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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감사의 글
제1부 패배 덕분에 얻은 승리
제1장 망명자의 아들
제2장 중국공산당 유격대에서
제3장 붉은 군대의 대위
제4장 모스크바에서 임명된 낙하산 수령
제2부 자주 독재를 위하여
제5장 새로운 시작
제6장 김일성의 전쟁
제7장 수령의 적들
제8장 결정적 전투
제9장 최후의 승리
제3부 어버이 수령과 그의 신민들
제10장 제2차 한국전쟁을 준비하며
제11장 쇄국의 시대, 주체사상 그리고 남한 습격
제12장 유일사상체계
제13장 총비서 동지와 그의 세자
제14장 죽은 수령의 강력한 손
맺음말
김일성 연대표
참고문헌책 속으로
독자들도 알 수 있겠지만 우리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사실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김성주의 운명은 그때도 특징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성주는 소득이 비교적 높은 망명자의 아들이었다. 그는 외국에서 외국어로 교육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그는 외국 문화와 외국 가치관의 영향을 받았다. 가족에게서 정치 이야기도 자주 들었을 것이다. 그의 부모는 서양 문명의 개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었다. 이 모든 것은 김성주의 성격이나, 그의 매우 예외적이며 흥미로운 운명의 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_ 제1장 망명자의 아들, 23쪽
‘김일성 장군’의 이미지에 의병장 김일성과 김현충의 활동은 확실히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보다 덜 알려져 있는 동명이인의 활동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김성주는 아마 자신이 바로 도시전설의 김일성과 닮아 보이도록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金日成(태양이 된다)’이라고 쓰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김영주가 아버지 김형직이 아들들에게 ‘김일성 장군’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고 증언한 것을 보면 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_ 제2장 중국공산당 유격대에서, 35쪽
북한 정권 수립 전에 사망한 사람 외에 대부분의 제88여단 조선인들은 북한의 고위 간부가 되었다. 제88여단에서 중대장이었던 최용진은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까지 올라갔다. 최현 소대장은 나중에 인민무력부장이 되었고, 박성철 분대장은 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북한에서 높은 간부가 된 제88여단 출신자들의 총목록을 매겨본다면 20명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전부 남자였다고 강조해야 한다. 김일성은 이 시대의 대부분 남자들보다도 여자들을 낮춰 보았다. _ 제3장 붉은 군대의 대위, 56쪽
김일성 평생 가장 중요한 시기는 1945년 가을이었다. 대대장에 불과했던 그는 바로 이 시기 하루아침에 북조선의 수령이 되었다. 1945년 소련의 영향권은 급격히 확장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소련은 위성국가가 2개밖에 없었다. 몽골과 투바였는데, 투바는 1944년 소련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1945년 소련은 사할린 섬의 남반부, 쿠릴 열도와 동프로이센 일부를 합병했으며 붉은 군대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만주를 점령했다. 소련은 독일, 오스트리아, 조선에 점령지가 생겼다. 전 세계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섰다. 북조선은 스탈린 전리품의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_ 제4장 모스크바에서 임명된 낙하산 수령, 73쪽
1945년 10월 14일은 맑은 날이었다. 이날 평양 모란봉 근처에는 큰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언덕 위에는 소련 병사들이 급하게 만든 대(臺)가 있었고 연설자를 위한 강단(講壇)이 있었다. 강단 위 벤치에는 치스탸코프, 레베데프, 로마넨코 등 소련군 주요 장군들과 조만식, 박정애를 비롯한 조선인이 앉아 있었다. 통역은 미하일 강 소령이 맡았다. 강단과 벤치 뒤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커다란 초상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 강단에 김일성은 없었다. 소련군의 시나리오에 따라 ‘민족적 영웅 김일성 장군’은 인민 앞에 갑자기 등장해야 했다. 그는 강단 아래 공간을 만들어 기다리고 있었다. _ 제5장 새로운 시작, 94~95쪽
1950년 6월 28일 조선인민군은 서울을 완전히 점령했다. 김일성은 ‘해방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도’ 시민들에게 연설을 했다. 그러나 북한 지도부는 아직 평양에서 서울로 출발하지 않도록 했다. 대신 김일성은 서울을 통치하기 위해 리승엽을 파견했다. 서울 함락 후 북한군은 남진(南進)을 계속하기는커녕 서울에서 ‘해방’ 경축 행사를 했다. 최용건 민족보위상도 사흘 동안 경축행사를 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_ 제6장 김일성의 전쟁, 141~142쪽
숙청들은 계속되었다. 1955년 12월 1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은 박헌영을 각각의 형법 규정에 따라 3중의 사형과 전체 재산 몰수형에 처했다. 해당 자료와 증언들을 보면 재판 기간 박헌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 인민재판이 희비극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이 무죄라는 것이 재판에 반영될 수 있게 노력했다. 박헌영은 이 재판이 사실상 김일성이 지시해 이뤄지는 그에 대한 제거 작전이라는 것을 끝까지 믿고 싶지 않았다. 박헌영은 혹시나 그에 대한 고소가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닐까도 살펴보려 했다. 전 조선공산당 당수는 인민의 나라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가 설마 부정재판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_ 제7장 수령의 적들, 170~171쪽
결과적으로 북한 야권이 결국 실패한 이유는 리상조의 결단력 부족이었다. 리 대사는 흐루쇼프에게 김일성을 해임해달라고 직접 요청할 용기가 부족했다. 그리고 대사는 소련공산당 앞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제기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 같다. 한편으로 리상조는 나라가 운명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일성을 해임하지 않으면 리 대사나 그의 동지들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미래가 고통과 암흑일 것이었다. 그러나 대사는 이 모든 일이 혁명 동지 사이에서 벌어진 오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 아닙니까? 그는 혁명가 아닙니까? 그는 동지에게 비판을 받으면 실수를 이해하고 고치지 않겠습니까? _ 제8장 결정적 전투, 193~194쪽
1957년 8월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4분의 1 정도가 숙청당한 것을 보면 1958~59년의 대숙청 규모를 인식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은 최고인민회의 보궐선거를 하도록 결정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선거를 언론매체에 절대 언급하지 않도록 했다. 아마도 숙청 규모를 숨기기 위한 결정으로 보인다. 1959년 7월 19일 진행된 이 선거에서는 약 120만 명 참가자 중 14명만 반대투표를 했다. 이 14명은 북한 역사상 마지막 반대투표자가 되었다. 이후 모든 북한 선거들의 결과는 ‘100.0% 찬성표’였다. 필자가 이 책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중앙선거와 지방선거 모두 예외는 없었다. _ 제9장 최후의 승리, 207쪽
https://youtu.be/ZJlPh0B2paA
김일성의 계획은 놀랄 만한 것이 아니다. 첫째, 그는 새로운 전쟁에 대한 꿈을 꾼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다. 1955년에도 이승만은 북진 멸공통일을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 이승만이나 김일성 모두 새로운 전쟁은 일으킬 수 없었다. 미국은 이승만에게, 소련은 김일성에게 이를 결코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북한의 상황이 바뀌었고 김일성은 소련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둘째, 김일성은 이미 전쟁을 일으켜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 그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던 것은 갑자기 생긴 평화사상 때문이 아니라 승리할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시 김일성은 전쟁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_ 제10장 제2차 한국전쟁을 준비하며, 220쪽
이 사건들 중 첫 번째이면서 아마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이었다. 이 작전을 위해 조선인민군은 정예 특공대를 훈련시켰다. 국군 군복을 입은 특공대는 군사분계선을 넘어 1968년 1월 21일 서울 청운동까지 들어갔다. 거기서 한국 경찰관 최규식 총경은 특공대를 가로막고 검문에 들어갔다. 의심이 많았던 최 총경이 총을 빼들자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최규식 총경은 순국했고 대부분의 특공대 대원들도 사살 당했다. 그중 한 명만 포로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탈출해 북한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다시 돌아간 박재경은 이후 인민군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고, 포로 김신조는 남한의 평범한 주민으로 계속 살면서 회고록도 썼다. 둘 중 누가 더 행복했을까? _ 제11장 쇄국의 시대, 주체사상 그리고 남한 습격, 233쪽
1967년 김일성은 진짜 전체주의 제도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신질서의 이름은 유일사상체계(唯一思想體系)라고 했다. 무시무시한 이 표현은 이제 나라의 모든 행동이 김일성 사상을 무조건 따라야 할 것이며, 김일성 사상과 모순된 사상은 물론 김일성 사상과 관계없는 사상 역시 모두 금지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유일사상체계는 전체주의 선포였다. 김일성은 이 표현을 1967년 3월 처음 언급했고 1956년부터 발생한 모든 일의 결과가 바로 이 체계의 설립이라고 덧붙였다. _ 제12장 유일사상체계, 240쪽
1974년 2월 김성애와 김정일의 싸움은 김정일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다. 2월 16일 김정일은 33살이 되었고 아버지는 그때 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일성도 33살이 되던 1945년 북한 지도자가 되었다. 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는 김정일을 아버지의 후계자로 추대했고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했다. 이 자리 위로는 김일성 총비서 자리밖에 없었다. 개인 면담을 통해 김성애는 아직도 자신은 중요한 인물이고 김정일이 김일성 아들인 것만큼 자기 아들이라고도 강조했지만 너무 늦었다. 2월 전원회의 이후 북한 매체에서 김성애에 대한 언급들은 줄어들었고 결국 북한의 공식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_ 제13장 총비서 동지와 그의 세자, 281쪽
그러나 자신의 두 눈으로 사회주의권 붕괴를 지켜본 김정일은 나라에 필요한 본질적인 개혁은 추진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버지에 대한 숭배를 더욱 강화하도록 결정했다. 김일성의 주석궁은 수령의 능(陵)이 되었다. 북한 매체는 이 ‘금수산기념궁전’이 ‘수령의 영생위업’을 위하여 어떻게 화려한 건물이 되었는지를 굶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선언했다. 김일성의 미라가 있는 외재궁(外梓宮)에 대한 접근을 허용하기 전 북한은 사진사들에게 그렇게 많은 불편을 주었던 수령의 혹을 시신에서 제거했다. _ 제14장 죽은 수령의 강력한 손, 317쪽 닫기
출판사 서평
서울 시청에서 불과 40km 떨어진 곳에 다른 나라가 있다. 북한이라고 부르는 이 나라를 1945년부터 하나의 가문이 다스리고 있다. 초대 지도자 김일성이 1994년 사망한 후 2011년까지 그의 아들 김정일이 최고지도자 자리에 있었고, 2011년이 끝나기 몇 주 전부터 손자 김정은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우리 지구는 넓고 역사가 깊은 행성이지만 이렇게 수십 년 동안 나라를 통치하고 3대 세습까지 성공한 비군주제 정권 사례를 북한 외에 찾을 수 없다. 이제 북한 주민들 중에 김씨 일가 아닌 통치자 밑에 살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이 남지 않았다.
북한의 제도와 북한 사람의 운명을 만든 사람은 바로 이 나라의 설립자인 김일성이다. 김일성이 1994년 사망한 후 북한이 변화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지금 북한 경제는 김일성 시대보다 시장질서에 더 가깝다. 그러나 다른 분야는 그렇지가 않다. 김일성 시대 후반과 다름없이 북한 주민 대다수는 인터넷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주민들이 합법적으로 볼 수 있는 정보는 매우 엄격한 검열을 받는다. 국경은 차단되어 있고 사람들은 나라의 허가 없이 외국에 나갈 수 없다. 모든 주민은 국가원수와 그의 가족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노역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사형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제도를 만든 사람이 바로 김일성이다.
김일성은 현대사에서 가장 안정된 독재정권을 설립한 사람이다.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그는 중국식 개혁 개방의 길을 거부했는데,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 정권이 곧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권은 건재하다. 김일성이 사망한 지 25년이 더 지났지만 북한은 그의 손자 김정은이 통치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김일성을 거의 신으로 본다.
김일성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나. 1945년 권력을 장악하기 전의 그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김일성은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식민지 조선의 교원 가정에서 태어난 김일성은 3·1운동 후 부모와 함께 만주로 이주했고, 1930년대 초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설립한 후 김일성은 중국공산당 유격대에 입대했고 빨치산 투쟁에 참가했다. 1940년 그는 소련으로 탈출했고 소련 붉은 군대의 대위가 되었다. 그리고 1945년 그의 운명은 완전히 다른 길로 향했다. 붉은 육군의 위관 장교인 김일성은 갑자기 북한의 수령으로 임명되었다.
이 책은 북한 초대 수령에 대한 완벽한 평전이 아니다. 북한 정권이 무너지거나 근본적인 개혁이 일어난다면 훗날 미래의 학자들이 김일성에 대해 발견할 것들이 아주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이 변화가 언제 찾아올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저자는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로 된 각국의 자료들을 활용해 북한 설립자 김일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서술했다.
저자 서문_ 만약 그때 그 약이 없었더라면
01 의약품은 언제, 어떻게 탄생했을까?
원숭이와 곤충도 약을 사용한다고?
참혹한 '쓰레기 약'의 시대
불로불사의 약 '금단'이 당나라를 멸망시킨 주범이다?
불멸의 작곡가 슈베르트는 매독 치료에 사용한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는데
통계학 발전이 의약품 효능 판정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이유
02 세계사의 흐름을 결정지은 위대한 약, 비타민C
대항해 시대에 바다 사나이들이 풍랑이나 해적보다 두려워한 것은?
괴혈병 예방법이 수백 년 동안 대중에 퍼져 나가지 못한 이유
괴혈병이 만든 비극을 영원히 종식시킨 영웅, 제임스 린드
비타민C가 좀 더 일찍 발견되었다면 대영제국은 탄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20세기 초반 과학자들에게 '기독교 성배'처럼 여겨졌던 비타민C 발견 이야기
위대한 화학자 라이너스 폴링이 인생 말년에 비타민C 연구에 빠져든 이유
03 인류 절반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 말라리아 특효약, 퀴닌
중국 최고의 명군 강희제의 목숨을 구한 약, 퀴닌
말라리아, 절대권력자 투탕카멘 왕과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쓰러뜨리다
훈족의 위협으로부터 서로마 제국을 구한 일등공신, 말라리아
퀴닌이 '예수회 가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까닭
천재 소년 화학자 윌리엄 퍼킨과 퀴닌 인공 합성에 얽힌 이야기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은 말라리아
21세기, 새롭게 인류를 위협하는 질병 말라리아
04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지닌 약, 모르핀
스위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양귀비 재배 흔적이 발굴되었다는데
미국 남북전쟁 동안 아편중독자가 급증한 이유
인체 복잡 시스템을 파괴하는 힘을 지닌 원자 40개 덩어리, 모르핀
중국인들이 아편의 약효와 함께 독성과 해악도 알았더라면
청나라와의 천문학적 무역 적자를 벌충하기 위해 아편을 이용한 영국 정부
헤로인이라는 '악마'의 탄생
천사와 악마의 두 얼굴을 지닌 약, 모르핀
05 통증과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은 약, 마취제
의학 진보를 가로막은 결정적 장애물, 통증
전신마취 수술을 가능케 한 하나오카 세슈의 쓰센산 처방
'역사상 최초 마취 기술 개발자'라는 타이틀은 누구에게?
빅토리아 여왕의 무통 분만 성공을 도운 마취약, 클로로폼
마취제를 둘러싼 역사상 최대 미스터리, 마이클 잭슨의 죽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마취의 수수께끼
06 병원을 위생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주인공, 소독약
인류 역사를 은밀히 뒤바꾼 작은 원인, 산욕열
임산부 사망률을 낮춘 '제멜바이스 손 씻기 방법'
19세기 의학계가 '제멜바이스 가설'을 배척한 이유
영국 외과의사 조지프 리스터, 소독의 대명사 되다
07 저주받은 성병 매독을 물리쳐준 구세주, 살바르산
16세기 한때 파리 시민 3분의 1이 매독 환자였다는데?
천하의 영웅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공포에 떨게 한 질병, 매독
매독 환자를 말라리아에 걸리게 하여 매독을 치료한다고?
'황당한' 실수가 빚어낸 '위대한' 발견
매독 환자의 구세주, 살바르산의 탄생
08 세균 감염병에 맞서는 효과적인 무기, 설파제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낸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온 두 발의 총성
전쟁에서 100만 대군보다 무서운 감염병
갖가지 병원균의 온상, 불량한 참호
세균 감염병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 설파제의 탄생
1941년 미국에서만 50만 명의 생명을 구한 기적의 약, 설파제
나치 정권 패망이 설파제 때문이었다고?
설파제는 페니실린의 페이스메이커?
09 세계사를 바꾼 평범하지만 위대한 약, 페니실린
20세기 가장 위대한 발명 중 하나, 페니실린의 탄생
알렉산더 플레밍의 콧물에서 탄생한 깜짝 발견
1928년 9월 어느 날, 플레밍의 연구실에 푸른곰팡이 포자가 날아들지 않았더라면?
신이 플레밍을 통해 인류에게 내려준 은총, 페니실린
페니실린이 실용화하기 어려운 이유
페니실린, 세계사를 다시 쓰다
페니실린이 목숨을 구한 세계 최초의 인물은 누구?
플레밍이 처칠의 목숨을 두 번 구했다고?
만화 주인공 닥터 진과 페니실린
항생물질을 투입해도 죽지 않는 세균, '내성균'의 등장
10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약, 아스피린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약, 아스피린
아스피린이 버드나무에서 태어났다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달래주는 건 아스피린밖에 없다”
바이엘 vs. 바이엘
70년 만에 밝혀진 아스피린의 수수께끼
아스피린이 알츠하이머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고?
11 악마가 놓은 닻에서 인류를 구한 항 HIV 약, 에이즈 치료제
에이즈 치료제 개발자가 노벨상을 못 받은 이유
전 세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기이한 질병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놓은 필리핀 출신 에이즈 환자
병원성 바이러스를 둘러싼 끝없는 암투
에이즈는 악마가 인류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설치한 덫이라고?
에이즈 치료제를 최초로 개발한 일본인 의사 이야기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
저자 후기책 속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BC 4000년경부터 3000년경 기간 동안 점토판에 550종이나 되는 의약품 목록을 빼곡히 기록해 놓았다. 그 의약품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다 보면 누구나 자기 눈을 의심하게 될 정도다.
소똥과 말똥, 썩은 고기와 기름, 불에 태운 양털, 돼지의 귀지 등 오늘날의 상식으로는 약은커녕 쓰레기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온갖 물질들이 버젓이 기록되어 있다.
왜 그런 '쓰레기 약' 목록이 기록으로 남았을까? 이는 당대를 산 사람들의 생각, 즉 신념 및 종교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질병이란 악마가 몸속에 침투하여 만들어내는 나쁜 현상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몸속 악마를 쫓아내려면 악취를 풍기는 동물의 똥이나 오줌, 썩은 고기, 심지어 돼지의 귀지 같은 악마가 싫어하는 더러운 물질을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 점에서는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던 고대 이집트도 예외는 아니다. 고대 이집트에도 온갖 종류의 '쓰레기 약'이 존재했다. 실제로 동물의 피나 똥, 빵이나 나무에 핀 곰팡이 등 듣기만 해도 속이 울렁거리는 이상한 물질을 환자의 몸속에 투여했다는 기록이 공식문헌에 남아 있다.
악마를 쫓아낸다는 퇴마 약품은 외과수술에도 적극적으로 이용되었다. 그 증거가 고대 이집트와 잉카 유적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유적지에서 두개골에 구멍이 뚫려 있는 미라가 여러 구 발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그 구멍이 머리로 들어온 악마를 몰아내기 위해 외과수술로 구멍을 뚫은 흔적이라고 추정한다. 구멍 주위 뼈에 상처가 아문 흔적이 남아 있는 사실로 미루어 한동안 머리에 구멍이 뚫린 상태로 살았던 게 아닌가 싶다.
- 본문 중에서 (24~25p.)
쿡 선장은 선원들의 심리를 활용한 특별 방법을 썼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간부용 식단에만 사우어크라우트를 메뉴로 올렸다. 그러고는 사우어크라우트를 아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간부들에게 지시했다.
그의 예상대로 '우리에게도 사우어크라우트를 달라'는 거센 항의가 선원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쿡 선장은 사람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악하고 교묘히 조종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위의 일화 역시 그런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다. 그는 선원들의 심리를 정확히 간파하고 현명하게 대처하여 단 한 명의 괴혈병 사망자도 없이 성공적으로 기나긴 항해를 마쳤다.
그 결과 그는 하와이 제도를 발견했고, 뉴질랜드를 측량했으며, 유럽최초로 남극권에 진입하는 등 눈부신 업적을 세웠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바스쿠 다 가마와 마젤란 일행이 쿡 선장처럼 괴혈병을 예방하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세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그들은 인명 손실 없이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더 많은 신천지를 발견했을지 모른다.
그들의 고국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향신료 무역에서 막대한 부를 얻어 세계를 제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영국은 '대영제국'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조차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 본문 중에서 (48~49p.)
그러나 바티칸은 본래 늪지대, 모기가 발생하기 딱 좋은 서식 조건을 갖추고 있다. 늪지대 위에 세워진 성당에 먹잇감이 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우글거리고 있는 셈이니, 모기들에게는 잘 차려진 잔칫상이나 다름없었다. 콘클라베라는 행사 자체가 말라리아가 창궐하기 안성맞춤인 환경을 만들어준 것이다.
말라리아에 희생된 비극의 주인공 중 하나로 1048년에 선출된 교황 다마소 2세가 있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된 후 불과 23일 만에 말라리아로 선종했다. 더 심한 경우도 있다. 1590년 우르바누스 7세는 교황에 선출된 지 2주도 되지 않아 세상을 떴다. 이로써 그는 역대 최단 교황 재위 기록을 달성했다.
최대 비극은 1623년 콘클라베에서 발생했다. 선거를 위해 모인 추기경 중 10명이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중 8명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보르게세 추기경도 중태에 빠져 입후보를 단념하며 사람들은 대혼란에 빠졌다. 최종적으로 선출된 우르바누스 8세도 말라리아에 걸리기는 했지만, 어찌어찌 살아남아 재선거 위기를 모면했다. 아마도 다른 추기경들은 그 덕분에 말라리아를 피해갈 수 있게 되었다며 가슴을 쓸어내리지 않았을까?
말라리아의 '바티칸 사랑'은 애틋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인노켄티우스 3세, 알렉산데르 6세, 율리우스 2세, 레오 10세 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교황들이 모두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이 밖에도 몇 명 더 있지만, 그들의 경우 암살설도 분분하다).
비교적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는 10세기 이후의 교황 약 130명 중 말라리아 또는 열병이 사인으로 추정되는 교황은 22명이 넘는다고 한다. '신의 대리자'도 말라리아의 위협만은 비껴가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 본문 중에서 (72~73 닫기
출판사 서평
인류 역사는 '질병과 약의 투쟁 역사'다!
역사의 결정적 장면에 만약 '그 약'이 없었다면…?!
도서출판 사람과나무사이에서 출간된 『세계사를 바꾼 10가지 약』은 인류 역사를 '질병'이라는 창과 '약'이라는 방패의 투쟁 역사로 파악한다.
이 책은 많은 국가와 사회를 치명적 위기에 빠뜨렸던 10가지 질병과 결정적 고비마다 인류를 무서운 질병의 위협에서 구한 10가지 약에 관한 흥미진진하고도 유익한 이야기로 빼곡하다.
저자의 관점대로, 인류 역사는 질병과 약의 투쟁 역사다. 괴혈병, 말라리아, 매독, 에이즈 같은 치명적인 질병이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 날카로운 창처럼 인류를 위협하면 비타민C, 퀴닌, 살바르산, AZT 같은 약이 기적적으로 등장하여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라고들 말하지만, '그때 만약 이랬더라면?' 하는 식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면 역사는 좀 더 흥미진진하고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인류 역사의 몇 가지 장면에 '만약'을 대입해보자.
▣ 만약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바스쿠 다 가마와 마젤란이 비타민C를 알았다면?
바스쿠 다 가마와 마젤란은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더 많은 신천지를 발견했을지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그들의 고국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향신료 무역에서 막대한 부를 얻어 세계를 제패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만약 그랬다면 영국은 '대영제국'이라는 화려한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며,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세계지도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18세기 후반, 괴혈병이 만든 비극을 영원히 끝낸 영웅이 등장했다. 영국 해군 소속 군의관 제임스 린드가 바로 그다. 린드는 집념과 끈기로 오렌지, 사과, 레몬 등을 사용하여 실험에 실험을,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끝에 괴혈병 치료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린드의 괴혈병 치료제란 다름 아닌 다량의 비타민C가 함유된 과일과 채소 위주의 식단이었다. 이후 제임스 쿡 선장은 린드가 개발한 '비타민C를 포함한 과일과 채소 위주의 식단'을 지혜롭게 활용하여 세계 일주에 성공했다.
그 시대의 뱃사람들은 거센 풍랑이나 해적의 습격보다 괴혈병을 더 두려워했는데, 쿡 선장은 '비타민C 예방법'으로 단 한 명의 선원도 잃지 않고 무사히 항해를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위대한 항해는 19세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 만약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강희제의 주치의 손에 '예수회의 가루' 퀴닌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강희대제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역시 명군으로 인정받는 옹정제, 건륭제 역시 역사 무대에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며, 청나라는 물론 아시아와 세계 판도도 달라졌을 것이다.
강희제는 여덟 살의 어린 나이에 만인지상의 자리에 올라 61년간이나 제위에 있으면서 많은 위대한 업적을 세워 중국 역사상 최고 명군 중 한 명으로 남았다. 300년 가까이 이어진 청 왕조의 기반이 거의 전적으로 그에 의해 닦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 강희제가 제대로 날개를 펴보기도 전에 종말을 맞이할 뻔한 치명적인 위기를 만났다. 마흔 살에 떠난 원정길에서 말라리아에 걸린 탓이었다. 그 바람에 한때 그는 위독한 상태에 빠졌는데, 운 좋게도 예수회 선교사가 진상한 특효약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예수회의 가루'라 불리는 약 퀴닌이 바로 그것이다. 여담이지만, 중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는 부왕에게 병문안 온 황태자는 황제의 건강을 염려하기는커녕 이제 곧 자신이 황위에 오른다는 생각에 희색이 만면했다고 한다.
기적적으로 병에서 회복한 강희제는 인간적인 서운함에 더해 황태자의 작은 그릇에 실망하여 황위를 다른 아들에게 물려주었다. 강희제에게 황위를 물려받은 이가 또 한 명의 명군인 옹정제이며, 그 뒤를 이은 황제가 역시 명군의 반열에 오른 건륭제다.
퀴닌은 왜 '예수회의 가루'라는 이름으로 불렸을까? 대항해 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포교를 떠난 선교사들에 의해 퀴닌이 유럽과 아시아 등 여러 대륙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 세계로 전파된 퀴닌은 영국 왕 찰스 2세, 청나라 황제 강희제 등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
이 기적의 가루 덕분에 1655년 교황을 선출하는 회의인 콘클라베는 장장 석 달을 끌었음에도 말라리아로 인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무사히 마쳤다.
그로부터 30여 년 전인 1623년 콘클라베에서 선거를 위해 모인 추기경 중 10명이 말라리아에 걸렸고, 그중 8명이 사망했으며, 교황에 최종 선발된 우르바누스 8세가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했던 걸 고려하면 예수회의 가루, 퀴닌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실감이 난다.
▣ 만약 에를리히 연구팀이 매독 치료제 개발을 위한 605번째 화합물 실험에서 실패한 뒤 좌절하여 연구를 중단했다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한때 인류를 치명적 위기에 빠뜨렸던 가장 무서운 질병 중 하나인 매독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을지 모른다. 또한 '수은 요법'이라는 황당한 치료로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었던 중세인들처럼 현대인들은 여전히 끔찍한 고통을 겪고 있지 않을까.
매독은 무서운 병이다. 프랑스 왕 샤를 8세, 프란시스 1세, 잉글랜드 왕 헨리 8세 등 널리 이름이 알려진 쟁쟁한 왕들이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한때 파리 시민의 3분의 1이 이 병에 걸릴 정도로 심각했다.
유럽 전역을 강타한 매독은 바스쿠 다 가마의 함대에 매독 환자가 섞여 들어가는 바람에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와 말레이반도를 거쳐 중국에 진출했다. 그리고 다시 16세기 초반 무렵 일본에 상륙하여 수많은 이들에게 공포의 대명사가 되어 있었다.
이 시대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오는데, 전국시대의 극심한 혼란을 극복하고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관한 이야기다. 희대의 영웅 이에야스는 매독이 두려워 윤락 여성들 근처에도 가지 않는 등 지나칠 정도로 몸을 사렸다고 한다.
인류는 이 위험천만한 질병 매독 치료법을 찾기 위해 수백 년간 분투했다. 한때 중앙아메리카 원산인 유창목 나뭇진이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귀한 대접을 받았다. 또한 수은이 매독 치료 특효약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수은 요법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심부전과 탈수, 질식 등으로 목숨을 잃거나 운 좋게 살아남아도 간과 신장에 장애를 입은 채 빈혈 등의 부작용을 안고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위험천만한 치료법이 줄줄이 등장하는데, 그중에는 오스트리아 의사 율리우스 바그너 야우레크가 개발한 '매독환자를 말라리아에 걸리게 하는' 기상천외한 치료법까지 등장했다.
에를리히 연구팀은 획기적인 매독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감염병에 관한 많은 업적을 세워 이미 전 세계적 명성을 얻은 에를리히 연구팀에는 일본인 유학생 하타 사하치로가 참가하고 있었다. 에를리히는 해박한 의학 지식과 탁월한 실험 기술, 경이로운 끈기를 갖춘 이 제자를 깊이 신뢰했다.
하타가 에를리히 연구팀에 참가하기 얼마 전 매독 병원체가 발견되어 배양법이 학계에 보고되었다. 에를리히 연구팀은 수백 년 동안 인류를 괴롭혀온 이 병에 초점을 맞추었다. 에를리히는 하타에게 지금까지 만든 화합물을 매독에 시험해보라는 임무를 주었다.
끈질기게 실험을 거듭한 하타는 606번째 화합물 실험에서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비소를 포함한 이 화합물 한 방울만으로 실험용 토끼의 혈액에서 매독 병원체를 말끔히 몰아냈다. 한 달가량 시간이 지나자 매독으로 생겼던 종기가 완치되었고, 토끼는 건강을 회복했다.
임상시험이 진행되었으며, 인체에 대한 효과도 입증되었다. 무서운 질병 매독이 마침내 정복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하타 사하치로의 집념과 끈기에 힘입은 에를리히 연구팀이 개발한 606번째 비소화합물은 '살바르산'으로 명명되었는데, '구세주'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살바토르(Salvator)'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약은 언제, 어떻게 탄생했을까?
약의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다양한 기록과 연구 자료, 정황들을 근거로 추정할 수 있을 뿐 정확히 언제, 어떻게 약이 탄생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분명한 것은, 약의 발견과 활용이 인류가 탄생하기도 전인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렇게 말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도 있겠다. '인류가 탄생하기도 전에 약이 존재했다면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들도 약을 사용했다는 건가?' 그렇다. 이 책의 저자는 약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약을 '발견'하고 '활용'한 인간 이외의 다른 동물들의 사례를 들어보자. 남미에 서식하는 꼬리 감는 원숭이(카푸친 원숭이)가 대표적이다. 이 원숭이들은 노래기를 발견하면 잽싸게 잡아서 자기 몸 여기저기에 문지른다.
노래기가 방출하는 화학물질 벤조퀴논(Benzoquinone)을 몸에 바르면 뱀이나 해충 등이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는 걸 터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을 '발견'하고 '활용'할 줄 아는 똑똑이는 곤충 세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불나방 유충이 그런 똑똑이 중 하나다. 녀석은 어떻게 약을 '발견'하고 '활용'할까? 가생파리라는 곤충은 애벌레에 알을 낳고, 부화한 유충은 애벌레 몸속에서 성장한다. 이윽고 애벌레가 번데기가 될 무렵, 기생파리 유충은 숙주의 외피를 아귀아귀 뜯어먹고 바깥세계로 나온다. 이처럼 녀석은 <에일리언> 같은 SF 영화나 공포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무시무시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기생 당하는 쪽, 즉 숙주인 불나방 유충도 기생파리 유충에게 아무 대책 없이 무기력하게 잡아먹히지는 않는다.
불나방 유충은 기생파리가 제 몸에 알을 낳으면, 평소에는 잘 먹지 않는 나도독미나리속의 독당근(Conium) 같은 독성식물을 찾아 먹는다. 이렇게 독성식물을 뜯어 먹은 불나방 유충은 독초를 먹지 않은 녀석들보다 생존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즉, 불나방 유충은 제 몸속에 둥지를 튼 기생충을 퇴치하기 위해 '약초'를 이용하는 셈이다. 야생동물이 본능적으로 자연계에서 약을 찾아 이용하는 사례는 이 밖에도 무수히 많다. 초기 인류는 원인(原人)이나 원인(猿人, Australopithecine)이라 불리던 시대부터 이른바 '약'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참혹한 '쓰레기 약'의 시대
“인류는 독과 약을 기록하기 위해 문자와 점토, 종이 등의 기록 수단을 발명한 것처럼 보인다.” 『독과 약의 세계사』의 저자이자 일본 약과대학 교수인 후나야마 신지의 말이다. 실제로 초기 문명인들은 파피루스, 점토판 등의 필기구에 다양한 약이나 독약 등에 관한 특징과 사용법 등을 문자로 남겼다.
이 시대 사람들에게 무엇을 먹으면 병에 걸리는지, 또 무슨 약을 먹으면 병이 낫는지에 관한 정보는 어쩌면 왕의 이름이나 전쟁의 승패를 기록하는 일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일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초기 인류는 구체적으로 어떤 물질들을 약으로 사용했을까? 놀랍게도,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약으로 사용할 엄두를 냈을까' 싶은 황당한 사례로 넘쳐난다. 예를 들어,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BC 4000년경부터 3000년경 기간 동안 점토판에 550종이나 되는 의약품 목록을 기록해놓았는데 소똥과 말똥, 썩은 고기와 기름, 불에 태운 양털, 돼지 귀지 같은 것들이다. 오늘날 상식으로는 약은커녕 쓰레기로밖에 여겨지지 않는 물질들이다. 고도의 문명을 이룩한 고대 이집트도 예외는 아니어서 동물 피나 똥, 빵이나 나무에 핀 곰팡이 등 이상한 물질을 환자의 몸속에 투여했다는 기록이 공식 문헌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메소포타미아인들과 고대 이집트인들은 왜 '쓰레기 약'을 사용하고 기록으로 남기기까지 했을까? 이는 당대를 산 사람들의 신념 및 종교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질병이라는 악마가 몸속에 침투하여 만들어내는 나쁜 현상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몸속 악마를 쫓아내려면 악취를 풍기는 동물 똥이나 오줌, 썩은 고기, 심지어 돼지 귀지 같은 악마가 싫어하는 더러운 물질을 사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런 '쓰레기 약'이라는 악습이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춘 것은 '의학의 성인' 히포크라테스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질병이 악마의 소행이 아닌 자연현상의 하나임을 깨달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결정적 고비마다 인류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하고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약 이야기]
비타민C ㅡ 대항해 시대에 괴혈병은 뱃사람들에게 거센 풍랑이나 해적의 습격보다 치명적이었다. 인류는 비타민C의 발견으로 괴혈병이 초래한 끔찍한 비극에서 영원히 해방되었다. 18세기 후반, 제임스 쿡 선장은 세계 일주 항해에 성공하여 영국이 최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했다.
비타민C는 쿡의 항해를 성공으로 이끌어준 가장 위대한 공헌자였다.
퀴닌 ㅡ 투탕카멘왕과 알렉산드로스 대왕, 단테와 크롬웰의 목숨을 앗아간 질병. 수많은 교황과 추기경들을 쓰러뜨린 질병. 지금까지 태어난 인류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질병. 말라리아다. 이 병의 위협에서 인류를 구해낸 것은 페루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키나 나무 껍질로 만든 퀴닌이었다.
모르핀 ? 원자 40개 덩어리 모르핀은 인류를 끔찍한 통증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러나 잘못 사용하면 인생을 파괴하는 무서운 약이 된다. 19세기에 모르핀이 원인이 되어 청과 영국이 맞붙은 아편전쟁은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다.
모르핀 원자 구조가 하나라도 달랐다면 세계지도는 지금과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살바르산 ㅡ 에를리히 연구팀의 하타 사하치로가 불굴의 의지와 놀라운 끈기로 개발한 606번째 비소 화합물 살바르산. '구세주'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살바토르(Salvator)'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인류가 수백 년 동안 매독 치료제로 사용한 수은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1910년 처음 발매된 살바르산은 위험한 가짜 약 수은을 의약품 목록에서 몰아냈으며, 수많은 매독 환자를 죽음의 늪에서 건져내 주었다.
페니실린 ㅡ 1928년, 스코틀랜드 출신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개발한 페니실린. 비티만C와 함께 인류사를 뒤바꾼 가장 중요한 약 중 하나로 꼽힌다.
특수한 푸른곰팡이를 배양하여 만든 기적의 약 페니실린은 1941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만 50만 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으며, 수많은 사람의 병을 낫게 해주었다.
아스피린 ㅡ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약은? 진통·소염제 아스피린이다. 생산량은 5,000mg 알약 기준으로 1,000억 알 분량이며, 지구에서 달까지 한 번 반 왕복할 수 있는 거리다.
1899년에 처음 출시된 아스피린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에 내몰리던 1920~30년대에 특히 대단한 인기를 구가했으며, 역사가들에 의해 '아스피린 에이지'로 기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