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동북공정 작업이 한창인 시기에 맞물려 각 방송사에서
경쟁적으로 다루고 있는 고구려 및 발해사의 일부분을 다룬 역사극 "주몽"과 "연개소문", "대조영"에 등장하는 장면이 환단고기에 실려 있는부분을 살펴보면 이해가 될 것같기도 합니다.
이하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의 고구려본기제6의 일부를 해석한 것을 퍼왔습니다.
桓檀古記
第六券 太白逸史
第六冊 高句麗本紀
瓔陽武元好太烈帝時 天下大理 國富民殷
隋主楊廣 本鮮卑遺種 統合南北之域 以其餘勢 侮我高句麗 以爲小虜 侮慢上國 頻加大兵 我旣有備 而未嘗一敗也
弘武二十五年 廣又復東侵 先遣將兵 重圍卑奢城 官兵戰不利
將襲平壤 帝聞之 欲圖緩兵 執遣斛斯政 適有瑋衣一仁者 自願請從而偕到
獻表於楊廣 廣於舡中 手表而讀未半 遽發袖中小弩 中其胸 廣驚倒失神
右相羊皿 使負之 急移於小船而退 命懷遠鎭撤兵
廣謂左右 曰予爲天下主 親伐小國而不利
是非萬世之所嗤乎 羊皿等 面黑無答
後人歌之 曰
嗟汝蠢蠢漢家兒 莫向遼東浪死歌 文武我先號桓雄
綿亘血胤英傑多 朱蒙太祖廣開土 威振四海功莫加
紐由一仁楊萬春 爲他變色自靡繃 世界文明吾最古 攘斥外寇保平和
劉徹楊廣李世民 望風潰走作駒過 永樂紀功碑千尺 萬旗一色太白峨
영양무원호태열제때 천하는 크게 다스려져 나라는 부하고 백성은 성했다. 수나라왕 양광은 본래 선비의 유종족인 바, 남북의 땅을 통합하여 그 여세를 모아 우리 고구려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더니, 상국을 업신여기고 자주 대병을 일으켰으나 고구려는 이미 대비가 있어 한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홍무 25년 양광은 또다시 동쪽으로 침략해와서 먼저 장병을 보내 비사성을 여러겹으로 포위케했다. 관병은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하니 바햐흐로 평양을 습격하려 했다. 제께서는 이를 듣고 완병술을 쓰려 했다. 계략을 꾸며 곡사정을 보냈다. 때마침 조의 가운데 일인이라는 자가 있어 자원하여 따라가기를 청한 끝에 함께 표를 양광에게 바쳤다. 양광이 배에서 표를 손에 들고 읽는데 절반도 채 읽기 전에 갑자기 소매 속에서 작은 활을 꺼내 쏘아 그의 뇌를 맞혔다. 양광은 놀라 자빠지고 실신했다. 우상 양명은 서둘러 양광을 업게하여 작은 배로 갈아타고 후퇴하여 회원진에 명을 내려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하였다. 양광은 좌우에 말하여 가로대 '내가 천하의 주인이 되어 몸소 작은 나라를 쳐도 승리하지 못하니 이는 만세의 웃음거리가 아니겼는가?' 라고 했다. 양명 등은 얼굴색이 검게 변하여 대답 못하고 말았다.
후인들은 이를 노래로 불러 가로대,
오호 어리석은 한나라 어린애들아
요동은 향하지 마라.개죽음이 부른다.
문무의 우리 선조 한웅이라 불렀느니
자손들은 이어져서 영웅호걸 많단다.
주몽 태조 광개토님
위세는 세상에 울려 더할나위 없었고
유유 일인 양만춘은
나라 위해 못 바꿔 스스로 사라졌다
세상문명은 우리가 가장 오래니
오랑캐 왜구 다 물리치고 평화를 지켰다.
유철 양광 이세민도
보기만해도 무너져서 망아지처럼 도망갔다.
영락기공비는 천 척
만가지 기가 한 색으로 태백은 높단다.
라고 하였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석다산 사람이다. 일찌기 입산하여 수도하고 꿈에 천신을 보고 크게 깨닫다. 3월 16일 마리산으로 달려가 공물하며 경배하고 돌아오고, 10월 3일이면 백두산에 올라가 제천했다. 제천은 곧 신시의 옛 풍속이다.
홍무 23년 수군 130여만이 바다와 산으로 나란히 공격해왔다. 을지문덕은 능히 기이한 계책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이를 초적하고 추격하여 살수에 이르러 마침내 으를 대파혀였다. 수나라 군사는 무륙 양군이 무너져 살아서 요동성(오늘의 창려성)까지 돌아간 자가 겨우 2700인이었다.
양광은 사신을 보내 화해를 구걸했으나 문덕은 듣지 않고 영양제도 또한 엄명하여 이를 추격케하였다. 문덕은 제장과 더불어 승승장구하여 똑바로 밀어붙여 한쪽은 현도도로부터 태원까지 추격하고 한쪽은 낙랑도로부터 유주에 이르렀다. 그 주군에 쳐들어가 이를 다스리고 그 백성들을 불러다가 이를 안무하였다. 여기에서 건안 건창 백암 창려의 제진은 안시에 속하고 창평 탁성 신창 용도의 제진은 여기에 속하고 고노 평곡 조양 누성 사구을은 상곡에 속하고 화룡 분주 환주 풍성 압록은 임황에 속했다. 무두 옘처럿 관리를 두고 다스렸다. 이에 이르러 강병백만으로 강토는 더욱 더 커졌다.
양광은 임신의 오랑캐라고 한다. 출사가 성대하기로는 예전에는 그 예가 없었다. 그런데 조의 20만인을 가지고 모조리 그 군을 멸망시켰는데 이는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과 같은 분은 곧 만고에 세상의 흐름을 만드는 한 성걸이다.
문충공 조준이 명나라 사신과 더불어 축배하고 함께 백상루에 올라 이렇게 시를 읊었다.
살수는 탕탕하게 흘러 프르고 허하고나,
수나라 병사 백만은 물고기 밥이 되었지.
이제 가던 길 멈춰 어부에게 그 때 얘기 듣나니
장부 이 한마디 웃음 남기기엔 오히려 모자라네.
옛 역사에서 말하기를,
'영양수원호태열제의 홍무 9년 제는 서부대인 연태조를 보내 등주를 토벌하고 총관위충을 잡아 죽이게 하다'라고 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는 병럭으로써 제나라 노나라 오나라 월나라 등지를 평정한 후 관서를 설치하여 호적을 정리하고, 왕작을 분봉하여 험난한 요새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정벌한 곳의 세금을 고르게 부과하여 모든 것을 내지에 준하게 하였다. 명치연간에 백제의 군정이 쇠퇴하고 진흥치 못하매 권익의 집행이 모두 성조로 돌아왔다. 성읍을 구획짓고 문무의 관리를 두었는데 수나라가 또 군대를 일으켜 말썽이 났다. 남북이 소요하여 사방이 온통 시끄러워지니 해독은 백성들에게 시치게 된지라. 제는 몹시 화를 내어 삼가 하늘의 뜻을 행하여 이들을 토벌하니, 사해에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수나라 왕 양견은 은밀하게 모반의 뜻을 품고 감히 복수의 군대를 내어 몰래 위충 총관을 파견하여 공명을 위해 관가를 부수고 읍락에 불지르고 노략질하게 하였다, 이에 제는 곧장 장병을 보내 적의 괴수를 사로잡아 죽이니,산동지방은 이에 다시 평정되고 해역은 조용해졌다. 이 해에 양견은 또 양량왕세적등 30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 정주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고는 병력을 모아 등주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척을 징집시켜 동래로부터 배를 띄워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는데, 고구려가 이를 알아차리고는 후군으로써 이를 방어하도록 내보냈는데, 갑자기 큰 바람이 일어나서 전군이 물에 떠다니는 판에 백제가 수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가 되려 하다가 고구려의 타이릇을 받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좌장군 고성은 은밀하게 수나라와 친할 마음이 있어 은밀하게 막리지의 북벌계획을 막았다. 이에 여러 차례 청해서 출사하여 공격함으로써 공을 세웠다. 그러나 홀로 막리지는 대중의 의견을 물리치고 남수북벌의 정책에 집착하여 여러차례 이해관계를 들어 말하므로 이 말에 따르게 되었다. 고성이 즉위하게 되자 전황제의 모든 정책은 폐기되었다.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노자의 상을 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청강시켰다. 또 무리 수십만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으니 부여현으로부터 남해부에 이르는 1000여리이다. 때에 서부대인 연개소문은 청하여 도교를 강하는 것과 장성쌓는 일을 중지시키고자 했으나 제는 기꺼워하지 않고 소문의 병사를 빼앗고는 장성을 쌓는 일의 감독을 시키더니, 은밀하게 뭇 대인과 더불어 의논하여 연개소문을 주살코자 하였다.
소문은 앞질러 이 말을 들을 수 있어 장탄식하며 말하기를, '어찌 이몸이 죽고나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랴? 일은 급하다. 때를 잃지 말지라.' 하고 모든 부장을 모아 마치 열병하는 것처럼 하고는 성대하게 술상을 벌려 뭇대신을 초청하여 함께 이를 시찰하자고 하였다. 모두가 참석하자 소문이 소리를 크게 내며 격려하기를, '대문에 호랑이 여우가 다가오는데 백성구할 생각은 않고 되려 나를 죽이려 한다. 빨리 이를 제거하라' 하니 제는 변고를 듣고 평복으로 몰래 도망쳐 송양을고 가서 조서를 내려 나라의 대신을 모으려 했으나 한 사람도 오는 사람 없고 보니 스스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저절로 숨이 떨어져 붕어하였다.
<<조대기>>에 가로대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하고, 할아버지는 자유라하고, 증조부는 광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 나이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는데 의표웅위하고 의기호일하여 졸병들과 함께 장작개비를 나란히 베고 잠자며, 손수 표주박으로 물을 떠 마시며, 무리속에서 스스로의 힘을 다하였으니, 혼란한 속에서도 작은 것을 다 구별해내고, 상을 베풀때는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호하며, 마음을 미루어 뱃속에 참아두는 아량이 있고, 땅을 위로 삼고, 하늘을 경으로 삼는 재량을 갖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동하여 복종해 한 사람도 딴 마음을 갖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법을 쓰는데 있어서는 엄명으로 귀천이 없이 똑같았으니 만약에 법을 어기는 자 있으면 하나같이 용서함이 없었다. 큰 난국을 만난다 해도 조금도 마음에 동요가 없었으니 당나라 사신과 말을 나눔에 있어서도 역시 뜻을 굽히는 일이 없었고, 항상 자기 겨레를 해치는 자를 소인이라 하고, 능히 당나라 사람에게 적대하는 자를 영웅이라 하였다. 기쁘고 좋을 땐 낮고 천한 사람도 가까이 할 수 있으나 노하며 권세있는 자나 귀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가 겁냈다. 참말로 일세의 쾌걸인저!'라고 했다. 스스로 '물 가운데 살아서 능히 잠행할 수 있고 온종일 더욱 건장하게 피로할 줄 모른다'고 말해였다. 무리들 모두 놀라 땅에 엎드려 절하며 가로대 '창해의 용신이 다시 몸을 나타내심이로다'라고 했다.
소문은 마침내 고성제를 내어 쫓고 무리와 더불어 함께 고장을 맞아들여 이를 보장제로 삼다. 소문 드디어 뜻을 얻어 만법을 행하니, 대중을 위한 길은 정기 자유 개물 평등으로 하고, 삼홀을 전으로 하고,조의에 율이 있게 하고,힘을 국방에 쏟아 당나라에 대비함이 매우 완전하였다.
먼저 백제의 상좌평과 함께 의를 세웠다. 또 신라의 사신 김춘추에게 청하여 자기의 집에 머무리도록 하며 말하기를, '당나라 사람들은 패역하기를 짐승에 가깝습니다. 청컨대 우리나 그대들은 반드시 사사로운 원수를 잊고 지금부터 삼국은 백성들의 뜻을 모으고 힘을 합쳐 곧바로 당나라 서울 장안을 쳐든어가 도륙한다면 당나라 괴수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전승의 뒤에 옛 영토에 따라서 연정을 실시하고 인의로써 함께 다스려 약속하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영구준수의 계획으로 함이 어떻겠소?'
라고 하며 이를 재삼 권하였으나, 춘추는 종래 듣지 않았으니 애처롭고 가석할 일이었다.
개화 4년 당나라 이세민이 군신에게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제하의 땅이다. 수나라가 네번 출사하였어도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이제 출병하여 제하를 위해 자제의 원수를 갚고자 한다.' 고 하다. 세민은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이세적 정명진 동 수십만 명을 이끌고 요택에 이르다 진흙길 200여리 사람과 말이 다닐 수 없었다. 도위 마문거가 말에 채찍질하며 달려가 공격했지만 이미 싸움을 벌였던 행군총관 장군차는 대패했다. 이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였고 세민은 몸소 수백기를 이끌고 세적과 합쳐 백암성의 서남쪽을 공격했다. 성주인 손대음은 속여서 항복을 청하게 하고 실은 틈을 엿보아 반격하고자 하였다. 세민은 안시성에 이르러 먼저 당산으로부터 병사들을 진격시켜 이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북부의 욕살 고연수와 남부의 욕살 고혜진은 관병 및 말갈병 15만 이끌고 똑바로 전진하여 안시에 연결되는 진지를 쌓고,높은 산의 험악한 곳에 의거하여 진지를 쌓고 성의 곡식을 식량으로 삼고, 병력을 종휭무진으로 풀어 놓아 당나라군마를 약탈했다. 당나라군을 감히 접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려고 해도 지흙길이 가로 막았으니 가만히 앉아서 패하는 길밖에 없었다. 고연수는 군대를 이끌고 똑바로 나아가서 안시성에서 약 40리 떨어진 곳에 나아가더니, 사람을 보내 대로 고정의에게 물었으니 그는 나이가 많아서 모든 일에 익숙했다. 정의노인은 대답하기를, '이세민은 안으로 군웅들을 제거하고 집을 바꿔 나라를 이루었으니 역시 범상하진 않다. 지금 모든 당나라의 병력이 떨치어 나왔으니 업신여길 수가 없다. 우리들로서 바람직한 것은 군대를 움직이지 말고싸우지 않으며,여러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며,날랜 병사들을 보내 그 식량 보급의 길을 끊는 것보다 좋은 계책은 없다. 식량이 이미 끊겨 싸우고자 하나 싸워주지도 않고, 돌아가려해도 길이 없으니 결국 이기기 마련이라' 고 하였다. 고연수는 그 계략에 좇아 적이 오면 막고, 적이 도망가면 곧 추격을 멈추고, 또 날랜 병사들을 파견하여 식량의 길을 끊고, 불태우거나 빼앗게 하자 이세민은 백가지 계략으로 유혹하여 뇌물도 썼으나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고는 속으로는 거슬렸다. 수시로 습격을 감행하여 마구 무너뜨리니 적군의 사상자는 쌓여만 갔다. 고연수등은 말갈과 병력을 합쳐 진지를 펴고 지구전을 벌이다가 어느날 저녁 표변하여 작전을 개시하여 급히 습격하여 번개처럼 치니, 이세민은 거의 포위될 뻔하게 되자 비로소 두려운 빛을 보였다. 이세민은 또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재물과 보화를 보내면서 연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귀국의 힘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였으므로 그 죄를 물으려온 것이다. 그대의 나라에 들어와서 싸움을 하게 됨에 말 먹이와 식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얼마간 노략질을 몇 곳에서 했었을 뿐이니, 그대의 나라가 예를 갖추어 수교를 기다리면 반드시 회복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연수는 말했다. '좋다, 그대의 군사가 30리를 후퇴하면 곧 나는 우리 황제를 알현코자한다. 그렇지만 막리지는 국가의 기둥이다. 군법을 스스로 갖고 있으니 많은 말도 팔요가 없다. 그대의 임금 세민은 아비를 폐하고 형을 죽이고 동생의 아내를 음란하게도 받아들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죄를 물을 만하다. 그 뜻을 이세민에게 전하여라.'
이에 사방으로 감시관을 보내 더욱 더 방비를 굳혔다. 산에 의지하여 전지를 굳히고 허를 틈타 기습하니, 세민은 백가지 계략을 다 써도 어쩔수가 없어 요동 출병의 불리를 통한히 여길 뿐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유공권의 소설에서,
'육군은 고구려의 조롱거리가 되고 거의 떨쳐 일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척후병이 영공의 군기는 흑색 깃발(고구려의 군기 색갈)로 에워 싸였다고 보고 하니 세민은 크게 놀랐다. 종내 저 혼자 탈출했다 해도 위험을 이와 같았다.' 라고 하였으니, <<신구당서>>와 사마공의 <<통감>>이 이를 적지 않음은 어찌 나라를 위해 치욕스러운 일을 숨기려 함에서가 아닐까보냐?
이세적은 세민에게 말한다.
'건안은 남쪽에 있고 안시는 북에 있습니다. 우리 군대의 양곡은 벌써 요동으로 수송할 길을 잃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 건안을 습격하는데 만일 고구려가 수송로를 끊으면 군세는 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안시를 공격함만 같지 않으니 안시가 함락되면 곧 북치고 행진하여 건안을 취할 뿐입니다.' 안시성의 사람들은 세민의 깃발이 덮어오는 것을 멀리 바라보며 성위에 올라 북치고 떠들며 침을 뱉으며 세민을 조롱했다. 그의 죄목을 열거하면서 무리에게 떠들어 댔다. 세민은 몹시 화를 내면서 성을 함락시키는 날 성중의 남여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흙구덩이에 생매장하겠다고 했다. 안시성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더욱 더 굳게 성을 지키니 성을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았다. 때에 장량은 사비성에 있었는데 그를 불러오게 하였으나 채 이르지 못하였고. 이리저리 망설이는 사이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도종도 역시 험악한 곳에 떨어져 떨치지 못하니 당군의 여러 장수들은 의논한 끝에 갈라졌다. 세적만이 홀로 생각하기를 '천자의 친정은 제장의 정벌과는 달라 요행을 바라고 행동한다는 건 안될 일이다. 지금 건인 신성의 적은 무리가 수십만이요. 고연수가 이끄는 말갈의 군대도 역시 수십만이다. 국내성의 병력도 오골성을 돌아 낙랑의 여러 길을 차단할 것 같다. 그리 된다면 저들의 세력은 날로 성해지고 포위당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적을 우롱하다가는 후회막급이 될 것이니,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고 다음에 건안을 취하고 그런 후에 천천히 진격하느니만 못하다. 이것이 만전책이다.'라고 했다. 이 문제가 채 결론도 나기전에 안시성주 양만춘은 이를 듣고 밤 깊음을 틈타 수백의 정예를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내려오니 적진은 스스로 서로 밟고 찔러 살상된 자가 수 없이 많았다. 세민은 이도종을 시켜 흙산을 성의 동남쪽에 쌓게 하였다. 관병(고구려 병사)은 성의 틈 사이로 출격하여 마침내 토산을 뺏고 참호를 파고 이를 지키니 군세는 더욱더 떨치더라. 당군의 여러 진은 거의 싸울 힘을 잃으니, 부복애는 패전으로 목잘려 죽고 도종이하 모두가 맨발로 나와 죄를 청하였다. 막리지는 수백기를 이끌고 난파를 순시하며 상세하게 정세를 듣더니 사람을 보내 총공격하여 사방을 칠 것을 명하였다. 연수등도 말갈병과 합쳐 협공하고 양만춘은 성위에 올라가 싸움을 격려하니 사기는 더욱 떨쳐저서 일당백의 용맹이 없는 자가 없었다. 세민은 이기지 못함을 분하게 여겨서 감연히 나서서 싸우려 했다. 양만춘은 이에 한마디 소리지르며 화살을 당겨 반공에 날렸다. 세민은 진에서 나섰다가 왼쪽 눈에 화살을 맞아 떨어져버렸다. 세민은 어쩔 줄을 모르고 군사들 틈에 끼어서 도망쳤다. 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볍 기병 수만을 이끌고 후군이 되도록 하였으나 요택의 진흙길은 군마의 행군을 어렵게 했다. 무기에게 명하여 모든 병사들에게 풀을 베게하여 길에 깔고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니. 세민도 몸소 장작을 말고삐에 연결하여 매고 역사를 도왔다. 겨울 10월 포오거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고 길이 메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심한 바람과 눈이 몰아쳐서 사졸들을 적시니 죽는 자가 많이 많이 나왔다. 이에 불을 길에 지피고 기다렸다. 때에 막리지 연개소문은 승승장구 이들을 심히 급하게 이들을 추격했다. 추정국은 적봉에서부터 하간현으로 이르고, 양만춘은 곧바로 신성으로 나아가니, 군세는 크게 떨쳐졌다. 당나라 군사는 갑옷과 병기를 마구 버리면서 도망가, 드디어 역수를 건넜다. 때의 막리지는 연수에게 명하여 용도성을 개축케 하니 지금의 고려진이다. 또 제군을 나누어서 일군을 요동성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창려이다. 일군을 세만의 뒤를 바짝 쫓게 하고 또 일군을 상곡을 지키게 하니 지금의 대동부이다. 이에 세민은 궁지에 몰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침내 사람을 보내 항복을 구걸케 되니 막리지는 정국 만춘 등의 수만 기를 이끌고 성대하게 의용을 갖추어 진열한 뒤 선도하게 하여 장안에 입성하여 세민과 약속하였으니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좌가 모조리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백제와 더불어 백제와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요서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백제가 영유하던 곳은 요서의 진평이라 했다.
첫댓글 사극을 보면서 배운 역사책에도 없는 이야기들이 등장하여 황당하기도 하고, 아이들이 물을 때에 진땀을 흘리시는 분들이 많으시다고 합니다. 참고 되세요.
환단고기를 뒤지다보니 몇 번 본 사극의 내용과 비슷하여 이름지어 봤습니다. 실제로 극본으로 택했는지는 연락모해봤십니다.
역사 자료 이렇게 소개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잘 읽고 많이 참고 하고 있습니다. ^^*
동북공정의 진위도 중요하고 ~~일본의 동방정책(독도영유권주장등 대표적사례)의 이 두정책은 두나라의 속셈이 무엇인가를 깊이있게 아시고 계셔야 할시기인데 지금이야 말로 국사에대한 정통성을 모르는 작태가 아쉽고 유비무환 정신을 심는 교육정책도 일희 일비 정책의 일관성이 없어 흔들림없는 초석이 없으니 아쉽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