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쓰촨성 대지진
2008년 5월 12일 오후 2시, 중국 쓰촨
성(四川省) 지방에서 발생한 리히터 규모
8.0의 큰 지진을 말한다.미국 지질조사국
에서 처음으로 보도했다.후진타오 주석은 현지에 인민해방군 파병을 지시하였다
사망자 약 69,000명, 부상자 약 374,000
명, 행방불명자 약 18,000명, 재산피해자
누계 약 4,616만명, 붕괴된 가옥 약 216,
000동의 피해를 야기했다
▶2019년 - 경상남도 양산시 통도사
승용차 돌진 사고
▶2016년- 모바일 게임 로드 모바일 출시
▶2015년 젤라빈스크 세계태권도
선수권대회가 개최.
▶2012년 - 광주광역시 산성수듯물 사고,
전염병 아포칼 립스 게임 전염병 주식회사
모바일 버전 출시
▶2008년 중화인민공화국 쓰촨성
청두에서 북서쪽으로 약 90㎞ 떨어진
지역에서 리터 규모 7.9의 대지진이
일어나다.
▶ 2007년 보복폭행 혐의 김승연 한화회장 구속, 수감
아들을 때린 술집 종업원들을 보복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는 한화그룹 김승연(55) 회장이 2007년 5월 12일 새벽 구속, 수감됐다. 재벌 총수가 폭행혐의로 구속된 것은 처음이다.
서울중앙지법은 11일 밤 11시쯤 김 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고, 김 회장은 자정을 넘겨 서울 남대문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다.
김 회장은 지난 3월 8일 자신의 아들과 몸싸움을 했던 서울 북창동 S유흥주점 종업원 4명을 경기도 성남시 청계산 인근 신축 건물 공사장에 감금한 뒤 쇠파이프 등으로 폭행하고, S유흥주점에 찾아가 다른 종업원 2명을 손과 발로 폭행한 혐의다. 김 회장 구속은 사건 발생 64일만이다.
▶ 2001년 여류 문학가 강신재 별세
▶ 199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유혈시위 발생
인도네시아 시위소요사태가 수도 자카르타를 강습, 유혈사태가 벌어지면서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경제 및 물가난에 의해 1998년 1월부터 전국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시위소요상황이 최정점을 향해 급상승한 것이다. 잠시 소강 상태를 보였던 대학생 시위가 1998년 5월 12일 자카르타 트리삭티 대학에서 학생 6명이 사망하면서 성난 파도로 바뀌었다.
시위대들은 이날 수하르토의 하야를 외치며 정면 돌파를 시도하다, 군경이 발사한 플라스틱 탄에 맞아 하나둘씩 흩어졌다. 목격자들은 이 중 2명이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졌다고 밝혔으나, 인근 숨베르 와라스 병원 관계자는 모두 6명이 사망했다고 확인했다. 이번 사태로 대학생과 자카르타 시민 등 수천명은 유혈사태에 흥분, 트리삭티 대학 주변에서 상점과 주유소 은행 경찰차량을 불태우는 등 시위사태가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빠져들었다.
결국 수하르토의 사임 발표로 자카르타 유혈사태는 마무리 됐고, 인도네시아 국민에게 자신들의 민주화 요구가 정당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 1998년 거평그룹 부도
▶ 1997년 LG화학, 차세대 `퀴놀론계 항생제`개발
LG화학이 탁월한 효능을 지닌 차세대 `퀴놀론계 항생제(LB20304a)` 개발에 성공했다. 이 항생제 개발로 1997년 5월 12일 세계적인 다국적 제약회사인 영국 스미스클라인 비참사에 3천7백75만달러(3백40억원)의 기술 수출료와 2000년 상품화 이후 매년 3백억원씩 20년간 총6천억원의 로열티를 조건으로 기술제휴에 관한 계약을 체결했다.
이 항생제는 호흡기와 요로감염증, 피부감염증에 탁월한 효능이 입증됐다. 회사측은 이 신약을 5년간의 연구끝에 개발하여 국제적인 전문 시험용역회사인 영국 코반스사의 비임상 동물실험과 1단계 임상실험을 거쳤다고 밝혔다. LG화학의 신약 개발은 독자 연구개발은 거의 없고 원료를 외국에서 들여와 포장해 파는 국내 제약사들에게 제약시장이 얼마나 큰 성장 가능성이 있는지를 시사했다.
▶1997년 북한주민 2 가족 14명 망명
▶1992년 서울대 규장각,순종황제가
즉위이후 반포된 「재무감독국관제」등
48건 의 칙령 순종 서명이 위조.
▶1992년 정주영 국민당대표, `연말
국민당이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할 경우
재벌 그룹을 해체하겠다'고 발표.
▶1991년 부산과 보스토치니간 한-소
직항로 개설문제가 소련측 극동해운
공사와 한국측 한소해운(주)간에 타결
▶1990년 정부, 호텔 여관 사우나 콘도 등
호화사치성 또는 유흥 오락성 건물의
건축허가를 전면 금지키로 .
▶1990년 권정달 전 민정당 사무총장,
80년 언론인해직문제를 주도했으며
언론통폐합은 허문도씨가 관여, 진술
▶1990년 현대, 대북한 무상공여 위해
중장비와 승용차를 일본으로 반출
▶1990년 청소년 헌장 선포
▶1989년 치안본부, 80년 삼청교육과
관련사망 등 피해신고자 3182명에 대해
피해보상 실사작업에 착수
▶1989년 건설부, 아파트단지 주차장
설치확대방안을 마련, 45평 이상 아파트는
2대의 주차시설 의무화
▶1989년 서울시,용산 美8군 자리에
공원을 조성키로 확정 발표
▶1989년 한ㆍ중 정기화물선 6월 취항
매월2회 부산∼천진 직항로에 운항키로
▶1988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씨를 총재로 재추대
▶1988년 김대중 평민당 총재,광주사태
와관련 '전두환 씨는 광주사태에 깊이
개입돼 있는 사람중의 하나'밝혀
▶1994년 김대중 아ㆍ태평화재단
이사장,북한 김일성 주석이 미국방문을
희망한 만큼 미국정부의 초청을 촉구
▶1987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소속
6개 교단 성직자와 신도 1200명,
4·13조치 철회 요구
▶1987년 국회의장에 이재형씨 재선.
새 부의장에 장성만의원 선출
▶1987년 미국 상원 외교위,
4ㆍ13 조치 재고 결의안 통과
▶1986년 이민우 신민당 총재 방미
(12일간)미국 조야 지도자들과 접촉
▶1986년 멀로니 캐나다수상 내한,
한·캐나다 정상회담
▶1984년 문교부, 국어문법을 85년부터
통일하고 5종류의 고교 문법 교과서를
국정으로 단일화 발표
▶1984년 가출소년 28명 인신매매-
지하실 가두고 혹사-매질
▶1982년 조달청, 미국쌀 37만t 추가
도입계약 체결
▶1981년 공정거래위원회, 시장지배
감시대상 71업체 42품목을 지정
▶1981년 검찰, 우편진술제 실시
▶1970년 한국등반대, 히말라야
추렌히말봉(해발 7430m) 정복
▶1964년 민주ㆍ자민ㆍ국민당 통합 선언
▶1962년 남산 케이블카 개통
1962년 5월 12일 남산의 새 명물로 등장한 남산 케이블카. 이름은 삭도차(索道車-a cable car)였다.
▲ ① 1980년대 당시 남산케이블카.
② 1962년 개통 당시 삭도차로 불리던 남산케이블카.
1962년 5월 12일 서울남산에 우리나라 최초 여객삭도(索道ㆍa cable car)인 남산 케이블카 ‘은하수’와 ‘무지개’가 개통됐다. 남산 케이블카는 이날 개통된 후 쉬지 않고 운행돼 국내 최장수 케이블카로 서울의 명물이 된 지 오래다.
한국삭도공업주식회사가 1961년 9월에 착공해 당시 2억9천여만환(2300만원)을 들여 준공됐다. 남산 케이블카는 그 운행거리가 회현동 승강장에서 남산 꼭대기에 있는 예장동 승강장까지 605m 이며 평균 초속 3.2m로 운행, 편도 운행 시간은 약 3분 정도이다. 지상과의 고저차는 약 138m로 올라가는 것과 본관 승강장을 향해 내려오는 것 두 대가 동시에 운행되며 이 두 대의 케이블카는 중간지점에서 정확히 마주쳐 지나가도록 설계됐다.
케이블카의 수용 정원은 20명으로, 개통 후 이틀 후인 5월 14일 운행을 시작해 오전 10시에서 오후 11시까지 바람이 세게 부는 날(초속 9m이상)을 제외하고 연중무휴로 운행되고 있다. 개통 당시 20인승이던 케이블카는 1984년 38인승, 2008년 48인승으로 커졌다. 또한, 개통 당시 요금은 왕복 400환(대인기준 40원)이었고 2011년 현재 7500원이다.
우리나라 삭도 산업의 선두주자로 제 몫을 해온 남산 케이블카이지만, 지난 2002년 7월 7일 상하행선 2대가 갑자기 멈춰서는 사고가 발생, 60여명의 탑승객들이 지상 40~50m 상공에 매달려 있다 1시간여 만에 구조되기도 했다. 2011년 서울시는 환경 훼손 논란과 수송 능력 저하 등으로 케이블카를 철거하고, '곤돌라 리프트' 설치를 추진했다.
▶1962년 아시아 영화제,
서울에서 개최됨.12일∼16일
▶1956년 텔레비전 방송 개시- 이듬해
6월16일부터 정규 방송 시작-(HLKZ)개국
1956년 5월 12일 한국 최초의 TV방송이
시작됐다.
1956년 5월 12일 오후 7시30분, 우리나라 최초의 TV 방송 전파가 발사됐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15번째, 아시아에서는 필리핀·일본·태국에 이어 4번째 TV방송국 보유국이 됐다. 방송국 이름은 코캐드(KORCAD). 미국 RCA사의 한국 대리점을 맡고 있던 황태영씨가 설립한 방송국이었다. 호출부호는 HLKZ였고 출력은 0.1㎾로 미약했다.
이날 서울 종각 건너편의 RCA 빌딩 3층 스튜디오에서 선보인 첫 시험방송은 궁중 연례악 ‘취타’와 국악 합주곡 ‘수제천’이었다. 민속무용단의 승무와 백설희·현인 등 인기가수가 대거 출연한 쇼프로도 2시간 동안 방송됐다. 화신백화점 앞과 서울역 등에 설치된 TV를 처음 본 시민들은 한결같이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쌀 한 가마니가 1만8000환이던 시절에 14인치 TV 수상기 한 대값이 34만환이나 됐으니 TV 수상기 보급도 기대에 못 미쳤다. 300대뿐이었다. 결국 재정난으로 소유권이 대한방송(DBC)으로 넘어갔지만 이마저도 1959년 2월에 원인 모를 화재로 방송국이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국영방송 KBS가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61년 12월이었다.
▶1951년 국민방위군 설치법 폐지법률
공포-국민 방위군 해체.
▶ 1949년 소련, `베를린 봉쇄` 322일 만에 해제
소련이 베를린과 서방측을 연결하는 모든 교통로를 봉쇄했던 이른바 ‘베를린 봉쇄’가 1949년 5월 12일 해제됐다. 1948년 6월 24일 봉쇄 이후 322일 만이었다.
2차대전 후 독일은 미·영·불·소 4개국에 의해 분할점령됐으나 소련 점령지역 내에 있는 베를린만이 공동관리하에 있었다. 베를린 봉쇄는 미·영·불 서방 3개국이 자신의 점령지역을 통합해 단일 경제공동체로 하고 베를린을 포함한 통합 전 지역에 새로운 통화인 마르크화(貨)를 유통시키기로 한 것이 빌미가 됐다.
소련은 보복에 나서 육로·철로·수로를 봉쇄하고 식량수송까지 금지했다. 연합국은 250만 베를린 시민들을 돕기 위해 항공기를 이용한 식량·연료·의약품 공수작전으로 맞대응했다. 소련이 베를린 4개국 공동관리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베를린의 독점적 지배권을 주장하면서 긴장도 더욱 고조됐다.
그러나 미국의 방침은 정면대응이었다. 공수는 예정대로 진행됐고 항공기가 3분마다 떴다. 수송 횟수만 약 20여만회, 공수물자도 약 232만t에 달했다. 봉쇄가 장기화하면서 식량은 배급제로 됐다. 전력소비도 제한됐으며 공장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어느덧 동독 주둔 소련군은 40개 사단으로 증가했고, 미군은 원폭 탑재기를 영국에 배치했다. 다행히 양측의 자제로 무력충돌로까지는 발전하지 않았지만 독일의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다.
▶1926년 조선박람회, 서울서 열림
▶1925년 조선치안유지법 공포 시행
▶1919년 김규식, 파리 강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 제출 : 서구 각국은 냉담한 반응을
보임.
▶1905년 영국 주재 공사 서리 이한응
(1874∼)이 국가의 주권이 대외적
으로 인정받지 못함을 비관하여 자살.
▶1871년 비스마르크 독일수상에 취임 -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
출처 네이버지식백과,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