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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힘의 이동 - 칼뱅과 제네바
1530년대 중반이 되자 서유럽에는 두 개의 주된 개혁 운동이 형성되었다. 그 첫 번째 운동은 점차 '루터파’ 로 불리게 되었는데, 지리적으로는 독일 영내로 한정되었으며, 주로 마르틴 루터가 제시한 요리문답들과 필립 멜란히톤이 저술한 신학 서적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 두 번째 운동은 독일 남부와 스위스의 도시들에서 전개되었는데, 이후 '개혁파'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루터의 개혁 프로그램보다 많은 점에서 더 급진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채택했다. 이 두 번째 운동에는 루터가 번째 운동에 끼친 개인적 영향력만큼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없었다. 훌드리히 츠빙글리, 하인리히 불링어 (1531년에 츠빙글리가 전사한 뒤 그 뒤를 이어 취리히의 개혁을 이끈 인물), 그리고 마르틴 부처는 개혁파 내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기보다 차라리 내부에서 권위를 가진 인물들로 간주되었다. 주된 이 두 운동들과 더불어 더 급진적이고 때로는 훨씬 더 작은 다양한 운동들이 영향력과 힘을 확보하고자 다툼을 벌였다.
루터는 1540년대에 일련의 위기에 부닥친다. 특히 1546년에 루터가 사망한 것은 큰 위기였다. 독일 종교개혁의 시작과 발전에 루터가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루터의 죽음은 독일 내부의 종교개혁으로부터 목숨보다 소중한 지도자를 앗아갔을 뿐만 아니라 후계자 문제를 미지수로 남겨놓았다. 누구에게 루터의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까? 루터파와 독일 종교개혁을 이끌어갈 명확하고 유력한 지도자 없이도 이 개혁 운동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런데 루터파는 이렇게 심대한 타격을 입은 뒤 곧바로 또 하나의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이 타격은 루터파를 매우 심각한 딜레마에 빠뜨렸다.
1530년 루터파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그들이 개혁에 나선 대의를 황제인 칼 5세에게 제시했다. 제국을 다시 통일시키겠다는 결의에 차 있었던 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신앙의 기초로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고, 이 제후들에게 1531년 4월까지 가톨릭교로 돌아오도록 통지했다. 그러나 루터파 제후들은 1530년 12월, 작센 지방의 한 고을인 쉬말칼덴에 모여 칼 5세가 계속해서 위협할 경우 그에게 맞설 신성한 개신교 동맹(1)을 창설하는 것으로 황제에게 보낼 대답을 갈음했다. 이 개신교 동맹의 지지세가 점차 커져가자 칼 5세는 동쪽에 있던 튀르크의 위협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때에 내부에서도 자신의 권위가 위협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문제가 적절히 해결될 수 있을 때까지 루터파 제후들은 자신들의 영내에서 자유롭게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게 타협안의 요지였다. 훗날 독일 역사가들은 쉬말칼덴 동맹을 '개신교 국가인 독일 제국’의 잠재적 기초라고 보았지만, 이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 동맹을 황제의 압력을 밀어내는 잠정적 수단이라고 보았다.
(1) 동맹의 중심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헤센 공 필립이었다. 이 외에도 브라운쉬바이크, 브레멘, 스트라스부르, 막데부르크 등이 가입했다.
이 동맹은 1543년까지 훌륭한 성공을 거두었다. 헤센 공 필립과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의 지도 아래 루터파는 사실상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루터파에 공감하는 제후들의 영내에서 발전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1543년에 이르러 동맹 내에 갈등이 발생했다. 헤센 공 필립의 중혼(重婚)이 추문을 일으켰던 것이다. 부처와 루터와 멜란히톤은 필립의 중혼을 눈감아주었다가 혹독한 비판을 받았으며, 종교개혁은 오명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칼 5세는 군사력을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1546년에는 한 해 내내 지방 제후들과 은밀히 협약을 맺어나갔다. 필립은 루터파가 심각한 위험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너무 늦기 전에 스위스의 개신교도들과 동맹을 맺을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어떤 계획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쉬말칼덴 전쟁이 일어나 칼 5세는 이제 그 영역이 축소된 개신교 그룹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쟁은 현저하게 이후의 정세를 결정지었다. 1547년 6월, 필립과 요한 프리드리히는 사로잡혀 독일 남부에 있는 감옥에 갇혔다. 1년도 못되어 루터파는 그 종교적 창시자와 지도자를 잃고, 가장 중요한 정치적 후원자를 둘이나 잃었다. 루터파 개혁 운동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시기였다.
루터파의 패전이 갖는 상징적 중요성은 특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 1547년, 비텐베르크 시는 어쩔 수 없는 운명에 굴복하여 황제의 군대에게 항복했다. 그해 5월 27일 칼 5세는 직접 그 도시에 들어가 말을 타고 성읍교회로 갔다. 거기서 그는 잠시 동안 루터의 무덤 옆에 서 있었다. 그가 루터를 마지막으로 만난 때는 보름스 의회 때였다. 그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들이 스쳐갔을까? 이전에 더 공격적인 행동을 취했더라면 이 운동을 제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후회했을까? 우리는 앞으로도 영원히 그 답을 모를 것이다.
칼 5세는 재빨리 독일의 루터파 지역에 종교적 일치를(가톨릭을 따를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트리엔트 공의회(2)가 종교개혁이 제기한 이의들에 겨우 대답을 내놓기 시작하자, 칼 5세는 트리엔트 공의회 결과를 담은 최종보고서가 출간될 때까지 종교적 평화를 보장할 잠정 조치들을 요구했다. 1548년에 체결된 아우크스부르크 임시 협정 덕분에 루터파는 그들의 가장 독특한 행위 두 가지 - 성직자 혼인과 성찬 때 평신도도 떡과 포도주를 함께 받을 수 있도록 한 것-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점들을 놓고 본다면, 이 임시 협정은 교회가 행하는 관습에 가톨릭이 고수해 온 전통 방식들을 아주 많이 채택했다. 이 협정은 전통적인 가톨릭 미사를 미사에 수반된 모든 의식과 함께 회복시키도록 규정했다. 시계가 마치 30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몇몇 루터파 제후들은 아우크스부르크 임시 협정을 거부하고 그 대신 '라이프치히 임시 협정'으로 알려지게 될 잠정 조치를 채택했다. 이 임시협정은 외관상 더 짙은 개신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멜란히톤은 이런 도전들에 맞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adiaphora)’(3)을 강조했다. 그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도 관용이 가능한 문제들이 있다고 믿었다. 멜란히톤은 새로운 상황 속에서 루터파의 유산을 가능한 한 많이 보존할 목적으로 실용적 접근 방식을 펼쳐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런 시도를 타협이자 배신으로 간주했다. 멜란히톤이 루터의 비전을 순진하게 정치적 책략에 순응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유력한 루터 해석자인 그의 위치에 공공연히 도전을 제기했다. 루터파 내부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멜란히톤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그들의 개혁 운동이 가장 존경하는 창시자(4)가 주창한 교리들을 오염되지 않고 손상되지 않은 채로 지켜가고자 투쟁했던 '순수한 루터파(Gnesio-Lutheran)’(5)의 격렬한 반대에 부닥쳤다.
(2)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분열을 해소하고 가톨릭교회 내부를 개혁할 목적으로 모두 3차(1545~1547년, 1551~1552년, 1562~1563년)에 걸쳐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에서 열린 공의회다. 교회 분열을 해소하지 못한 채, 구원은 은혜와 자유의사의 협동으로 이루어진다는 등 기존의 가톨릭 교리들을 재확인하여 종교개혁에 반대하는 입장을 확고히 했다.
(3) '아디아포라'는 성경이 특별히 금지하지도 않고 행하도록 명령하지도 않은 문제들을 가리킨다.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예전 가운데 성경이 명시적으로 금지하지 않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이므로 허용해도 상관없다고 보았다.
(4) 마르틴 루터를 말한다.
(5) 마티아스 플라키우스 일리리쿠스(Matthias Flacius Illyricus, 1520~1575)가 이끌던 루터파의 한 지류로 예나가 그 중심지였다. 루터가 죽은 뒤에 가톨릭교회와 교리 면에서 타협하자고 주장했던 신학자들(소위 '빌립보 사람들')에 맞서 루터가 주창한 교리를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 잠정 조치들을 둘러싼 위기는 지나갔다. 가까스로 군대를 재정비한 개신교도들은 칼 5세를 압박하여 독일의 종교적 지형을 결정한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약 (1555)을 받아들이게 했다. 각 통치자의 영토는 그 통치자의 종교를 따라야 했고, 통치자는 자신의 종교를 그 백성들에게 강제할 수 있었다. 통치자가 믿는 종교에 동의하지 않는 백성들은 다른 영지로 자유롭게 이주할 수 있었다. 제국 도시에는 가톨릭교와 루터파가 허용되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이 두 종교 중에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재세례파, 그리고 독일 남부와 스위스에 있던 개신교 형태들은 고려 대상에서 분명하고 의도적으로 제외되었다. 이 원칙은 "그 사람의 영토가 곧 그 사람의 종교를 결정한다(cuius regio, eius religio)" 라는 유명한 표어로 요약되었다. 모멸감을 느낀 칼 5세는 이듬 해 제위에서 물러났다. 그는 독일을 다시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던 사명을 이루지 못했다.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화약은 루터파에게 새로운 정체감을 부여했다. 독일 민족주의에 깊이 호소했던 루터파의 모습도 이 정체감을 형성하는 한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루터파가 독일 민족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는 점은 루터파가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확장되어 가는데 큰 장애 요인이 되었다. 루터파는 독일 땅에 갇히게 되었고, 루터파가 거둔 민족주의적 성공은 오히려 루터파를 속박하는 굴레가 되었다. 물론 루터파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나라들로 천천히 확장되어 갔다. 그러나 미래에 루터파의 확장은 주로 이민, 그 중에서도 특히 북아메리카로 간 이민에 의존하게 된다.
그렇다면 또 다른 개신교 운동(6)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이 운동 역시 루터파와 같은 운명을 맞을 것인가? 결국 츠빙글리와 스위스의 다른 개신교 개혁자들도 민족주의적 강령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기독교라고 여겼던 것의 재탄생이 그들 국가의 문화적·정치적 갱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두 번째 형태의 개신교 역시 결국은 루터파처럼 스위스의 독일어권 도시들과 지역들에 갇혀버리는 지역 종교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의 경계를 초월하여 진정한 국제적 개혁 운동이 될 정체감과 핵심 비전을 계발할 수 있을 것인가? 1520 년대와 1530년대 초반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스위스 개혁 운동을 단순한 지역 종교 운동정도로 보았다. 이 개혁 운동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개혁 운동이 지역 운동에 그칠 것인지 그것을 넘어설 것인지 여부는 영토의 미래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1560년에 이르자, 이 두 번째 형태의 개신교에는 정치적·사회적 국경선을 쉽게 건널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이 운동을 변화시킨 무언가가 일어났던 것이다. 이것은 이 개혁 운동을 지역적 제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이었을까?
한 사람과 한 도시가 그 답이었다. 이 둘은 이 시기 개신교의 통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둘은 바로 장 칼뱅과 제네바 시였다.
(6)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스위스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개혁 운동을 말한다.
제네바 종교개혁의 기원
1520년대에 복음주의 개혁 운동들은 스위스의 여러 도시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애초 이 운동은 취리히에서 시작되었지만, 1520년대 말에는 바젤과 베른을 포함하여 스위스 지역의 몇몇 유력한 도시들까지 뻗어나갔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모두 독일어 사용 지역이었다. 1520년대가 저물어갈 무렵, 스위스 서부에 있는 불어 사용 지역들과 도시들을 개혁의 대의에 동참시키는 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패드 보(Pays de Vaud), 뇌샤텔(Neuchatel), 로잔느(Lausanne), 그리고 제네바가 바로 그런 지역과 도시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많은 곳은 이미 정치 조약과 상업 조약을 통해 스위스 도시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개신교로 전향한 스위스의 도시들은 그들의 교역 상대방인 이 불어권 도시들에게 자신들을 따르도록 은근히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국어로 설교하는 것을 강조했던 복음주의 개혁 운동의 입장은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스위스 지역의 유력한 개혁자들은 대부분 독일어를 사용했다. 불어를 사용하는 복음주의자들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으로서 파리에서 공부하고 프랑스 모(Meaux) 교구의 개혁 활동에 참여했던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에 의지했다. 1524년, 외콜람파디우스는 바젤에 온 파렐을 환대했다. 그러나 이 결정으로 외콜람파디우스는 씁쓸한 후회를 하게 된다. 파렐은 걸핏하면 사람들과 마찰을 빚고 공격적이며 직설적인 토론자였다. 그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설득하기보다 따돌리는 쪽이었다. 심지어 에라스무스조차도 파렐이 바젤이라는 위대한 도시의 평판에 먹칠을 한다는 이유로 그를 바젤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결국 파렐은 베른에서 몇명의 지지자들을 겨우 찾아, 스위스 지역에서 개혁 활동을 펼쳐갈 근거지를 이 베른에 마련할 수 있었다.
1532년, 파렐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제네바에서 한 설교가 긍정적인 반응을 몰고 와, 결국 1535년에 대규모 공개토론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11 같은 해에 인접한 사보이 공국으로부터 가까스로 자유를 획득한 제네바는 이웃에게 지배당하기보다 그들의 미래를 스스로 결정하기로 결정했다. 1535년 8월, 제네바 시의회는 제네바 공화국이 개신교 종교개혁이 표방한 원리들을 받아들이고 미사를 폐지할 것을 표결했다. 파렐은 피에르 비레(Pierre Viret)(7)와 함께 제네바의 종교 질서를 재정립할 책임을 떠맡았다.12 그러나 이 과업은 파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파렐에겐 도움이 필요했다. 누가 그를 도울 것인가?
(7) 1511~1571. 스위스의 종교개혁가다.
장 칼뱅은 프랑스의 성당 도시인 뇌용에서 태어나 파리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이어 오를레앙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3 파리에 머무는 동안 칼뱅은 마르틴 루터의 개혁 사상 가운데 적어도 몇 가지를 만나게 되었다. 그것은 대학 서클들에서 널리 토론되던 것들이었다. 오를레앙 대학교를 졸업하고 파리로 돌아온 칼뱅은 개혁 그룹들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 시기 칼뱅의 삶을 거의 알지 못한다. 1533년 그의 숙소를 급습한 경찰들이 칼뱅이 직접 쓴 기록들을 압수해 버렸기 때문이다. 파리 대학교 총장인 니콜라 콥(Nicolas Cop)은 설교로 개혁을 역설했다. 파리대학 당국과 파리 시 당국은 그의 설교를 매우 선동적이라고 보았다.(현대독자들의 눈에는 온건해 보이는 설교다.) 이 설교의 사본은 칼뱅의 친필 기록속에 남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칼뱅이 이 설교의 진정한 저자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칼뱅은 체포를 피해 결국 스위스 바젤로 갔다. 그는 이제 개신교의 보루가 된 이 도시에 몸을 숨겼다. 프랑스의 상황은 나빠졌다. 개혁의 대의는'벽보 사건' 때문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1534년 10월, 파리 곳곳에 ‘무시무시하고 엄청나며 참을 수 없는 교황의 미사 남용에 관한 진실' 이라는제목이 붙은 반가톨릭 벽보들이 나붙었다. 벽보를 만든 사람은 알려지지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욤 파렐이 연루되어 있다고 믿었다. 정말 그렇다면, 그것은 파렐의 대표적인 정치적 오판이었다. 한때는 프랑스개혁자들의 대의에 공감했던 프랑수아 1세는 하룻밤 사이에 개혁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신세가 되어버렸고, 이제는 종교개혁의 철천지원수가 되어버렸다. 더욱이 재세례파의 뮌스터 점령을 목격하면서 프랑수아 1세는교회 개혁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치안을 위협할 수 있는 인물로 간주하게 되었다.
칼뱅은 이런 사태에 간담이 오싹해졌다. 균형을 회복할 수 있는 어떤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바젤에 은신하는 동안 시간을 갖게 된 칼뱅은 자신이 지지하던 개혁파의 관점에서 바라본 기독교 신앙의기본 요소들을 제시한 작은 책을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 사도신경과 주기도에 관한 자신의 견해와 함께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치는 서문을 기록해 놓았다. 그는 이 서문에서 온건한 복음적 형태의 기독교에 관용을 베풀어줄 것과 이 기독교를 과격하고 폭력적인 재세례파와 구별하여 봐줄 것을 호소했다. 이리하여 1536년 5월에 첫 출간된 《기독교강요(Institutiones Religionis Christinae)》는 결국 16세기에 나온 가장 영향력 있는 출판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이 책의 정중한 서문 때문이 아니라 이 책이 기독교 개혁파의 기본 요소들을 명료하고 체계적이며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칼뱅이 《기독교강요》를 쓸 때 1529년에 나온 루터의 요리문답(8)과 논문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 및 《교회의 바벨론 유수 서곡》을 인용했다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8) 어린이용의 소요리문답과 어른용의 대요리문답으로 되어 있다. 십계명과 사도신경과 주기도, 그리고 성례를 체계 있게 설명해 놓았다.
칼뱅은 몇 가지 가정사를 처리하기 위해 놔용에 돌아왔다가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여기서 그는 여정을 멈췄다. 그리고 1536년 여름, 제네바에 잠시 들렀다. 그는 여기서 하룻밤만 머물 작정이었다. 그러나 칼뱅을 알아본 파렐은 칼뱅에게 제네바에 머물면서 파렐이 이 도시에 소개했던 개혁조치들을 공고히 다지는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칼뱅은 파렐이 필요로 하던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우선 칼뱅은 불어를 유창하게 말하고 쓸 수 있었다. 둘째, 칼뱅은 제네바에 오기 직전 탁월한 기독교 교리 입문서를 출간했는데, 이는 칼뱅이 교육자로서 능력을 갖춘 인물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셋째, 칼뱅은 법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제네바 시가 법 제도의 골격을 만드는 일을 도와줄 수 있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칼뱅은 제네바에 머물기로 했다. 그는 여기서 성경 '독사(讀師, lector)' 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의미의 '서품이나 안수'도 받지 않았다.
1536년 9월에 칼뱅은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로잔느 시는 제네바 시를 따라 종교개혁 원리들을 수용할 것인지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파렐과 비레는 이제 의사결정 과정에서 필수 요소가 된 공개 토론에 참석하고자 로잔느로 갔다. 이때 그들은 칼뱅을 데리고 갔다. 그들은 로잔느 지역의 성직자들과 맞붙었는데, 이 성직자들은 학문적으로 뛰어난 이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토론은 파렐과 비레에게 불리한 쪽으로 전개되었다. 두 사람은 몇 가지 질문에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해야 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들은 심각한 도전에 부닥쳤다.
그 질문 가운데 하나는 제네바에서 실시한 개혁 프로그램의 핵심을 건드리는 동시에 재세례파의 망령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비레와 파렐은 사람들이 초기 교회 저술가들의 견해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고 성경을 마음 내키는 대로 해석하도록 허용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토론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만일 제네바의 개혁과 많은 사람들이 사회 불안을 야기한다고 믿고 있던 재세례파 같은 급진파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면, 제네바 개혁의 신뢰성은 영원히 손상을 입게 될 판국이었다. 이때 칼뱅이 일어나 답변했다.
칼뱅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초기 기독교 저술가들을 분명하게 인용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은 이 저술가들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이 저술가들을 중요한 권위자로 간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청중들은 칼뱅의 명석한 설명에 압도당했다. 칼뱅은 3세기의 저술가인 카르타고의 키프리아누스의 서신 ('키프리아누스의 서신들을 담은 두 번째 책 속에 들어 있던 세 번째 편지’)을 인용하고, 4세기의 신학자요 설교가인 요한 크리소스톰(9)은 훨씬 더 정확하게(크리소스톰의 21번째 설교를 중간쯤부터 끝까지)인용했다. 그리고 칼뱅이 자리에 앉을 때쯤에는 모든 사람들이 두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첫째는 제네바의 종교개혁이 교회의 갱신이자 연속이라는 것이요, 둘째는 개신교라는 하늘에 새 별이 등장했다는 것이었다. 로잔느는 종교개혁에 설복당하고, 제네바는 칼뱅에게 설복당했다.
(9) 350~407. 시리아 안디옥 출신의 동방교회 신학자요 설교가였다. '황금의 입' 이라는 별명이 말해 주듯이뛰어난 설교로 큰 명성을 얻었다. 청빈과 금욕의 본을 보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감독으로 있을 때에는 교회 개혁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칼뱅과 제네바의 관계는 원만하지 않았다. 파렐은 함께 일하기 수월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얼마 전에 사보이 공국이라는 정치권력과 교황이라는 종교권력을 몰아냈던 제네바 시가 새로운 틀 -특히 반드시 예배에 참석해 다소 긴 설교를 경청해야 할 의무 같은 것 - 에복종할 뜻이 없었다는 것이다. 활동가이지만 정치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했던 파렐은 제네바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켜 버렸다. 그 바람에 결국 1538년 초에는 파렐의 반대파가 제네바 시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1538년 4월, 파렐과 칼뱅은 제네바에서 추방당했다. 칼뱅의 서신을 보면, 그가 이런 사태 진전에 얼마나 낙심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칼뱅은 이제무엇을 해야 할까? 그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란 말인가? 결국 그는 여러생각 하지 않고 자신이 1536 년 여름에 떠나왔던 그 곳을 선택했다. 그는 행장을 꾸려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그 곳에서 자신의 일을 계속할 수 있기를 소망했다.
애초에 가고자 했던 스트라스부르에 2년이 지나서야 당도한 칼뱅은잃어버린 시간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그는 잇달아 일련의 중요한 신학 저작들을 저술했다. 초판을 개정하고 확장한 《기독교강요》 2판을 펴냈고(1539), 《기독교강요》의 초판을 불어로 번역해 펴냈다.(1541) 칼뱅은 불어를 사용하는 스트라스부르 회중의 목회자로서 개혁파 지도자들이 실제로부딪히는 문제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의 유력한 개혁자인 마르틴 부처와 교분을 나누었다. 이 사귐을 통해 칼뱅은 자신이 생각한 개혁 프로그램의 지적 기초뿐만 아니라 도시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칼뱅은 분명 여러 가지 점에서 스트라스부르의 이 경험 많은 개혁자로부터 중요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장난삼아부처에게 '스트라스부르 주교' 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1541년에 이르러 칼뱅은 상당한 교회 운영 경험을 쌓고 개혁 교회의 본질, 그 중에서도특히 시민사회의 정치 조직과 기율을 둘러싼 여러 쟁점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되었다. 부처가 칼뱅에게 끼친 영향은 특히 이 점들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오직 칼뱅의 마음속에만 존재하고 있었던 개혁 교회와 공동체는 이제 1538년 제네바에서 구체적 현실로 나타났다. 추상적 이론과 순수한 사유는 실제 경험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칼뱅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모든 것을 바로 잡겠다고 결심했다.
이윽고 1541년 가을, 칼뱅은 제네바로부터 돌아와 달라는 초청을 받는다. 그가 없는 동안 제네바의 종교 상황과 정치 상황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제네바 시는 칼뱅에게 돌아와서 질서와 신뢰를 회복시켜달라고 간청했다. 칼뱅은 더 지혜롭고 경험 많은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엄청난 과업들을 그 곳을 떠날 때인 3년 전보다 훨씬 더 잘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갈등과 반대가 있었다. 특히 세르베투스 사건과 관련해 심각한 갈등이 있었지만, 사실 칼뱅은 유명한 재세례파인 미카엘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10)를 정죄하고 처형한 이 사건에서 비교적 적은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세르베투스 사건도 당시 정황에 비추어 판단해야만 한다. 이 시대는 공공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인간의 생명을 범상하게 빼앗던 시대였다. 칼뱅은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당국과 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 다툼은 힘이 있는 자리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제네바는 칼뱅을 필요로 했다. 결국 칼뱅의 개혁 프로그램에 반대하는 입장은 소멸되었다. 그의 삶에서 마지막 10년 동안, 칼뱅은 제네바시의 종교 문제를 사실상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소신껏 처리할 수 있었다.
개신교 형성에서 칼뱅이 차지하는 엄청난 전략적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를 아주 유명한 인물로 만든 책인 《기독교강요》와 이 책이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신앙 체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10) 1511~1553. 본명은 미겔 세르베토 이 레베스(Miguel Serveto y Reves)다. 에스파냐 출신의 의사 학자이며인문주의자였는데, 삼위일체를 부인하다가 이단으로 정죄 받아 제네바에서 화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