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 자신의 글을 올리려고 하였으나 배운게 부족하여 글이 짧아 대신 퍼왔습니다. God People에 올려진 글이며, 유성오라는 형제님께서 기고하신 글입니다. 개혁의 첫걸음은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의 위치를 전문인들의 성경적인 바른 해석을 통하여 깨닫는 것이 첫걸음인것 같아 퍼왔습니다. 몇몇 분들에게는 너무 기초적인 것 같아 올리기 죄송하지만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제목 : 사도와 집사의 차이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서, 백성 가운데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 그때에 구레네 사람과 알렉산드리아 사람과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으로 구성된, 이른바 리버디노 회당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몇이 들고 일어나서, 스데반과 논쟁을 벌였다. 그러나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므로, 그들은 스데반을 당해 낼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습니다" 하고 말하게 하였다.(행 6:8~11)
"군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으키는 갈등 중 상당 부분은 "니가 날 무시해?"라는 감정적 분노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어려서부터 자신과 남을 비교해가며 살아갑니다. 그 비교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하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악은 비교에서부터 비롯된다"는 말이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남보다 비교우위를 점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부에 대한 집착으로도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큰 평수의 집을 찾게 되고, 자동차도 배기량이 더 큰 것을 선호합니다. 심지어는 아이들조차도 아파트 평수에 따라 친구가 나누어지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업무상의 필요와는 상관없이 사무실도 가급적 크게 마련하고 사치스럽게 꾸며야 거래처로부터 무시당하지 않는다고들 말합니다.
인간 사회의 신분이라는 제도도 이러한 인간의 비교 우위에 대한 욕망과 연관된 것은 아닐까요. 가진 자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자신과 자기 자식들이 지속적으로 우쭐거리며 살기 위해서, 현재 만들어놓은 비교우위의 상황을 고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신분제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사람들을 신분이라는 굴레로 묶고 서열화시켜 놓음으로써, 가진 자는 자자손손이 현재의 기득권을 손쉽게 물려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도 직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말로는 그저 모두가 벼슬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벼슬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직분에도 알게 모르게 서열이 매겨져 있습니다. 담임목사·장로·시무권사·안수집사·권사·서리집사·성도로 이어지는 직분의 순서는 공식적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서열입니다.
과연 목사는 특별한 신분일까요?
하지만 역시 교회에서의 가장 큰 서열은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오늘날 목사라는 칭호는 특별한 신분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목사들이 흔히 하기 좋아하는 말 중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니까 평신도가 가타부타 따지지 말라" 는 경구(?)가 있습니다. 이 말 속에는 목사는 특별한 신분의 사람이라는 믿음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목사들에게 흔히 따라붙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명칭은 사실 평신도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롬 6:22).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국교회에서는 이 말을 주로 목사에게 전속된 호칭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아닌 평신도를 보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호칭하면 왠지 불경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분위기입니다. 성경 본래의 가르침은 거부되고, 인간이 만들어낸 이상한 관습이 더 우선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습니다.
종교개혁자였던 마르틴 루터는 교황이나 주교가 기름을 붓고 체발하고 서품을 하고 봉헌례를 하고 평신도와는 다르게 옷을 입음으로써, 스스로를 "영적 계급"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루터의 주장에 따르면, 사제(성직자)는 일반 사회 공동체에서의 관리(국가 공무원)와 같은 것입니다. 특정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단지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일시적으로 직무를 맡긴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마치 사제가 무슨 특별한 신분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여, 한 번 사제가 되면 영원히 사제로서 특별한 신분을 얻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단지 인간이 만들어낸 그릇된 제도일 뿐이라고 루터는 선언하였습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는 목사라는 특별한 신분을 얻어야만 당회장·제직회장·공동의회장·설교권·축도권 등의 권한을 손에 쥘 수 있습니다. 목사가 되기 전에는 꿈도 꿀 수 없는 직무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직무를 홀로 독차지하는 목사라는 신분을, 성경은 결단코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초대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직무를 주고 그 직무에 걸맞은 호칭을 붙여주었던 것이지, 특별한 신분을 정해놓고 그 신분에 귀속되는 권한이나 직무를 규정해놓았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평신도니 성직자니 하는 구분은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그릇된 제도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종교가 세속화하면서 교회가 권력 집단화하고 성직자들이 특혜를 누리게 되자, 이를 둘러싼 일종의 권력다툼과 기득권 확보경쟁이 낳은 결과였던 것입니다.
기독교 직분에서 최고의 정점은 사도라는 직분입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로서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셨습니다. 또한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보냄을 받은 자로서 사도라고 칭하여졌습니다. 물론 그 중 열두 사도가 대표적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그들만이 사도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동생 야고보나 바나바나 바울도 역시 사도라 칭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있을 뿐,
예수께서 열두 사도를 파송(보냄)하셨을 때, 열두 사도가 한 일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예수의 말씀을 전하고, 귀신 들리고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열두 사도가 예루살렘에서 한 일 역시 예수의 말씀을 증언하고 병든 백성들을 치유하는 것이었습니다.
헬라파 유대인 과부들이 구제에서 소외됨으로 원망이 일어나자, 사도들은 즉시 헬라파 유대인 지도자 일곱 명을 집사로 세웁니다. 자신들이 구제에 관계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선언하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합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구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곱 집사를 뽑게 된 것이므로, 일곱 집사의 할 일은 당연히 구제하는 일에 한정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스데반과 빌립에 관한 기사는 그들의 본업(?)인 구제 활동과 연관된 얘기가 아닙니다. 그들이 구제활동이라는 직무만을 위하여 선택된 것이라면 당연히 구제활동과 연관된 이야기가 이어져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사도행전에서 이어진 기사는 스데반이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병든 자들을 치유하며) 헬라파 유대인 회당에서 예수를 증거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열두 사도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였던 것과 똑같은 일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와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가 행한 이적은 베드로와 바울이 행했던 이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그 대상 지역이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이었다는 점이 베드로 사도와 다를 뿐입니다.
아마도 열두 사도의 주 활동 무대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회당과 예루살렘 성전이었고, 일곱 집사의 활동 무대는 주로 헬라파 유대인들의 회당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곱 집사는 헬라어를 쓰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위해 선택된 지도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열두 사도나 바울 사도의 직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헬라파 유대인들을 향하여 세워진 사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보내졌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사도라는 직분은 신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대로 인간을 쓰시기 위해 주신 은사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엡 4:11~12)
사도나 선지자나 전도자나 목사(목자)나 교사 등의 명칭은 모두가 각각 그 쓰임새(직무)에 따라 붙여진 호칭에 불과합니다. 그 명칭이 그들의 신분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는 한 사람이 선지자로 불릴 수도 있고, 교사로 불릴 수 있고, 사도로 불릴 수도 있습니다(행 13:1~3). 그에게 맡겨지는 직무에 따라서 붙여지는 호칭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목사라는 호칭을 대단한 신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성직자라는 명칭 하에 교회의 모든 직무에 있어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는 권력의 자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목사가 아니면 강대상에서 설교도 축도도 할 수 없고, 당회장이나 제직회장이나 공동회장도 못하고, 세례도 줄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성경의 본래 가르침과 어긋나는 제도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는 세상을 향하여 보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이 땅에 존재합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예수의 명령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부름 받았음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제자가 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써,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이 그렇게 했듯이 말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에는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신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도로서 부름 받은 예수의 제자들이 있을 뿐입니다.
첫댓글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디모데전서를 통해 전해준 교회의 여러 요건들과 몸을 이루는 성도들이 나아갈 길을 주셨음을 아는데... 단지 문제는 그것을 자신의 식으로 바라보고자하는 자들이 문제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