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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원서/사실경위서
1976년
서울에서 9년 열애 끝에 결혼 하여 한살, 세 살 된 두 아이와 다복한 생활을 하던 중 친정집이 재산몰락 했습니다.
그 영향에 저의 남편이름으로 된 집도 넘어간다는 말에 집 건지겠다는 욕심만으로 결혼생활을 일시 포기하고
‘위장이혼’이라는 협의이혼을 했습니다. 젖도 안 뗀 생후 6개월짜리 아들을 손윗동서에게 맡긴 채 세 살짜리 딸만 데리고
수원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제 딸과 언니 딸 조카를 키우며 그 해 대학을 졸업하고 수원 영복여고 교사로 발령받은
여동생과 음악학원 원장이었던 제가 뭉쳐 네 식구-새 가족을 이루어 함께 살게 되었고 동생과 저는 직장, 출장지도 등
틈나는 대로 열심히 둘이 벌어 모았습니다.
1980년
열심히 산 댓가인지 이혼의 상처가 조금 가셔지고 동생과 저는 모은 돈으로 수원 매탄동에 집을 마련하기까지 했고
그해 말 12월에는 “피아노교육을 위한 어린이뮤지컬 -별의눈동자-”라는 공연을 수원 시민회관 무대에 올려 그 당시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했던 피아노 교육의 새로운 아이템으로 저의 피아노 교육 뮤지컬이 무대에 올려졌다는 평가를
받게 되자 갑자기 제가 운영하는 학원이 유명해 지고 저는 밀려오는 원생들과 공연 계약으로 갑자기 부자가 되었습니다.
1981년
학원건물주인 ‘주영이 엄마’(유쌍감)는 그 당시 수원 ‘금강(현대계열회사)’ 회사의 사장 보디가드직원의 부인이면서 제
조카가 다니던 화서초등학교 육성회장 이었던 관계다 보니 자연 그 집 딸과 제 조카가 절친한 같은 반 동무로 같은
학부형이 되었고 건물주와 임차인 관계를 떠나 저와 유쌍감은 항상 한상에 밥을 같이 차려먹을 만큼 특별친분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사건이 생겼습니다.
유쌍감이 갑자기 엄청난 비밀을 제게 털어 놓았습니다.“내가 남편 몰래 사촌오빠랑 불륜의 관계에 빠졌는데 스님신분인 그 오빠가 나와의 내연관계를 빌미로 돈을 남편 몰래
빌려 가지고 가서 돌려주지 않아 남편이 눈치 채고 너무나 다구치는데 오빠와 내연의 관계가 들킬까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되었다.”라면서 유쌍감은 “채권자들이 자기 남편과 같은 회사직원 동료 아내들이라서 내가 저지른 빚을
피아노선생(유경혜)의 빚보증으로 생긴 부채라고 거짓말을 하여 둘러대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쌍감은 “나와 내 자식들을 한번만 살려 달라”
“남편이 이혼하자는데 이혼만은 하지 못할 내 심경을 이해할 것이다. 지난날의 근친상간 내 잘못을 남편에게는 도저히
고백하지 못하지만 친구인 당신한테 고백했고 반성하고 있으니 한번만 우리가정을 위하여 그 돈을 당신이 빌려 썼다고
거짓말 한번만 해주면 된다. 확인이 되면 남편이 다 갚아 주겠다 했다 도와주라” 하며 매달렸고 유쌍감의 채권자 6명도 함께 찾아와 “우리 남편들이 모두 유쌍감 남편과 같은 직장 직원들인데 직원부인들끼리 돈거래를 하여 시끄러워 지고
관계가 나빠졌으니 피아노 선생이 우리를 믿고 그 돈을 썼다라고 거짓말 한번만 해주면 금강회사도 조용해지고 남의
부채를 뒤집어쓴 자기 부인에게 이혼강요는 못할 것이니 친구가정도 살려줄 수 있다 만약 잘못되면 우리가 증인 서
줄테니 우리를 믿고 가짜 차용증 한 장만 써주라”라고 하여 저는 아이아빠와 이혼으로 인한 뼈아픈 고통을 겪은 다음이라
친구 유쌍감의 그 말과 증인이 6명(학원 원생들 학부모)의 간곡한 부탁이라 너무도 쉽게 ‘가짜 차용증’을 썼습니다.
언제 얼마 어떻게 왜 누구랑 돈을 빌렸다... 그렇게 차용금 명세와 함께 언제까지 갚겠다는 각서까지 몇 장의 종이위에
적은 후 날짜는 그 작성한 실제날짜 보다 훨씬 이전 날짜를 소위 6명의 증인(유쌍감의 채권자)이 지켜보며 불러주는 대로
적었습니다. 제 동생이 옆에서 화를 내고 울면서“언니야 가짜로도 써주면 안된다. 이 사람들 절대 믿지 마라”
애걸하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친구를 이혼당하지 않게 구하고 그 아이들과 가정을 구하고 학부모들을 구할 수 있다하는
말을 진심으로 믿고 증인들의 6가정을 구하여 좋은 결과가 곧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 ‘가짜 차용증’을 써 주었습니다. 그만큼 저는 이유막론하고 ‘이혼’으로 인한 ‘가정의 파괴’ 사랑하는 가족들이 뿔뿔이, 산산조각이 나 버린 자신의 불행을
친구 유쌍감이 겪게 해선 안된다고 결심했던 ‘낭만적 사고의 가짜차용증 작성’ 한 장으로 제 인생의 궤도가 그리 쉽게
바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써서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단 며칠 후
건장한 남자들이 학원으로 들어와 저의 팔에 쇠고랑을 채우고 다짜고짜 끌고 갔습니다.
그 시대에는 고문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경찰은 제게 미리 작성해둔 신문조서에 “무조건 서명해라”했습니다.
저는 무슨 일이 제게 일어난 건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유쌍감과 증인6명이 곧 나타나 저의 무죄를 밝혀주고
사건은 해피엔딩 될 걸로 굳게 믿었습니다.
경찰은 저를 낮이고 밤이고 창살 안에 가두어 놓고 잠을 못 자게 했습니다. 밥을 못 먹게 했습니다. 때늦었지만 제가
유쌍감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밝히며 ‘차용증’은 가짜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경찰의 어떤 강압에도 맞섰습니다.
경찰은“이 여자 바른 말 실토할 때까지 밥 굶겨라” “잠 재우지마라” 잠이 쏟아지는 때마다 끌어내어 ‘가짜차용증’을
사실대로 작성한 것이라는 조서에 서명하고 실토하라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견디다 못해 저는 하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심한 하혈을 하여 저는 곧 죽을 것만 같았지만 담당 경찰은 피로 벌겋게 된
저의 하체를 내려다보며 조롱하고 피딱지가 엉켜 붙은 다리로 계속 경찰서 사무실을 걷게 했습니다. 제 두 허벅지는
딱딱하게 굳어 엉킨 피가 피부를 갉아 껍질이 벗겨져 쓰리고 칼날이 스치는 아픔으로 온몸이 오그라 붙곤 했습니다.
저는 때늦은 현실감에 오장육부가 갈갈이 찢어지는 분노를 안으로 삭혀야만했고 끝내 구속되었습니다. 배신과 거짓을,
분노로 표출할 힘도 남지 않을 만큼 경찰관과 싸웠지만 ‘전과자’라는 주홍글씨를 결국 가슴에 달았습니다.
제가 구속되기 전 학원의 조교가 유쌍감에게로 건네준 “가짜차용증”과 차용명세서를 갖고왔습니다. 지금은 세월이
30여년이 흘러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제가 ‘문서 은익죄’에 실형선고를 받은 경위는 스스로 작성한 그 가짜
차용증을 제가 도로 받아 보관한 것을 경찰이 뒤집어쓰게 하여 ‘문서 은익죄’를 적용했던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세상사 돌아가는 것 모르고 로맨티스트로 살아 어리석기 짝이 없던 저는 그저 부잣집 딸로 태어나
파출소에도 한번 가 본적 없이 곱게 서른 해를 피아노만 치고 노래만 부르고 살던 한사람의 착한 여자였으나 이혼에
뒤따른 속임수에 말려들어 ‘구속’까지 당한 것에 이 세상 그 어느 것도 해결방안이 없는 거대한 불행-‘쓰나미’로 인하여
저는 제가 제 손으로 작성한 가짜 문서가 되돌아온 상황까지 범죄로 몰아갔던 그 조작극으로 ‘문서은익죄’를 만들어 붙여
한없이 죄질이 나쁜 ‘전과자’로 지옥에 던져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 운명을 그런대로 사랑하며 살기로 했고 그렇게 사는 것이 순리라면 저는 겁내지 않고 갇힌 자로서 소외된
자로서 빛나는 생을 찾아내기로 했습니다.저는 인천 동부검찰청에서 “당신은 왜 경찰서에서 완강히 부인했던 사실들을 이렇게 신사적으로 대해주는 검찰에서 다 시인을 하느냐? 어느쪽이 사실이냐?” 라고 했습니다.
검사님도 그런 의문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저의 경찰조사는 사실을 사실대로 조사하지않고 강압하여 서명하라 하지
말라 소리 질렀습니다만 검찰조사는 간단히 마쳤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참으로 간단했습니다.
유쌍감이 검찰대질신문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숙여 “미안하다,죄송하다. 남편이 이 모든일을 시켰다”라는 말만 했습니다.
수갑을 차고 끌려나와 자기앞에 앉아 있는 죄없는 친구에게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유쌍감이 더 무슨 말을 할수 있으랴더욱이 그 증인6명은 모두 경찰에서 눈알을 부라리며 이구동성으로 제가 써준 차용증은 ‘진짜차용증’이라고 거짓말들을 하였습니다. 단지 유쌍감 만이 고개 숙여 울고 또 울었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제가 싸 담아 안고 가야할 “용서”밖에 없음을 알았고 공연히‘금강’이라는 그 당시 그렇게 힘 있는 현대회사 고위간부를 제 힘으로 부딪친다 해도 소란하기만 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 시절 이후 한 번도 찾지 않았던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용서와 사랑’을 안 이상 더 지체할 것 없이 ‘가짜차용증’에 대한 시간을 질질끌것없이 바로 교도소로 들어가 들어 눕고만 싶었습니다. 그 어떤것도 그 상황에서 밝힌다는 것이 무의미했고 유쌍감과 저만 더 깊이 고통스러울 것 같았습니다
그 결과 갇힌 딸의 소식을 듣고 인천학익동 청소년교도소로 찾아온 제 어머니의 절규와 혼절은 제가 아무리 어머니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려해도 끝내 숨진 어머니의 시신앞에 갚을 길 없는 불효로 남아버렸습니다
이렇게 저는 교도소 식구가 되었습니다. 8개월 징역세월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8일간도 아닌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 교도소 안에서 세례를 받은 우리나라 첫 번째 교도소 세례자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갇힌 자들의 그 당시 일상은 저를 기도하게 했고 참으로 성공하는 삶이 어떤것인가? 삶의 목적과
올바르게 사는 방법을 깨우쳐 주었고 지금도 저는 그렇게 인도하신 나의 하나님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저는 사회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제 도덕적 양심에 비추어 죄를 짓지 않았음에 틀림없었습니다만, 저의 신앙적
양심에 비추어 보면 단 하루도 숨쉬기가 미안할 만큼 사랑하지 못했고 용서하지 못했던 제 모습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너진 교도소 마당 고목에서 죽은 나무 등걸을 비집고 매화가 피어오른 아름다운 봄에 저는
교도소 쇠창살을 잡고 흔들며 찬송했습니다. 절대자. 전지전능하신 분이 살아계신다는 믿음은 저의 억울함을 다
해소시켜주었고 새로운 삶의 기획을 하게 했습니다.
저는 출소하자마자 ‘바울어린이 합창단’을 조직했습니다. 서울 YWCA‘담안회’와 이정찬 인천학익동교도소장을 통하여
이제 교도소를 벗어난 수감자가 아닌 교도소의 모든 형제자매의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함께 지고 위로하고 싶어
출소자로서 아름다운 삶에 도전함을 보여주려고 교도소 식구들에게 다시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내가 울 때 함께 울었던
분들이었고 의지가 약하여 같은 동종의 죄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안에서 만은 ‘죄’라는 의식을
늘 생각할 줄 알고 밖에서 뻔뻔하게 죄의식 없이 사람을 괴롭힌 자신의 실체를 잠깐만이라도 후회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갖고 있음으로 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수원교도소로 찾아가 무기수와 살인수들의 중보기도를 했으며 보증인이 없어
자유롭게 세상에 나오지 못하는 무기수의 보증인이 되어 출소를 도왔습니다. 그들이 이십 수년간 몸담았던 교도소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두렵고 낯설은 세상에 혼자 버려진다는 두려움 마저 갖게 할수도 있기에 저는 그러한
출소자들의 심리적 안정을 도와주려고 제 집으로 오게 하여 함께 트레이닝을 해 갔습니다. 어떤 이는 그 안에서 아이를
낳아 아이도 엄마와 함께 교도소 생활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80년대 초 그 시대에 저는 그런 아이들과 엄마에게도
출소하기까지 아이를 맡아줄 기관을 필요로 한다고 아동보호소에 찾아가 호소했습니다. 저의 8개월간의 담 안의 생활은 그로부터 현재까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저력을 키워주었습니다. 유쌍감은 더 이상 저의 ‘원수’가 아니라 저의 ‘스승’이었습니다. 저의 봉사활동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그 후 삼익악기사로부터 의뢰받아 크로마하프라는 악기 첫 지도강사가 되었고
부산 YWCA 크로마하프 연주단의 지휘자로 있던 중 부산 MBC에서 저의 봉사활동촬영을 하러 부산노포동 아동일시보호소 “남광원”에 갔던 것이 계기가 되어 천애고아가 될뻔한 이수희, 형민,두 오누이를 아들, 딸로 삼기로 하고
1987년9월1일 두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위탁모가 되어 키우게 된 것이 부산생활 동기였습니다.
알콜 중독자였던 아이들의 생부가 찾아와 온갖 흉기로 아이들과 저를 괴롭히는 세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피할 길 보다는 그 알콜 중독자를 고쳐보자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이들과 평생 함께 동행할 계획을 하며 아이 둘을 공포에 떨리게 했던 사람... 날이면 날마다 그에게 맞아 얼굴은 ET같이 우그러 졌지만 흉기에 찔리고 갈비뼈가 부러져 목숨이 위태로울 때 이웃사람들이 똥을 구워 삶아 달여 먹였던 그 사랑의 정성을 어찌 보답할까 하다가 이웃 어린이, 독거노인, 시골 아낙네, 고아원의 아이들, 모두 하나같이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음악을 연주하기로 했습니다.
저의 기도가 이루어져서 알콜 중독자인 아이들의 아버지는 그림공부를 시작했고 마침내 국내에서 인정받는 화가가 되었으며 국외에도 작품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저는 성취감, 보람과 두 아이들의 커가는 모습에서 더욱 힘을 내었습니다.
1989년 3월 저는 부산해운대 하이얏트 호텔 첫 개관한 리젠시 룸에서 ‘한국크로마하프예술협회’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창립연주회를 개최했습니다.
1989년 3월21일
부산 MBC에서는 화가와 음악가가 이루어 내는 예술의 하모니에 대한 “크로마하프에 사랑을 싣고...”라는 다큐작품을
송출했습니다.
이어서 다소 생소했던 크로마하프로
1989년 12월15일
정기연주회를 부산KBS부산홀에서 개최하여 이튿날까지 뉴스에 ‘부산여성봉사활동단체’로 소개됨으로서 결국 저의
복지봉사활동은 공인된 행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