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000000/2003/08/005000000200308062302107.html
“좌우 대립의 아픈 결과물 정치적 해결을”
‘10·13 동지회’ 회원 오준식씨‘10·13 동지회’ 회원인 오준식(70·가명)씨는, 신천대학살은 “좌우 대립의 결과로 생겨난 아픈 과거”라며 “이젠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씨는 “그러나 ‘손 내밀기’는 사실상 개인이 하기 어려운 사안”이라며 “남북 정치권에서 우선 문제를 풀어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신천대학살 당시 18살이었던 오씨는 후퇴하던 좌익의 예비검속에 걸려 아버지가 사라지자 ‘10·13 봉기’에 참여했다. 오씨는 유엔군이 들어온 뒤 금광 속 우물에서 철삿줄에 묶인 채 숨져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 신천학살은 누가 한 것인가. = 유엔군이 북진할 때 공산쪽이 먼저 유지들을 예비검속으로 잡아 총살했다. 그래서 10·13 폭동이 일어나 시민들이 마을을 점령했다. 이때 북쪽 사람들 중에 후퇴 못한 사람이 많았다. 리룡진 당시 황해도 인민위원장도 늦게 후퇴하다가 봉기 일으킨 사람들에게 총살 당했다. 그때 미군은 진주도 안했다.
― 북한은 신천학살로 3만5천여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 과장된 것이다. 당시 신천군 인구가 10만1천명이다. 암만 봉기를 일으켰어도 그렇게 죽이기는 어렵다. 다 고향사람들 아니냐. 그러나 3만명은 안돼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은 사실이다.
― 왜 그런 학살이 있었나. = 우리가 당시 너무 무식했던 거다. 공산주의건 기독교건 우리 사상이 아니다. 이북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가지고 통치하려고 재산 빼앗고 이주시키고 종교 말살하고 하는데, 기독교가 굉장히 강하니까 저항도 강했던 거다. 신천에서도 인민정권의 예비검속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폭동의 주동자가 됐다. 우리가 죽였든 그 사람들이 죽였든 마음 아픈 일이다. 서로가 잘못했다.
― 어떻게 신천 문제를 풀어야 하나. = 지금 단계에서 솔직하게 누군가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월남한 신천 사람들은 방북을 안한다. 잘못하면 죽임을 당할까봐서다. 어떤 사람이 만주를 통해 고향 사람하고 연락했다가 “연락하지 말라”는 답변만 받았다. 이미 북쪽에서는 죽었다고 신고가 돼 있는데 괜히 복잡하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일은 남북이 정치적으로 풀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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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신천대학살'이라고 부르고 미국이 학살을 자행했다고 주장하고 있죠. 오늘날 신천군에 '신천박물관'만들어서 반미교육장으로 활용..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좌우대립으로 인한 비극으로 많이들 주장하고있죠.
교차검증하면, 위의 기사 증언이 사실과 많이 부합하는 측면이 있다고 판단됩니다.
일단, 북한이 주장하는 미군 학살 주도설에는 너무 적개심이 가득찬 내용들이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시 미군은 평양점령에 몰두해있었는데, 굳이 황해도에서 머물 이유가 있을지 의문이 들더군요. (소수의 병력들 주둔시켜 동태를 살피는 그런역할은 했겠지만..)
또, 우리나라 역사교과서 내용살펴보면, '10.13 신천봉기'라는 표기가 나옵니다. (해방이후 part 단원에서 지도로 나와있음)
이를 통해 미루어본다면, 미군주도 학살설보다는 지역내 기독교,지주 vs 공산당 이런구도로 좌우대립으로 인한 참사, 비극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됩니다.
첫댓글 신천군학살은 북한군의 후퇴속에 우익세력에 위 저질러진 학살사건입니다. 미군에 의한 학살은 당연히 아닙니다.오준식씨의 주장은 사건관련자로서 중요한 증언이기는 하나 반드시 객관적이지는 못합니다.먼저 신천군학살의 배경을 보면 신천군이 일제시대때 황해도에서도 지주세력이 가장 강한 지역이었습니다.당연히 소작농에 대한 착취도 그만큼 심했습니다.그러다 해방후 북한이 공산화되면서 신천군의 지주세력들은 제거되거나 월남을 했습니다.신천군에 남은 지주세력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6.25때 인천상륙작전후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는데 평양진격노선에서 신천군은 빗겨나가게 됩니다.오준식씨는 자체봉기했다고 하지만
당시 신천군내 우파.지주세력들은 그럴 능력이 없었습니다.극소수에 불과했으니까요. 북진하던 유엔군과국군을 따라다니던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서북청년단등 북한에서 월남한 반공기독교.지주세력들입니다. 이들이 공산당원.지주세력축출에 앞장섰던 소작농.노동자등을 학살하는이른바 뒷청소를 했습니다.신천학살은 이들 특히 신천군출신들이 신천군에 들어와 기존에 잔류하고 있던 지주세력과 함께 자행한 겁니다. 결론은 미군에 의한 학살도 자체적인 반공봉기도 아니라는 겁니다. 신천학살은 지주와 소작농의 계급대결이 해방후의 이념대결과 결부되어 발생한 비극이랄까요.
@godhon 해당하는 구체적인 증거자료가 존재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