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로 간 목마
최 재 우
겨울이 갔다.
봄을 맞으러 남쪽 바다로 갔다. 제주도 남쪽 섬 차귀도로 가는 바다에, 슬픈 바위가 있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채 울부짖고 있다. 눈물방울이 발아래 떨어져 부스럭 바위가 되고, 슬픔을 어루만지는 파도는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사랑을 노래하건마는, 먼 바다로 떠나지 못하는 바위는 웅크린 채, 슬픔만을 포효하고 있다. 처음 보았을 때, 울퉁불퉁한 돌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냥 뭍이 가까운 바다에 어지러이 포개진 바위였다.
이상한 일이다. 내 곁에 있던 이들이 뭍으로 올라가고, 나 홀로 섬에 남아있었을 때, 바위는 내게로 와서 슬픈 짐승이 되었다. 머리칼을 휩쓰는 바람이 나를 수십 년 옛날로 데려갔고, 귓전에 맴도는 파도소리에 슬픈 이야기가 실려왔다. 낡은 유성기에 색 바랜 엘피 음반을 올려놓자 들려오는 노래 같은, 슬프지만 아름다운 그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여대생 주희는 갓 일학년 스무살이다. 눈 오는 날, 창경원에 갔다가 회전목마를 태워준 민우라는 노총각을 사랑하게 된다. 주희보다 열 살 나이가 더 많은 민우는 농아학교 교사다. 주희네 식구들 모두가 민우와의 결혼을 반대한다. 주희 아버지는 충격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다. 주희는 민우를 잊기 위해 휴학하고, 절에 들어간다. 민우도 주희와의 사랑을 외면하고, 아니 앳띤 주희의 앞날을 위해 바다가 있는 도시 혜화학원으로 학교를 옮긴다. 잊으려 해도, 잊지 못하던 주희는 어느 날 갑자기 민우를 찾아간다. 민우와 재회한 주희는 바닷가 도시에서 민우와 오붓한 살림을 차린다. 바닷가 언덕에 집이 있었다. 방에 들어가면 바로 한눈에 바다가 내려다보였고, 바다로 향한 길이 바위사이로 뻗어있었다.
주희는 사랑의 씨앗, 아이를 갖는다. 그러나 주희는 한달 빠른 조산(早産)으로 하혈을 많이 하고, 응급 수술을 받다가 그만 숨을 거두고 만다. 핏덩이 아기를 민우 품에 안긴 채.... 민우는 바다로 간다. 예전 주희가 사랑의 정표로 주었던 나무로 깍은 목마를 바닷가 모래사장에 묻는다. 몇 년이 흘러간 어느 날, 민우는 주희와 처음 만났던 창경원을 다시 찾는다. 주희를 꼭 빼닮은 딸에게 회전목마를 태우면서 슬픈 회상에 잠긴다.
바다로 간 목마여 안녕!
한수산의 소설 ‘바다로 간 목마’는 1978년 처음 출간되었다. 그때 당시 베스트셀러였다. 그 무렵 나는,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근처 읍 소재지 여자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나도 그 소설을 읽어보았다. 내 나이 스물일곱살 총각 때였다. 사슴같이 착한 노총각 민우와 깊은 산속 옹달샘을 찾는 토끼 같은 주희의 청순한 사랑이야기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였지만, 결말이 너무도 슬펐다. 내가 그 소설을 읽게 된 데에는 비밀스런 사연이 있다.
고삼 담임이었던 나는 진학지도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학교에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면서 학생들의 야간 자율학습을 지도하였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출근하여보니, 아직 아무도 없는 교무실 내 책상 위에 무언가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색지로 포장된 책이었다. 뜯어보니. ‘바다로 간 목마’ 라는 소설이다. 그런데, 책 어디에도 누가 보낸 것인지 메모도 없고, 또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누가, 왜? 이 소설을 내게 주었을까? 어느 여학생이 갖다놓았을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내가 수업을 들어가는 반마다 누구냐고 공개적으로 물어볼 일도 아니었다. 책을 놓고 간 어느 여학생의 알듯 말듯 한 마음이 오래 마음에 걸렸다. 그 이듬 해 가을, 나는 장가를 들었다.
섬에 혼자 남아, 울부짖는 짐승 모습을 한 바위를 보자니, 그 때 그 소설에 나오는 목마가 바다로 떠나지 못하고, 슬피 우는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때의 여학생 몇몇이 아슴아슴 생각났다. 예전에 보았던 책을 펼쳤더니, 그 속에 오래 전에 끼워 놓았던 꽃잎을 보는, 그런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예순살 남짓 되었을 그 여학생도, 지금 어느 하늘아래에서, 농익은 술처럼, 잘 살아가고 있으리라.
소설 ‘바다로 간 목마’는 처음 이렇게 시작된다.
‘겨울이 갔다. 이제 내 마음에 남아 있을 뿐, 겨울은 어디에도 없다.’
섬에 있는 내 마음에도 긴 겨울이 가고, 이제 추억의 봄이 오고 있었다.
첫댓글 국어 선생님 을 짝사랑하던 그때를 생각나게 하는 글에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