곳이 성지였는지도 모른다. 신자들이 찾아가 영혼을 바치는 인도의 베나레스처럼.
그들은 참으로 먼 곳으로 날아가기 전에 이곳에 와서 그들의 뼈를 버리는 것이다. 풀 한 포기 없이 헐벗고
차디찬 돌덩어리로 된 구아노 석의 섬들에서부터 그들은 다만 곧장 직선으로 이곳에 날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피가 차가워지기 시작하여 이제 겨우 그 바다를 건너기에 적당할 만큼밖에 여력이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이곳의 모래는 부드럽고 따뜻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의 설명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일에는 과학적인 설명이 있기는 하겠지만 물론 우리는 시(詩)속에 마음을 묻고 태양과 친구가 되고
바다의 목소리를 듣고 자연의 신비를 믿을 수도 있다. 약간은 시인이 되고 약간은 꿈에 젖고……
그리하여 스페인에서 투쟁하고 프랑스에서 항독 지하운동에 참가하고 쿠바에서 싸우고 난 뒤에
이렇게 페루의 안데스 산맥 밑, 모든 것이 끝나는 바닷가에 와서 숨어 살게 된다.
왜냐하면 나이가 마흔일곱쯤 되고 보면 그래도 배울 만한 자신의 교훈은 체득한 셈이고 위대한 목적에도
아름다운 여자에도 이제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니까. 다만 아름다운 풍경으로 마음의 위안을 찾게 된다.
풍경이란 거의 배반하는 법이 없다. 약간은 시인이 되고 약간은 꿈에…… 하기야 시도 어느 날엔가는 과학적으로
설명되고 어떤 단순한 분비 현상처럼 연구될 것이다. 과학은 모든 면에서 인간의 위로 보무도 당당하게
개선하여 전진한다. 사람은 페루 해안의 어느 카페의 주인이 되어 오직 바다와 벗하고 지낼 수 있지만
여기에도 역시 어떤 해석이 따른다. 바다야말로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요 영생의 약속, 최후의 위안의 약속이 아닌가?
약간은 시인이 되고…… 영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를 빌어야 마땅하다. 영혼이 올가미에 걸리지 않는
유일한 길은 그것뿐이니까. 학자들은 머지 않아서 영혼의 정확한 부피, 밀도, 상승속도……
를 계산해내게 될 것이다. 역사의 시초부터 하늘로 날아 올라간 그 모든 수억 수만의 영혼들을 생각해보면
정말 통곡할 만한 일이다.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의 원천을 낭비한 것인가. 그 영혼들이 날아오르는 순간에
그들을 포착할 수 있는 발전소를 건설하기만 했더라면 이 땅위 전체를 밝히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인간은 아무 것도 버릴 것 없이 완전 사용 가능한 존재로 될 것이다. 벌써 학자들은
인간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꿈들을 채취하여 전쟁과 감옥을 만들었다. 모래 위에 어떤 새들은 발을 딛고 서 있었다.
새로운 놈들이었다. 그들은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바다에 떠 있는 섬들은 구아노 석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것은 매우 수지 맞는 산업으로 한 마리의 가마우지 새가 살아있는 동안 생산하는 구아노 석은 같은
기간 동안 한 가족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다. 이와 같이 땅 위에 태어나서 자기의 사명을 다한 뒤에 새들은
이곳에 와서 죽는 것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 자기의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지난번 시에라 마드레에서 카스트로와 함께 다한 것이다. 한 훌륭한 인간이 산출하는 이상주의는
같은 기간 동안 어떤 경찰체제의 권력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약간 시인이 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머지않아 인간은 달나라에 갈 것이고 머지않아 달 같은 것은 있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는 모래 위에 담배꽁초를 버렸다. 어떤 멋진 사람이 물론 그런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그는 죽어버리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면서 조롱하듯이 생각했다. 외로움이 때때로 아침이면
그를 이같이 엄습하곤 했다. 우리의 숨을 돌리게 해주기는커녕 아주 짓눌러버리는 것 같은 좋지 못한 외로움 말이다.
그는 도르래 쪽으로 몸을 숙이고 밧줄을 잡아서 가교를 내려놓고 안으로 들어가 면도를 하면서
여느 아침이나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면서 거울 속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가 바랐던 것은 이게 아닌데!」 하고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이 모든 흰머리며 주름살을 보면 이제 남은 길이라고는 점잖은 스타일 쪽으로 몸을 숨기는 것뿐이다.
얼굴은 길고 여위었으며 피곤한 두 눈, 그래 봐야 별수 없는 아이러닉한 웃음.
그는 이제 아무에게도 편지를 쓰지 않았고 편지를 받는 일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자기자신과 헛되이 절교하려는 사람이 다 그러하듯 그는 다른 사람들과 인연을 끊어버렸다.
바닷새들이 우짖는 소리가 들렸다. 고기떼들이 해안 쪽으로 지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늘은 온통 하얀빛이었고 난바다의 섬들은 햇빛을 받아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대양은 그 우유빛 바탕에서 벗어 나오고 바다표범들이 모래언덕 뒤에 무너진 방파제 곁에서 짖어댔다.
그는 데울 커피를 불에 올려놓고 테라스 위로 다시 돌아갔다. 그는 처음으로 오른쪽의 어떤 모래언덕 밑에
어떤 사람의 해골이 배를 깔고 얼굴을 모래에 파묻고 손에는 유리병을 들고 엎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옆에는 팬츠 바람에 발에서 머리까지 푸른색, 붉은색, 노랑색을 칠한 채 웅크리고 있는 몸뚱이와
루이 15세식의 흰 가발을 쓰고 맨발에 푸른색 궁정용 상의와 흰 명주바지를 입고 반듯이 누워 있는
엄청나게 큰 흑인이 보였다. 이 모래밭에까지 밀려와서 끝이 난 카니발의 마지막 표류물이었다.
조연배우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시 당국은 그들에게 의상을 제공했고 하루 저녁에 오십 전씩을 지불한 것이었다.
그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하얀 고기떼들 위로 희고 회색빛 나는 연기 기둥처럼 떠 있는 가마우지새떼들을
바라보다가 그 여자를 알아보았다. 그 여자는 에메랄드 빛 옷을 입고 손에는 초록색 목도리를 든 채
머리를 뒤로 젖히고 벗은 두 어깨 위에 머리털을 흐트러뜨린 채 흘러내리면서 물위에 목도리를 끌며
방파제들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물이 그의 허리께까지 차 있었고 큰 물살이 너무 가까이 까지 오면
그 여자는 때때로 몸을 비틀거렸다. 엄청난 파도가 그 여자에게서 불과 이십 미터 되는 곳에서 부서지고
있었으므로 장난은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아직 잠시 동안 기다렸다. 그러나 여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아갔고 대양은 벌써 서서히, 무거우면서도 유연하게 음흉한 움직임으로 일어서고 있었다.
이제 한번만 털썩 치는 날이면 끝장이었다. 그는 층계를 내려서서 여자를 향하여 달렸다.
때때로 발 밑에 새가 밟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은 이미 죽어 있었다. 새들은 항상 밤에 죽어갔다.
그는 자기가 도착했을 때는 너무 늦은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조금 더 큰 파도가 한번 덮쳐오고 나면
경찰에 전화를 걸고 질문에 대답하는 등 귀찮은 일들이 시작될 것이었다.
그는 마침내 여자 곁에 이르러서 그의 팔을 잡았다. 여자는 그에게 얼굴을 돌렸고 한순간 파도가
그들 두 사람을 뒤덮었다. 그는 손으로 여자의 팔을 꼭 잡고 모래밭 쪽으로 그를 이끌기 시작했다.
여자는 하는 대로 가만히 버려 두고 있었다. 그는 잠시 동안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모래 위를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여자를 쳐다보기 전에 잠시 주저했다. 때때로 예상 밖으로 기분 좋지 않은 쪽으로 놀라는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지극히 섬세하고 매우 창백한 얼굴, 매우 심각하고 매우 큰 두 눈 ,
그 가에 흩어져 있는 잘 어울리는 물방울들. 그 여자는 목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그리고 귀걸이,
반지들 및 팔찌를 차고 있었다. 여자는 여전히 초록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그는 이 여자가 여기서 무엇을 하는 중이었을까, 어디서 오는 길일까 하고 마음속으로 묻고 있었다.
외딴 바닷가 모래밭 위 죽은 새들 가운데 아침 여섯 시에 금과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를 달고 서서 무엇을 하는 것인가.
「그냥 놔두시는 게 좋을걸 그랬어요.」하고 그 여자는 영어로 말했다.
그의 묵은 놀라울 정도로 연약해 보였고 뚜렷한 목의 선은 다이아몬드의 광석다운 무게를 온통 더하게 하며
그 빛을 지워주는 것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내 말 알아들으세요? 난 스페인 말을 할 줄 몰라요.」
「몇 미터만 더 나갔으면 당신은 물살에 실려 갔어요. 여기 물살은 매우 거세요.」
그 여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두 눈이 온통 자리를 다 차지하는 어린애 얼굴이었다.
무슨 사랑에 실패한 것이겠지 하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항상 이런 것은 실연 때문이었다.
「이 새들은 모두 어디서 왔지요?」
여자가 물었다.
「저쪽 난바다에는 섬들이 있지요. 구아노 석 섬이랍니다. 새들은 거기서 살고 여기 와서 죽습니다.」
「왜요?」
「모르지요. 설명은 가지각색이거든요.」
「그럼 당신은요? 당신은 왜 이곳에 왔습니까?」
「저는 저 카페를 경영합니다. 이곳에서 살고 있지요.」
여자는 발 곁에 있는 죽은 새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여자가 울고 있는 것인지 혹은 그것이 두 뺨 위에 흐르고 있는 물방울인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여전히 모래 위의 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무슨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있을 텐데요. 늘 한 가지 이유는 있는 법이니까요.」
여자는 해골과 페인트칠을 한 사람, 가발을 쓰고 궁중복을 입은 흑인이 모래 위에 잠들어 있는 언덕 쪽으로
두 눈을 돌렸다.
「카니발이랍니다.」
그가 말했다.
「알고 있어요.」
「당신 구두는 어쨌지요?」
여자는 두 눈을 내리떴다.
「기억도 안 나는군요…… 그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아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나를 구했습니까?」
「그러는 법이니까요. 이리 오세요.」
그는 여자를 잠시 동안 테라스 위에 혼자 남겨놓았다가 곧 뜨거운 커피 한 잔과 코냑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여자는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서 극도로 주의를 기울여 구석구석 놓치지 않고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남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도 분명 어떤 설명할 수 있는 까닭이 있을 텐데요.」
「나를 그냥 놔두셨어야 할 걸 그랬어요.」하고 여자가 말했다.
그 여자가 울기 시작했다. 그는 여자의 어깨를 만져주었다. 그 여자를 도와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기자신의 용기를 되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잘될 겁니다. 두고 보세요.」
「때때로 진절머리가 나요. 진절머리가 난다구요. 이대로 그냥 계속할 수는 없어요……」
「춥지 않으세요? 옷을 갈아입지 않겠어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대양은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밀물 썰물은 없었지만 이 시간쯤이면 물결 쓸리는 소리가 훨씬
대단해지는 것이었다. 여자는 두 눈을 들었다.
「당신은 혼자 사세요?」
「혼자지요.」
「저 여기 머물러 있어도 되겠어요?」
「원하시는 만큼 얼마든지 계십시오.」
「나는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여자는 흐느끼며 울었다. 그의 말대로 이길 수 없는 실수가 그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 점에 대하여 그는 완전히 의식을 하고 있었고, 항상 모든 것이 그의 손안에서 바싹 부서지는 경험을
습관이 될 만큼 겪은 터이면서도 늘 이 꼴이었고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속에는 그 무엇인가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희망이라는 모든 낚싯밥을 끊임없이 무는 것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삶의 심연 속에 숨어 있다가 황혼의 시간에조차도 문득 찾아와서 모든 것에 빛을 던져줄 수 있는
행복의 가능성을 그는 남몰래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일종이 손댈 길 없는 바보스러움이 그의 내부에 잠겨 있었다.
어떤 패배도 어떤 쓰디쓴 맛도 결코 말살시키지 못한 순진성이, 그를 스페인의 전장에서 베르코르 지하운동 조직으로,
쿠바의 시에라 마드레로, 그리고 모든 것이 마침내 다 실패로 돌아간 것같이 보이는 순간 엄청난 포기의 시간에
문득 나타나서 다시금 발동을 걸어놓은 두세 명의 여자들에게로 그를 떠밀고 갔던 어떤 힘이 그의 속에 잠재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트라프로 들어가거나 혹은 히말라야 동굴 속으로 찾아 들어가 그들의 남은 삶을 끝내듯이
그는 그러나 이 페루의 해안까지 도망쳐 오지 않았던가? 다른 사람들이 하늘 끝에 가서 살 듯이 그는 대양의
끝에서 살고 있었다. 대양은 소용돌이에 차 있으면서 동시에 정일한 형이상학이었다. 그가 바다를 바라볼 때마다
매번 그 자신을 잊게 해주는 엄청난 진정제였다. 상처를 쓰다듬어주고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도와주는 몸 곁의 영원.
그러나 여자는 얼마나 젊고 얼마나 속수무책인 모습이었는지, 그 여자가 얼마나 믿음에 가득 찬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는 얼마나 많은 새들이 이 모래언덕 위로 숨을 거두려고 찾아오는 것을
보았는지, 그중 한 마리를,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마리를 구하고 그를 보호하고 여기 세상의 끝에서
자기 혼자서 가진다는 생각, 뜀박질의 그 마지막에 와서 이렇게 하여 인생을 성공시킨다는 생각은 아이러닉한
그의 웃음과 환멸에 찬 그의 표정이 아직도 감추려고 애를 쓰는 그 모든 순진함을 단숨에 되돌려주는 것이었다.
그토록 별 것 아닌 작은 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여자는 그에게로 두 눈을 들고 마지막 남은
눈물 때문에 더욱 밝아진 저 애원하는 듯한 눈길로 어린애 같은 목소리를 울리며 말했다.
「허락하신다면 여기 있고 싶어요.」
그렇지만 그는 이미 습관이 되어 있었다. 이것은 아홉 번째의 고독의 물결이었다. 가장 힘찬 물결, 매우 먼 곳에서,
난바다에서 오고 우리들을 뒤집어엎고, 전신을 뒤덮으며 깊숙이로 집어던지고, 문득 우리들을 손 놓아버리고,
두 손을 쳐들고 팔을 벌린 채 수면으로 다시 솟아오를 수 있는, 지나가는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허덕일 시간을 간신히 남겨주는 그런 물결이었다. 그 누구도 결코 정복한 일이 없는 유일한 유혹,
즉 희망의 유혹이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그토록 기막히게 버티고 있는 고집에 질린 채 머리를 으쓱했다.
오십이 다 되어 가는 나이에 그의 케이스는 참으로 절망적인 것으로 보였다.
「머물러 계십시오.」
그는 손으로 여자의 손을 잡았다. 그는 처음으로 그 여자가 겉옷 속에 아무 것도 입은 옷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그 여자가 어디서 오는 길인가를, 누구인가를,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왜 죽으려고 했는가를,
목에는 다이아 목걸이를 걸고, 두 손에는 금과 에메랄드를 차고 왜 야회복 속은 알몸인 채 그렇게 슬프게 웃고
있는가를 물어보기 위하여 입을 열었다. 그 여자는 아마도 무엇 때문에 그 자신이 모래언덕 위에 흘러와
낙착되었는지를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새일 것이다. 거기에는 분명 설명할 수 있는 까닭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항상 한 가지 까닭이 있게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과학은 우주를
설명하고 심리학은 인간들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몸 잡도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호락호락 당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마지막 남은 환상의 부스러기들을 강탈당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해변과 대양과 허연 하늘이 빠른 속도로
흐릿한 빛과 눈에 보이지 않는 햇빛으로 밝아졌고 보이는 것은 오직 활발해지는 땅과 바다의 색조뿐이었다.
여자의 젖가슴이 젖은 옷 속으로 완전히 보였다. 그 여자에게서는 어찌나 상처받기 쉬운 모습이 엿보였는지
맑은 두 눈, 약간 커지고 요동하지 않는 두 눈 속에는 두 어깨가 부드럽게 흔들리는 모습 속에는 어찌나 강한
순진함이 담겨 있었는지 주위의 세계가 문득 훨씬 가볍고 떠받들기 쉽게 보였고, 마침내 그 세계를 가슴에 안고
어떤 보다 나은 운명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자크 레니에여, 너는 절대로 변하지 못한다
하고 그는 팔과 어깨와 두 손을 사로잡는 저 보호해주고 싶은 욕망에 대항하려고 애쓰려는 듯이 조롱하듯 생각했다.
「어머나, 추워서 죽을 지경이에요.」하고 여자가 말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그의 방은 바의 뒤쪽에 있었다. 창문들은 여기서도 모래언덕과 대양 쪽으로 나 있었다. 그 여자는 잠시
유리벽 앞에 발을 멈추었다. 그는 여자가 오른쪽으로 재빨리 슬쩍 눈길을 던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도 같은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해골 옷을 입은 자가 모래언덕 밑에 몸을 꾸부리고 병을 들이마시고
있었고 궁중복을 입은 흑인은 두 눈 위로 미끄러진 흰 가발 밑에 파묻힌 채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푸르고 붉고 노란 페인트로 온몸을 칠한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서 손에 들고 있는 굽 높은 여자
구두 한 켤레를 뚫어져라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리더니 웃어대기 시작했다.
해골은 마시기를 그치고 손을 내밀어 모래 속에서 브래지어를 집어들더니 그것을 입술로 가져갔다가
바닷속으로 던졌다. 그는 이제 한 손을 가슴에 얹고 떠들며 호소해대기 시작했다.
「당신은 나를 그냥 죽게 버려두셨어야 했어요. 그건 정말 어찌나 끔찍했는지……」하고 여자가 말했다.
여자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그 여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다시 한번 사정을 알지 않으려고
물어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전혀 알 수가 없어요.」하고 여자가 말했다. 「길에 서서 카니발 군중들
속에 싸여 있는 중인데 그들이 나를 강제로 차에 떠밀어 싣고는 여기까지 끌고 왔어요. 그리고 나서…… 그리고 나서……」
이렇다니까,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항상 설명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심지어 새들도 까닭없이 하늘에서 떨어지지는 않는다.
좋다. 그는 여자가 옷을 벗는 동안 목욕탕으로 욕의를 가지러 갔다. 그는 유리문을 통하여 모래언덕 밑에 있는
세 사람의 남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자리 머리맡 탁자 서랍 속에 권총을 한 자루 넣어두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을 포기했다. 저 사람들은 결국 저 혼자서들 죽고 말 것이다. 잘만 하면 그쪽이 훨씬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페인트칠을 한 남자는 여전히 손에 구두를 들고 있었다. 그는 구두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해골은 웃고 있었다. 궁중복을 입은 흑인은 흰 가발을 쓴 채 자고 있었다.
그들은 바다 쪽으로 몸을 돌리고 수천 마리의 죽은 새들 가운데 모래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진 것이다.
여자는 소리지르고 발버둥치고 빌고 사람 살리라고 외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잠귀가 밝은 사람이었다. 지붕 위로 바닷제비가 날개만 쳐도 그는 잠이 깨곤 했다.
그러나 대양의 파도소리가 여자의 목소리를 가렸던 모양이다. 가마우지 새들이 새벽 속에서 목쉰 소리로 짖으며
때로는 고기떼들을 향하여 돌처럼 날아가 물 속으로 처박히는 것이었다. 난바다의 섬들은 수평선 위로
석고처럼 하얗게 꼿꼿이 솟아 있었다. 그들은 여자에게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도 반지도 빼앗아가지 않았다.
정말 물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들이 빼앗아간 것이라도 약간 도로 찾으려면
그자들을 죽이기는 해야 될지도 모른다. 여자는 몇 살쯤 되었을까? 스물 한 살, 스물 두 살?
그 여자가 리마에 혼자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가 있을까? 남편이 있을까?
세 사람의 남자들은 굳이 서둘러 떠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경찰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은 여유 있게 바닷가에서 그들의 인상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을 흡족하게 해준 카니발의
마지막 남은 쓰레기. 그가 되돌아왔을 때 여자는 방 한가운데 서서 그의 젖은 옷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자가 옷을 벗고 욕의로 갈아입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는 여자가 자기의 품안에서 잠시 몸을 떨면서
파닥이는 것을 느꼈다. 보석들이 그의 벗은 몸에서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호텔을 떠나지 말았어야 했어요.」하고 여자는 말했다. 「방안에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아 있어야 하는 게 옳았어요.」
「그 사람들이 당신의 귀금속들은 빼앗아가지 않았군요.」
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재수가 좋았지요.」 하고 덧붙여 말할 뻔했다. 그러나 다만 이렇게만 말했다.
「누구에겐가 연락을 해드릴까요?」
그 여자는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하고 여자는 말했다. 「정말 모르겠어요. 더 이상 알 수 없게 된 거예요.
의사를 만나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지요.」
「차차 알아보지요. 좀 누우십시오. 담요를 덮으세요. 몸을 떨고 있군요.」
「이제 춥지 않아요. 여기 머물러 있게 허락해주세요.」
여자는 침대에 누웠다. 담요를 턱에다까지 끌어당겨 덮었다. 여자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를 원망하시는 것은 아니지요? 안 그래요?」
그는 웃으면서 침대에 앉아서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것 봐요.」하고 그는 말했다. 「아무려면 그러기야 하겠어요……」
여자는 그의 손을 잡아서 자기의 뺨 위에 대고 꼭 눌렀다. 그리고는 입술에 가져가서 꼭 눌렀다.
그녀의 두 눈이 커졌다. 무한하고 물에 젖은 채 태양처럼 에메랄드빛이 서리는 두 눈.
「당신이 아시기나 한다면……」
「그 생각 더이상 하지 마십시오.」
여자는 눈을 감고 그의 손에 뺨을 눕혔다.
「끝장을 내고 싶었다. 끝장을 내야 해요. 나는 더 이상 살수가 없어요. 살고 싶지도 않아요. 내 몸이 구역질나요.」
여자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약간 떨렸다. 그는 이토록 맑은 얼굴을 한번도 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나서 여자는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마치 구걸하는 듯한 눈길로.
「내가 역겹지 않으세요?」
그는 몸을 숙여서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는 자기 가슴 아래 사로잡힌 두 마리의 새를 보듬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갑자기 조바심이 났다. 수치심과 분노가 한데 뒤섞인 감정. 그렇지만 자기의 피를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아직도 살아서 파닥거리는 새를 발꿈치로 짓밟아 죽여버리기 위하여 모래사장
위를 걸어 다니는 어린아이들을 본 적이 있었다. 그는 그중 몇 아이들을 두들겨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자신이 이 상처받은 연약한 존재의 부름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자신이 그를 끝장내주고 있었다. 그 자신이 여자의 두 젖가슴 위에 몸을 굽히고
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포개고 있었다. 그는 그의 어깨 주위로 여자의 팔이 감겨 오는 것을 느꼈다.
「나를 역겹게 느끼시지 않는군요.」하고 여자가 엄숙하게 말했다.
그는 발버둥을 치려고 했다. 그의 위에 이제 막 와서 덮치는 것은 다만 외로움의 아홉 번째 파도였다.
그러나 그는 그 파도에 휘말려들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다만 얼굴을 여자의 목에 묻고 젊음을
숨쉬면서 잠시 동안만 더 그렇게 있고 싶었을 뿐이었다.
「제발.」하고 여자가 말했다. 「잊어버리게 좀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여자는 다시는 그를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여자는 여기 이 바라크에 세상의 끝, 사람들이 거의 찾아오지도 않는
카페에 남아 있고 싶어했다. 그녀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너무나도 다급했고, 그의 두 눈 속에는 너무나도
엄청난 애원이 , 그의 어깨를 껴안고 있는 두 손에는 너무나도 강렬한 약속이 담겨 있었으므로 그는 갑자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 와서 그의 인생을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여자를 가슴에 꼭 껴안은 채 이따금씩 그의 머리를 두 손으로 잡아 쳐들었다.
그러는 동안 수십 년의 고독이 문득 되돌아와서 그의 두 어깨를 짓눌렀고 아홉 번째 파도가
그를 뒤집어엎어서는 여자와 함께 난바다로 휘몰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요.」그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구말구요.」
파도가 물러가고 그가 다시 바닷가에 되돌아오자 그는 여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뜨지도 않은 채,
그녀의 뺨에 포개어 놓은 이마를 들지도 않은 채 여자가 흐느끼는 대로 버려 두었다.
그는 동시에 흘러내리는 자신의 눈물과 여자의 가슴에 맞댄 채 자신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테라스 위에서 사람의 목소리와 발자국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모래언덕 위에 있던
세 사람의 남자들 생각이 나서 펄쩍 뛰어 일어나 그의 권총을 가지러 갔다. 누군가 테라스 위를 걷고 있었고
멀리서 바다표범들이 짖어댔다. 바닷새들이 하늘과 물 사이에서 소리치고 큰 파도가 해변에 와서 부서지면서
모든 목소리를 뒤덮더니 물러나고 그 뒤에는 오직 짧고 슬픈 웃음소리와 영어로 말하는 목소리만이 남았다.
「지옥과 저주라구. 이 친구야, 지옥과 저주, 이게 바로 적합한 말이지. 나도 이젠 지긋지긋해졌어.
이게 내가 그 여자와 마지막 하는 세계일주야. 이 세계는 아무리 봐도 인구가 너무 많아.」
그는 문을 반쯤 열었다. 연미복을 입은 오십대의 한 남자가 테이블 옆에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서 있었다.
그는 여자가 커피잔 옆에 놓아둔 초록색 목도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희끗희끗하고 작은 수염이 나고
어깨 위에는 카니발의 종이꽃 가루가 떨어져 있고, 떨리는 손, 젖어 있는 푸른 눈, 술 주정뱅이 같은 피부색에
점잖으면서도 부패한 듯 어렴풋한 표정, 피곤으로 인하여 더욱 불분명해진 작고 흐릿한 윤곽,
가발 같은 염색한 머리털의 남자였다. 그는 반쯤 열린 문에 나타난 레니에를 보고는 조롱하는 웃음을 지으면서
목도리를 바라보더니 다시 그를 향하여 눈을 들었다. 그의 웃음이 조롱하는 듯하며 슬프고 원한에 찬 빛을 띠면서
확실하게 떠올랐다. 그의 옆에는 투우사의 옷을 입고, 매우 검고 반들거리는 머리를 한 젊고 잘생긴 남자가
손에 담배를 든 채 도르래에 몸을 기대고 어두운 빛의 눈을 내리깔고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 나무계단 위에는 난간에 한 손을 얹은 채 회색빛 제복을 입고 챙 달린 모자를 쓴 운전수가
여자용 외투를 팔에 걸치고 서 있었다. 레니에는 권총을 어떤 의자 위에 내려놓고 테라스로 나왔다.
「스카치 한 병 부탁합니다.」하고 테이블 위에 목도리를 내려놓으면서 연미복의 남자가 말했다.
「뻬르파보르(부탁합니다).」
「바는 아직 열지 않았는데요.」 하고 레니에가 영어로 말했다.
「아, 그렇다면 커피를.」하고 남자가 말했다. 「부인께서 옷을 입도록 기다리는 커피를.」
남자는 그에게 슬픈 푸른 눈길을 던지고는 지팡이에 의지하여 몸을 약간 일으켜 세웠다.
흐릿한 빛 속에 납빛의 얼굴, 무력한 원한의 표정 속에 굳어진 윤곽. 한편에서는
새로운 파도가 나무 받침기둥 아래에서 나룻배를 흔들고 있었다.
「큰 파도와 대양과 대자연의 힘이다…… 프랑스 사람 같은데? 그럼 바야흐로 저 여자는 왔던 길을
되돌아온 셈이군요. 그래도 우리는 프랑스에서 이 년이나 살았는데 아무런 효과가 없었거든요.
과대 평가된 소문뿐이었지요. 이태리로 말할 것 같으면…… 여기 보시는 내 비서는 매우 이태리적이지만……
그 역시 별효과가 없었어요.」
투우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의 발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국인은 모래언덕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해골은 하늘을 향하고 두 팔을 십자가 모양으로 벌린 채 누워 있었고 푸르고 붉고 노란 색칠을 한 남자는
모래 위에 앉아서 머리를 뒤로 젖힌 채 병 주둥이를 입술에 갖다 대고 있었다. 그리고 가발을 쓰고
궁중복을 입은 흑인은 발을 물 속에 잠근 채 서서 흰 명주바지 단추를 열고는 바다 속에 오줌을 누고 있었다.
「저자들 역시 별 효과가 없었다는 것이 확실하지요.」하고 영국인은 모래언덕 쪽으로 지팡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땅 위에는 인간의 힘을 초월하는 어떤 배짱 좋은 자들이 있답니다. 저 세 사람의 사내들 말인데요……
저들이 여자의 보석을 훔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만. 한재산 톡톡히 되는 값이거든요. 보험회사도 값을
지불해주지 않을 겁니다. 조심을 하지 않은 것을 나무랠 터이니 까요. 어느 날엔가는 누군가 저 여자 목을
비틀어 놓고 말 거예요. 참 그런데, 저 죽은 새들은 도대체 모두 어디서 온 것들인지 말해주실 수 있습니까?
수천 마리 되겠는데요. 코끼리 무덤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만 새 무덤 이야기는……
아마 무슨 전염병 때문인가 보지요? 아무래도 무슨 설명될 만한 까닭이 있겠지요.」
그는 등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아, 드디어 당신이 나타났구먼.」하고 영국인이 가볍게 몸을 숙이면서 말했다.
「나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으니까. 여보, 네 시간이나 되었소. 뭐니뭐니해도 여기는 세계의 끝이 아니오? ……
불행한 일이란 금방 닥쳐올 수 있다니까.」
「나 좀 가만히 놔두세요. 가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제발 나 좀 가만 놔둬요. 뭣 하러 오셨어요?」
「여보, 걱정을 하는 게 당연한 건데……」
「당신 보기도 싫어요.」하고 여자가 말했다. 「구역질나요. 왜 나를 따라 다니는 거예요? 나한테 약속도 해놓고는……」
「그렇지만, 여보, 다음번엘랑은 보석들을 호텔에 둬두고 나가요. 그게 낫지.」
「왜 항상 내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려는 거예요?」
「여보, 창피를 당한 것은 누구보다 나요. 적어도 관례에 따른다면 말이오. 물론 우리야 그런 것을 초월한 처지지만.
<행복한 소수>랄까…… 그렇지만 이번에는 정말 좀 지나쳤어. 나를 위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오. 알다시피
나야 무슨 일이든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나는 당신을 사랑하오. 나는 그걸 당신에게 충분할 만큼
증명해 보였소. 그렇지만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뻔하지 않았나…… 오직 내가 요구하는 것은
어느 정도 더……분별력을 가지고 행동하라, 이거요.」
「게다가 당신은 술이 취했어요. 또다시 술에 취해 있단 말예요.」
「여보, 이건 순전히 절망감 때문이오. 네 시간 동안이나 차안에서 기다리다 보면 별 생각이 다 나니까……
내가 이 세상에서 최고로 행복한 남자는 못 된다는 것을 당신도 인정할 테지.」
「시끄러워요. 아이구 맙소사. 시끄러워요!」
그 여자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여자를 보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녀가 두 주먹으로 눈을 문지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어린아이 같은 흐느낌이었으니까. 그는 생각도 하지 않고, 이해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오직 바다표범들이 우짖는 소리와 바닷새들의 외침과 대양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만을 들으려고 했다.
그는 그 사람들 가운데서 눈을 내리뜨고 서 있었다. 추웠다. 아니 그는 다만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고
있는지도 몰랐다.
「당신은 왜 나를 구해주셨어요?」하고 여자는 소리쳤다. 「나를 그대로 버려 두셨어야 했어요.
파도가 한번 치고 나면 끝장이 났을 텐데. 진절머리가 나요. 이렇게 계속할 수는 없어요.
나를 그대로 놔뒀어야 하는 거였어요.」
「선생님.」하고 영국인이 요란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감사를 표시해야 할지요? 우리들의 감사의 말씀을
말입니다. 허락해주신다면 우리들 모두의 이름으로…… 우리는 다같이 당신에게 영원한 감사의 마음을 품겠습니다……
자, 여보, 이리 오시오. 분명히 말하지만 나도 이제는 괴로워하지 않아요…… 남은 문제는……
우리 같이 몬테비데오로 귀즈만 교수를 만나보러 갑시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 분은 기적적인 효과를
얻었다더군. 안 그래, 마리오?」
투우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안 그래, 마리오? 아주 위대한 분이지. 정말 진정한 의사야…… 과학이 끝장에 이르지는 않았어.
그분은 그 모든 것을 그의 책 속에 써놓았거든. 안 그래, 마리오.」
「아, 알았어요.」하고 투우사가 말했다.
「정확하게 몸무게가 오십이 킬로 되는 경마기수하고라야만 꼭 일을 치를 수 있는 사교계 부인 얘기를 생각해봐……
그리고 항상 그 짓을 하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문을 짧게 세 번, 길게 한 번 두드려 달라고 요구하는 여자는 어떻고.
인간의 영혼이란 헤아릴 길이 없는 것이지. 그리고 절정에 달하려면 꼭 금고의 경보장치가 요란하게 울어대야
되는 은행가 부인은 그러자니 사정은 난처한 꼴이지. 왜냐하면 그것이 꼭 남편의 잠을 깨우게 마련이거든……」
「오, 그만. 됐어요, 로제.」하고 투우사가 말했다. 「재미있지도 않아요. 당신은 술이 취했어요.」
「그리고 관자놀이에 정열적으로 권총을 바싹 들이대야만 만족할 만한 결과에 도달하는 여자는? 귀즈만 교수는
그 여자들을 전부 다 완치시켰어. 그 분은 그 모든 이야기를 책에 다 써놨어. 그 여자들은 하나같이 훌륭한
가정의 어머니들이 되었거든. 여보, 실망할 것은 못 돼.」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의 곁으로 옮겨갔다. 운전수가 공손하게 여자의 어깨에 외투를 걸쳐주었다.
「그리고 어때, 메사린도 그랬다구. 그러면서도 왕비였거든.」
「로제, 그만 됐어요.」하고 투우사가 말했다.
「아직 정신분석학이 생기기 전인 것은 사실이야. 귀즈만 교수라면 그 여자를 충분히 고쳤을 거야.
자, 예쁜 왕비 폐하, 나를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요. 마리오, 옆에 우리 속에 가두어 놓은 사자가 으르렁거려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하고 골을 내는 그 젊은 여자 생각나? 남편이 항상 한쪽 손으로는「목신의 오후」를
연주해줘야만 되는 그 여자는? 여보, 나는 뭐든지 다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다오.
내 사랑은 끝이 없으니까. 그리고 항상 적당한 순간에 방돔 기둥을 바라보기 위해서 리츠 호텔에 드는 여자는?
또 마라케쉬로 신혼여행을 갔다온 뒤에는 회교 사원에서 들리는 찬가소리를 안 듣고는 견디지 못하는
아주 젊은 여자는? 인간의 영혼이란 헤아릴 길 없고 심원한 것이라니까! 초혼 시절 런던에서 대폭격을 겪고
나서는 그때마다 남편에게 폭탄 날아가는 소리를 흉내내어 들려 달라고 조르는 그 여자는?
그 여자들이 모두 훌륭한 가정의 어머니들이 되었다니까, 여보.」
투우사 옷을 입은 청년이 영국인에게 다가가더니 뺨을 후려쳤다.
영국인은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계속할 수는 없어.」하고 그는 말했다.
여자는 층계를 내려갔다. 그는 여자가 죽은 새들 사이로 맨발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손에 목도리를 들고 있었다. 그는 인간의 손으로도, 신의 손으로도 더 이상 손댈 필요가 없을 만큼
순수한 그녀의 프로필을 보고 있었다.
「자, 로제, 진정해요.」하고 그의 비서가 말했다.
영국인은 여자가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코냑 잔을 들더니 단숨에 비웠다. 그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지갑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잔 받침 밑에 놓았다.
그리고 나서 모래언덕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저 모든 죽은 새들이라니.」하고 그는 말했다. 「분명 무슨 설명될 만한 까닭이 있을 텐데.」
그들은 갔다.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모래언덕 꼭대기에서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주저하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거기 없었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페는 텅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