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주일에 한번씩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명 꼴로 중남미에 유명작가들을 만나고 있는데요
이번에는 가르시아 마르케스를 접했습니다
강의들은 다음에 정리한 내용들인데요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하세요^^
가르시아 마르케스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좋아한다는 가수 샤키라의 뮤직비디오를 틀어주셨다. 노래 가사를 알아듣지 못해도, 중남미란 무엇인가에 대해 문자를 이용해서 설명해주지 않아도, 그 여가수의 목소리와 표정 그리고 멜로디와 색감만으로도 간접적으로 라틴 아메리카를 느낄 수 있었다.
콜롬비아의 작가이자 외교관인 알베르토 살라메아가 인터뷰 형식으로 작성한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대한 기사이다. 이 밑에는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고 맘에 드는 그의 대답들.
당신의 주요 결점은? 비이성적 낙관주의
당신이 되고 싶은 사람은? 내 친구들이 나를 알아볼 때의 나 자신
좋아하는 색깔은? 오후 세 시 경의 자메이카에서 볼 수 있는 카리브해의 노란색
가장 좋아하는 꽃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메르세데스가 매일 아침 책상이 꽂아놓는 빨간 장미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보름마다 바뀜. 그 중 끊이지 않는 사람은 소포클레스와 콘라드. 이번 주에는 멋진 자서선을 쓴 무하마드 알리
가장 되고 싶었던 사람은? 장터의 마술사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생애
그는 1927년에 태어났다. 호적 상으로는 1928년 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주장하길 마르케스가 1928년에 이미 한 살이었다며 1927년에 태어난 것으로 정정했다고 한다. 마르케스는 콜롬비아의 대서양변에 위치한 아라카타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라카타카는 끊이지 않는 폭우로 인해 홍수가 나며, 무더운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카리브 해의 열대 지역이다. 이런 탓에 마르케스는 안데스 지역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작품 『백년의 고독』에서도 잘 나타난다.
1948년 4월 9일 보고타에서 ‘보고타소’라고 불리는 자유당과 보수당간의 정치 투쟁인 ‘콜롬비아 폭력 사태’가 일어난다. 그러자 콜롬비아 국립대학은 휴교하고 그는 당시 그의 가족이 살고 있던 카르타헤나로 옮긴다. 그곳에서 그는 《엘 우니베르살》 신문의 기자로 일한다. 마르케스가 기자로 일하던 당시에 한국전쟁에 관해 직접 기사를 쓰기도 한다. 또한 『백년의 고독』속에 나오는 대령의 이미지는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참전용사” 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1950년에 바랑키야에서는 플리니오 아풀레요 멘도사와 함께 평생 동안의 친구가 될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알폰소 푸엔마요르, 알바로 세페다 사무디오와 헤르만 바르가스이다. 이들로 구성된 단체는 소위 ‘바랑키야 그룹’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이들에 의해 당시 주변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대서양 해안 문학이 그 진가를 인정받게 된다.
그 후 1954년 그의 첫 번째 소설이자 포크너의 영향이 다분히 보이는 『낙엽』이 출판된다. 출판 직후 그는 《엘 에스펙타도르》지의 유럽 특파원으로 로마로 간다. 이탈리아에 있게 되자 그는 ‘로마 영화 실험 센터’에서 공부한다. 그가 파리에 있을 때 《엘 에스펙타도르》신문은 폐간되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일자리를 잃게 된다.
1962년 이후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아무 작품도 출판하지 않는다. 그는 이 침묵의 기간을 작가로서 성숙하기 위한 시간으로 삼으면서, 그를 일약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하게 만든 『백년의 고독』을 쓴다. 1967년 6월에 드디어 『백년의 고독』이 출판된다.
그는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그가 아카풀코로 가족과 함께 운전하면서 가는 동안 갑자기 자신이 청년시절부터 쓰고자 했던 소설의 구조가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당시의 장면을 이렇게 말한다. “너무 완전히 생각이 나서 거기에서 타자수에게 첫 장의 단어 하나하나를 구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6개월 정도면 이 소설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소설을 끝내고 보니 18개월이란 세월이 흘러 있었다고 밝힌다.
『족장의 가을』이란 소설은 1975년에 출판된다. 이 소설은 구체적인 독재자를 소재로 다룬 것이 아니라, 19세기부터 존재해 왔던 여러 독재자들의 이미지를 종합하여 독재자의 원형을 그리고 있다. 또한 1976년에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칠레의 피노체트가 권좌에 있는 한 더 이상 소설을 출판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하지만 1981년 4월에 이 약속을 깨고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출판한다.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선정되었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1989년 3월에는 『미로 속의 장군』을 출판한다. 1994년에는 5년간의 침묵을 깨고 카르타헤나를 다시 소재로 잡아 『사랑과 다른 악마들』을 출판한다. 그리고 1996년에는 메데인 카르텔의 우두머리인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꾸민 납치 사건을 소재로 『납치 일기』를 발표한다. 한편 2002년에는 자서전 『이야기꾼의 삶』을 출판하고, 2005년에는 일본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에 영감을 받아 아흔 살의 노인이 십대의 젊은 여자를 사랑하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발표하면서, 70대 후반임에도 아직 작가로서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르케스와 마술적 사실주의
『백년의 고독』에서 절정에 이르는 ‘마술적 사실주의’와 ‘스토리텔링’ 기법은 20세기 후반의 세계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백년의 고독』은 고전이나 대작은 반드시 어렵고 진지한 것이 아니라, 진지함과 장난의 경계를 없애면서 정치․사회․경제의 문제들을 문학적 상상력과 결합시켜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작품임을 일깨워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술적 사실주의란 무엇일까.
우리는 “사실주의”에 중점을 두고 마술적 사실주의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현실이란 개념을 눈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가 굳게 믿고 있는 것으로 확장시킨다.
라틴 아메리카의 환경 자체가 비현실적인 현실이다. 예를 들어 아마존 강은 일반 강과는 달리 끝이 보이지 않는 누런 바다와 같다. 이를 문자로 묘사한 것을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보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겠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현실이다. 즉 비현실적인 것은 현실적으로, 현실적인 것은 비현실적으로, 이런 교차를 통해 마술적인 사술주의를 구현한다.
미국과 유럽의 비평가들은 마술적 사실주의를 “현실과 환상의 혼합”이라고 정의하지만, 그것을 전 세계에 천착시킨 작가는 ‘현실’에 집착한다. 그에게 마술적 사실주의는 환상적이거나 심리적인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포함하지 않으며, 20세기 후반부터 서구에서 각광 받기 시작하던 몽환문학과도 다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에게 마술적 사실주의는 라틴아메리카 사람과 그를 에워싼 세계 사이의 신비스러운 관계를 발견하려는 일종의 현실에 대한 태도인 것이다.
비록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만을 강조하고 있지만, “우리의 최대의 적은 우리의 삶을 믿게끔 만들 수 있는 전통적인 도구가 불충분하다는 것”이라는 말을 통해 서구 리얼리즘의 한계도 지적한다. 다시 말하면, 그에게 현실은 눈에 보이는 현실뿐만 아니라, 일반인이 굳게 믿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들까지도 포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