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수상작가 펄벅이 본 한국의 가을 <글 쓴 이: 이규태 작가>
1960년 가을 녘,
한국을 방문한 미국의 여류소설가이자 대문호인
펄벅 여사(Pearl S. Buck/1892∼1973)를 당시 조선일보 문화부의 초년생 기자였던
이규태(李奎泰,1933∼2006,칼럼니스트 논설위원 역임)가
동행 취재를 하게 된다.
펄벅은,
어린 시절에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중국 서민들의 생활을 소재로 삼아
1930년 첫 작품 ‘동풍서풍’으로 인기를 끌었고,
이듬해 1931년
중국의 한 빈농과 하녀 출신 부인이
대지주가 되기까지의 살아가는 과정을 그린
장편소설 ‘대지’(大地,The Good Earth)로 퓰리처상을 받고
1938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세계적인 작가였다.
경주를 여행하는 차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던 펄벅 여사가
가을 녘 시골집 마당의 감나무 끝에 달린감 여남은 개를 보고는
문득 “따기 힘들어 그냥 두는 거냐?”고 물었다.
이 기자는
“까치밥이라 해서
겨울새들을 위해 남겨둔 것”이라고 설명하자
펄벅 여사는
“바로 그거예요. 제가 한국에서 보고자 한 것은
고적이나 왕릉이 아니었어요.
이것만으로도 나는 한국에 잘 왔다고 생각해요”라고 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대문호인 그녀는 한 번 더 감동을 느낀다.
마침 가을 들녘에서 온종일 밭일을 마친 소가 힘들어할까 봐
달구지를 타지 않고 지게에다 볏단을 짊어진 농부가
소 곁에서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1963년 출간한
펄벅의 ‘살아있는 갈대’ 첫머리에
“한국은 고상한 사람들이 사는
보석 같은 나라”라고 극찬한 것은
날짐승과 소까지 배려한
한국인의 고운 심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펄벅, 미국인이지만 동양인을 사랑했던 여인….
자신의 딸이 정신지체와 자폐증 환자임을 알기에
더 마음 아픈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은 어머니….
그러기에 전쟁 고아들을 위해
미국에 최초의 동양계 고아원 'welcome house’을 세웠고….
가을 녘 한국 방문에서 느낀 감동으로
1964년에 유한양행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의 주선으로
전쟁 후 태어난 혼혈고아 2,000명을 위한
‘소사희망원’을 새워 1974년까지 운영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2006년
부천시 소사구 심곡본동에 건립된 ‘펄벅기념관’이다.
여자로서 이혼의 아픔을 딛고,
정신지체와 자폐증에 고통받으며
이웃으로부터 외면받고 사는 딸을 위하여
<자라지 않는 아이>란 책을 썼고,
자신의 딸을 위함이 어느덧 손길이 필요한
소외된 모든 아이를 위함으로
크나큰 사랑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후원을 위해서 많은 책을 썼고,
두 번째 결혼 때는 4명의 아이를 입양하면서
소외된 아이들에 대하여
특별한 사랑을 끝없이 베푼 사람이
바로 대문호 펄벅 여사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다문화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미국인이면서도 동양인을 사랑했던 그녀는
그 먼 이전부터 다문화 시대에 살며
혼혈아를 몸소 안아주며
지극한 사랑을 베풀었다.
한국전쟁 후
1인당 국민총생산(GDP) 67달러로
지금 아프리카에 있는 몇몇 최빈국 수준이던 한국을
보석처럼 사랑하면서
1964년∼1974년까지 9년 동안
부천 변두리 땅에다 재산을 털어
사회로부터 버림받는
혼혈 고아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기에,
한국의 가을을 사랑했던
펄벅 여사의 아름다운 삶을 알면 알수록
한 여자로서,
한 분 엄마로서,
뜨겁고 진한 감동 그 자체로 다가옴을
부인할 수 없다.
결실의 가을을 맞았어도
세상 분위기가 뒤숭숭하기만 한 요즘,
늘 어눌한 맘으로 글을 쓰는 큰 머슴이
훌쩍 떠난 가을여행 길에
전국협회장 오승규 장로님의 안내로
부천에 있는 펄벅기념관을 찾았을 때,
대문호인 그녀가 한국의 가을에 남긴
진한 사랑의 발자취에 감동하여
이웃사랑의 물꼬를 다시 트게 한
귀한 반성의 기회가 되었기에,
집으로 돌아오는 KTX안에서 이 글을 씁니다
카페 게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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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이 본 한국의 가을
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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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20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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