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돈 남 말한다
"사돈 남 말한다."
자기의 허물은 놔두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을 비판하는 말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사돈 남말하는 자가당착의 상황을 너무나 많이 접한다.
주말에 서울 외곽으로 여행을 갔다가, 귀경할 때 차들이 몰려서 길이 막힌다.
그 때 짜증을 내면서 "집에나 있지 무슨 구경하려고 다들 나오냐?"라고 지껄이다.
그러나 자기도 사실은 그렇게 교통체증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사돈 남 말하듯 하다.
자기만은 교통체증의 원인이 아니라고 하면, 이는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이렇게 사돈 남 말 하는 듯한 상황을 패러독스(Paradox)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역설(逆說)이라고 번역하는 패러독스을
재조명함으로써 서양 수학사에 일대전환이 일어났다.
1910년 서양철학자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엄청난 학문작업을 기획하였다.
수학의 원리 전체를 논리학과 집합론의 기호로 대체하는 작업이었다.
그러던 중 집합론에서 패러독스적 상황을 만나서 전체 작업이 난국에 빠졌다.
럿셀이 제기한 패러독스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자기 자신을 원소로 하는 집합을 보통집합이라고 부르고,
자기 자신이 원소가 아닌 집합을 특수집합이라고 명명할 경우,
보통집합 전체의 집합은 보통집합인가, 특수집합인가?"
그런데 보통집합 전체의 집합이 보통집합이라면,
그 자신의 원소에 포함되기에 특수집합이 되어야 하고,
보통집합 전체의 집합이 특수집합이라면,
그 자신의 원소에 포함되지 않기에 보통집합이 되어야 한다.
요컨대 보통집합이라면 특수집합이 되고,
특수집합이라면 보통집합이 되는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역설적 상황에 빠지고 만다.
결국 러셀은 계형이론이라는 자의적 해결을 통해 이런 난국을 덮어버리고,
세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수학의 원리》 저술을 완성하였지만,
이로 인해 수학의 한계가 드러나게 된다.
합리적 사유의 정수인 수학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합리성 자체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사상사에서 이런 패러독스적 논법을 통해
합리적 사유의 문제점을 드러냄으로써 대승불교의 지평을 연 사상이 있다.
기원후 200년 경 용수보살께서 창안하신 중관학(中觀學)이다.
반(反)논리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중관학에서는 심지어 "비가 내린다."와
같은 가장 단순한 판단조차 논리적 오류를 범한다는 점을 드러낸다.
'비'라고 할 경우 이미 내리고 있는 것이기에 그것에 다시 '내린다.'는 서술어를
붙일 경우 '내리는 비가 다시 내리는 꼴'이 되어 의미중복의 오류에 빠진다.
그렇다고 해서 내리지 않는 비가 어딘가에 있어서 그것이 내린다고 생각할 경우,
'내리지 않는 비'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기에 사실위배의 오류에 빠진다.
'내리는 비'도 내릴 수 없고, '내리지 않는 비'도 내릴 수 없다. 창밖의 강우현상에
대해 이렇게 규정할 수도 없고, 저렇게 규정할 수도 없다. 역설적 상황이다.
사돈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지 않고 남만 비판하는 역설적 상황에서,
사돈의 행동 역시 그의 말의 대상이 된다는 점'은 의미중복의 오류에 대응되고,
사돈의 행동만은 그 말의 대상이 아니라고 할 경우 사실위배의 오류에 빠진다.
럿셀이 발견했던 집합론의 패러독스, 중관학의 반논리적 논법,
그리고 "사돈 남 말한다."는 속담 모두 인간의 합리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그 취지를 같이 한다.
속담 속에 담은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