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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머시여, 벌거지!
단기 4282년 새해는 1월 1일부터가 아니라 1월 11일부터 시작되는 기분이었다.
그날은 바로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의 본격적인 활동이 공개된 날이었다.
신문마다 '삼천만의 시선집중' '육천만 개의 눈동자 주시' '민족정기 세울 반만년 역사 초유의 쾌거' 등 그야말로 주먹만한 활자와 대문짝만한 사진이 실려 그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배반한 친일분자들과 민족반역자들이 마침내 처벌을 받게 되었다!
그 말은 꿈결에서나 듣는 것처럼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것이 신문에 보도된 엄연한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그 일에 대한 해결의 기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돌덩이로 굳어진 체념이었다.
그것은 해방이 됨과 동시에 제일 먼저 해결을 보았어야 할 문제였다.
해방을 맞은 이 땅의 사람들은 남녀 유무를 가릴 것 없이 두 가지 공통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 첫째는 공평하게 사는 새나라가 세워질 것과, 둘째는 모든 친일세력에 대한 응분의 응징이었다.
1945년 12월 27일 미국, 영국, 소련이 결성한 5개년 신탁통치 실시가 발표되자마자 탁구공을 되받아치듯 전국적으로 반탁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던 것은 첫 번째 기대가 무너지는데 대한 민족적 자각의지의 표현이었음과 동시에, 또 다른 외세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민족적 결의가 응집된 외세배격 항거였다. 일본놈들에게 눌려 산 지긋지긋한 세월을 현실감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 앞에 5년 동안의 신탁통치라는 것은 또 다른 식민체제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지극히 필연적이면서 자연스럽고, 순수하고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 반탁운동과 함께 미국과 소련에 대한 불신감정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말고…… 하는 노랫말이 바람결처럼 퍼진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리고, 반탁만이 우리 민족이 살아갈 길이라고 부르짖는 이승만이 '역시 진정한 애국자'로 대중지지를 얻게 되고, 반탁에서 갑작스럽게 찬탁으로 태도를 바꾼 좌익은 '넋빠진 이완용의 환생'으로 이승만이 얻은 만큼의 대중 신뢰를 잃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지배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외세배격으로서의 반탁인 대중 순수감정은 정치의식을 가진 집단들이 은밀하게 감추고 있는 어떤 목적을 감지할 수가 없었다. 이승만의 반탁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다리놓기라는 것도, 좌익의 찬탁이 사회주의의 독립국을 세우기 위한 숨죽이기라는 것을 식별할 여유가 없이 일단 흐르기 시작한 대중의 물결은 제 흐름만 따라 흘렀다.
자신들의 순정을 더럽히는 정치의 덫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사람들은 반탁의 물결을 이루기 전에 이미 두 번째 기대가 먼저 허물어지는 배신감을 맛보아야 했다. 반탁의 물결이 그렇게 거세게 일어나는 데는 그 배신에 대한 보복감도 작용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대중들의 정의로운 기대는 여지없이 짓밟힌 채 각종 친일세력들은 미군정의 비호 아래 양지살이를 하며 더 오르고 더 거드름을 피웠다. 사람들은 썩은 놈의 세상, 망할 놈의 세상을 되뇌었고, 세월은 한 해, 그리고 또 한 해, 그리고 다시 또 한 해, 3년이 흐르면서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는 제멋대로의 세상을 외면했고, 체념은 돌로 변해갔다. 독립운동 혐의를 앞세워 지하실에서 고문을 자행했던 바로 그자가 해방된 땅의 경찰로 변해 이번에는 좌익 혐의를 놓고 똑같은 사람을 똑같은 지하실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고문하는 것이 예사로운 일이 된 세월이었다.
그런데, 사 년째로 접어들면서 친일한 자들을 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이 아닌가.
체념이 깊고 단단했던 만큼 사람들은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워했다. 물론 반민특위가 활동을 시작하기까지는 관계법이 두 차례에 걸쳐 국회를 통과했다. 지난해 9월 7일 반민족행위처벌법과 11월 25일의 반민족특별조사기관법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반민족특위가 각 도에 조사부를 설치하고 실질적인 활동을 개시한 것은 1월 8일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일반인들의 관심이 별달리 나타나지 않았다. 신문의 보도도 예사로운 것에 지나지 않았고, 세상을 흔드는 더 큰 사건들이 사람들을 휘둘러 댔던 것이다.
반민특위의 활동 본격화는 벌교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집중시키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보급소마다 신문이 동났고, 이 집 저 집 신문을 빌리러 다니는 발길이 부산스러웠다. 주막이나 이발소, 구멍가게 같은 데서 신문 한 장을 에워싼 사람들의 모여앉음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이 멋대로 가락을 넣어가며 신문을 읽어 내리고, 모여 앉은 사람들은 유심한 얼굴로 그 소리를 따라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읽기가 끝나면 으레 한바탕씩 말잔치가 벌어졌다.
"………한때 패검도 멋지게 금테두리 모자에 검정 경복제복을 입고 동분서주하던 노덕술 또한 고동색 두루마기에 몸을 감은 채 조사관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 하면, 이 땅의 갑부 박흥식도 자가용 자동차에 마까오 양복은 옛일이라는 듯 꾀죄죄한 세루 두루마기에 눈만 번쩍이며 고랑을 차고 끌려다니고, 일본의 국민복을 입고 각반에 전투모를 쓰고 학병을 권유하던 미쯔오도 이제는 이광수로 돌아와 회색 두루마기에 몸을 쓰고 조용히 제2의 '나의 고백'을 쓰고 있다.
흥망성쇠 - 인생의 허무함이 이같을진대 어찌하여 그들은 사람으로서 걷지 못할 친일반역의 길을 걸어 이 같은 눈물의 길을 걷고 있는가?"
"와따, 하든 일중에 질로 잘허는 일이다. 인자 나라가 지대로 채가 잽히는 갑다."
"어이, 어이, 카만 있어부와, 거 반민특위라는 것이 말이여, 고것이 무신 뜻이당가?"
"어허허!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거여 시방?"
"이눔아, 무식허먼 입이나 봉허고 있어야 무식이 덮어질 일인디, 무식 자랑헐라고 입 놀리고 그러냐?"
“하, 호로자석, 니가 그리 주딩이 놀리고 앉었응께 사서삼경 다 띤 눔맨치로 유식해 뵈는디 그려, 유식헌 니가 무식헌 날 잠 갤차도라. 반민특위가 무신 말이다냐?"
"아, 무신 말언 무신 말, 친일 해묵은 눔덜 때레잡는 일허는 디라고 듣고도 몰르냐."
"워메 성님, 공자 맹자 빰따구 치게 똑똑허시요이. 에라이 씨부랄눔아, 고까징거시야 누가 몰라서 묻냐! 나가 알고 잡은 것은 반,민,특,위, 그 네 글자가 품은 뜻이 머시냐 그 말이여. 워디 답혀봐라."
"금메…… 나도 몰르겄는디."
"잡것, 염병허고 자빠졌네. 무식헌 눔이 무식험스로 유식헌 척 방정떠는 꼬라지, 확 그냥 불알을 훑어뿔라."
"워따 성님, 잘못혔소."
"인자 삥아리 쌈 다 끝났다냐? 반민특위가 먼고 허니,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럴 간딴허게 쭐인 말이시. 긍께, 반민족행위자란 말이 친일파나 민족반역자허고 같은 뜻인디, 거그서 반,민 두 자럴 뽑고, 특별조사에서 특 한자럴 뽑고, 위원회에서 한 자럴 뽑아, 합친 말이 반민특위시."
"기왕지사 간딴허게 쭐일람사 '반특' 두 자로 짝 쭐여불먼 워쩔랑가?"
"워따 이 자석이 인자 엿장시 맘뽀할라 생기는 갑네?"
"그려, 싸게 신문사로 달음박질쳐 가서 갤차줘라, 상금 받겄다."
"아니시, 아녀. 쩌 평삼이 말이 실답잖은 소리가 아니시. 평삼이 말맹키로 '반특'은 아니고, '특위'라고 두 자로 쭐여 불르기도 허는구마."
"봐라, 요런 무식헌눔아! 나가 비싼 밥묵고 쓰잘 디 웂는 소리 헐 성부르냐."
"오냐, 오냐, 니가 군수감이고 도지사감이다."
"근디 말이여, 친일헌 눔덜얼 처벌허는 것이야 골백분 자알허는 일인디, 일본눔덜헌테 붙어묵은 눔덜이 한둘이 아니고 천지에 쫘악 깔렸는디, 고것덜얼 다 벌헐 수 있을랑가 몰라?"
"고것은 권세부리는 자리서 내몰고, 각단지게 콩밥을 믹여야제, 한 눔도 빼놓지 말고 권세부리는 자리서 내몰고, 각단지게 콩밥 믹여야제. 워떤 눔이 을맨치 친일 해묵었는지 우리 눈으로 똑똑허니 봤응께 아는 일인디, 즈그눔덜이 뒷걸음질침서 쥐구녕 찾는다고 피해질 일이간디?"
"어허! 나 말언 고런 뜻이 아니시. 관공서고 워디간에 심쓰는 자리넌 다 그 똥묻은 잡것덜이 차지허고 앉었는디, 우리 벌교바닥만 해도 읍사무소고, 경찰서고 싹 다 문닫아 뿌려야 헐 것 아니냐 그 말이시."
"허, 이 사람 참말로, 걱정도 팔자고, 구데기 무서바 장 못 담구고 앉었네 그랴. 그 드런 눔덜 싹 쳐내뿌러도 신선맹키로 깨끔헌 사람 을매던지 있어. 친일헌 눔덜이 지아무리 많어도 친일 안허고 깨끔허니 산 사람덜이 멫 십 곱절 많다는 것을 알아야 써. 친일헌 눔덜얼 처벌혀야 현다는 것이 먼지. 고눔덜이 바로 깨끔헌 둠벙물 꾸정키리는 느자구웂는 미꾸랑지 새끼덜이라서 그런 것 아니겄어!"
"워따 말 한분 씨언하게 자알헌다. 니가 읍장 해묵어뿌려라."
"참말로, 기왕지사 시작헌 일, 이잡디끼 혀부렀으면 좋겄다."
"금메 말이시, 일본순사질 험스로 그리 못되게 굴던 눔덜이 해방이 되고도 설레발치는 꼴 보는 것도 속에서 천불이 일어나고, 그때 권세 잡았던 눔덜이 그대로 권세잡고 모강댕이 잣지잣지 해갖고 뻗대고 사는 꼴 보는 것도 환장헐 일인디, 인자 고눔덜 꼴 안보게 생겠응께 3년 묵은 쳇증 떨어지겄다."
"그리만 됨사 그 씨언허기가 용잿물 싸는 것보담 더 씨언허겄네."
"저 허풍쟁이, 이 세상에 지아무리 씨언헌 것이 있어도 용잿물 싸질르는 것을 당허겄냐!"
"어허, 워째 그리 말맛을 몰르고 땁땁헌 소리 허고 앉았당가? 나 말언 말이시………"
"아네, 아네, 자네 말이 맞네."
"워쨌기나 요 일언 잘되고 잘된 일이여. 낼 신문에도 또 소식 나겄제?"
"온 나라가 들썩이는 중헌 일인디 안 날라등가?"
"인자 일 나가기로 허고, 낼 또 듣세."
"참 재미로 쳐도 삼국지보담 재미가 오진 이약이시."
"당연지사제. 금으로 명함얼 박았다는 그 유명한 부자 박흥식이도, 자유연앤가 그 유명한 글쟁이 이광수도 덜컥덜컥 잽혀 들어가는 판국인디 삼국지가 성님! 허고 엎어져야겄제."
"근디 말이여, 친일파 때레잡는 법얼 맹근 것도 중허고 존 일인디, 토지개혁인가 농지개혁인가 허는 법 맹근다는 소식은 신문에 웂능가?"
"고것은 웂느디."
"참말로 사람 환장허겄네웨. 친일파 때레잡는 법보담 그 법이 먼첨 맹글어져야 지대로 되는 순서 아니겄어?"
"고것이야 우리 맴이제."
"생각지도 안헌 친일파 처벌법도 맹글었응께, 그 법이야 폴세부텀 맹근다맹근다 혔으니 하매 뜸들 때도 안 됐겄냐고? 방구가 잦으먼 똥 나오는 법잉께 기둘려보드라고."
"방구면 다 방구간디? 헛방구도 있고, 핏방수도 있재. 뜸 딜이다가 밥 다 태와뿌는 수가 있응께 애달아서 혀는 소리네."
"고런 맴이야 아그덜꺼정도 다 통허는 맴 아니겄는가. 기둘리세, 기둘려보세."
"항, 인자 시상이 지 정신 채리고 지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께."
반민특위의 활동에 대해서는 남자들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었다. 여자들도 남자들 버금가게 그 일에 신경쓰며 한 가지라도 더 얻어들으려고 귀를 세웠다. 남자들처럼 신문을 둘러싸고 모여 앉기가 어려운 여자들은 주로 남편들 겨드랑이 아래서 살랑거려 귀에 담은 말을 다음날이면 서로 모여앉아 합치고는 했다. 거기다가 바람타고 다니는 소문까지 곁들여 신문은 구경조차 못한 처지에서도 신문을 직접 읽은 사람 못지않게 남자들처럼 말잔치를 벌이게 마련이었는데, 그 내용은 남자들과 엇비슷했다.
봄이 한 발 먼저 오는 남도지방의 2월말은 푸른 기색이 완연했다. 논두렁 밭두렁에도 푸른 기가 돌았지만 보리밭의 싱싱한 초록빛이 봄을 내뿜고 있었다. 보리는 죽이나 국을 끓일 수 없도록 억세게 자라 오르고, 하루볕이 다르게 밤을 새고 나면 더 진한 초록, 더 진한 초록으로 옷을 바꿔 입어갔다. 보리갈이를 하지 못하는 습한 논에는 날이 갈수록 벌건 속살을 드러낸 봉분이 늘어갔다. 그 객토할 흙더미가 한 해 농사일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거름에 절고 벼에 기름기를 빨려 회색빛으로 변한 논바닥에 봉분을 이루고 있는 객토 흙더미는 유별나게 그 빛깔이 진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옛날 옛적부터 전라도 땅에 흉년이 들면 온 나라가 굶어죽는다는 말은 전라도에 평야가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넓은 땅이 많되 그 땅이 차지고 기름진 황토라서 논농사 밭농사가 다 걸게 될 수 있었다. 전라도 땅 중에서도 보성군과 고흥군의 황토는 그 명(名)이 예로부터 널리 나 있었다. 문둥병을 앓으며 소록도를 찾아가느라고 고흥의 황토길을 걸어야 했던 시인 한하운이 '가도 가도 황톳길/끝이 없네'라고 읊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도 했다.
소가 멍에를 끌 듯 또 한 해의 농사일을 시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반민특위의 소식은 몸 가볍게 만드는 한줄기 신선한 바람이 아닐 수 없었다.
손승호는 하염없는 눈길을 창밖에 던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질정 없는 생각들로 가득했다.
이데올로기, 인간의 인간다움, 혁명, 투쟁, 아는 자의 자각, 시대적 삶, 일제시대와 오늘의 현실, 선택, 행동, 기회주의와 개인의 당위, 진실과 변명, 이데올로기의 출동과 민족과 집단과 개인, 집단의 진실과 개인의 허위, 집단의 허위와 개인의 진실, 마르크스 과학의 명징성과 인간, 인간이란 존재와 인간의 논리인 과학으로 인간을 규명할 수 있다는 논리, 인간은 인위적인 존재가 아니고 자연적 존재라는 그 미궁, 마르크시즘의 맹신적 종교화와 자본주의의 추악한 물신주의, 염상진의 확신과 행동, 나의 불확신과 비행동, 김범우의 또 다른 인식과 내재된 활동성………
"선상님, 선상님만 믿는당께요. 이 늙은 년 소원얼 풀어줄 사람언 이 시상에서 선상님뿐이란 말이어라."
그 잡다한 생각들을 일시에 덮어버리는 노파의 애달픈 음성이었다.
노파는 벌써 두 번째 찾아와서 도움을 청했다. 결국 어떻게 해보마고 해서 돌려보내야 했다. 늙은 학부모인 노파를 동정해서도 아니었고, 선생으로서 학부모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도 아니었다. 상황과는 상관없이 노파의 요구는 부모로서 당연하고도 정당했던 것이다.
손승호는 고개를 숙여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받치며 눈을 감았다. 노파의 사연을 가지고 심재모를 찾아가야 할 일이 숙제로 남아 있었다.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음을 느꼈다. 심재모의 입장에서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미리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왔다. 평소에 되풀이했던 그 결론 없는 잡다한 생각들에 다시 빠졌던 것도 노파의 일 떠맡게 되면서 거기에 연장되어 일어난 사고행위다.
'선상님, 지가 새끼덜언 다섯이제만 팔자가 박복허니라고 고것 하나만 아덜이고 남치기(나머지) 넷언 쪼로록허니 딸년이랑께라. 그러니 고것이 으짤 도리웂이 독자 아닌가비요. 즈그 아부지 눈감기 전에 소원 풀어 디릴라고 웂는 살림에 장개럴 딜였등마, 아 글씨 그 미친 눔이 밭에 씨뿌레갖고 즈그 아부지도 탁허고, 지도 탁헌 아덜 날 생각언 안허고, 그 오살헐 눔에 좌익에 미쳐갖고 염상진이 뒤따라 입산얼 해부렀당께요. 즈그 아부지가 눈 뻔히 뜨고 죽음시로, 그눔이야 워찌되든간지가네 무신 수럴 써서라도 씨받아 아덜얼 얻어라, 그러드란 말이요. 긍께 워쩌겄습니껴. 전에야 암스로 워찌 참고 있겄는게라. 돈이 지아무리 존 물건이라 허드라도 사람 나고 돈 나 순차가 있데끼, 사상이란 것도 사람 살자고 맹근 것잉께 그 순차가 사람 담 아니겄는게 혀줘야 인간 도리고 순리 아니겄는게라. 선상님, 선상님이 들어서 이 늙은 년 소원 잠 풀어 주시씨요. 선상님………"
그 늙은 학부모에게 심재모를 직접 찾아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건 선생을 신뢰해서 찾아온 학부모에 대한 무책임한 배신이고, 선생의 입장을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한 인간이 정당하게 찾고자 하는 자연적 권리를 손상시키는 비열한 회피였다. 결과를 예측하지 말고 노파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해보자는 것만이 노파의 말마따나 '인간 도리'라 여겨졌던 것이다.
손승호는 느리게 눈을 떴다. 눈에 들어온 것은 책상 위에 펼쳐진 백지에 난무하고 있는 낙서였다. 말이 백지지 그것은 암회색빛이었다. 바탕도 고르지 못해 곧 구멍이 날 것처럼 얇은 부분이 있는가 하면 김자반처럼 두꺼운 부분도 있었다. 그 조악한 지질의 종이에 해방의 실감이 담겨 있었다. 해방이 되면서 지질은 형편없이 나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본놈들의 고의적인 기술 불이전(不移轉), 기술 미숙상태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파업, 그 종이는 오늘의 산업현실의 허약함을 숨김없이 드러내주고 있었다.
밤마다 시대가
신음하는 소리를 듣는다
밤마다 시대를 신음하는
사람들의 신음을 듣는다
밤마다
사람의 신음하는 고통에
마른 나무가지들까지 신음하는 소리를 듣는다
올올이 신음이 감겨
요가 되고 이불이 되고
마침내 무덤이 된다
나는 그 무덤에 파묻혀
무엇을 신음하는가
똑바로 서야 하는 것이 어디 나무뿐이랴
신음하는 시대 앞에
삼대의 곧음으로 세워야 할 생명 의지
시대의 바람은 계절의 바람이 아니어서
의지를 세울 방향을 몰라
둔전거리는 바보 같음을 신음하는가
시대의 신음은 시대의 혼미가 낳는가
끝없이 나열되는 무슨무슨 주의들
그 많은 이름들에 의탁함은
우리의 모자람이다
모자람이 허덕거리는 욕심이다
시대가 신음하고
시대를 사람이 신음하고
사람을 마른 나무가지가 신음하는
밤마다
신음의 무덤 속에서
나는 먼저 나의 바보 같음을
그리고, 우리 모두의 모자란 욕심을
신음하는가
질 나쁜 종이 위에 질 나쁜 잉크로 끄적거린 낙서였다. 잉크라는 것도 정제품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물방에서 물감가루를 사다가 적당히 물에 풀어서 쓰는 것이므로 겨우 글자 모양을 그려내고 있을 뿐 선명도라고는 없었다. 비교적 행간을 맞춰가며 쓴 그 낙서의 사방에는 알아보기 힘든 다른 낙서들이 무수하게 자빠지고 엎어지고 넘어져 있었다.
낙서들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던 손승호는 갑자기 두 손으로 종이를 와락 몰아쥐더니 박박 찢기 시작했다. 그 순간적인 동작은 마치 무슨 발작이라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암회색 종이쪽들이 낙엽처럼 책상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손승호는 종이를 찢어대며 김범우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김범우를 동원하는 것이 힘이 될 것 같았다. 김범우까지 동원되면 심재모가 압력으로 느껴 언짢아할 수도 있었지만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까지 고려할 바가 아니었다.
손승호는 손바닥을 맞때려가며 손을 털고 일어섰다. 암회색 종이조각들은 썩어가는 나뭇잎처럼 교무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손승호는 그것을 내려다보며 까닭 없이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의미 모를 웃음을 입가에 머금으며 전화기가 걸려 있는 벽 쪽으로 걸어갔다.
"자넨가? 나 승홀세."
"자네가 어쩐 일인가, 먼저 전화를 다 걸고."
"그럴 일이 생겼네. 자네, 시간 있나?"
"응, 언젠가 말했던 법일 스님 일로 광주에 갈까 하던 참이었네. 왜 급한 일인가?"
손승호가 입맛을 다셨다.
"글쎄,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 일보다 급할 건 없네만………"
"아니네, 그분이 오늘 재판을 받는 건 아니고, 재판을 빨리 받게 하려고 누굴 만날까 한 거네. 나 나갈 테니, 거기 어딘가?"
"학교………"
"알았네, 전화 끊세."
손승호는 수화기를 전화통 옆구리에다 걸며 생각했다. 왜 범우는 좌익에서 돌아선 것일까. 그것은 새삼스러운 것 같으면서도 새삼스러운 생각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이유를 물어본 일이 없었고, 김범우도 그에 관해 입을 뗀 적이 없었다. 그것이 마치 두 전향자 사이에 지켜야 되는 무슨 계율인 것처럼.
김범우, 그는 여러 모로 건강한 존재였다. 뼈대 앞세우는 가문의식이나 지주 자식으로서의 우월의식 같은 것이 없었고, 순천중학교의 기질인 고상한 현학취미도 없었으며, 더욱이 일본 유학생들이 감염되어 오는 전염병인 일본식 서구 열등감도 없었다. 그와 우정을 깊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그런 격의없는 태도 때문이었다. 그가 같은 순천중학교 학생들보다 사범학교 학생인 염상진이나 안창민 등과 더 가깝게 지낸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순천중학교, 사범학교, 농업학교 학생들은 얼핏 보기에는 다 똑같은 학생일 뿐이었고, 좀 더 관심을 가진 눈으로 살피는 경우는 목표가 다르다는 것을 식별할 정도였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서로서로의 기질과 냄새가 어떻게 다른지 확연하게 구분짓고 있었다. 농업학교 학생들은 순천중학교 학생들을 '늘고자'라고 불렀으며, 순천중학교 학생들은 농업학교 학생들을 '야쿠샤'라고 불렀다. 그런데, 농업학교 학생들이 순천중학교 학생들에게 대놓고 '늘고자'라고 불러대는데 비해 순천중학교 학생들은 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야쿠샤'라고 맞대거리를 하지 못했다. 그만큼 농업학교 학생들의 완력은 순천중학생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두 학교 학생들이 견원지간처럼 지내는 중간지점에 사범학교가 놓여 있었다. 두 학교 학생들은 사범학생들을 '애늙은이'라고 불렀다.
순천중학은 상급학교 진학을 목표로 삼고 있는 인문학교로서 학구적인 두뇌를 가졌으면서도 집안 살림이 비교적 넉넉한 학생들로 성원을 이루고 있었다. 세 학교 중에서 일본인이 특히 많은 것도 그 까닭이었다. 농업학교는 그와 반대로 실생활에 직접 활용을 목표로 하는 실업학교로서 새끼 꼬는 경연을 벌일 정도로 실습위주의 교육을 시켰는데 집안이 가난하거나 비학구적인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농업기술의 과학화를 자각하고 있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지만 순천중학이나 사범학교를 낙방한 경험을 가진 학생들이 꽤나 많았다. 그런데, 사범학교는 학구적 두뇌를 가졌으나 집안 형편이 궁색해서 인문학교를 다닐 수 없는 학생들이 일본의 교육정책에 의한 학비의 특혜를 받아 공부하려고 모여들었다. 두뇌적으로는 인문학교와 가깝고, 졸업과 동시에 사회진출을 하는 것으로는 실업학교와 가까운 사범학교의 특수성에 따라, 사범학교가 순천중학교와 농업학교의 중간 지점에 놓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순천중학생들이 '늙은 고자'라고 불리는 것은 책만 파고드는 행동성의 빈약 때문이 아니었다. 젊은이들에게 모욕적일 수밖에 없는 그 별명이 붙여진 데는 여중학생들의 작용이 컸다. 여중학생들은 그들 나름의 계산속 빠른 기회주의를 십분 발휘하여 한사코 순천중학생들에게 호감을 표시했다. 그 다음의 대상이 사범학생들이었다. 여학생들은 타산적 속성을 야비할 만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꼴이었다. 가문 좋고 돈 많고 머리 좋은 남자가 최고야, 하지만 그게 안 되면 머리 좋고 장래 보장된 남자는 잡아야지. 여중생들은 거의 전부가 동일한 호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천중학생들은 '늙은 고자'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신통한 연애사건 하나 일으키지 못했다. 사범학생들은 '애늙은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도록 대부분 나이와는 걸맞지 않게 예절바른 점잖음과 진중한 사고력을 갖추어 어른스럽게 철이 들어 있었다. 그건 완제품으로서의 '선생님'을 만들어 내기 위한 일본식 사범교육의 결과였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인간은 교육으로 재창조될 수 있으며, 그건 소년기 교육으로 결정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민학교 선생들은 군국주의적 인간을 양성해내는 전초병이었고, 그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낼 수 있는 능력자를 길러내는 것이 사범학교였다. 사범학교 교육은 선생이라는 존재가 언제나 균형을 잃지 않아야 할 지식적인 면과 현실적인 면을 융합시켜 주도면밀하게 실시되었다. 특히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뇌세포 하나하나까지 일본화 되게 하는 의식교육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에는 언제나 다소의 실패나 약간의 의외가 따르게 마련이었다. 염상진을 위시하여 사회주의에 경도된 학생들은 완제품을 만들어내려는 사범교육의 본보기 실패작이었다. 특히, 적색농민조합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사범 출신자들에게 부여된 의무근무까지 징역살이로 때워버린 염상진의 경우는 그야말로 대표적인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일본화 교육이 어느 학교보다 치밀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이 되자마자 사범학생들이 학생사회의 좌익 주도권을 행사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어느 지역에서나 비슷했던 사범학교의 그런 양상은 '애늙은이'란 별명 속에 이미 포괄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순천중학생인 김범우에게 '늘고자'라는 집단별명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가 지닌 건강성은 사범학생들과 연계를 이루어 사상학습에 몰입했고, 그가 품은 진지한 열정은 누구의 눈에나 모범적인 공산주의자가 될 것으로 보였다.
"만약 해방이 된다면 봉건적 지배계층은 그날로 몰락을 면할 수 없게 된다.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몰락을 막을 순 없다. 그건 역사의 필연적 힘이니까."
방학이 되어 동경에서 돌아온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둘러앉은 모두는 감동적 동감을 표했다. 그의 말이 새로워서가 아니었다. 그 정도의 인식은 좌중의 누구나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 말을 김범우라는 사내가 함으로써 더 값지게 느껴졌던 것이다. 지주의 아들인 그가 스스로가 속한 계급의 몰락을 예견하면서도 조금도 연연해하는 빛 없이 의연할 수 있음에 대하여 좌중은 동지로서의 신뢰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학병에서 돌아와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승호, 혼자 있나?"
김범우가 교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응, 일직교사는 서무실에 가 있네. 이쪽으로 앉게."
"자아, 애길 들어보세."
김범우는 담배를 뽑아들며 지체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생각은 깊게, 행동은 빠르게, 라고 생각하고 있는 그다운 태도였다.
손승호는 노파의 사연을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게 요약했다.
"어떤가 자네 생각은? 실현 가능성이 있겠는가."
손승호는 망연한 눈길로 김범우를 바라보았다.
"그것 참 고약스러운 문제로군. 뭐랄까…… 인간 본성과 이데올로기의 대결? 말이 되나?"
김범우가 입술을 조금 내밀며 웃어 보였다.
"그럴 듯하군. 거창한 논문 제목 같아 입맛은 없지만."
손승호가 윤기 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건 그렇고, 실현 가능성이라…… 전혀 예측 불가능인데."
"왜, 심재모 그 사람 그렇게 막힌 사람이 아니던걸."
"심재모도 문제지만 염 선배도 문제 아닌가. 또, 두 사람이 합의했다고 해도 그놈의 씨를 받는 방법이 문제 아닌가. 씨를 받는다는 게 잠자리를 하룻밤 같이하는 것이 아니고 여자의 임신이 확인될 때까진데, 그 기간 동안 남자가 집으로 나올 것인지, 여자가 율어로 들어갈 것인지도 문제란 말일세."
"나도 그 문제까지 생각해봤는데, 이 일이 간단한 성질은 물론 아니지, 일이 겹겹인 셈인데, 염 선배야 쉽게 이해가 될 것 같고, 우선 심재모의 이해부터 얻어내는 게 순서 아니겠나."
"그야 그렇네만, 염 선배도 낙관만 해선 안 되네, 지금 상황이라는 게 이게 활시위 잡아 늘인 상황 아닌가."
"그렇긴 해. 헌데, 심재모는 언제 만나면 좋겠나?"
"거야 단김에 쇠뿔 뽑아야지."
김범우는 새로 담배를 꺼내며,
"참 빌어먹을 일이군. 그러길래 서로 갈라서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투덜거리듯이 혼잣말을 내뱉으며 성냥을 그었다.
"광주 일은 바쁘잖은가?"
"괜찮아. 그럼 가보세, 다 이게 우리 일인 셈이니."
말에다 한숨을 묻혀내며 김범우는 무겁게 일어섰다.
"먼저 나가게. 나 일직선생 불러올 테니."
"그러게. 난 심재모한테 전화부터 걸어 놔야겠구만."
전화를 받은 사환 아이는, 심 사령관님 안 기시는디라우, 귀청이 떨어져 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가 거슬리고, 말의 내용에 맥 빠진 김범우는 울컥 짜증이 솟기는 걸 느꼈다.
"이눔아, 기차 화통 삶아먹었냐! 어디 멀리 가셨어?"
"아니구만요, 칙간에라우."
“예끼놈! 전화 끊어라."
김범우는 어이없는 웃음을 픽 흘리며 전화통 앞에서 돌아섰다.
김범우와 손승호는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나무 복도에 윤기가 반들거렸다. 어린 조막손들의 정성스런 노동이 거기에 어려 있었다. 깨끗하게 청소를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나무판자가 유리를 닮도록 반들거리는 데서 김범우는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청소를 교육이라고 강요한 일본교육의 모습이 변질 없이 그대로 시행되어 어린것들에게 불필요한 노동을 강요한 결과가 바로 그 복도의 반들거림이었다.
"참, 춘부장어르신은 평안하신가?"
현관 쪽으로 돌아서며 손승호가 물었다.
"별로 안 좋으셔."
"왜, 어디가 편찮으신가?"
손승호의 어조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저, 노쇠현상이지."
"그래, 범준이 형님 땜에 상심도 많이 하시구."
손승호는 무심결에 말을 해놓고 아차 싶었다.
자신은 분명 범준이 형님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으로 여겨 말을 해버렸고, 그런 투의 말을 김범우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생각은 뒤미처 떠올랐다.
"그래, 형님이 어딘가 살아있다는 보장만 확실하면 아버님 건강이 그렇게 표나게 나빠져 가진 않을지도 모르지. 아버님이 형님의 생존 가능성을 포기하신 건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설 거네. 귀환동포들 말야. 작년 1월말에 미군정이 210만 명 정도로 발표했잖나. 그 사람들 중에는 간도· 만주, 더 멀리는 중경 쪽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거든. 그것도 홀몸이 아니라 가족들을 이끌고 말야. 그런데 홀몸인 형님은 안 오는 것 아닌가. 그러니 단념해얄밖에. 허나, 어머님은 달라. 형님이 틀림없이 살아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거든. 그 근거는 꿈이고, 점이야. 그건 아마 논리성이 강한 남자와 논리성이 약한 여자의 차일 거고, 부성과 모성의 차일 거고, 그렇지."
김범우의 정연한 말 속에는 정작 그 자신의 생각은 전혀 들어 있지 않았다. 그건, 형의 생사를 속단하고 싶지 않다는 김범우의 마음임을 손승호는 읽어내고 있었다.
"아, 아, 정말 춘색이 도도하도다, 로구먼."
김범우가 두 팔을 뻗쳐 올리며 목청을 높였다. 형의 생각을 털어내려는 몸짓인 것을 손승호는 느꼈다.
"술생각 나나?"
"그래, 술! 사상이고 이즘이고 다 때려치고 염 선배하고 우리 다 같이 만나 옛날처럼 술이나 코가 삐틀어지게 마셨으면 좋겠구만."
김범우의 얼굴은 소년처럼 밝아졌다.
"빌어먹을, 그런 날은 영원히 안 올지도 모르지."
김범우의 얼굴은 이내 침울해지고 말았다.
그는 술을 입에 한번 댔다 하면 끝도 한정도 없이 마셨다. 그가 엉뚱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꼭 술에 만취했을 때였다. 염상진의 주량도 대단했고, 손승호의 주량도 만만치 않았지만 김범우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무슨 술을 그리 마시느냐고 만류하면,
"이게 다 그 망할 놈에 부르주아 잔재라. 뱃속이서부터 보약 먹고 태어났으니 술을 마셔도 취해야 말이지"
그는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대꾸하고는 했다.
침울하고도 탄식적인 김범우의 말이 섬뜩한 차가움으로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손승호는 그 말을 되뇌어 보았다.
빌어먹을, 그런 날은 영원히 안 올지도 모르지……… 영원히……? 영원히……?
손승호의 의식 속에서는 격분처럼, 비애처럼 솟아오르는 말이 있었다.
만약에 지금 상태가 악화돼 완전히 두 패로 갈라져서 전쟁을 하게 되면 범우 자넨 어느 편에서 싸울 건가?
그러나, 손승호는 이빨을 사려 물었다. 그건 김범우에게 물을 말이 아니었다.
김범우야 자신을 미친놈 취급은 하지 않겠지만, 그 말은 결국 김범우를 심각하게 만들고 괴롭히게 될 것은 빤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답이 있을 수도 없는 물음이었다. 자신이나 무시로 그런 꿈을 꾸며, 어느 쪽 편도 못 들고 우왕좌왕하다가 양쪽에서 총을 맞고 죽어가는 연기를 계속하는 것으로 족했다.
김범우가 지켜보는 가운데 손승호는 심재모에게 노파에 관한 이야기를 보다 상세하게 해나갔다. 무미하게 사연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이야기 자체가 설득적인 감흥을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
심재모는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신경이 긴장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폐를 끼치게 될 줄을 알면서도 찾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승호가 이야기를 끝냈다.
"아닙니다, 잘 오셨습니다."
심재모는 담배를 빼들었다.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를 생각하기에 앞서 그는 희한한 이야기 내용을 되짚고 있었다.
"그러니까, 먼저 심 사령관께서 허락을 하시면, 2차로 씨 받을 방법까지 강구해서 제가 염상진을 찾아가 동의를 구하는 식으로 하면 어떨까 합니다."
김범우는 정면으로 압력을 넣고 있었다.
"예에, 김 선생께서 수고를 해주신다니 고맙습니다. 그런데, 사연이야 기막히고 가슴 아파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라고 하고 싶습니다만, 그게 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문제라서…… 어떻게, 제가 좀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여율 주시겠습니까?"
심재모는 유연하게 김범우의 압력을 피해섰다,
"물론 그러셔야죠." 김범우는 고개까지 폭넓게 끄덕이고는,
"그런데, 사상이란 것도 사람이 살자고 만든 거니까 그 순서가 사람 다음이고, 그러니까 좌우익 따지기 전에 자기 며느리가 씨받게 해주는 것이 인간의 도리고 순리라는 그 여자노인네의 말 앞에서는 아무 할 말이 없어지고 만단 말입니다. 그 말 앞에서는 어떤 군자의 말이나 철학자의 말도 무색해지고 말게 돼 있습니다. 그 말이 바로 철학이고 진리 아닙니까?"
간접화법으로 우회작전을 시도하고 있었다.
"예, 저도 동감입니다. 아까 손 선생 얘길 들으면서도 그 대목이 특히 머리에 남았습니다. 두 분께서도 제 입장에 서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을지 고민해 보십시오.”
난처한 부탁은 하지 말아달라는 의미 같기도 했다. 그 모호함을 밝힐 방법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자리를 뜨기는 찜찜한 기분이고 해서 김범우는 심재모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말을 한마디 해둘 필요를 느꼈다.
"그 노인네의 소원내로 씨를 받게 해주면 여태까지 당한 심리전의 참패를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심재모의 반응이 금방 달라졌다.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사령관 입장에서 시간 여유를 갖고 더 생각해보시지요. 아무래도 우리 입장과는 다를 테니까요. 전 광주에 볼 일이 있어 이만 일어서야겠습니다."
김범우를 따라 손승호도 일어섰다.
"자네가 결정타를 가했네."
손승호가 경찰서 정문을 나서며 싱긋 웃었다.
"왜, 될 것 같은가?"
"능청떨지 말게. 그 얼굴빛이나 목소리가 반갑게 변하는 걸 나보다 가까이서 확인한 게 누군데."
"그래, 어찌 되겠지."
두 사람은 역 쪽으로 방향을 잡고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나 사표냈네." 김범우가 말했다.
"사표?"
손승호가 걸음을 멈추며 김범우를 쳐다보았다. 그 눈이 놀라움을 담고 있었다.
"응, 사표."
"언제? 어떡 할려고?"
"서울로 지각한 공불 하려고."
"결국 그렇게 결정했군."
손승호는 눈길을 돌리고 발을 떼어놓았다.
손승호의 옆얼굴로 쓸쓸한 그늘이 찬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을 김범우는 순간적으로 포착했다.
"곧 술 한 잔 하세." 김범우가 말했다.
"그러지, 술은 내가 사겠네."
"좋아, 자네도 사고, 나도 사고 그러세."
둘이는 역에 이르도록 더는 말이 없이 걸었다.
고흥으로 넘어가는 뱀골재는 가풀막지면서도 구불구불 길었다. 뱀이 많아서 뱀골재라 한다고도 했고, 생김새가 뱀을 닮아 구불거려 뱀골재라 한다고도 했다. 그 두 가지 이유가 함께 어울리도록 뱀골재 언저리 남향받이 산에는 뱀이 많았고, 순천으로 넘어가는 진트재에 비하면 뱀골재의 구불거림은 행인들의 짜증을 일으킬 정도로 심했다.
세 사람이 뱀골재를 오르고 있었다. 마삼수· 김복동· 강동기였다.
그들은 또 서운상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어이, 다리 쉼서 담배나 한 대씩 꼬실리고 가세."
김복동이가 앞서가는 두 사람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소리침은 숨이 가빴고, 꺼칠한 얼굴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쪼깐만 가먼 몬뎅잉께(정상이니까), 몬뎅이서 쉽시다."
마삼수가 계속 걸어 올라가며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야이 문딩아, 몬뎅이럴 올라챌 심이 모지랑께 심 모타 올라챌이라고 쉬잔 것이제, 몬뎅이 올라챌 심 있음사 머헌다고 쉬자겄냐! 느그눔덜 뱃보 시컴허기가 똑 덕보눔 뱃보다."
아예 걷기를 멈추어버린 김복동은 어기부리듯 소리 질렀다.
“소리 헐 기운으로 한 발이라도 더 걸을 맘 묵으씨요. 안직 정기가 입꺼지 올를 나이도 아님스로 위찌 그리 입심만 씨다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선 마삼수가 말끝에 어이없다는 헛웃음을 달았다.
마른 풀섶에 엉덩이를 붙인 강동기는 담배쌈지를 꺼내고 있었다.
"이눔아 말 조심혀. 안직꺼지 내 정기는 요렇타께 붕알에 있다. 나가 찌렁찌렁허니 소리질르는 것 들음시롱도 그리 멍청헌 소리허고 자빠졌냐. 그 찌렁찌렁헌 소리넌 붕알에 재인(쌓인) 정기가 뱃창새기럴 뻗질러 타고 올라 목구녕으로 터져 나오는 거이다. 나 말이 참말인지 그짓말인지는 정작 정기가 입으로 올라붙어뿐 노친네덜얼 바라. 뇐네덜이 워디 나맹키로 찌렁찌렁헌 소리 질르디야? 소리럴 질러바야 숨보트는 소리가 발 앞에 떨어지는 골골허는 소리제."
마삼수 쪽으로 걸음을 놓으며 김복동은 변명인지 강변인지 모를 말을 숨 식식거리며 해대고 있었다.
"오따매, 성님 사설 참말로 징허요잉. 속 뻔허니 딜다뵈는 그짓말얼 워찌 그리 목수 문틀 아구맞추대기 혀분다요? 성님 붕알에 정기가 따악 쟁앴으먼, 울 정기는 워디 있을께라?”
마삼수는 귀에 꽂았던 말이담배 공초를 뽑으며 느물거리고 웃었다.
"물으나마나 다리에 있제. 긍께로 나 앞질러 팽팽허니 걸어가제."
김복동은 휴우 숨을 내뿜으며 강동기 옆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성님 말이 요상허시? 다리에 정기가 있는디도 새끼럴 까는 붕알도 있읍디여? 동기나 나 붕알언 글먼 미친놈에 붕알일랑가, 똑별난 붕알일랑가. 성님, 고섯 잠 판결내레줏씨요."
진작부터 말머리를 잡았다 싶었던 마삼수는 김복동의 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마른 침을 삼켰다.
"미친눔."
벌교 쪽으로 먼 눈길을 보내고 앉아 있는 강동기는 말을 흘리며 피식 웃었다.
"고것은 미친것도 아니고, 느자구웂는 붕알이다."
능청스럽게 말을 한 김복동이는 말이담배에 흠뻑 침을 붇혔다.
"느자웂는 붕알? 그 판결 한분 요상시럽네. 워떤 붕알이 느자웂는 붕알이다요, 성님?"
"워따 그 자석, 몰르는 것도 많고, 알고 잡은 것도 많다. 아, 느그덜 붕알맹키로 풋붕알임서 새끼나 까잘르는 붕알이 느자웂는 붕알이제 워째."
"허어 참말로, 나가요 이 나이꺼정 삼스로도 풋자지라는 말언 들었어도 풋붕알이란 말언 오늘 첨 듣는 말이시. 성님, 우리 나이가 멫인디 우리 것 보고 풋자지라고 헌 것은 아니겠제라? 으쩌요, 말이 궁허다봉께 헛나온 것이제라?"
입꼬리가 처지게 입을 다문 마삼수는 김복동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야가 시방 무신 소리럴 험시로 사람얼 무시헐라고 든다냐. 풋자지넌 아그덜 자지로 따로 있는 것이고, 머시냐, 느그덜 나이 것은 안직도 설영근 좇잉께로, 그려, 풋좇이다, 풋좇!"
"니기럴, 자지· 풋자지· 좇· 풋좇, 그눔에 것 천자문보담 더 에로와 워디 해묵겄소."
마삼수는 가래를 돋구어 퉤 내뱉고는,
"근디 성님, 나 한 가지 걱정이 있는디라. 안직 바람언 썬들썬들헌디 성님이 그리 땀얼 흘리는 거시 필시 식은땀일 것인디, 그래 갖고도 새북좆이 스요오(새벽좇이 서요?)?"
아주 진지하고도 은밀하게 물었다.
"야가 시방 사람얼 멀로 보고 허는 소리다냐!"
김복동은 펄쩍 뛰듯이 했다.
"나가 성님얼 무시혀서 허는 소리가 아니고, 새북좆 안 스는 눔헌테는 돈도 빌레주지 말라고 혔는디, 성님이 그리 식은땀 흘리는 것 서운상이가 보면 워디 소작 줄라고 허겄소. 성님이 걱정시러바서 허는 소리요."
"나 좆이 새북에 스는지 눕는지 속씨언하게 알아뿔라먼 대환이 엄씨헌테 물어바라."
"어허 성님, 무신 말얼 그리 쌈빡허게 혀뿌요. 쌍눔헌테도 범절이 있는 법인디, 아짐씨헌테 워쩌크롬 고런 말을 묻겄소. 성님 말 그냥 믿기로 허고, 나가 담배나 한 대 몰아디리겄소.(말아드리겠소.)"
마삼수가 쌈지를 펼치며 밉지 않은 눈짓을 보냈다.
"그려, 진작에 그럴 일이제."
김복동이는 헤식이 웃음을 피우고는,
"에라 또 봄언 영축옶이 오고, 땅 한뙈기 웂는 이눔에 팔자 앞날이 막막허고 막막허다."
하늘을 향해 푸념을 토해냈다.
멀리 건너다보이는 제석산 줄기에도, 멀리 내려다보이는 중도들판이나 포구에도 봉 이내가 뿌유스름하게 끼여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포구의 하늘에 물이랑을 짓던 기러기 떼의 날개 짓도 사라졌고, 회색빛으로 넓은 중도들판에는 객토 흙더미들이 앵두알처럼 붉은 점으로 점점이 박혀 있었다.
"요 담배 피고 기운채리씨요. 산 입에 거미줄 칠랍디여."
마삼수가 김복동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어이, 고맙네. 헌디, 꿈에도 생시에도 덕보눔 맘뽀가 워찌 그리 변해뿌렀는지, 알다가도 몰을 일이랑께."
김복동은 또 노덕보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그 잡녀러 인종 이약 때레치고, 고만 가드라고."
강동기가 내쏘며 벌떡 일어섰다. 그 서슬에 두 사람도 따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앞서 걷고 있는 강동기의 얼굴에는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뒤를 따르고 있는 두 사람은 강동기의 성깔을 아는 까닭에 노덕보의 이야기를 더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노덕보가 세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고 어떻게 뒷손을 써서 최씨네 소작을 얻어 부치게 됐음을 안 것은 보름 전쯤이었다. 그들은 노덕보네 집을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노덕보나 그의 아내는 미안해하거나 잘못했다는 기색은 털끝만치도 없이 너무나 태연하고 여유 만만했다.
정 사장네를 함께 찾아가고, 분하고 억울함으로 함께 일을 저지르고, 유치장살이를 함께 치르고, 변상을 해주느라 함께 빚돈을 내고, 소작문제를 풀어보자고 서운상을 찾아 함께 뱀골재를 넘나들었던 노덕보가 아니었다. 소작을 얻어 부쳐서 이제 몸 달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생판 딴 사람인 노덕보가 앉아 있었다.
노덕보보다 더 가관인 것은 그의 아내 조성댁이었다.
연상 뻔뻔스러운 거짓말로 입을 나불대다가, 떨어진 감 먼저 줏어 먹는 것이 임자지 못 줏은 사람들이 왜 여러 말 하느냐고 나왔다.
그때, 이 개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소리치며 목침으로 방바닥을 내려친 것이 강동기였다. 평소에는 별로 말이 없이 진중하다가도 어떤 그른 짓을 대하고 한번 성질을 돋우었다 하면 그 결기와 강단을 막기 어려운 강동기가 목침을 손에 잡은 것이다. 노덕보와 그의 아내는 사색이 되었고, 마삼수와 김복동은 강동기를 방문 밖으로 떠밀어냈다.
"워디고 노덕보맹키로 개 겉은 눔덜이 깔렷응께 지주눔덜이 그리 배짱 퉁게감서 세세만년 떵떵거리고 살아지는 것이여. 개잡녀러 세끼덜!"
어둠 속을 걸으며 강동기가 말했다.
서운상의 집이 먼발치로 보이게 되었을 때 세 사람은 어느만큼 지쳐 있었다.
묽은 죽 한 사발씩으로 아침을 때우고 30리가 겨운 길을 걸었던 것이다.
"넘덜언 객토짐얼 지는 판인디, 오늘이야 꼭 결말얼 보게 돼얄 것인디."
서운상의 집에 들어가지 전에 기운을 추슬리느라고 다리쉼을 하며 김복동이가 시름겹게 말했다. 강동기는 물론, 마삼수도 말이 없었다.
찌르륵, 찍찌르르. 어디선가 봄새가 방울 굴리는 소리를 냈다.
고개를 뒤로 젖힌 마삼수가 담배연기를 푸우 뿜어내며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깊게 푸른 하늘뿐 새는 보이지 않았다.
“와따, 머 묵자고 하늘언 저리 시퍼런고. 아매(아마) 넘 시장끼 돋구니라고 저리 시퍼런갑구마.”
마삼수는 쩝쩝 입맛을 다셨다.
"일어나 보드라고."
강동기가 손으로 무릎을 짚으며 더디게 일어났다.
문 앞에서 그들을 제지한 것은 머슴이었다. 머슴이 처음 팔을 벌렸을 때는 잠시 기다리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떡 버티고 서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고 있는 그 얼굴이 전 같지 않게 냉기가 돌아 제지를 당하고 있음을 안 것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세 사람은 동시에 불길한 생각에 부딪쳤다.
"워째 이려?"
마삼수가 퉁명스럽게 내질렀다.
"나도 똑겉이 가난헌 처지에 복통터질 일인디, 다 끝나뿐 일잉께 암말도 말고 그냥 돌아쓰시요. 쥔 어르신네가 딜이지 말라고 허요."
"고것이 먼 소리당가?"
눈을 부릅뜬 것에 비해 김복동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다 끝나뿔다니, 똑똑허니 말해봇씨요!
강동기가 머슴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그의 굳어진 얼굴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세세허게는 몰르겄고, 논얼 딴 사람헌테 폴아넴겠소."
"고것이 누구요!"
"몰르것소."
"을매나 되얐소."
"하매 댓새 된 상 싶으요."
"질 틔우기요. 서운상이럴 만나야것소."
강동기의 입에서는 '서운상'이라는 소리가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그리 안된다니께.”
자기도 모르게 내렸던 팔을 머슴은 다시 황급하게 벌려서 문을 막았다.
"삼수 니 머 허냐, 내쳐뿌러라."
강동기의 말에 몸집 큰 마삼수가 머슴의 양쪽 어깻죽지를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당하고만 있을 머슴이 아니었다. 대문간에서는 밀치고 젖히는 실랑이가 벌어졌다. 그 사이에 강동기와 김복동은 마당으로 들어섰다.
"멋들 허는 짓거리여!"
느닷없는 소리가 강동기와 김복동의 발길을 가로막았다. 사랑채 마루에 서운상이가 버티고 서 있었다.
강동기와 김복동은 꾸벅 인사부터 했다.
"못 들어오게 허는 말 전해들었으먼 순순허니 돌아슬 일이제, 요런 쌍것덜이 누구 마당서 난리굿이여, 난리굿이."
서운상은 전에 없어 서슬이 시퍼렇게 돋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도금 날짜를 어겼으니 계약금 몰수하고 해약이라는 통고가 정 사장한테서 왔고, 몸이 달아 정 사장을 찾아가 변명하고 사정하고 했지만 정 사장은 막무가내로, 중도금을 어긴 날짜만큼을 잔금 날짜에서 까내서 치르되 만약 하루라도 어기면 해약하고 딴 사람한테 팔아넘길 테니 할 말 있으면 법으로 하라고 숨통을 죄어왔고, 법으로 해보았자 계약금 떼이는 것이야 자명한 일이라서 하는 수 없이 다음날로 미룬 중도금을 급전을 돌려 막았고, 중도금 어긴 날짜를 까내고 보니 잔금 날짜도 며칠 남지 않아 논 팔아넘길 작자를 찾아 허둥거리다가 간신히 유주상이와 선이 닿아 사들인 값에서 2할을 밑지는 조건으로 일시불을 받아 잔금을 치렀던 것이다. 그 난리를 겪으며 몸은 몸대로 닳고, 손해는 손해대로 본 서운상은 그 심기가 말이 아니었다.
상것들이라는 말에 강동기는 속이 뒤집어지려 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렇제라, 우리야 가난혀서 쌍것잉께 쌍것 소리 듣는 것이야 당연지사고요, 논얼 폴아냄기셨다는디, 그 경우 우리 소작권도 항꾼에 넴게주십사 헌 부탁언 워찌 되얐는가 허고요."
"나가 느그 소작 띠묵은 사람이여? 고것이야 정 사장헌테 가서 따져."
강동기는 눈앞이 아뜩해짐을 느꼈다. 한 가닥 남았던 기대가 불길한 생각 그대로 끊어져버린 것이다.
이놈들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가슴이 푸들거리고 떨리며 다시 속이 뒤집어지려 했다.
강동기는 이빨을 맞물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눌렀다. 아직 한 가닥이 더 남아 있었다. 논을 사들인 사람을 알아내 찾아가보는 일이었다.
"글먼 논 사딜인 사람이나 갤차줏씨요."
"아니, 시방 누구 복장 긁자는 심뽀여? 그눔 꿈에 다시 볼까 무선께, 나가, 싸게 나가!"
서운상은 냅다 소리를 질러댔다.
"복장 긁자는 거이 아니라 우리덜 목심이 붙은 중대사구만이라."
"벌거지 겉은 것덜 죽으나 사나 나 알 일 아니다. 머 허고 있냐! 저것덜 내몰아라."
"머시여, 벌거지!"
강동기가 소리치는가 싶더니 담 쪽으로 내달았다. 삽을 집어든 그는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머슴이 팔을 벌리며 그를 막아서려 했다. 그는 삽을 내려쳤다. 머슴이 폭 꼬꾸라졌다.
"동기야! 동기야" 김복동과 마삼수가 외쳤다.
눈에 파랗게 불을 단 강동기는 동료들의 외침도 아랑곳없이 서운상을 향해 내달았다. 돌발한 위험을 피하려고 허둥거리며 방문을 열어젖히던 서운상은 비명을 토하며 나뒹굴어졌다. 김복동과 마삼수가 소리쳤다. 강동기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또 삽을 치켜 올렸다. 뒤따라 쫓아온 김복동과 마삼수가 강동기의 팔을 붙들었다. 강동기가 버둥거렸다. 김복동이 강동기의 뺨을 철퍽 갈겼다.
"이눔아, 정신채려. 살인죄인 되겄다. 니가 요리 미쳐뿔먼 우리넌 위쩌란 것이냐."
김복동의 목소리는 그대로 울음이었다.
"냅두씨요. 요런 인종덜언 싹 다 때레쥑여뿌러야 쓰요,"
강동기는 질펀하게 뻗어 있는 서운상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서운상의 어깻죽지 언저리에는 벌써 피가 시뻘겋게 배나고 있었다.
"인자 워쩔 것이다냐?" 김복동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도망가야제라."
"얼로?"
"모르것소.”
"우리도 항꾼에 가야제." 마삼수가 마른 침을 삼켰다.
"니 미쳤냐!" 강동기가 마삼수를 노려보며 내쏘았다.
그때였다. 한쪽 팔이 피범벅이 된 머슴이 안채 쪽으로 기어가며 소리치고 있었다.
"사, 살인이여! 살인났네에!"
"여그서 도망허먼 죄인 된께 꼼지락 말고 있어야 써."
강동기는 김복동과 마삼수를 마당으로 떠다밀며 자기도 마루를 뛰어내렸다.
안채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머슴의 허벅지를 걷어찼다. 머슴과 눈이 마주치자 강동기는 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저, 저눔이다. 저눔 잡아라아! 저눔이 사람 쥑였다아!"
머슴은 있는 대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안채에서 쫓아 나온 세 여자가 허둥지둥 마루로 뛰어올라 소리쳐 울기 시작하고, 머슴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그제서야 피 흐르는 팔을 다른 손으로 붙든 채 아이고땜을 놓았다.
하얗게 질린 김복동과 마삼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마당 가운데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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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즐독 감사합니다
참으로 비감스럽네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