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서민영은 작은 손수레를 끌고 배나무 사이를 오가며 잔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배나무 하나 하나를 살피며 월동 결과를 점검하고 있었다. 상처입고 말라버렸거나 자연고사한 가지들을 찾아내 가위질을 해나갔다. 그리고 점검이 끝난 나무 둘레로는 한 뼘 남짓한 깊이로 괭이질을 했다. 한쪽 다리가 성하지 못한 그의 괭이질하는 모습은 어설프고 힘들어 보였다. 절룩거리며 손수레를 끄는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농장 사람들은 그런 일을 한사코 만류했지만 서민영은 귀머거리인 양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농장 여기저기에 세워진 푯말의 ‘일하지 않은 자는 먹으려 하지 말라, 내일 먹으려 하거든 오늘 일하라,’ 하는 문구들이 서민영의 대답인 셈이었다.
몸 성한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비치는 것뿐 서민영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불편도 힘듦도 느끼지 않았다. 신체 어느 부위가 불구가 되면 전체적 균형이 깨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불균형이 야기하는 착란이나 불편은 또한 치유되게 마련이었다. 그 불균형 속의 균형인 자연스러운 치유는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력이며 모든 생명체에 내포된 오묘한 생명력이라고 서민영은 믿고 있었다. 불구라는 사실로 스스로를 불구로 구속하지 않는 정신력만 갖게 되면 육체의 활동은 정상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동물이든 식물이든 간에 그 질긴 생명의 적응현상에서 서민영은 우주의 신묘한 힘과 신의 섭리를 보고 있었다. 서민영은 나뭇가지를 매만지면서 나무들이 저마다 봄맞이 숨을 쉬고 있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지 마디마디마다 맺혀있는 꽃봉오리들은 하룻밤 사이가 다르게 변해갔다. 하룻밤을 지낼 때마다 팽팽한 탄력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는 꽃봉오리들은 어느 절정의 순간에 다다라 마침내 껍질을 벗어던지고 꽃을 피워낼 것이다. 모든 꽃봉오리들은 겨울을 맞기 전에 벌써 그 속에 꽃을 담고 겨울을 나는 것이다. 봄의 꽃피움을 위하여 그 얇은 껍질에 싸여 엄동을 견디어내는 꽃의 인내, 아니, 엄동의 추위 속에서도 꽃이 얼지 않도록 하는 그 얇은 껍질에 모아진 보온의 힘, 서민영은 거기서 우주의 신비를 보았다. 그것은 모든 생명현상에 걸치는 경이로움이었고, 인간으로서의 자만을 버리게 하는 가르침이었다. 인간의 고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논리라는 것이 얼마나 일방적이며 얼마나 편협한 것인지, 그것이 결국은 비인간적이고 반자연적인 올가미라는 것을 서민영은 홀로 깨닫고 있었다.
"선상니임, 선상니임, 손님 오셨어라우."
꼬마가 나무들 사이를 다람쥐처럼 빠져나가며 외치고 있었다. 그 카랑한 목소리가 봄기운 가득한 과수원에 싱싱한 파문을 이루며 퍼져나갔다. 서민영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선상님, 선상님, 손님 오셨어요."
아이는 숨 가쁘게 말했다.
"어허, 힘드는 데 살살 다니잖고."
서민영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가 빙그레 웃으며 서민영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 누구시더냐."
"아, 첨 보는 사림인디, 목사님이라고 허시등마요."
"모옥사아?"
서민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아, 양복 입고 모자럴 썼는디, 영 멋지드만이라."
아이는 무언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싶다는 눈으로 작은 입을 놀렸다.
"그래, 가보도록 하자."
서민영은 아이의 손을 잡았다.
"선상님, 구르마는…………"
아이가 서민영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따 또 일해야지. 놔둬라."
아이의 말대로 회관에는 양복차림에 중절모를 쓴 중년의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 선생이십니까. 첨 뵙겠습니다. 전 황순직 목삽니다."
남자는 중절모를 벗고 고개 숙였다.
"예, 전 서민영입니다."
이북 사투리의 억양, 자칭 목사라고 내세우는 태도, 대머리도 아니고 계절도 지났는데 쓰고 있는 중절모, 서민영의 첫눈에 거슬리는 것들이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순천교회 장 목사님이 이걸………"
황순직이 양복 속주머니에서 봉투를 받아든 서민영이 돌아섰다. 봉투에서 나온 것은 편지를 겸한 소개장이었다.
건강은 어떠하시며, 하시는 일은 여일하신지요. 소생은 염려지덕으로 무사평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집안의 일로 의논드릴 사정이 생겼기로 필을 들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여기 서 선생을 찾아가는 분은 황순직 목사로서, 이 땅의 기구한 형편상 월남한 목회잡니다. 황 목사는 이곳 순천에서 교회를 갖고 목회활동을 하고자 하여 저를 찾아오셨는데, 서 선생도 아시다시피 여기는 작년, 재작년에 걸쳐 새 교회가 세 개나 생겨 포화상태가 아닙니까. 그래 생각다 못해 서 선생한테 소개를 해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곳에도 기존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만 아직 새 교회가 생기지 않은 까닭입니다. 물론 서 선생이 통찰하여 일을 처리하실 것이고, 행여라도 저를 의식하시어 일을 무리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해방 이후 교회의 과다한 증가는 기독교 내적으로도 그러하고 기독교 외적인 사회적으로도 문제점이 많은 것이야 진작 서 선생과 논의한 바가 아닙니까.
건강 누리시고, 하시는 일에 늘상 하나님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이만 난필 줄입니다. 총총.
읽기를 마친 서민영은 편지를 본래대로 접어 봉투에 넣었다.
그때 마침 찻물을 끓여 내왔다. 서민영은 자그마한 오동나무상자를 왼손에 받쳐 올리고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 갇혀 있던 향그러운 차향이 그윽하게 스며났다. 그는 눈을 사르르 내려감으며 부드럽게 숨길을 당겼다. 땅내음인 듯, 꽃내음인 듯 차향이 가슴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는 네 겹으로 덮인 한지의 한 자락씩을 조용조용한 손놀림으로 펼쳐 나갔다. 그때마다 조금씩 더 진한 차향이 코로 스밈을 그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차향 자체보다는 어쩌면 월주 스님의 정성을 감득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한지 네 자락을 다 펼친 서민영은 옆에 놓인 무쇠주전자 뚜껑 위에 오른손 가운데 세 손가락을 모아 조심스럽게 대보고는 했다. 물의 뜨겁기를 감지해보는 것이었다. 물이 너무 뜨거우면 차맛이 떫고 잠기고, 물이 너무 식으면 차맛이 싱겁고 들떴다. 알맞은 물 식히기, 적당량의 차 넣기, 알맞게 맛 우리기, 이 세 가지가 세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어우러져야 차맛이 제대로 나는 것이다.
물을 끓여 내온 다음 상자뚜껑을 열고, 한지 한 자락씩을 펼치고 하는 서민영의 동작이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느렸던 것은 물 식히기를 한 셈이었다. 서민영은 손가락 끝을 모아 입차의 양을 어림해가며 그것을 세 번에 나누어 주전자에 넣었다.
승려 월주는 손수 만든 차를 잊지 않고 보내왔다. 그는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지닌 대승불교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승려였다. 그는 조선불교의 폐쇄적인 보수성을 늘 안타까워 했으며, 사회적 실천 자각이 없는 개인주의적 기복성(祈福性)을 우려했다. 그는 기독교적 성경 한글화를 무엇보다도 부러워했으며, 한용운 같은 승려가 열만 된다면 조선불교가 제대로 되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뇌고는 했다.
그와 교분을 나누게 된 것은 그가 순천포교당에 머무를 때였다.
그와 의식을 맞물림으로 이루어진 일이 야학경영이었다. 그가 없었더라면 교직에 몸담은 상태에서 야학경영이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차맛을 음미할 줄 알게 된 것도 그를 통해서였다.
"깊고 넓게 생각하고, 많은 글을 써야 했던 다산이 호를 다산으로 지을 만큼 차를 좋아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지요. 차는 미각도 미각이지만 그보다는 정신을 쇄락하게 해주거든요. 다산은 과중한 정신노동으로 머리에 쌓이는 피로를 차로 푼 것이지요. 다산에게 차를 대준 게 대흥사 절집이었는데, 예로부터 중들이 차를 즐겨왔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지요. 정신노동자가 차를 즐기고, 육체노동자가 막걸리를 즐긴 것은 퍽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놈들 때문에 어이없는 꼴들이 생겨나게 되잖았읍니까. 차를 마시는 일이 무슨 신선놀임이나 한량놀음을 하는 것 같은 도착된 풍조 말입니다. 닛본도를 휘두르는 군국주의자들이 찻잔을 받쳐들고 앉은 꼴이라니, 가관 중에 가관이 아닐 수 없지요."
그러면서 그는 일본놈들이 보성 일대 야산에 대단위 차 재배단지를 조성하게 되자 못내 불쾌해했다. 도미를 위시해서 맛진 생선이면 다 일본놈들이 차지해 식생활가지 파괴당했듯 우리의 고유한 정서생활 중의 하나가 또 일본놈들에게 침해당하는 것은 그는 아까워했다.
서민영은 주전자를 들어 차를 찻잔에 반씩이 미처 못되게 따랐다.
그는 하루에 꼭 한번, 낮일을 마치고 저녁에 책을 펼치기 전에 차를 만들어 마셨다. 차를 만드는 그 시간에 하루 일을 더듬어 생각에 잠기는 것이 좋았고, 천천히 차를 마시며 책 속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갈피 잡아가는 것도 좋았다.
승려 월주는 한용운이 세상을 떠나자 선암사 대웅전 마룻바닥을 쳐대며 한나절을 통곡하고는 그 길로 종각으로 내려가 사흘 밤낮을 식음을 전폐하고, 눈 한번 붙이지 않은 채 쇠북을 울려대 고인의 극락왕생을 빌었는데, 그 소문이 짜하게 퍼져나가 그는 갑작 고승이 아닌 명승이 되고 말았다.
"삼일삼야에 일순불면, 식음전폐, 통시타종, 부단염송 하였으니 소승이 바로 생불이란 겁니다. 그것까지도 좋은데, 글쎄 넋 나간 늙은이들이 생불님 모시고 불공드리는 것이 소원이라고 쌀 됫박 이고 줄을 서지 않았겠습니까. 그 꼴을 만해 선사께서 내려다보시며, 이놈 땡초 월주야, 그런 재앙 떨었으니 당해서 싸다, 하실 겁니다. 이게 우리 불교의 한곕니다."
서민영은 두 번째로 차를 따라 찻잔을 채우며 소리 없이 웃었다. 생불곤욕을 피해 말사를 떠돌던 월주를 생각하면 언제나 웃음이 나왔다.
"드십시오, 선암사 경내 큰 나무 그늘에서 잘 자란 것인데다가, 한 스님의 정성까지 깃든 찹니다."
서민영이 찻잔을 들며, 편지를 읽고 나서 처음 한 말이었다.
"아니, 크리스천으로서 우상숭배자들과 관계를 하십니까?"
황순직은 차를 마실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고 정색을 하고 있었다.
서민영은 혐오감과 피로감이 한꺼번에 끼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장 목사를 생각했고, 그의 왜곡된 편협성 또한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우상숭배……… 내 종교가 소중할수록, 신도가 확장되기를 바랄수록 남의 종교를 함부로 비난하거나 헐뜯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불교가 부처님을 모신다고 하여 우상숭배라고 매도하다면, 그럼 우리 기독교가 내세우는 십자가는 뭔가요. 부처님이나 십자가는 각 종교의 상징물이지 우상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상을 숭배치 말라 하심은 인간 영혼을 사악하게 만드는 마귀적 우상을 가리킨 것이지, 엄연한 경정을 가지고 내세관을 확립하고 있는 다른 종교의 상징물을 지칭해서, 다른 종교를 배척하고 비난하라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불교는 그뿐만 아니라 미신적 기복(祈福)이나 일삼는 집단 아닙니까?"
"그래요오? 그러면 우리 기독교에서 하는 기도는 뭡니까. 우리가 밤낮으로 외는 주기도문이 바로 기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무엇 하여 주시옵고’의 계속 아닙니까. 모든 종교를 비난하고 헐뜯음으로써 우리 종교의 위대성을 내세우려는 착각과 교세를 확장하고자 하는 비열성을 버려야 합니다. 김교신 선생께서 외롭게 실천하신 일이 뭡니까. 이 땅의 기독교에 미국식 물량주의와 저돌성이 감염된 것을 치유해서 건전하고 건강한 민족종교가 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물량주의는 무질서한 교회 짓기였고, 저돌성은 바로 다른 종교의 무조건적 배척과 전통생활양식의 조직적 파괴였습니다. 이 땅의 목회자라는 사람들은 아무런 비판 없이 서양사람들의 저의가 감추어진 말을 그대로 따라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도 우상숭배요 미신이다, 고사잔치도 우상숭배요 미신이다, 심지어 나라의 상징인 국기에 예를 표하는 것까지 우상숭배냐 아니냐로 지금 유치하고 졸렬한 입씨름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럼, 이 땅에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전파시킨 나라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엄연히 그들 풍습대로 부모 죽은 날 모여 앉고 묘지를 찾아가서 절하고, 무슨 일을 시작할 때나 마치고는 뻔질나게 파티를 해대고, 전쟁을 할 때나 식민지를 약탈할 때나 그들은 철저하게 국기를 모시고 다니며 경례를 붙였습니다. 기독교 본고장 나라들에서는 우상이 아닌 게 왜 우리한테 와서는 우상이 되어야 합니까. 김교신 선생께서는 일찍이 그 저의를 간파하신 겁니다. 예수를 이용해서 한 민족을 뿌리에서부터 와해시켜 의식을 완전히 속국화 시켜버리려는 강대국의 저의 말입니다. 그분이 기독교의 민족종교화를 꾀했던 것은 그 음모에 맞서기 위한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황순직은 찻잔을 들어 단숨에 마셔버렸다. 차를 마시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듣다 보니 못 견디게 목이 말랐던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공박할 만한 말이 없는데다가, 괜한 트집을 잡았다가 용건은 아직 꺼내지도 못한 채 인상만 나쁘게 박힌 것이 몸이 달았다. 꾀죄죄한 차림에 볼품없는 생김에서 그런 강단지고 아구맞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미리 귀띔을 한마디도 해주지 않은 장 목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예,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편지에 적힌 일은 어떻게………"
"예에, 월남을 하셨다고요?"
서민영은 차로 혀를 축였다.
"그 빨갱이놈들의 탄압으로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그 아까운 교회 다 버리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빨갱이라면 아주 치가 떨립니다. 예수를 부정하는 그 놈이야말로 진짜 사탄입니다. 이북 목회자들은 예수님 다음가는 수난을 당한 겁니다."
말이 진전됨에 따라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가는 황순직을 서민영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차로 혀를 적셨다.
"그럼 반공주의자가 되셨겠군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공산주의자들은 내 원수, 아니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의 원숩니다."
"그런가요. 그런데, 왜 공산주의가 기독교는 물론 모든 종교를 부정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거야 사탄이니까 그렇지요."
"생각이 분명하시군요."
서민영은 입가에 엷은 비웃음이 스쳐갔다. '단순'이라고 나오려는 말을 '분명'으로 바꾼 것이었다.
"성경 말씀의 예언이니까요."
저리도 단순한 사람은 얼마나 속이 편할까. 그러나 이 땅의 기독교가 문제로구나.
서민영은 눈길을 떨어뜨리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그와의 자리를 파할까,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나, 서민영은 생각했다.
시계로 눈길을 보냈다. 12시가 20여 분 남아 있었다. 밥 때까지 일손을 다시 잡기도 어중간하고, 먼 길을 온 손에게 밥은 먹여 보내야 했다.
"제 생각으로는 그게 성경 말씀인 사탄이라서가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모든 종교를 부정하는 건 종교가 저지른 잘못 때문입니다. 가장 인간적이어야 할 종교들이 가장 비인간적으로 타락한 결과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인간 사회구조를 재편성하고자 하는 논리를 전개한 마르크스한테 부정당한 겁니다."
"아니, 서 선생은 그럼 막스 그놈이 옳다는 말입니까!"
황순직은 말허리를 자르며 버럭 소리쳤다. 서민영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황순직을 바라보았다. 서민영은 더 이상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아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러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가 비록 인식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예수의 품안에 든 목숨이었다.
"말을 다 들어보시고 말씀하셔야죠. 다 제 생각일 뿐이니까 더 말하지 않도록 하지요."
"아, 아닙니다.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막스 그놈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바람에 제가 실수했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일방적인 얘길 한 거지요, 목사님이 필요로 하는 얘긴 젖혀놓고 말입니다."
"예에, 그 일은 어떻게 될지………"
황순직은 반색을 하며 앉음새를 고쳤다.
"편지에는, 황 목사님이 교회를 갖고 목회활동을 하시고자 한다고 썼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요."
"예, 그 말 그대로지요. 목회활동을 하자면 교회가 있어야 되니까, 조그맣게 하나 짓든지, 맞춤한 건물이 있으면 사들일 작정이지요."
우문현답이 될 것이기에, 어떻게 그런 경제력이 있는지 서민영은 묻지 않았다.
"여긴 39년에 세워진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꼭 10년이 됐군요. 그런데 신도라는 것이 오십 평 정도에 반도 안 차 운영이 어려운 실정입니다."
"아니, 인구가 얼만데 그 꼴이란 말입니까. 그건 전적으루 전도활동에 문제가 이쓰요."
황순직의 말은 갑자기 사투리 억양이 심해졌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곳 일대는 토착화된 불교세가 뿌리 깊은데다가, 오래도록 사람들은 절박한 생존문제로 시달리고 허덕여 오면서 신에 눈 돌릴 여유도 없고, 신을 믿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황 목사님을 위해서나, 현존 교회를 위해서나, 이곳은 피하시는 게 현명한 처살 겁니다. 아무래도 농업지역이 아닌, 대도시라야 개척이 쉽잖겠습니까. 왜, 서울 같은 데 계시잖고 이 멀리까지………"
"여북 했으믄 예까지 왔갔어요, 서울엔 교회 천지고, 그것도 다 끼리끼리 해먹고 말아요."
또 말허리를 자른 황순직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끼리끼리 해먹는다는 그의 한마디에서 월남한 교파들간의 난맥상과 기존교회들과의 갈등 같은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46년과 7년, 2년 동안 무슨 유행처럼 일어났던 교회 짓기는 바로 월남한 목사들의 터잡기였다. 그에 따른 미군정과의 은밀한 관계에 대해서 사회적 의혹과 비판이 생겨났다. 사실 군정은 월남한 목사들을 상대로 일본 대종교의 회당들을 넘겨주는 특혜를 베풀었던 것이다. 월남한 기독교인들은 낯선 땅에서 안착이 급선무였고, 미군정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공산주의에 필연적이고도 원색적 증오심을 가진 장래성이 확실한 조직세력이었다. 상호간의 필요에 의해 주고받은 밀월관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서북청년단이 그랬던 것처럼, 서민영은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성직노동을 통한 단계적 안정을 꾀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쉽게 타협해 스스로 정치올가미를 쓰는 것을 걱정하고 우려해 왔었다. 미군정과의 그런 관계는 물론 월남 기독교인한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서민영은 이 땅의 기독교 장래를 우려하며 김교신 선생을 생각했고,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절감했으며, 그럴 때마다 '한 알의 밀알'의 가르침을 곱씹으며 농장 일에 파묻혀 들고는 했다.
"알겠습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에 잠겨 있던 황순직이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 점심이나 잡숫고 가셔야죠. 밥 때가 됐습니다."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아닙니다. 또 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황순직은 거칠게 마루를 내려갔다.
"글쎄, 밥 때에 그냥 가시면 됩니까." 서민영은 다급하게 뒤따랐다.
"전 지금 밥 먹는 게 중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황순직이 돌아서며 말했다. 서민영의 눈앞에는 노기 찬 한 중년 사내의 얼굴이 드러나 있었다.
"알겠습니다." 서민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루를 내려섰다.
"괜히 실례했습니다. 가보겠습니다."
"예, 편히 가십시오."
서민영은 황토 길을 따라 멀어져 가는 황순직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멀어질수록 서민영의 가슴에는 까닭모를 슬픔이 차올라 왔다.
주여………… 서민영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김복동과 마삼수는 고흥 경찰에 결박당해 심재모에게로 넘겨졌다.
내려치는 삽날에 찍혀 어깻죽지에서부터 등줄기까지 사선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서운상은 정신을 잃은 상태로 피를 흘리며 자애병원으로 옮겨졌다. 응급처치로 지혈을 한 전 원장은 환자를 순천도립병원으로 옮기게 했다. 척추에 이상이 있을지 모르니 정밀검사를 받아야 하다는 것이었다. 머슴이 입은 상처도 경상이 아니었다. 살점이 너덜거릴 만큼 외상을 입은 데다, 뼈가 부러졌던 것이다. 그도 외상만 치료받았을 뿐 골절치료를 위해서는 순천으로 넘어가야 했다
머슴은 순천으로 떠나기 전에 대충 조사를 받았는데, 삽을 휘두른 것은 강동기요, 두 사람은 그에 합세했다고 사건 진술을 해버렸다. 그 진술에 따라 두 사람은 흉기난행 폭행공범이 되어 꼼짝없이 유치장에 갇히게 되었다.
너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자신들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자신들이 뒤쫓아가 동기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서운상은 죽고 말았을 거라며 두 사람은 사실대로 부르짖었지만 그들의 말은 통하지 않았다. 서운상을 찾아간 목적이 동일한데다가, 유일한 목격자인 머슴의 증언이 그랬으므로 두 사람의 주장이 받아들어질 리 없었다.
일단락된 것으로 알았던 정 사장 사건이 사람을 옮겨가면서까지 그렇게 확대된 것을 조사를 통해서 알고 난 심재모의 놀라움은 컸다. 그리고 그는 지주와 소작인의 그 끈질긴 관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주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소작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도 그건 결국 먹고산다는 문제였다. 지주는 배불리 먹고살겠다는 욕심이었고, 소작인은 최소한 배는 채워야겠다는 집념이었다. 그 줄다리기에서 목숨을 내건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심재모는 두 피해자가 입은 상처를 처음 보는 순간 자신의 몸 그 부분에 차가운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상처에서 끼쳐온 것은 살의였다. 죽이기로 작정을 하지 않고서야 사람의 몸에 그런 끔찍한 상처를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서운상의 상처에서 그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등을 그렇게 깊이 파고든 삽날이 머리에 떨어졌더라면 그가 즉사하고 말았을 것은 보나마나 한 일이었다.
더욱 배가 부르고 싶은 싸움과 굶어죽지 않으려는 싸움,
그 싸움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말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며 심재모의 마음은 착잡하게 가라앉아갔다.
바로 그날 밤부터 강동기의 집 주위에 경찰을 잠복시켰지만 이틀이 지나도록 범인의 행방은 감감했다.
범인을 잡지 못하고서는 다른 두 사람도 어떻게 조처할 수가 없었다. 머슴은 그들이 합세했다고 진술했지만 그것이 갖는 증언으로서의 타당성이 문제였다. 머슴은 서운상의 한 식구나 마찬가지 조건에서 피해까지 입은 입장인데다가 당사자들은 합세 사실을 완강하게 부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범인을 제지했기 때문에 서운상의 피해가 그 정도로 그쳤다는 두 사람의 주장은 타당성을 인정할 만한 심증을 갖게 했다.
그 사건이 터지고 보니 김범우가 부탁한 노인의 문제는 자연히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탐문수사를 벌이게도 했지만 범인을 목격한 사람조차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병원에서 온 연락은 심재모를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서운상이 척추를 상해 대수술을 받았는데 계속 혼수상태이고 의식이 깨어난다 하더라도 완치가 될 것인지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완치 여부의 불확실함은, 척추의 이상이 뇌에 영향을 미치는 혼수상태가 계속되거나, 깨어나더라도 전신마비나 반신불수가 될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다.
나무꾼 차림으로 석거리재를 넘은 하대치는 쌍암 장터가 멀지 않은 조계산 자락에 이르러 지게를 받쳤다. 우선 바지춤을 까내리고 오줌부터 누었다. 오줌발이 뻗어나가기 시작하자 그의 눈꺼풀은 사르르 잠겨 내렸다. 배설의 쾌감을 감지하는 말초신경의 반응이었다.
"어어 참 쎤타!"
하대치는 온몸을 푸드들 떨어 진저리를 치며 흡족감이 넘치는 소리를 토했다.
닌장맞을, 혁명이고 해방이고 요리 오짐누고 똥누대끼 쎤허게 되야뿔먼 을매나 좋아뿌까이.
하대치는 바지춤을 끌어올리며 생각했다.
그는 허리끈을 단단히 동여매며 주위를 두리번거려 살폈다. 산이 깊어 나무감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그러나 이제 솔가리나무는 쓸모가 없었다. 그 대신 솔가지나무를 하면 되었다. 솔가리는 겨울을 나면서 진기가 거의 빠져버려 불땀이 없이 아궁이에 재만 채웠다. 그러나 큰 나무에 붙어 저절로 죽어버린 솔가지들은 겨우 내내 잘 말라서 솔가지나무 하기는 제철이었다.
해를 힐끗 올려다본 하대치는 양쪽 손바닥에 침을 튀겨 맞비볐다. 한바탕 나무를 할 작정이었다. 장터댁으로 돌아가자면 위장을 위해서나 장터댁을 위해서나 나뭇짐이 나뭇짐다워야 했다.
첫 번째 나뭇가지를 툭 꺾으며 하대치는 코웃음을 흘렸다. 대장 염상진이 생각나서였다. 선(線)을 대러 가는 길에 장터댁을 한번 만났으면 한다고 말하자 염 대장은 그윽이 쳐다보고 웃으며 "정들었소?" 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 쳐다보는 눈길이나 웃음이 반은 농이었고, 반은 의심이라고 느껴졌다. 서운한 생각이 왈칵 치밀었다.
"나가 미쳤간디라? 대장님 따라댕김서 허는 일이 워디 색질입디여? 그라고, 대장님이 은제 색질허라고 갤찼는게라?"
자신도 모르게 열이 오르고 있었다.
"하 동무 맘 다알고 있소."
염 대장이 부드럽게 웃었다.
"장터댁얼 한분 찾아볼라고 허는 거슨, 우리 사업얼 지성으로 도와준 것도 고맙고, 지가 으쩌다 봉께 홀압씨라고 혀부렀는디, 고 창아리 옶는 예펜네가 고것 믿고 한정웂이 목 닐이고 있으먼 지가 사람 못헐 일 시키는 것이고, 그차저차혀서 고마운 것 표식허고, 이사허는 것맨치로 혀서 끝막음도 깨끔허니 허고 헐란 것이었제라.”
"그거 좋은 생각이오. 그리 하시오."
염 대장은 어깨를 잡아 흔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대치는 육자배기 가락을 흥얼거리며 마른 가지를 꺾어나갔다. 아직 햇발이 넉넉하게 남은데다가 나무가 많아 서두를 것이 없었다.
오늘은 장터댁을 만나고, 선은 내일 대도록 되어 있었다. 하대치는 선 요원 노릇 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만족스럽고 떳떳한 일로 생각했다. 선 요원 노릇은 위험하고도 힘이 들었다. 언제나 감시의 눈을 피해야 하고, 혼자서 산을 타야 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었다. 눈치 빠르고 몸이 날래야 하는 것에 앞서 당성이 강하고 혁명의식이 투철해야 했다.
염 대장은 선 요원을 '혁명전사 중의 전사'라고 말하며 자신에게 그 임무를 맡겼던 것이다. 그건 영광이었고 기쁨이었다. 보람이고 힘이었다.
실한 솔가지 나뭇짐을 지고 하대치가 쌍암 장터로 들어섰을 때는 사방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하대치는 지게를 받히기 전에 국밥집 안의 동정부터 살폈다. 장날 저녁이 아니라서 그런지 손님 있는 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게를 진 채로 문을 옆으로 밀었다.
"어여 오씨………" 여자의 목소리가 여기서 끊기는 듯하다가,
"음마아! 요것이 누구다요."
장터댁은 두 팔을 뿌리듯 허공을 치며 반가운 소리를 내질렀다.
"위따, 춘향이 이도령 보디끼 허네이."
하대치는 심드렁하게 말하고 서 있었다.
"반갑기로 치자먼야 고것으로 모지래고, 죽었다가 되살아난 심청이가 봉사 아부지 새시로 만난 것만 허요. 근디, 나뭇짐 안 부리고 워째 그러고 섯소. 워디 딴 국밥집 새로 맹글었소?"
장터댁이 화기 도는 얼굴로 눈을 흘겼다.
"하먼, 자네보담 이쁘고 찰방진 여자가 쩌짝에 있데."
하대치는 서너 발짝 옆걸음질을 쳐 지게를 벗었다.
"고년이 워떤 년인지 대갱이에 머리크락 싹 다 잡아띧겨 중놈 상호 되고 잡은개비요. 얼렁 들오씨요, 국밥 맛나게 몰 거싱께."
하대치는 지게작대기를 받치며, 다시 오기를 백번 잘했다 싶은 생각을 했다.
일은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어야 했다. 그녀가 옷짓는 일을 말끔하게 끝내자 마음먹었던 수고비를 내밀었는데 그녀는 한사코 받으려 하지 않았다. 욱대기다시피 해서 돈을 쥐여주고 돌아서서도 돈을 마다하는 그녀의 마음이 끈이 되어 따라오고 있었다. 그건 밥장사를 하는 마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돈을 벌기 위해 옷짓는 일을 맡았다고 해도 고마울 판인데, 그녀는 돈을 상관하지 않는 마음으로 일을 해낸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국밥집 하면서 임도 보고 뽕도 따고 하는 계산속으로 잠자리를 폈을 그녀가 잠자리가 거듭되면서 임만 보아도 좋다는 쪽으로 마음이 변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신분을 감추려고 홀아비니 뭐니 해가며 밑자락을 깐 탓이었다.
"장시 잘해갖고 이문 톡톡허니 냉케오씨요이."
옷짐을 지고 돌아설 때 흡사 남편에게 하듯 한 그녀의 말이 날이 갈수록 마음에 죄로 걸렸다. 그 옷을 혁명전사들이 입게 될 것은 그녀가 끝까지 모르는 것이 오히려 그녀에게 좋은 일이지만, 그녀가 자신을 턱없이 기다리게 만들어놓고 소식을 끊어버리는 것은 사람을 이용만 해먹고 똥 치운 막대기 내던지듯 하는 사람 같지 않은 짓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우리는 인민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순결한 전사다………
그 순결을 더럽히는 것만 같은 찜찜함이 계속 남아 있었다.
장터댁은 엄연한 인민의 한 사람이었고, 더구나 혁명 사업을 도운 장한 인민이었다. 뒷마무리를 깨끗하게 하여 그녀의 마음에서 기다림을 없애주고, 자신도 찜찜함이 없는 순결한 전사이고 싶었다. 염 대장은 그런 자신의 마음을 다 헤아리는 것 같았다. 어깨를 잡고 흔들던 것이며, 고개를 끄덕이던 것이 그렇게 느껴졌다.
"머 허고 기시오, 국밥 다 몰았는디."
"어이 들어가는 참이시."
하대치는 생각을 털며 돌아섰다.
"워찌 그리 함흥차삽디여?"
장터댁이 술 바가지를 들고 뒤따르며 말했다. 그 말을 할 만큼 수 십 날이 지나갔음을 하대치 자신이 먼저 알고 있었다.
"워쩌다 봉께로 그리 되야부렀네."
하대치는 등받이 없는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옷장시 해갖고 돈벌어 거그서 새 장개 들어뿐 줄 알았소."
마주보고 앉은 장터댁이 바가지의 술을 잔에 따르며 하대치를 진득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나도 글 되길 바랬는디 뜻대로 안되야뿌렀네."
하대치는 해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씨엉쿠(시원하고) 잘되야 뿌렀소" 장터댁은 오기를 지르듯 말하고는,
"근대, 무신 일이 있기는 있었는갑소이. 신색이 전만 못헌디다가 기색도 워째 구름찐 것맹키로 쌔코롬헌디, 장시가 밑갔읍디여?"
장터댁은 무언가를 알아내려는 눈빛을 하대치의 눈치를 살폈다.
하대치는 마음먹은 말을 꺼낼까말까 망설였다. 만나자마자 마지막 걸음을 하러 왔다는 말을 꺼내자니 너무 야박한 것 같고, 장터댁이 깔고 있는 말자리는 그 말을 꺼내기에 안성마춤이고 그랬다.
하대치는 술사발을 쭈욱 기울였다. 어차피 해야 할 말이고, 일부러 걸음한 것도 그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하대치는 손바닥으로 야무지게 훔친 입술을 되짚어 손등으로 훔쳤다.
"장시고 머시고, 나가 오늘로 장터댁얼 끝보기럴 혀얄랑가비네."
"머시라고라?"
장터댁은 엉덩이를 벌떡 들었다가 놓았다. 그 바람에 의자가 신음소리를 냈다.
"와따 걸상 뿌시러져뿔겄네."
"음마, 태평시런거. 궁뎅이는 성허고라?"
"자네 궁뎅이야 실헌께."
"사람 간 떨어지게 혀놓고 무신 싱건 소리 허고 앉었소. 시방. 고것이 무신 소리다요?"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터댁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감돌고 있던 화기는 간 곳이 없고 놀란 기색만 드러나 있었다.
"나가 벌교로 이사럴 가야 허게 생겼네. 근디, 나 따땃허게 대해주고, 일 지성으로 챙게준 자네럴 안 보고 뜰 수가 있어야제."
"참말로, 정들라 헝께 이별인갑소이."
장터댁이 고개를 푹 떨구었다.
하대치는 또, 찾아오기를 잘했다 생각했다.
"으짤 수가 있겄소. 사람찌리 만내고 멀어지고 허는 것이야 서운헌 일임스로도 서운해 허덜 말어야 헐 일이제라. 나가 암것도 헌 일이 웂는디 요리 찾아온 맴이 하여튼지간에 아즘찬이요, 국물 다 식는디 싸게 드시씨요."
장터댁이 코를 들이마시며 국밥그릇을 하대치 앞으로 조금 밀었다. 그는 비로소 국밥에 꽂힌 숟가락을 잡았다.
그날 밤 그녀는 미친 듯이 하대치를 탐하고 들었다. 그녀는 몸이 불붙어 타오를 때마다 신들린 무당처럼 온갖 소리를 토해내고는 했다.
"가지 말어. 가지럴 말어. 갈라먼 날 딜꼬 가, 딜꼬 가아, 워메 요래 놓고, 워메, 요래 놓고………"
"워메, 워메, 나넌 따라갈라네, 천리만리 따라갈라네. 워따, 워따, 혼자서는 못 살것다, 기엉코 따라갈라네, 못 오게 혀도 죽어도 따라갈라네. 요리 미치게 혀놓고 워째 가, 워째가."
"나가 믹에 살링랑께 항군에 살어. 가덜 말고 항군에 살어. 워야 죽겄다. 워야 못 살겄다. 나가 믹어 살릴랑께."
"아이고 웬수야. 아이고메 이 웬수야, 그리 허망허니 가뿔람사 요리 달지나 말아야제, 요리 담스로, 요리 꼬심스로 가기넌 워딜 가. 워메메 나 죽겄다. 워메메 미치겄다. 날 두고 갈라먼 쓰고 맵고 짜와야제, 요리 달고 꼬셔뿔먼 난 워쩐디야, 난 워쩐디야, 요 무정헌 웬수야."
그리 정신이 없다가도 화합이 끝나면 그녀는 하대치가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는 했다.
"심청이가 닭아 닭아 울지럴 마라 혔던 맴얼 인자사 알아묵을 것 겉으요."
"나넌 평상 거그럴 안 잊어뿔 것 같은디 거그넌 나럴 돌아슴스로 잊어뿔겠제라?"
"사람 맴이란 것이 요상시러븐 것잉개비요. 전에넌 그냥저냥 그랬는디, 영영 못 볼 것이다 싶은께로 옶던 맴이 도지고 그러요."
"나넌 여그서 말뚝박고 살 것잉께 무신 일로 여그 가차이 오고 허먼 꼭 찾아오씨요이."
그녀가 정신없이 한 말이든, 정신을 차리고 한 말이든 간에 하대치는 그저 "그려, 그려" 하고 대꾸했다. 그 대꾸가 자신의 말에 맞든 안 맞든 그녀도 탓하지 않았다.
먼데서 장닭의 목청 뽑는 소리가 길게 들려오기 시작하고, 창호지문에 새벽빛이 젖어들었다.
"와따 인자 코에서 피냄새가 나네."
하대치가 머리를 짤짤 흔들었다.
"고상혔소, 잠 한심 지대로 못 잠시로, 이년 띠놓고 가는 죄 딲음 톡톡허니 헌 심이요. 이년 가심 씨언허게 맹글어놓고 간께 고맙기는 헌디, 너무 심빼게 혀서 미안시려 워쩔께라. 인자 이년이라먼 씬물이 나겄소."
장터댁은 하대치의 겨드랑이를 파고들며 콧소리를 냈다.
"아니시, 아니시, 자네 시언허게 되앗으면 좋제. 자네가 시언허당께 나 가심도 씨언허시. 암시랑 않네. 암시랑토 안혀………"
하대치는 선을 댈 것이 오늘 해질녘이라는 것을 되짚으며 밀려오는 잠의 파도에 휩쓸려들었다.
김범우와 손승호는 술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둘이서 심재모를 찾아갔다가 돌아온 뒤로 며칠이 지나도 심재모한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손승호는 몇 번이나 김범우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그만두고는 했다. 가부간 무슨 연락을 받고서도 무심하게 있을 김범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 있는 참에 학부모가 다시 찾아 왔다.
"기둘리다 기둘리다 애가 보타서 또 왔구만이라. 그 여드레가 워쩌크름 그리 질든지…… 성가시럽게 해싸서 참말로 미안시럽구만이라. 선상님."
노인네의 말을 듣고서야 여드레가 지난 줄 알게 되었다. 그 여드레가 노인네한테 얼마나 지루하고 초조한 시간이었을 것인가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노인네를 보내놓고 바로 김범우에게 전화를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응, 내가 진작 알아봤었네. 무슨 사건이 터져 심재모 그 사람 거기 매달리느라고 좀 복잡하데. 자네, 오늘 시간이 어떤가. 술도 한잔 해야니까. 만나서 자세한 얘길 하세."
겸사겸사로 술자리를 만들게 되었다.
"아직도 범인은 잡히지 않고, 피해자는 생명이 위독한 상태고 좀 시간 여율 달라는 거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런데, 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있었네."
"당연하잖은가. 옆에서 총소리나 울려대면 모를까, 자네야 저 밑바닥만 내려다보고 정신을 팔고 앉았으니 읍내가 시끄러운 소문도 귀에 들어올 리가 있나."
"밑바닥………" 손승호는 되뇌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찔러왔다.
"왜, 그 말이 싫은가?"
"아니야, 뭐랄까……… 내 맘을 꼬집힌 생각이 들어서."
"아픈가?" 김범우가 빙그레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글쎄, 아프다기보담은 …………. 쓰라리군."
"쓰라려 하지 말게, 다급하게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보단 깊이 생각해보자는 태도가 더 옳을지도 모르니까."
"그나저나, 그 폭력사건도 단순한 무제가 아니로군."
손승호는 화제가 자신 문제로 향하는 것이 싫어서 말머리를 돌렸다.
김범우는 그런 손승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술잔을 건넸다.
"그건 피할 도리가 없는 상황사건 아니겠나. 반민특위가 활동을 개시하면서 묻혀 있던 농지개혁법안 상정도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지 않았나. 반민법이 국회를 통과해서 실질적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는 건 농지개혁법도 언젠가는 통과된다는 의미네. 두 법안이 통과되는 정치적 사회적 의미는 따로 얘기할 문제고, 농지개혁법이 통과될 거라는 전제 아래 지주들이 자기네한테 끼칠 손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온갖 수단방법을 다 동원할 판인데, 그리되면 소작인들과 정면충돌은 불가피하게 되고, 앞으로 그런 사건은 속출하게 돼 있네."
"그렇겠지, 인간의 역사란 경제구조의 모순을 척결하기 위한 피나는 싸움의 연속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된 상황이군."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손승호가 술잔을 들었다.
"맞는 말이지. 경제란 결국 생존이란 뜻이니까. 정치라는 것도 경제구조를 어떻게 합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운용할 것인가 하는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직 아니겠나. 권력은 그 운용과정에서 생겨난 파생물이고, 모든 정치적인 종말을 고하게 된 건 그 파생물인 권력을 과신하거나 남용하는 가치전도의 결과고 말야."
"그런데 우리 앞엔 시작부터 그 순서가 뒤바뀐 정권이 버티고 있으니 문제 아닌가."
"그러니까 삽으로 사람을 찍는 사태가 벌어질 수밖에. 그게 이놈의 정권이 억지춘향이고 사상누각이란 증거 아닌가. 참, 자네 혹시 해방직후 대표적인 정객들이 내세운 정치관을 비교해본 적이 있는가?"
"글쎄에, 어떤 식으로 말인가?"
"응, 해방이 되자마자 새 나라 건설을 전제로 제각기 내놓은 그 사람들의 정치설계를 비교대조해 보는 거지. 해보면 현 정권의 문제점이 환하게 드러나네. 해방 직후에서도 나 잘났다는 정객들이야 부지기수였지만, 그 조직이나 세력으로 보아 네 사람으로 좁힐 수 있잖겠나. 건준을 대표하는 여운형, 임정을 대표하는 김구, 한민당과 손잡은 이승만, 공산당의 박헌영, 그렇겠지? 그런데 해방이 되자마자 김구는 중국 땅 중경에서 여운형과 박헌영은 각각 서울에서 건국강령이라든가 또 다른 이름으로 정치설계를 공개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말이네, 세 사람이 제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판단으로 작성한 그것들이 기막힌 일치점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네. 세 사람 모두 토지개혁 단행과 친일파나 민족반역자 처단을 내세운 것이 그것인데, 그것도 각각 열 가지 정도씩이나 되는 항목 중에서 그 두 가지를 맨 앞으로 내세워 첫 번째. 두 번째 항목으로 잡은 것까지 똑같아. 공통점은 그것뿐만이 아니네. 그 두 가지를 실행하려는 방법까지 똑같네.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로 하고, 친일파나 민족반역자들은 엄중 처단하여 일체의 정치참여를 못하게 한다는 것 말일세. 물론 어느 사람은 거기다가 더 강경하게, 평생 동안 투표권도 박탈하겠다고 했지. 그 세 사람의 정치의식이 뛰어나서 그런 일치를 보인 게 아니고 그 두 가지 문젤 해결하지 않고선 정치가로서 대중들에게 지지나 인정을 받을 수 없게끔 현실상황은 분명했던 거지. 그런데 말야 그런 확실하고 분명한 정치태도를 표명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바로 이승만이야. 그 무정견한 약삭빠른 기회주의가 미군정과 한민당에 이중으로 업혀 결국 정권을 탈취하게 되었으니,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 영감탱이야말로 가짜 중에 가짜지."
손승호는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는 빈 잔을 잠시 들여다보고 있다가,
"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네. 내가 거기서 등을 돌린 건 그와 반대로 자본주의를 선택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더군다나 무조건적인 반공주의에 협력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결국 상황이 이따위로 획일화되고 말았으니, 결과는 그 꼴을 면할 수 없게 되었거든, 이 직장에 계속 붙어있으면 앞으로는 더욱더 의무화된 강요를 받아 반공교육을 시키며 적극적인 협력자로 타락해갈 거고, 내가 설 자리가 없어. 최소한 날 지키고, 강요당하는 억지의 삶을 살지 않는 방법은………. 우선 이 직장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네."
그는 침통하게 말했다. 김범우는 손승호를 한동안 건너다보기만 했다.
그 갑작스러운 말이 김범우에게는 전혀 갑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말은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손승호가 오랜 시간에 걸쳐 고민해온 그대로의 표현이리라 싶었던 것이다.
그가 교직을 떠나려 하는 것은 생계 이전의 의식의 문제였고 사회주의 자체가 아니라 혁명 방법론에 회의를 느껴 등을 돌린 그로서는 반대 이데올로기에 강제로 종사해야 하는 직장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인지도 몰랐다.
그가 교직을 버린다는 것은 현 체제에 종사하는 모든 직장에 대한 거부를 의미했다. 현 체제 속에서 현 체제에 전혀 종사하지 않고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거기서부터 손승호는 새로운 고민을 하게 될 것 같았다. 생각이 깊은 손승호는 어쩌면 이미 그 방법을 찾아내놓고 직장을 버릴 마음을 먹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굳이 묻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생계 해결이라는 문제와 구분될 수만 있다면 그게 좋은 방법인지도 모르지. 앞으로의 교육은 자넨 물론이고, 의식면에서 평범한 교사들도 견디기 어려울 만큼 반공체제로 개편될 테니까. 그건,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스스로는 대통령이 아닌 국부로 추앙받기를 원하는 시대착오적인 봉건주의자 이승만이 가장 중대하게 생각하는 정책이니까."
손승호는 쓰디쓰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릴 뿐 더 말이 없었다.
바깥 술청에서 술기운으로 뽑아 늘이는, 가으네 가으네 나넌 가으네에에 이모으을 두이고 나너언 가으네에에, 하는 잡가 소리가 컬컬하면서도 구성지게 들려왔다.
"꾸척시러운 소리네만, 자넨 어째서 그 사상을 포기한 건가?"
손승호가 김범우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 눈에는 술기운이 어지간히 젖어 있었다.
"사람 싱겁기는, 꾸척시런 소린지 암시로 머 헐라고 꾸척시럽게 고런 말 묻고 그런가."
김범우는 손승호의 '꾸치시럽다'는 말을 받아 있는 대로 사투리를 쓰며 웃었다.
"금메 말이시, 꾸척시럽단 것 암스로도 자네가 서울로 뜬다니께 그런지, 맘이 요상허기 비는 것도 같고, 고것을 알고 잡아진단 말이시. 술 묵은 짐에 그 이약이나 털어놓고 가소."
손승호의 얼굴은 어떤 간절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려, 자네가 원허먼 평생 생각허고 싶지 않았던 이약이지만 술기운 빌레 해야지 어쩌겄는가."
"그리 허소. 술안주 삼아 듣세."
손승호가 듣기를 원하는, 행동의 계기가 명료하게 밝혀질 수 있도록 김범우는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간추릴 필요를 느꼈다. 김범우는 물론 탈영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군부대에서 미국으로 옮겨지기까지의 그 복잡한 과정을 몇 마디로 요약했고, 그 혹독하던 OSS훈련 과정은 아예 생략해버렸다. 그렇지만 이야기하는 목적에 필요한 대목은 가능한 한 자세하게 말을 했다.
"………그런 마음이 완전히 굳어진 건 거기서 하와이 포로수용소로 옮겨져 4개월을 갇혀 사는 동안이었지."
박두병과 함께 샌프란시스코를 떠난 김범우는 배에 실려 하와이로 이송되었다.
OSS 예비첩보원으로서 미국으로 갈 때는 물론이고 국내 이동에서도 비행기만 태우던 것에 비하면 이제 포로일 뿐인 자들을 배에 태운 것은 미국인의 합리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제대로 어울리는 처사였다.
두 사람이 배에서 내려 실려간 곳이 하와이 포로수용소였다. 그들이 반나절 가까이 대기실에 죽치고 앉았다가 만난 것이 수용소 소장이었다. 붉은 머리칼의 대령은 기분 나쁜 눈초리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우리 미합중국은 두 분에게 특별히 독방을 제공하도록 결정했습니다."
소장은 어떠냐는 듯 입가에 묘한 웃음을 그려냈다.
"사양하겠습니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터져 나온 말이었다.
"아니, 무슨 말입니까!" 소장은 휘둥그렇게 눈을 떴다.
"그따위 호의 우린 필요 없소."
박두병이 대꾸하고는, "미친 새끼들"하며 우리말로 중얼거렸다.
"이건 미합중국 정부가 결정한 사항입니다."
소장은 가슴을 펴 보이며 엄한 얼굴로 말했다.
"호의를 명령처럼 말하지 마십쇼. 호의는 주는 쪽의 권리가 아니라 받는 쪽의 자윱니다. 우리가 어차피 포로 취급을 받을 바엔 일반 포로들과 똑같이 지내겠소."
김범우의 말이었다.
소장은 난감한 얼굴로 붉은 머리칼을 두어 번 쓸어 넘겼다. 그 빠른 손놀림에 신경질이 묻어났다.
"좋소, 뜻대로 하시오."
소장은 내뱉았고, 두 사람은 형식적인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두 분, 개죽음 면한 걸 축하합니다."
비서실로 나오자 대뜸 들려온 뚜렷한 우리말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는 한 여자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아이고 이런, 조선사람 아닌가!" 박두병이 화들짝 반가워하며 여자의 손을 잡았고,
"그게 무슨 소리요?" 김범우는 차례가 온 여자의 손을 잡으며 마땅찮은 기분으로 물었다.
"기분 나쁘라고 한말은 아니니 오핸 마세요. 조국 독립에 기여하고자 OSS 요원을 자청한 두 분의 순수한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 너무 감동적이기까지 해요. 그러나 두 분의 그런 뜻은 결국 묵살되고, 두 분은 미국의 전과만 올려주는 소모품으로 사용될 뻔했으니까 하는 말예요."
"좀 심각한 말 같군요."
김범우가 여자의 까만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여자가 생긋 웃으며 다음 말을 했다.
"독방 사용을 거절하지 않았더라면 끝까지 알은 체하지 않았을 거예요. 대신, 개 같은 것들이라고 욕을 해댔겠죠. 근대, 소장이 화가 나서 한 가지 빼먹은 게 있어요. 수용소 안에서의 행동은 자유예요. 이건 받아들이도록 하세요. 치사한 특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예요."
"그럽시다. 그럼."
박두병이 말하며 김범우를 보았고, 김범우도 고개를 끄떡였다.
"그럼 여기다 싸인하세요. 앞으론 이곳도 출입 자유예요."
여자는 종이를 내밀며 환하게 웃었다.
"그 여자 그거 보통내기가 아닐세. 미국놈 밥 먹으면서 철저한 반미 아닌가."
대기실로 가며 박두병이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필시 하와이 교포 2셀 텐데 우리 비슷한 꼴을 수없이 당한 게지."
김범우는 예측하고 있었다. 김범우의 예측 그대로였다.
그 여자의 성은 도씨였고, 미국식 이름은 흔해빠진 메리였고, 그 이름이 싫어서 스스로 지은 조선식 이름은 장난스럽게도 라지여서 성까지 합해놓으면 '도라지'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을 심층으로부터 혐오하며 조국을 그리워하고 있는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되자 그 이름이 장난스럽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진지하게 지어진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어머니가 끝도 없이 흥얼거리는 도라지 노랠 들으며 자랐어요. 거 있잖아요, 도오라아지 도라아지이 백도오라아지이 시이임신사안천에 백도오라아지이, 하는 노래 말예요. 우리 부모님은 그 노랠 부르며 고향을 그리워하고, 가지 못하는 마음을 달래곤 한 거죠. 그래서 저도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요."
그녀는 군속이었다. 사회학을 전공했는데, 3학년에서 공부를 중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공부를 할수록 미국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감만 커져 더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음이 그 이유였다.
그녀는 해방을 맞은 조국의 장래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녀는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특히 미국이 제안하고 있는 신탁통치에 대해서는 그 비판의 열도가 불같이 뜨거웠다.
"미국은 인디언을 무차별로 죽이고, 흑인을 노예로 짓밟은 식으로 약소국들을 먹어치워 세계의 제왕이 되려 하고 있어요. 신탁통치란 게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인데. 교활하게도 소련. 영국. 중국을 동원해서 그 침략성을 위장하고 합법성을 가장하고 있어요. 루스벨트가 신탁통치 기간을 30년으로 잡은 그 음흉한 저의가 뭐겠어요. 일본 식민지의 재식민지화예요. 조선 사람은 뭉쳐야 해요. 뭉쳐 미소를 몰아내야 해요. 스테이트(state, 주)가 아니라 내이숀(nation, 국가)이 먼저예요. 민족이 단합하지 않으면 이 위기는 해결할 수 없어요."
그녀는 일과를 끝내고 늦게까지 두 사람과 토론에 열중하고는 했다. 조선 문제가 언급된 신문이나 잡지는 꼭꼭 구해다 주기도 했다.
"이건 한번 읽어둘 만한 책일 거예요. 읽고 나서 얘기하도록 해요."
그녀가 내민 두툼한 두께의 책에는 Red star over China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중국의 붉은 별이라. 구미가 당기는군." 박두병이 먼저 책을 집어 들었다.
그 책은 에드가 스노우란 기자가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주덕. 주은래. 임표. 팽덕회 등 중국공산당 주요 인물들과 만나 깊이 있는 인터뷰를 시도하여 그들의 사상과 투쟁 및 인물 됨됨이를 기록하고 공산당 지역을 구석구석 돌아보면서 그 조직체계. 교육방법. 인간관계. 질서유지 등을 다각적이고 심층적으로 취재한 내용이었다. 그건 공산당 결성으로부터 홍군의 대장정을 거쳐, 홍군이 팔로군으로 변신하기까지의 초기 중국공산당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책이었다.
"제가 왜 그 책을 권한 것 같애요." 도라지는 의미 깊게 웃고 있었다.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민족의식을 확고하게 가졌던 모택동과 그 노선에 발맞춘 사람들 때문이 아닌가 싶소."
김범우는 미리 정리한 생각을 말했다.
"내 생각도 그렇소. ‘우리가 공산혁명을 하고 있는 것은 중국을 소련에 넘겨주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스노우에게 한 모택동의 말이 제일 인상적이었소. 그리고, 코민테른이 1차 시도에 실패하고 2차로 주은래에게 코민테른화의 주도권 장악을 지시했는데 그 사실 자체를 모택동에게 알려버린 주은래의 태도가 그 다음으로 인상적이었소."
박두병이 진지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렇게 제 의도와 꼭 들어맞는지 모르겠네요.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보다 먼저 민족을 내세우는 건 참으로 기막혀요. 그러니 다른 주의도 어째야 할 건지 자명하잖아요."
도리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 모택동, 그 사람 어찌 보면 흠집투성이야. 이혼을 밥먹듯 하고, 대장정을 하며 제일 고통스러웠던 게 담배를 구할 수 없었던 거라는 소리는 예사로 하고, 계집애처럼 예쁜 나비를 잡아 책갈피에 끼우질 않나. 그런데 그런 게 다 흠으로 뵈는 게 아니라 지극히 인간적인 매력으로 느껴진단 말야. 역시 매력 있는 인간이고 가식이 없는 인물이야."
박두병은 혼잣말을 하듯 하고 있었다.
"그걸 선물로 드리겠어요. 미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릴 위해서 그걸로 영어 공부 열심히들 하세요."
도라지는 두 사람이 빌어 썼던 사전에 자신의 이름을 또박또박 써 주었다.
12월 중순에 귀국하는 배를 탔고, 그때 김범우의 의식 속에는 친일반역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이상으로 뭉쳐진 '민족의 우선'이 확고하게 자리잡혀 있었다
그런데 귀국을 하고 보니 미소의 점령에 따른 좌우의 대립은 생각보다 치열한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색채를 조금씩 달리하는 정치조직들끼리의 갈등까지 얽혀져 난맥상을 이루고 있는 속에서 민족은 골 깊게 분열되고 있었다. 우익은 더 말할 것 없었고, 그렇다고 좌익의 편에 설 수도 없었다.
좌익은 역시 역사의 필연성에 있어서나, 민중의 생존성을 창출함에 있어서나 신뢰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상대가 버티고 있는 한 좌익이 지향하는 바는 그 실현성이 희박할 뿐이었다. 좌익이 미군정에 정면대결을 하면 할수록 그들의 목적 실현은 그만큼 강한 힘으로 저지당하고, 그에 따라 민족의 분열은 심화될 뿐이었다.
첫째 민족의 삶, 둘째 이데올로기의 실현을 생각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이데올로기의 실천만을 목표로 성급하게 내딛고 있는 좌익의 방법론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미국이나 소련의 점령 목적이 자기네들에게 유리한 정권을 세우려는 것임이 유리그릇 들여다보듯 자명한 이상 이남이나 이북 그 어디에서든 그들의 뜻과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려고 나서는 것처럼 무모하고 어리석은 일은 없었던 것이다.
민족의 삶을 위해서는 그들의 점령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데올로기의 실현은 그 다음 단계로 추진해도 늦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들이 연합하거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으면 어느 기간 동안 정치색을 은폐하거나 해야 했다.
"자넨 나보다 생각이 더 구체적이고 앞서 있었군 그래. 자네가 왜 백범을 마음에 두는지 좀 더 확실하게 알 것 같군."
손승호가 술기운 도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백범을 전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네. 자기가 곧 임정이고, 임정이 곧 국가라는 비민주적이고 우익적이던 초기의 사고방식 같은 건 용납할 수가 없네. 다만, 민족자주통일을 위해 공산당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고 한 정치태도와, 그런 맥락에서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시도한 대목을 좋아하는 거네. 시기적으로 늦고, 여러 상황이 복잡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나마 그런 노력을 한 것은 남북의 현실정치세력들 중에서 백범이 유일한 분 아닌가. 백범의 그 노력만큼은 성패와 상관없이 분단이 굳어져 갈수록 높이 평가될 게 틀림없네. 자네 생각은 어떤가?"
김범우는 손승호에게 잔을 내밀며 물었다.
"그래, 정면대결로 끝없이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이 벌어지는 걸 보면 자네 말이 맞네. 그리고 민족과 통일을 전제로 한 백범의 그런 뜻은 높이 평가해야지. 그런데 말이네, 앞으로 세상이 어찌 돼갈 것 같은가?"
손승호가 스산한 얼굴로 김범우를 건너다보았다.
"글쎄, 용한 점쟁이인들 그 일을 어찌 맞추겠는가. 그저 현상만 더듬을 뿐이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선 세계제일이라고 자랑하는 미국이 자기들과는 정반대로 막강한 경찰조직으로 보호되는 가장 비민주적인 정권을 세우지 않았나. 그게 좌익과 그에 동조하는 민중들한테 도전을 받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제주도의 투쟁도 계속되고 있고, 여순투쟁도 새로 시작되고 있지 않나. 이승만 정권은 이미 공산당 박멸을 정책으로 내세웠고, 공산당은 이번 여순사건을 계기로 무장 공개투쟁으로 맞서고 있잖은가. 그건 서로가 피할 수도, 양보할 수도 없는 싸움이네. 그 정면대결이 어떤 또 다른 사태를 야기시킬지 그 누구도 전혀 모르는 일 아니겠나?"
"그래, 한치 앞을 제대로 내다볼 수 없는 세상이야. 빌어먹을, 군정 3년은 민중학살의 역사야………"
손승호가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미군은 이번 여순사건으로 철군을 미룰 명분까지 얻었네."
김범우가 중얼거리며 술잔을 들었다.
첫댓글 도메리..도라지
월남한 목사들 그들이 지금도 우리의 사회를 혼란과 맹목적인 신도의 양산을 통해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며 혹세무민을 유도
미래에대한 불안감을 증폭하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뒤따르는 신도들이 가엾기만하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