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孤山) 윤선도와 우암(尤菴) 송시열은 조선 후기에 최고위직에 올랐던 거물급 정치인이자 성리학의 대가였다.
국왕을 보필하며 국사를 이끌었다.
'고산'이 '우암'보다 20년 선배였다.
'고산'은 1587년에 나서 1671년에 눈을 감았으니 향년 85세로, 그 당시엔 상상하기 힘들만큼 장수한 사람이었다.
'우암'은 1607년에 나고 1689년에 사약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83세.
역시 17세기 조선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감안하면 초장수의 삶을 살았다.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의 평균수명이 30대 중반 정도였고, 27명 국왕의 평균수명도 41.5세에 불과했으니 이들이 얼마나 장수했는지를 단박에 알 수 있으리라.
두 사람은 관직에 등용되어 국사를 살피다가 파직, 유배, 귀양, 복권, 은거를 반복적으로 경험했던 인물이었다.
한 때는 고위직에 올랐었고, 자기 당파의 영수를 지낼 정도였으니 정적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정쟁에서 밀리면 그것은 곧 죽음이거나 귀양을 의미했다.
특히 17세기 조선엔 사색당파가 정점을 향해 치달을 때였으니 두 말해 무었하겠는가.
'남인'과 '서인'으로 갈라졌고 또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쪼개졌다.
목숨 건 주도권 싸움은 언제나 서슬퍼런 칼날이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왕가에 상이 발생했을 때, 상복을 얼마동안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격돌했다.
현재의 기준으로 보자면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을뿐만 아니라 말도 안되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당시엔 정파의 존립이 걸린 사생결단의 문제였다.
대공설(9개월)과 기년설(1년)의 충돌로 인해 제1차 예송(기해예송)과 제2차 예송(갑인예송)문제가 발생했다.
단순한 쟁송이나 분쟁이 아니었다.
승패는 곧 삶과 죽음이었고 요직이냐 파직이냐를 결정하는 운명의 갈림길이었다.
'고산'과 '우암'은 정파가 달랐고 많은 국사의 영역에서 대부분 대척점에 서 있었다.
오늘은 역사를 반추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므로 역사적인 피력은 이 정도까지만 언급하고 마무리하자.
이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들이 초장수의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그 당시 백성들보다 2-3배를 더 살았으니 말이다.
어째서 그랬을까?
나의 생각으로는 귀양, 유배, 은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맞든 틀리든 상관없다.
아무튼 나의 판단은 그랬다.
'고산'의 생애를 축약해 보더라도 그는 20여 년의 유배생활과 19년의 은둔생활을 하고 눈을 감은 인물이었다.
그가 파직과 복직을 수차례 경험하면서 관직에 몸 담았던 세월을 모두 합산하면 한 20여 년 정도 될까?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의 가문에서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여러차례 갇히고 묶이고 유배를 당했다.
권력에 환멸을 느껴 스스로가 산자수려한 '보길도'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완벽한 풍류를 즐기며 살았던 것이 초장수의 비결이 아닐까 싶다.
'서인'이자 '노론'의 영수였고 정신적 지주였던 '우암'조차도 삭탈관직과 복권을 수차례 겪었을 정도였으니 그 당시 정세가 얼마나 당리당략에 의한 자중지란이었는지 가늠하고도 남는다.
오늘, '고산'과 '우암'을 거론한 이유는 역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천혜의 섬, 보길도 때문이다.
내 가슴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아름다운 섬, 보길도.
그 섬에 꼭 가보고 싶었다.
언젠가는 속시원하게 끝내야만 했던 인생의 숙제였다.
그러나 바쁜 일상 때문에 자꾸만 우선순위에서 밀렸던 그 숙제를 2019년 만추에 확실하게 매듭짓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도 식지 않는 그리움으로, 강렬한 끌림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남아 있었던 바로 그곳,
더 이상 좌고우면하지 말고 떠나자 했다.
서울에서 KTX 열차로, 목포에서 차를 렌트해 해남 땅끝마을로, 거기서 다시 배에 차를 싣고 노화도로 들어갔다.
'노화도'와 '보길도'는 작은 다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노화도'가 위에 있고, '보길도'는 아래에 있다.
해남 땅끝마을에서 배 타고 들어가지만, 두 섬은 행정구역 상 완도군에 속해 있다.
육지를 떠난지 한 50분쯤 되었을까?
배는 육지에서 가장 가까운 노화도 북쪽 끄트머리, 산양항에 정박했다.
보길도를 가는데 노화도 북쪽 끄트머리에서 내리란다.
두 섬 사이에 다리가 생기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다녔다.
근데 진짜로 웃겼다.
위에 있는 노화도는 일반 도서였고, 바로 아래에 있는 보길도는 국립공원이었다.
작은 다리 하나 사이인데 한 곳은 개발이 한창이었다.
온갖 중장비와 덤프트럭들이 바쁘게 오갔다.
그러나 다른 한곳은 그야말로 깊은 숲과 푸른 바다 그리고 고요한 자연이 전부였다.
국립공원이라 마음대로 개발을 할 수 없었으니까.
덕분에 때 묻지 않은 청정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며 감상할 수 있었다.
행복했고 감사했다.
눈을 들어 시선이 머무는 데마다 푸른 산, 파란 하늘 그리고 광활한 바다가 전부였다.
동서남북 어느 바다를 보더라도 끝없이 펼쳐진 전복양식장이 드넓은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입이 딱 벌어졌다.
십여년 전에 '신지도'에서 느꼈던 감동과 충격을 훨씬 능가하는 보길도의 바다였다.
대단했다.
'망끝전망대'에 차를 두고 배낭을 멨다.
운동화를 벗고 트레킹화로 갈아 신었다.
그리고 보길도의 등뼈와 같은 산길을 따라 섬 트레킹을 시작했다.
망월봉(350M)을 지나 보길도의 꼭지점인 격자봉(433M)에 이르렀다.
"아아, 감동어린 일망무제의 바다와 아름다운 다도해의 풍경이여!"
정말로 탄성이 절로 흘렀다.
아열대 수종의 나무들이 빽빽한 밀림을 이루고 있었다.
언뜻언뜻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면 수마트라의 어느 정글을 탐험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신선하고 깨끗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적이 없어 태고적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내친 김에 격자봉, 큰길재 삼거리를 지나 예송리 바닷가까지 신명나게 걸었다.
거기서부터는 바닷가 트레킹 코스를 따라 절벽을 오르고 내렸다.
숨막힐듯 아름다운 뷰가 계속 이어졌지만 정말로 팍팍하고 힘든 코스였다.
왕복 15K 정도였는데 낮시간 대부분을 트레킹에 할애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사진도 많이 담았지만 무엇보다도 '고산'의 삶과 생애를 머릿속으로 계속 반추하며 걸었다.
그는 보길도의 자연과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가 정착한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명명했고 올곧은 기상이 서려있는 '격자봉' 아래에 집을 짓고 낙서재(樂書齋)라 이름 붙였다.
풍류를 완상하며 공부하고 집필하기 좋아하는 그의 성향이 그스란히 담긴 작명이었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큰 재산으로 세연정(洗然亭), 회수당, 석실 등을 지어 놓고 그곳에서 마음껏 자연을 흠향했다.
그런 정서적인 안정과 깊은 사유 덕분에 그의 나이 65세였던 1651년에, 그의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보길도의 깨끗하고 맑은 자연이 모태였다.
한편, 숙종 때인1689년에 세자책봉 문제로 또 한번 궐안에 태풍이 일었다.
숙의 장씨가 낳은 아들(훗날 경종)의 세자책봉이 시기상조라며 극명하게 반기를 들었던 반대파의 태두가 바로 '우암'이었다.
숙종의 대노를 샀고 그런 탓에 그는 삭탈관직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목적지는 제주도였다.
제주에 가는 길에 섬이 너무 아름다워 잠시 그곳에 들렀던 우암.
(기록에는 제주로 가는 길에 태풍을 만나 보길도에 잠시 머물다 갔다고 기술되어 있음)
그러나 내 생각엔 보길도 옆을 지나며 '고산'의 발자취를 무시한 채 그냥 지나칠 순 없었을 것으로 본다.
그때 우암의 나이 83세였다.
지금도 이 나이라면 많이 산 것이지만, 17세기 중엽엔 이미 천수를 누린 나이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정치 9단 '우암'은 숙종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제주도 유배'가 끝이 아니라 머지 않아 사약도 따라 올 것이란 것을 예감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고산'이 눈을 감은 지 18년 만에 그의 가장 큰 정적이자 치열한 경쟁자였던 '우암'은, 귀양길에 '고산'의 제2의 고향이었던 보길도에서 어떤 회한을 느꼈을까?
아마도 권력무상과 인생무상에 대한 애통함과 덧없음이 격자봉을 타고 넘지 않았을까?
나의 상상력이 너무 지나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배길에 잠시 보길도에 들었을 때 수많은 상념과 회한들이 '우암'의 가슴을 쳤을 것이다.
다음날 오전, 우리가 우암의 흔적을 찾아 나섰을 때 마침 가을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암이 거대한 바위에 새긴 글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상상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지는 모르겠지만 '고산'의 본거지였던 부용동(세연정)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보길도 동쪽 끝 거대한 해식애 바위 위에 '우암'은 시 한 수를 새기고 떠났다.
<八十三歲翁>으로 시작해 <感激泣孤哀>로 끝나는 오언절구 漢詩였다.
내용은 이랬다.
여든셋 늙은 몸이 / 멀고 찬 바다 한가운데에 있구나
한마디 말이 무슨 큰 죄이기에 / 세 번이나 쫓겨나고 보니 역시 빈궁하다
북녘의 상감을 우러르며 / 남녘바다 바람 잦기를 기다리네
이 담비 가죽옷 내리신 옛 은혜에 / 감격하여 외로이 흐느껴 우네
수직절벽 아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우암의 시 한 수.
그는 시를 새기고 한 잔 술을 따른 뒤에 아마도 두 번 큰 절을 했을 것이다.
한 번은 북녘의 상감을 향해, 한 번은 영원한 자연주의자인 동시에 가장 치열하게 경쟁했던 정치적인 맞수 '고산'을 향해서 말이다.
정철(鄭澈), 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歌人)으로 평가받고 있는 '고산 윤선도'.
이제 글은 여기서 끝을 맺자.
고산의 숨결이 아련히 묻어나는 아름답고 청정한 국립공원, 보길도의 자연을 몇 장의 사진으로 다시 만나보고 싶다.
대학자이자 거물급 정치가였으며 영원한 자연주의자였던 '고산'이 어째서 보길도에 뼈를 묻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조금이라도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수많은 인걸들이 명멸했어도 영롱하고 깨끗한 자연은 유구하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던가.
진정한 축복, 그것은 아름다운 자연이라 믿는다.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