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8일
충남 예산 가야산 산행풍경
요즘 미세먼지로 일기가 고르지 않아 일기예보 검색이 일상화 되었다. 아침에 검색해 보니 날씨는
좋고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는 보통 수준이었다. 9시경 준비하고 밖을 나가보니 생각보다 가야산
시야가 어제보다 그리 맑지 못하였으나 준비는 다 되어 곧장 출발하였다. 산행은 그리 춥지 않아 여유있게
소나무숲의 피톤치드를 마시며 가볍게 그리고 천천히 오르기 시작하였다. 중턱 이상 올라 먼곳을 바라보니
미세먼지의 농도가 점점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능선에서는 시원한 바람도 불어 왔으나 서쪽의 서해바다
에서는 흐릿한 구름과 먼지를 잔뜩 밀려 왔다. 몸은 이제 서서히 데워져 땀이 나기 시작하여 땀
조절하면서 12시경 석문봉 아래 양지바른 곳에서 준비해온 컵라면, 김밥과 커피로 점심을 대신하였다.
평일로 등산객은 간혹 보였으며 혹시나 멧돼지가 나타나면 어떻하나 걱정했지만 나타나지 않아 참 다행이다.
산행코스 : 가야산 주차장 - 옥양봉 - 석문봉 - 가야봉 정상 - 선문봉 방향 갈림길 -
하산 - 상가리 저수지 - 남연군묘 - 주차장 (지도 참조)
오른쪽으로 진입
오른쪽으로 진입
오른쪽으로 진입
소나무숲
레일은 관음전으로 가는 화물 이동 경로
휴식터와 구급품
밧줄을 새로 설치함.
가야산 능선, 멀리 보이는 곳은 가야봉 통신 탑
봉산면 방향
상가리 방향, 앞에 보이는 곳은 상가리 저수지, 뒤에 보이는 곳은 덕산저수지
앞질러 가는 등산객인데 아주 착한 등산객, 등산로 주의에 버려진 휴지를 줍고 가신다.
그래서 그런지 등산로 주변이 예전보다 휠씬 깨끗해 졌다.
이곳 석문봉 정상 아래에서 점심을 먹었다.
서산시에서도 가야산을 9경에 넣었네요. 예산은 가야산이 8경 안에 들어 있다.
지나온 옥양봉 능선
사자바위
시야가 조금 깨끗해 졌다.
거북 바위
금북정맥 등산로의 훼손 모니터링 구간 표식
가야산 정상, 가야봉
하산을 위해 다시 come back
해미방향
해미 방향
바위 이름좀 지어 보세요.
거북이 목 같기도 하고...
하산길은 응달이 져 눈길이다.
고목들이 여기 저기 무지 많다. 아까운거.
상가리 저수지
남연군묘에서 내려다본 풍경
남연군 묘
남연군묘 비석
감사합니다.
다음은 예산 임존성으로 가려 합니다.
가야산
가야산은 전체적으로 행정구역의 측면에서는 예산군 서부의 덕산면과 서산시 동부의 운산면·해미면에 걸쳐 있는 산이며, 세부적으로 보면 차령산맥 이서의 태안반도에 남북 방향으로 발달해 있는 가야산맥의 아랫부분[예산군 덕산면 일대, 서산시 운산면과 예산군 덕산면의 경계의 남부]에 있다. 가야산의 경도 및 위도상의 위치는 경도 126도 36분 40초, 위도 36도 42분 10초이다.
가야산은 서산시, 예산군 및 홍성군에 걸쳐 있으면서 남북 방향으로 뻗어 있는 가야산맥의 주봉이다. 가야산에는 주봉인 가야봉[677.6m]을 중심으로 원효봉(元曉峰)[677m], 석문봉(石門峰)[653m], 옥양봉(玉洋峰)[621.4m], 일락산[521.4m], 수정봉[453m], 상왕산[307.2m] 등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다. 특히, 석문봉은 가야산 봉우리 중에서 가장 바위가 많은 곳으로 대문처럼 서 있는 바위가 있다.
가야산의 지형, 지질 및 식생은 다음과 같다. 가야산 정상의 북측에는 2~3m 크기의 토어(tor)와 3~4m 크기의 암주(岩柱)가 발달하여 있다. 가야산 정상의 남측 급사면에는 35m 규모의 암벽이 있는데, 암벽 주변에 2m 내외의 토어가 집단적으로 나타난다. 가야산에서 석문봉에 이르는 능선은 대부분 두꺼운 토양층으로 형성되어 있지만, 차별침식(差別侵蝕)[지역에 따라 지표면의 단단한 정도가 달라서 서로 다르게 침식하는 일] 및 풍화에 비교적 저항력이 강한 암석들이 토양층 위로 노출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20m 정도의 높이와 폭으로 된 암석단애(岩石斷崖)들이 발달하였으며, 단애의 상층부에는 절리(節理)의 형태에 따라 각진 모습의 토어들이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석문봉은 가야산 봉우리 중에서 가장 바위가 많은 봉우리로, 가야산 쪽으로는 암릉을 이루고 서남쪽은 단애를 형성하고 있다.
가야산에서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은 전체적으로 완만하며 암괴가 노출되어 있다. 이에 따라, 가야산지는 전체적으로 정상부로 갈수록 석산(石山)의 모습이 뚜렷하며, 상부의 사면은 경사가 급하고, 하부로 내려올수록 암괴원(岩塊原), 암괴류(岩塊流) 등이 나타나면서 경사가 완만해진다. 가야산지의 하부에는 완사면의 지형이 발달되어 있고 다양한 크기의 암석 입자들이 퇴적되어 있다.
가야산 일대를 구성하고 있는 암석은 흑운모화강암으로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에 관입된 것이 대부분이다. 화강암 지형은 같은 암석이라도 장소에 따라 석산으로 이루어진 산체(山體)의 모습과 구릉지, 기반암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야산에서 토양층 발달은 미약한 편이고 전체적으로 식생밀도(植生密度)가 낮으나, 산 아래로 내려오면 식생밀도가 높아진다. 산 비탈면의 피복식생(被覆植生)으로는 침엽수인 소나무가 우세하며, 골짜기에는 활엽수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모습은 옥양봉 동측 사면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가야산 동사면을 흘러내리는 물길은 삽교천을 통하여 아산호로 배수되고, 서사면의 물길은 천수만으로 흘러간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야산 [伽倻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남연군묘
남연군 묘는 조선조 말 야심가였던 흥선대원군의 야망이 묻힌 곳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안동 김씨 세도가가 정권을 좌지우지하고 종친들은 조금이라도 잘못 보이면 역모로 몰려 죽음을 당하거나 귀양가기가 예사이던 시절이라 흥선군은 한편으로는 파락호로, 또 한편으로는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여 나라를 굳건히 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으니 그 오랜 계획을 실천에 옮긴 교두보가 바로 아버지 남연군 묘를 이곳으로 옮긴 일이다. 그 옮긴 장소와 옮기던 내력이 모두 숱한 뒷얘기로 남았으니 황현의 『매천야록』에도 소상히 전하고, 조금씩 다른 점이 있지만 예산의 향토사가 박흥식 씨의 『예산의 얼』에도 전한다.
남연군 묘에서 보아 왼쪽 산기슭에 돌부처가 한 분 있다. 풍채도 자그마하고 생김도 그만저만한 민불인데, 재미있는 것은 골짜기 앞쪽이 아니라 골짜기를 향해 있다는 점이다. 그 내력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남연군 묘의 풍수에서 보면 그쪽이 좀 비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골짜기로 빠져나가는 기를 막느라 부처를 세웠다는 말이 있다. 또 하나는 그와는 정반대로, 돌부처는 원래 거기에 있었는데 흥선군에 의해 가야사가 불타 버리자 그 모습이 보기 싫다고 돌아섰다고도 한다.
흥선군은 이 자리에 남연군 묘를 쓴 지 7년 만인 1852년에 둘째 아들 재황(載晃, 아명은 命福)을 얻었고 그로부터 11년 뒤인 1863년에 이 아이가 고종이 되었으며 그 아들이 순종이 되었으니 2대 천자를 본 것만큼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두 임금을 끝으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가 맥이 끊기고, 남연군 묘는 오페르트라는 독일 상인이 파헤친 바 되었으니 과연 그런 수난을 당하고 2대 천자의 결말이 그렇게 난 자리가 결과적으로 명당인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오페르트 사건은 고종 5년인 1868년에 일어났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두 번이나 통상을 요구하다 실패하자 미국인 자본가 젠킨스의 도움을 받고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앞세워 상해에서 ‘차이나호’를 타고 왔다. 덕산군 고덕면 구만포에 내린 그들은 한국 천주교인을 앞세워 와서 남연군의 묘를 파헤쳤다. 밤중에 일어난 급습이었으므로 막을 틈이 없었는데 날이 밝아오고 썰물 때가 다가오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퇴각해 버렸다. 대원군이 선견지명으로 비벼 놓은 강회 때문에 정작 그다지 파헤치지도 못한 상태였다. 대원군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잔존하는 천주학쟁이를 가일층 엄단하라”고 지시했으니 이땅 천주교 신자들은 또 한차례 회오리바람을 맞아야 했다. 한편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물의를 일으켜서 자본주 젠킨스는 불법파렴치죄로 기소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 버렸다.
흥선대원군이 폐해 버린 가야사는 성종 때 편찬한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수덕사보다 앞에 들고 있어, 수덕사보다 큰 절이었던 듯하다. 형승(形勝)조에 설명한 ‘금탑’(金塔)은 “그 윗머리는 구리쇠로 씌우고 네 모서리에 철사를 꼬아 만든 줄을 걸어 늘어뜨리고 풍경을 달았다. 그 형태가 웅장하고 만든 법이 기이하고도 교묘하여 다른 탑과 다르다”고 했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공주 마곡사에 있는 라마교 방식의 탑처럼 탑 상륜에 구리쇠로 보개를 씌웠는데 빛을 받으면 반사하여 번쩍이므로 금탑이라 한 듯하다. 그렇다면 고려 말기에 건립되었을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공민왕 7년(1358)에 나옹화상이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고 적고 있다.
또 가야사 보웅전에는 철불 세 분이 모셔져 있었는데 불에 타 녹아서 쇳덩어리가 되었다. 철불이었다면 신라 하대 또는 고려 초중기의 것일 수 있다. 뒷날 봉산면의 대장장이가 파묻혀 있던 쇳덩이를 녹여 쓰려고 했으나 가루가 되었다고 한다. 남연군 묘 아래쪽의 넓은 절터는 지금 논밭으로 변해 버렸는데 군데군데 깨진 석등, 부도, 탑비 조각이 있었으나 더러는 묻히고 더러는 캐 가서 건물 자리와 주초석이 남아 있다. 이곳에 있던 석등 화사석은 보덕사에 옮겨져 있다.
탑을 깨부수고 절을 폐한 것이 마음에 걸린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한 몇 달 뒤에 가야골 아래 상가리에 한양에서 목수를 보내어 은덕을 보답한다고 지은 절이 보덕사(報德寺)이다. 장남 재면(載冕)의 이름으로 지은 이 절은 왕실의 원찰이 된 셈이다. 규모로는 보잘것없어서 가야사의 영화를 재현하지는 못했던 이 절에 있는 가야사 석등 화사석은 그나마 가야사가 어떤 절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팔각의 몸돌에는 돌아가며 창이 넷 뚫려 있고 그 사이사이에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모두 귀신을 밟고 있는 형상으로 갑옷이 정밀하고 천의 자락이 날리는 품이 예사 조각과는 다르다. 석등의 몸돌만도 높이가 87㎝나 되니 전체 크기는 꽤 컸을 듯하며 형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가야사 석등의 운명만 보아도 가야사가 양택으로 명당이었는지도 의문스럽다. 2대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말도 흥선대원군의 아들과 손자까지가 왕이 되었기에 붙은 후대의 해석일 수 있다. 그러나 남연군 묘에 얽힌 처절한 이야기들은 우리 근대사의 아픈 한 구석으로 남아 있다.
금북정맥
경기도안성의 칠장산(492m)에서 남하하여 충청남도태안반도안흥진(安興鎭)까지, 연장거리 295㎞에 이르는 산줄기
연결되어 있는 주요산은 칠현산(七賢山, 516m)·청룡산(靑龍山, 400m)·성거산(聖居山, 579m)·차령(車嶺)·광덕산(廣德山, 699m)·차유령(車踰嶺)·국사봉(國師峰, 489m)·백월산(白月山 혹은 飛鳳山, 560m)·오서산(烏棲山, 791m)·보개산(寶蓋山, 274m)·월산(月山 혹은 日月山, 395m)·수덕산(495m)·가야산(678m)·성국산·팔봉산(八峰山, 326m)·백화산(白華山, 284m)·지령산(知靈山, 218m) 등으로 그 길이가 약 295㎞에 이른다.
금북정맥에 걸친 1:50,000 도엽은 안성, 진천, 평택, 전의, 보령, 청양, 예산, 홍성, 당진, 서산, 근흥, 만리포 도엽 등이 포함된다.
백두대간에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으로 이어지고 다시 금북정맥으로 연결되는 산줄기로 우리나라 남부지방과 중부지방의 자연스런 경계 구실을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북정맥 [錦北正脈]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