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의 비유
<연중 제17주간 목요일>(2023. 8. 3. 목)
(마태 13,47-53)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13,47-50).”
종말의 심판에 초점을 맞추면,
‘그물의 비유’는 ‘가라지의 비유’와 뜻이 같은 비유입니다.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라는 말씀은
‘가라지의 비유’에도 있습니다(마태 13,42).>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낸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이 말은, 심판은 의인들과 악인들을,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사람들과
자격이 없는 사람들을 분리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주님의 심판은 지극히 공정하게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억울하게 탈락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고,
반대로 자격이 없는데도 부당하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경우도 없을 것입니다.
또 그 심판은 절대적인 일이기 때문에, 재심, 삼심 제도 같은
것은 없고, 한 번 선고가 내려지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의인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또는 못 들어가는 악인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모릅니다.
바로 그 질문이 루카복음 13장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3-24)”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받을 사람의 수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면서도 노력하지 않아서
못 들어가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는 답변입니다.
<수가 얼마나 될지 궁금해 하지 말고,
너 자신이 들어가려고 노력하라는 뜻입니다.>
‘좁은 문’이라는 말 때문에, 하느님 나라는 들어가기가 굉장히
어려운 곳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42).”
살면서 작은 선행을 한 번이라도 실천했다면, 그 선행 덕분에
지옥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하늘나라로 직행할 수는 없을 테니,
연옥이라는 곳이 필요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그렇다면 ‘심판’은 한 사람이라도 더 잘라내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옥으로 떨어뜨릴 이유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 받아들일 이유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기 위한 심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끝까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만이 구원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들 자신들이 스스로 멸망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구원받기를 희망하면서 어떻게든 회개와 보속을 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비록 그 회개가 불완전하고, 보속이 많이 부족하더라도,
주님께서 그를 지옥으로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고기’ 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그물의 비유’는 ‘혼인잔치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 종들이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 22,10-13).”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라는 말은,
복음은, 또는 주님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선포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악한 사람’이라는 말은, 죄인이었지만 회개한 사람,
또는 사회적으로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채로 살고 있지만
회개한 사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됩니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으면서도,
또는 부르심에 응답했으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은 사람입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는데도, 예복을 안 입었다고
꾸짖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복을 안 입은 사람은 하나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초대를 받았든지,
아니면 집에서 여유 있게 초대를 받았든지 간에
그 초대에 응답한 사람들은 붙잡혀서 끌려간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이 모두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날은 갑자기 닥치겠지만,
그 전에 ‘회개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들의 멸망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요한 3,17).
그런데 그 시간은 바로 ‘지금’입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으면서도,
또는 부르심에 응답했으면서도
신앙인답게 살지 않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