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깃발
나희덕
깃발이 갈기갈기 찢어진 것은
바람 때문이 아니다
검은 머리카락을 모아 깃대를 묶고
그녀들은 외친다
더 이상 때리지 말라고 죽이지 말라고
여자라는 이유로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어야 할 목숨은 없다고
2022년 9월 13일 아샤 아미니는 윤리 경찰에 의해 구금되었다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구타로 삼 일 후에 사망한 그녀는 스물두 살
그녀들은 히잡을 불태우고
함께 걸어간다 머리카락 깃발을 들고
이것은 우리의 이름
이것은 우리의 얼굴
이것은 우리의 심장
머리카락은 얼마나 오래
히잡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던가
우리가 태어날 때
가장 먼저 자궁을 열고 나온 것이
머리카락이었던 것처럼
가장 슬플 때 바람에 나부끼는 것도 머리카락
더 이상 찢어질 수도 없는 깃발은
허공에 펄럭이며 외친다
이 검은 심장을 이제는 가둘 수 없다고
― 계간 《다층》 (2022 / 겨울호)
나희덕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예술의 주름들』이 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