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조선[古朝鮮]에서 조선[朝鮮]에 이르는 역사[歷史]의 영역[領域]
조선사[朝鮮史] !, 그 이름만 들어도 조선사[朝鮮史]의 후예[後裔]들에게 가슴이 설레고 마음의 격정[激情]을 끊어 오르게 하는 우리의 장구[長久]한 역사[歷史], 유구[悠久]한 세월 속에 위대[偉大]하고 찬란[燦爛]한 문명[文明]을 꽃피우며 장구[長久]한 세월을 도도히 흘러온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 앞에 모순[矛盾]과 의문[疑問]만을 가득히 않고, 대대로 속국[屬國]으로, 나약한 민족[民族]으로, 부끄럽고 초라하며 자주권[自主權]을 지키지 못한 민족[民族]으로 그려지고 있다.
근세[近世] 조선[朝鮮]의 말엽에 이르러서는 일제에게 나라를 송두리째 잃고 비참하고 미개한 후진적인 민족[民族]의 역사[歷史]가 되었으며,
반도[半島]땅의 조그만 지역에서는 같은 민족[民族]인 간신[奸臣]배들이 패거리를 가르며 판을 치고 이전투구[泥田鬪狗]를 벌이며,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역사[歷史]는 없는 듯하고, 외세[外勢]의 침략자[侵略者]들에게 나라를 잃은지 불과 반세기[半世紀]만에,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의 맥[脈]과 조선사[朝鮮史]의 명운[命運]은, 한가닥 희미한 역사적[歷史的] 진실[眞實]의 희망[希望]을 아득히 깊은 시름 속에 담고, 천하[天下]의 어두운 암흑[暗黑]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광복[光復]을 맞이하고 어언 반세기[半世紀]를 훌쩍 넘는 세월이 흐르고 있지만,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는,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는 상관없이,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에 의하여 다시한번 난도질을 당하고, 왜곡[歪曲]되며 조작[造作]되고 있으니, 외세[外勢]들에게 나라를 잃은 폐해[弊害]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역사[歷史]에 있어서,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이 나라를 잃은 치욕[恥辱]적인 어두운 그늘의 나락에서 끊임없는 방황[彷徨]과 혼란[混亂]을 자초하고 있다.
우리의 조상[祖上]님들께서 대대로 살아오신 생생한 삶의 자취[自取]이며, 정신[精神]과 혼[魂]이며 얼이요, 그 것을 이어받아 오늘날 우리가, 그 터전[攄田]인 이 땅 위에서 살고 있으며, 우리들의 자손[子孫]과 후예[後裔]들이 또한 대대로 살아가면서, 만년대계[萬年大計]를 세우는데 그 근본[根本]이 되는 정신적[精神的]인 지주[支柱]이며, 소중[所重]한 뿌리가, 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가 아니겠는가 ?
이제는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후예[後裔]들의 손으로, 침략자[侵略者]들이 만들어 놓은 간악[奸惡]하고 더러운 그 역사[歷史]의 위선[僞善]적인 가면을 벗기고,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아서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를 바로 세우는데 성심[誠心]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해동역사 [海東繹史]
단군조선[檀君朝鮮]
[조선세기[朝鮮世紀]
당요씨[唐堯氏]가 천하[天下]의 임금으로 있은 지 29년째인 무진[戊辰]에 단군씨[檀君氏]가 서서 처음으로 도읍[都邑]을 다스렸는데, 평양[平壤]에다 도읍[都邑]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다. 환웅[桓雄]은 천신[天神] 환인[桓因]의 아들이다. 태백산[太白山]의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와 사람으로 변하여 웅녀[熊女]와 합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박달나무 아래에서 낳았으므로 인하여 단군[檀君]이라고 하였다. 단군[檀君]의 이름은 검(儉)으로, 나면서부터 신명[神明]하여 구이[九夷]가 임금으로 삼았다. 은씨[殷氏] 무정[武丁] 8년 을미[乙未]에 단군[檀君]이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가서 신[神]이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1천[一千] 48세[四十八歲]였다. [중략]
해동역사 [海東繹史]
백두산(白頭山) -혹은 불함산(不咸山), 개마산(蓋馬山),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이라고도 한다. [중략]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圖會]
조선의 북쪽 달단(韃靼)의 남쪽 경계에는 큰 산이 있는데, 이름이 백두산[白頭山]이다. [중략]
해동역사 [海東繹史]
진서가 삼가 살펴보건대, 백두산은 회령부[會寧府]에서 서쪽으로 7, 8일 걸리는 곳에 있다. 옛날의 불함산[不咸山]으로, 중국 사람들은 장백산[長白山]이라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광종[光宗] 10년[959]년에 압록강[鴨綠江] 바깥쪽의 여진[女眞을 백두산[白頭山] 밖으로 몰아내 살게 하였다.” 하였는데, 백두산이라는 칭호가 여기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후한서 [後漢書]에 이른 바 개마산(蓋馬山) 역시 백두산[白頭山]이다. [중략]
후위서[後魏書] 물길열전[勿吉列傳]
물길국의 남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의 말로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중략]
비록 짧은 기록[記錄]으로 전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記錄]을 보더라도, 단군[檀君] 왕검[王儉]은, 불함산[不咸山], 즉 태백산[太白山]인 백두산[白頭山]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태백산[太白山]은 고조선[古朝鮮]의 시원지[始原地]임이 분명하며, 사서[史書]의 기록[記錄]이 근세[近世]까지 같은 내용으로 이어지고 있음은, 태백산[太白山]과 백두산[白頭山]이 단군[檀君]왕검[王儉]의 본원[本源]지지 임은 명확[明確]한 것이다.
단군[檀君] 왕검[王儉]이 구이[九夷]의 임금이니, 구이[九夷]는 사해[四海]의 이[夷]를 말하는 것인바, 사해[四海]의 임금이면 바로 천하[天下]의 임금이니, 곧 단군[檀君] 왕검[王儉]은 천하[天下]의 천자[天子]임을 말하는 것이다.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전[傳]하는 기록[記錄]들이 난마[亂麻]처럼 얽혀 있고, 모순[矛盾]과 의문[疑問]이 반복[反復]되고 있지만,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의 내용들을 대조하고, 그 흐르는 역사[歷史]의 맥[脈]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과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라 대입시키면, 조선사[朝鮮史]의 근본[根本]이 되는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된 모습을 정확히 볼수 있는 것이다.
불함산[不咸山], 태백산[太白山], 백두산[白頭山]은,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근세[近世]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록[記錄]을 통하여 같은 지역으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전[傳]해지고 있으니, 조선사[朝鮮史]에 있어서 이 지역을 찾아서 고증[考證]하여 증명[證明] 하게 되면,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의 강역[疆域]을 분명히 할수 있으리라.
해동역사[海東繹史]
고기[古記]에 나오는 ‘환인[桓因]’이니 ‘제석[帝釋]’이니 하는 등의 말은, 법화경[法華經]에 나오는 말인바, 신라[新羅]와 고려[高麗] 시대에 불교[佛敎]를 숭상하였으므로 그 폐해[弊害]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우리나라가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비장[祕藏]되어 있었던 국사[國史]가 모두 불타 남아난 것이 없게 되고, 승려들이 기록[記錄]한 것만이 암혈[巖穴] 속에서 보존되어 후세[後世]에 전해졌다. [중략]
이에 역사[歷史]를 쓰는 자들이 기록[記錄]할 만한 것이 없어서 답답한 나머지 간혹 이를 정사(正史) 속에 편찬[編纂]해 넣었다. 그런데 세대[世代]가 오래될수록 그 말이 사실로 굳어져서 중국[中國]에까지 흘러들어가 드디어는 인현[仁賢]의 나라인 우리나라를 말이 괴이한 나라로 만들고 말았으니, 통탄[痛歎]을 금할 수 없다.
또 살펴보건대, 회기[會紀]에 상[商]나라 무정 8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자년으로 당요 무진년부터 무정 갑자년까지는 1천 17년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사서[史書]에서는 모두 단군[檀君]의 나이가 1천 48년이라고 하고 있으니, 그 설[說]이 이치에 맞지 않아 상고[相考]할 수가 없다. [중략]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시[詩]에,
[傳世不知幾] 몇 대를 이어왔는지 모르겠으나 [歷年曾過千]지난 햇수는 천년이 넘더라
하였는데, 이는 대개 1천[一千] 17년[十七年]으로 세대를 전한 햇수를 삼은 것으로, 이 설[說]이 옳다. [중략]
여사[麗史]
단군[檀君] 시대[時代]를 전조선[前朝鮮]이라고 하고 기자[箕子] 시대[時代]를 후조선[後朝鮮]이라 하였기 때문에 지금 그대로 따른다. [중략]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는, 환국[桓國]으로부터 시작된 것은 분명[分明]하다. 그렇지 않고서 어찌, 단군[檀君]의 시조[始祖]를, 환웅[桓雄]은, 천제[天帝] 환인[桓因]의 아들이라고 기록[記錄] 할수 있겠는가 ?
그러나 전[傳]하는 기록[記錄]이 희미[稀微]하여, 단군[檀君]의 고조선[古朝鮮]으로부터 근세[近世]의 조선[朝鮮] 시대[時代]에 이르는 역사[歷史]까지만, 그 흐름과 영역[領域]에 대하여, 논증[論證]해 보기로 한다.
단군[檀君]께서 고조선[古朝鮮]을 세우고 나라를 여신 이래로, 삼한[三韓], 예[濊]와 맥[貊], 부여[夫餘], 옥저[沃沮],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발해[渤海], 일명[大震國], 고려[高麗], 조선[朝鮮]에 이르는 장구[長久]한 세월속에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는 도도히 흘러왔다.
단군[檀君] 왕검[王儉] 이래로, 오천년[五千年]의 유구[悠久]한 역사[歷史]에 이르는 조선사[朝鮮史]의 영역[領域]은, 환인[桓因]의 환국[桓國]과 신시[神市]의 시대[時代]를 제외하고, 시대[時代]에 따라 강역[疆域]에 대한 변동[變動]은 있었으나, 근세[近世]의 조선[朝鮮]에 이르기까지 그 본[本] 강역[疆域]은, 큰 틀에서 변함이 없었다.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을 따라서 나타나는 조선사[朝鮮史]의 흐름을 보더라도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는, 중요[重要]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 많이 소실[消失]되고 누락 되었으며,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 되었음을 누구나 알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현실이 이러함에도,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허실[虛實]을 가려내어 이를 밝히고,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바로 세우지 않는다면, 이는 조선[朝鮮]의 후예[後裔]가 아닐 것이며, 선대[先代] 조상[祖上]님들의 자손[子孫]임을 포기하는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국민[國民]임을 스스로 부정[否定]하는 것이 될 것이다.
산해경[山海經]
대황[大荒] 가운데에 산이 있는데 이름을 불함산[不咸山]이라 하며, 숙신씨[肅愼氏]의 나라가 있다. 비질(蜚蛭)이 있는데, 날개가 넷이다. 짐승의 머리에 뱀의 몸을 한 벌레가 있는데, 이름을 금충[琴蟲]이라고 한다. 대인[大人]이라고 이름하는 사람이 있고, 대인[大人]들이 사는 나라가 있는데, 성[姓]이 이씨[釐氏]이고, 기장을 먹고 산다. 대청사[大靑蛇]라는 뱀이 있는데, 머리는 황색이고, 고라니를 잡아 먹는다. 유산[楡山]이라는 산이 있고, [鯀]이 정주[程州]를 친 산[山]이 있다. [중략]
산해경[山海經]
숙신[肅愼]이라는 나라가 백민[白民]의 북쪽에 있다. 이름을 웅상[雄常] -어떤 데에는 ‘낙상[雒常]’으로 되어 있다.- 이라고 하는 나무가 있는데, 성인[聖人]이 새로 황제[皇帝]의 자리에 오르면 이 나무의 껍질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중략]
춘추좌전[春秋左傳]소[疏]
숙신씨[肅愼氏]에 대해서 위소[韋昭]는 이르기를, “동북이[東北夷]의 나라로 부여[夫餘]에서 1000리 떨어져 있으니, 진[晉]나라 때의 현도[玄菟]이다.” 하였으니, 바로 요[遼]의 동북[東北]쪽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예[杜預]는 말하기를, “현도[玄菟]의 북[北]쪽으로 300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으니, 이는 북이[北夷]로서 동[東]쪽에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두예[杜預]는 북이[北夷]라고 하고, 위소[韋昭]는 동북[東北]이라고 말한 것이다. [중략]
불함산[不咸山]을 찾으면 백두산[白頭山]을 찾는 것이요, 백두산[白頭山]을 찾으면 숙신[肅愼]지지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니, 숙신[肅愼]지지를 찾으면 부여[夫餘], 예맥[濊貊], 옥저[沃沮]를 찾고, 고구려[高句麗]의 시원지[始原地]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을 찾고, 낙랑[樂浪]과 현도[玄菟]를 찾을 수 있으며,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그리고 유주[幽州]를 찾을 수 있으며, 유주[幽州]를 찾으면, 연경[燕京]을 찾게 되는 것이다.
회남자[淮南子]
무릇 바다 밖의 36국 가운데 서북[西北]쪽에서 서남[西南]쪽에 이르기까지에는 수고[脩股]의 사람, 천[天]의 사람, 숙신[肅愼]의 사람이 있다. [중략]
춘추좌전[春秋左傳]주[註]
숙신[肅愼]은 북이[北夷]로, 현도[玄菟]에서 북[北]쪽으로 3000리 되는 곳에 있다. [중략]
사기[史記]주[註]
식신[(息愼]은 혹 숙신[肅愼]이라고도 하는데, 동북이[東北夷]이다. [중략]
사기[史記]
우[禹] 임금이 9주[州]를 평정한 다음 각각 그 직책으로 와서 공물을 바치게 하고, 황복[荒服]에 이르러서 북[北]쪽으로는 발[發]과 식신[息愼]을 무마하여 모두 순[舜] 임금의 공을 떠받들게 하였다. [중략]
현재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알타이산맥을 기점으로 해서, 서북[西北]과 서남[西南]으로 흑해와 터어키까지 이어지는 고대[古代]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은,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을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하고도 남는다.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沙漠]과 평원[平原] 지역에 이어, 산간 계곡에는 수[數] 천년[千年]의 풍파[風波]를 견디며 고대[古代] 역사[歷史]의 자취와 흐름을 전해주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회남자[淮南子]에서 말하는 바다 밖의 36국[國]가운데, 서북[西北]과 서남[西南]으로 수고[脩股]의 사람, 천[天]의 사람, 숙신[肅愼]의 사람이 있다는 이러한 기록[記錄]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찾아가는데 있어서 현재 보존되어 전하는 유적[遺跡]유물[遺物]과도 일치하며 부합[符合]되고 있으니,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歷史]의 교육[敎育]이라는 것이 얼마나 거짓되고 잘못된 것인가를 실감[實感]하고도 남는다.
후위서[後魏書]
물길국[勿吉國]은 고구려[高句麗]의 북[北]쪽에 있으니, 옛 숙신씨[肅愼氏]의 지역이다. 읍락[邑落]마다 각각 우두머리가 있다. 그러나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그곳 사람들은 굳세고 흉포하여 동이[東夷] 가운데에서 가장 강하며, 쓰는 언어도 그들만이 다르다. 두막루[豆莫婁] 등의 나라를 항상 깔보고 있으며, 여러 나라가 물길[勿吉]을 두렵게 여긴다. 낙양[洛陽]에서 5000리 떨어져 있다. [중략]
후위서[後魏書]
그곳의 땅은 낮고 습[濕]하다. 성[城]을 쌓아 놓고 혈거[穴居] 생활을 하는데, 집 모양은 무덤과 비슷하며, 출구[出口]를 위로 향하게 내어 사다리를 놓고 드나든다. 그 나라에는 소는 없고 수레와 말은 있다. 밭갈이를 할 적에는 두 사람이 짝을 지어 갈고, 수레는 사람이 밀고 다닌다. 곡식으로는 보리와 기장이 있으며, 채소로는 아욱이 있다. 물맛은 소금기가 배어 있으며, 소금은 나무에서 생산된다. 또 짠물이 고여 있는 못인 염지[鹽池]도 있다. [중략]
후위서[後魏書]
그 나라의 남[南]쪽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의 말로는 태백산[太白山]이라고 한다. 그 산에는 호랑이, 표범, 큰곰, 이리가 있어 사람을 해치므로, [중략]
삼국지[三國志]
읍[[挹婁]는 부여[夫餘]에서 동북쪽으로 1000여 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다. 남쪽은 북옥저[北沃沮]와 접하였고, 그 북쪽은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夫餘] 사람들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夫餘]나 고구려[高句麗]와는 다르다. 오곡[五穀], 소[牛], 말[馬], 마포[麻布가 산출된다. [중략]
삼국지[三國志]
사람들은 매우 용감하고 힘이 세다. 대군장[大君長]은 없으며, 읍락[邑落]마다 각각 대인[大人]이 있다. 사람들은 산림 속에서 살며, 항상 혈거[穴居] 생활을 한다. 대가[大家]는 그 깊이가 9계단이나 되며, 계단이 많을수록 좋은 것으로 여긴다. 그 지방의 기후[氣候]는 몹시 추워서 부여[夫餘]보다도 더 춥다. [중략]
삼국지[三國志]
활의 길이는 4척이며, 그 위력은 쇠뇌와 같다. 화살대로는 호[楛] 나무를 쓰는데, 길이는 1척 8촌이며, 청석[靑石]으로 화살촉을 만들었는바, 읍루[挹婁]는 옛 숙신씨[肅愼氏]의 나라이다. 활을 잘 쏘아 사람을 쏘면 모두 눈을 명중시킨다. 화살에 독약을 바르기 때문에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赤玉]과 좋은 담비가죽이 산출되는데, 오늘날 이른바 ‘읍루[挹婁]의 담비가죽[挹婁之貂]’이 그것이다. [중략]
진서[晉書]
숙신씨[肅愼氏]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의 북쪽에 있으며, 부여[夫餘]에서 60일쯤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北]쪽은 약수[弱水]에까지 닿아 있다. 그 땅의 경계[境界]는 너비와 폭이 수천 리이다. 사람들은 깊은 산골짜기에서 살며, 길이 험준하여 수레나 말이 통행하지 못한다. 여름철에는 소거[巢居] 생활을 하고, 겨울철에는 혈거[穴居] 생활을 한다. [중략]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의 기록[記錄]을 따라 역사서[歷史書]에서 가리키는 고대[古代]의 지역을 찾아 고증[考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사[朝鮮史]의 피폐[疲弊]함과, 멸실[滅失]되고 일그러진 우리의 역사[歷史]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행[遂行]해야 할 엄중한 과제이며, 조선[朝鮮]의 후예[後裔]들에게 내려진 천명[天命]이요, 사명[使命]이 아니겠는가 ?
숙신[肅愼]지지와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記錄]된 백두산[白頭山]의 지역을 찾아서 명확히 고증[考證]하면, 조선사[朝鮮史]의 역대 왕조[王朝]들의 강역[疆域]을 분명히 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유주[幽州]와 요동[遼東]과 요서[遼西]의 지역을 찾고, 고조선[古朝鮮], 부여[夫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 발해[渤海], 고려[高麗], 근세[近世] 조선[朝鮮]의 강역[疆域]을 분명히 하여, 잃어버리고 굴절된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를 바로 세우는데 근본[根本]이 되는, 역사[歷史]의 줄기와 그 토대를 확실[確實]하게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重要]한 것은,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의 원전[原典]에 기록[記錄]되고, 원전[原典]에서 설명하고 가리키는 지역을 따라, 정밀[精密]한 실측[實測] 조사를 통하여, 역사서[歷史書]의 기록[記錄]과 설명이 맞는 것인가를 징험[徵驗]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전하는 지형[地形]과 지리[地理], 강[江]과 하[河]천, 인종[人種], 기후[氣候],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그리고 현재 그 지역에서 전해오는 역사[歷史]에 대한 설[說]등이 일치하고 역사서[歷史書]의 원전[原典] 내용과 부합[符合]이 된다면, 역사서[歷史書]에서 가리키는 왜곡[歪曲]됨이 없는 본래의 지역을 찾게 되는 것이다.
현재에 조선사[朝鮮史]의 백두산[白頭山]과 숙신[肅愼]의 지역이 심히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되어 있음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백두산[白頭山], 즉 불함산[不咸山]의 북[北]쪽에는 숙신[肅愼]지지이며, 남[南]으로는 부여[夫餘]가 있었고, 예맥[濊貊]이 있었으며, 동[東]으로 옥저[沃沮]가 있었고, 백두산[白頭山]의 서남[西南] 지역에는 요동[遼東]과 요서[遼西]가 있었으며, 유주[幽州]가 있었다. 고조선[古朝鮮]의 기록[記錄]으로부터,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 고려[高麗]를 거쳐 근세[近世] 조선[朝鮮]의 말엽까지, 조선사[朝鮮史]와 대륙사[大陸史]를 포함하여 이러한 내용들은 일관되게 기록[記錄]되고 있으며, 특히 조선조[朝鮮朝]의 연행[燕行] 사신[使臣]들의 기록[記錄]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숙신[肅愼]의 위치[位置]를 정확히 고증[考證]하고 증명[證明]할수 있는 것은, 후위서[後魏書]와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등에 기록[記錄]되고 있는 내용들과, 현재까지도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들이 일치하고 부합[符合]되고 있으며, 명사[明史]와 청사[淸史], 그리고 조선인의 손으로 기록[記錄]된 조선사[朝鮮史]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역사[歷史]의 설[說]들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앞에 놓여진 우리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을 보기 위해서는, 개인의 힘과 노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현실[現實]을 바라보며,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후예[後裔]의 한사람으로서, 선대[先代]의 위업[偉業]과 미래[未來]의 후손[後孫]들을 위하여 발길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다.
진서[晉書]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 호시와 석노를 바쳤으며,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할 때에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였다. 그 뒤 1000여 년 동안 비록 진한[秦漢]의 강성한 세력을 가지고서도 그들로 하여금 들어와서 조회하게 하지 못하였다. 진[晉]나라 문제[文帝]가 위[魏]의 정승으로 있었을 때인 위나라 경원[景元] 말경에 이들이 호시, 석노, 궁갑[弓甲], 초피[貂皮] 따위를 가지고 와서 바치니, 위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그 물건들을 승상부[丞相府]에 보내도록 명하고, 숙신[肅愼]의 왕[王]에게는 요, 닭, 비단, 모직물, 솜을 하사하였다. [중략]
신당서[新唐書]
흑수말갈[黑水靺鞨]은 숙신[肅愼] 땅에 있는데, 또한 읍루[挹婁]라고도 하며, 원위[元魏] 시대에는 물길[勿吉]이라고 불렀다. 경사[京師]에서 동북쪽으로 6000리 밖의 동쪽 바닷가에 자리 잡았으며, 서[西]쪽으로는 돌궐[突厥]에 닿아 있고 남쪽은 고구려[高句麗]이며, 북쪽은 실위[室韋]이다. [중략]
신당서[新唐書]
땅은 수십 부[部]로 나뉘어 있으며, 추장[酋長]들이 각기 독자적으로 다스린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가 속말부[粟末部]로서, 가장 남쪽에 자리 잡아 태백산[太白山]에 닿아 있다. 태백산[太白山]은 도대산[徒大山]이라고도 하는데, 고구려[高句麗]와 서로 접해 있다. 속말수[粟末水]의 강가에 의지하여 사는데, 이 물의 근원은 태백산[太白山] 서쪽에서 흘러나와 북으로 타루하[它漏河]에 들어간다. 조금 동북쪽에 있는 것이 골돌부[汨咄部]이고, 그다음이 안거골부[安居骨部]이며, 더 동쪽은 불녈부[拂涅部]이다. 안거골부의 서북쪽에 있는 것이 흑수부[黑水部]이고, 속말부의 동쪽에 있는 것이 백산부[白山部]이다. 부와 부의 거리가 멀게는 3, 4백 리이고, 가깝게는 200리이다. [중략]
신당서[新唐書]
백산부[白山部]는 본디 고구려[高句麗]에 복속되어 있었으나, 왕사[王師]가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여 탈취하자, 그 무리 대부분이 당[唐]나라로 들어왔다. 골돌부와 안거골부 등도 모두 도망쳐 흩어져서 점차 사라졌으며, 유민[遺民]들은 발해[渤海]로 들어갔다. 오직 흑수부만이 완강하게 버텨 16부락으로 나누고 남부[南部]와 북부[北部]로 일컬었는데, 이는 그 위치가 가장 북[北]쪽이기 때문이었다. [중략]
신당서[新唐書]
정관[貞觀] 2년[628]에 그 지역을 연주[燕州]로 삼았다. 태종[太宗]이 고구려[高句麗]를 정벌할 적에 그 북부가 반기를 들고 고구려[高句麗]와 합세하였는데, 고혜진[高惠眞]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안시성[安市城]을 구원할 적에 싸움마다 항상 말갈[靺鞨]의 군사가 앞장을 섰다. 이에 태종이 고혜진[高惠眞] 등을 사로잡은 뒤에는 말갈[靺鞨]의 군사 3000여 명을 모아 모두 파묻어 죽였다. [중략]
신당서[新唐書]
개원[開元] 10년[722]에 말갈의 추장 예속리계[倪屬利稽]가 조근[朝覲]을 오자 현종[玄宗]이 그를 발리주 자사[勃利州刺史]에 제수하였다. 이에 안동 도호[安東都護] 설태[薛泰]가 흑수부[黑水府]를 두자고 청하였므로, 말갈의 부장[部長]으로 도독자[都督刺史]를 삼고, 조정에서 장사[長史]를 두어 감독하였다. 부[府]의 도독에게는 이씨[李氏] 성을 하사하고, 헌성[獻誠]이라는 이름을 하사한 다음, 운휘장군[雲麾將軍] 영흑수경력사[領黑水經歷使]를 제수하여 유주 도독[幽州都督]에게 예속시켰다. [중략]
신당서[新唐書]
불녈부는 또한 대불녈부[大拂涅部]라고도 칭한다.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연간에 여덟 차례 와서 경[(鯨睛], 초서피[貂鼠皮], 백토피[白兔皮]를 바쳤다. 철리부는 개원 연간에 여섯 차례 왔다. 월희부는 일곱 차례 오고, 정원[貞元] 연간에도 한 차례 왔다. 우루부는 정관 연간에 두 차례 오고, 정원 연간에 한 차례 왔다. 그 뒤에 발해[渤海]가 강성해지자 말갈[靺鞨]은 모두 그들에게 예속되어 다시는 조공하러 오지 않았다. [중략]
문헌통고[文獻通考]
옛날의 숙신[肅愼]은 바로 위[魏]나라 때의 읍루[挹婁]이다. 주(周)나라 초기부터 호시[楛矢]와 석노[石砮]를 조공으로 바쳤으며, 위나라 상도향공[常道鄕公] 말기부터 동진[東晉]의 원제[元帝] 초기 및 석계룡[石季龍] 때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공을 바쳤다. 후위[後魏] 이후에는 물길[勿吉]이라고 하였고, 지금은 말갈[靺鞨]이라고 한다. [중략]
무비지[武備志]
여진[女眞]은 옛날의 숙신씨[肅愼氏]로, 혼동강[混同江]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으로는 올량합[兀良哈]에 접하였고, 남쪽으로는 조선[朝鮮]과 인접하였다. 한[漢]나라 때에는 읍루[挹婁]라 하였고, 원위[元魏] 때에는 물길[勿吉]이라 하였고, 당[唐]나라 때에는 흑수말갈[黑水靺鞨]이라 하였다. 그 부락을 여진[女眞]이라 하며, 금[金]나라의 조상이다. 후대에는 요주[遼主]의 이름을 휘[諱]하여 여직[女直]이라 하였다. [중략]
춘추좌전[春秋左傳]
주[周]나라의 첨환백[詹桓伯]이 말하기를, “우리 무왕께서 상[商]나라를 쳐서 이긴 뒤부터는 숙신[肅愼], 연[燕], 박[亳]이 우리의 북[北]쪽 땅이 되었다.” [중략]
이아[爾雅]
십수[十藪]의 동[東]쪽 언덕은 신[阠]이고, 남[南]쪽 언덕은 식신[息愼]이고, 서[西]쪽 언덕은 위이[威夷]이고, 가운데 언덕은 주등[朱滕]이고, 북[北]쪽 언덕은 서유[西隃]와 안문[鴈門]이다.” 하였다. [중략]
해동역사[海東繹史]
살펴보건대, 호[楛]에 대해서 설문[說文]에는 ‘목[木]’이라 하였고, 서경[書經] 우공[禹貢]의 ‘균로와 호이다.[惟箘簵楛]’라고 한 곳의 주[注]에는 이르기를, “호[楛]는 화살대로 쓰기에 적당한 것이다.” 하였으며, 육기[陸機]는 말하기를, “모양은 가시나무와 비슷하고 붉은색이며, 줄기는 시초[蓍]와 비슷하다.” 하였고, 성경통지[盛京通志]에는 이르기를, “호[楛]는 일명 치미형[雉尾荊]이라고도 하는데, 색은 붉으며, 화살로 만들기에 적당하다.” 하였다. 세상에서 숙신씨[肅愼氏]의 호시[楛矢]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지금 세속에서는 서수라목[西水羅木]이라고 칭하는데, 서수라[西水羅]는 바로 두만강[豆滿江] 서[西]쪽 강변의 지명[地名]으로, 옛날 숙신씨[肅愼氏]의 남[南]쪽 경계[境界]이다. [중략]
석지여론[釋地餘論]
사기[史記]의 순본기[舜本紀]에는 그 지역[地域]을 칭하여 ‘북[北]쪽으로는 발[發]과 식신[息愼], 이라고 하였는데, 식신[息愼]은 바로 숙신[肅愼]으로 지금의 영고탑[寧古塔]인바, 경사[京師]에서의 거리가 3242리[三千二百四十二里]이다. 후대[後代]로 내려와 삼대[三代] 때에 이르러 무왕[武王]이 교통[交通]하자 와서 호시[楛矢]를 바쳤으며, 성왕[成王] 때에 정벌하자 마침내 와서 조하[朝賀]하였다. 그러니 더구나 우순[虞舜]의 성대한 시대에는 그곳이 영주[營州]의 지역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경계[境界]가 지나치게 먼바 별도로 설치[設置]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 [중략]
수서[隋書]
말갈[靺鞨]은 고구려[高句麗]의 북쪽에 있다. 읍락[邑落]에는 모두 추장[酋長]이 따로 있어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는바, 모두 7개의 종족이 있다. 첫 번째는 속말부(粟末部)로서 고구려[高句麗]와 인접하여 있으며, 정병[精兵]이 수천 명으로 용감한 병사가 많아 늘 고구려[高句麗]를 침입하였다. 두 번째는 백돌부[伯咄部]로서 속말부의 북쪽에 있으며, 정병이 7000명이다. 세 번째는 안거골부[安居骨部]로서 백돌부의 동북쪽에 있다. 네 번째는 불녈부[拂涅部]로서 백돌부의 동쪽에 있다. 다섯 번째는 호실부[號室部]로서 불녈부의 동쪽에 있다. 여섯 번째는 흑수부[黑水部]로서 안거골부의 서북쪽에 있다. 일곱 번째는 백산부[白山部]로서 속말부의 동남쪽에 있다. 이들은 모두 정병이 3000명에 불과한데, 그중에서 흑수부가 가장 굳세다. 불녈부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화살이 모두 돌촉이니, 곧 옛날 숙신씨[肅愼氏]의 지역이다. [중략]
통전[通典]
물길[勿吉]과 말[靺]은 그 음이 서로 이어졌다. [중략]
지리통석[地理通釋]
물길[勿吉]은 고구려[高句麗]의 북[北]쪽에 있으며, 또한 옛 숙신국[肅愼國]의 지역이다. 말갈[靺鞨]은 바로 물길[勿吉]이다. [중략]
단군[檀君] 왕검[王儉]의 태백산[太白山],.............. 구이[九夷]의 임금인 단군[檀君]은, 사해[四海]의 천자[天子]로서 조선사[朝鮮史]의 시조[始祖]이며, 천제지자[天帝之子]이다. 고구려[高句麗]의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비문[碑文]에, 유석시조추모[惟昔始祖鄒牟] 왕지창기야[王之創基也] 출자북부여[出子北扶餘] 천제지자[天帝之子]의 내용과 그 흐르는 역사[歷史]의 맥[脈]을 같이하고 있음이니, 천자[天子]의 칭호[稱號]는, 오직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근본[根本]이며, 그 도도히 흐르는 역사[歷史]의 정신[精神]이며, 그 맥[脈]이다.
그러므로 고려[高麗]는 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루었고, 조선[朝鮮]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육룡[六龍]을 몰고 다닌 것이다.
고조선[古朝鮮]의 태백산[太白山]과 고조선[古朝鮮]의 요동[遼東], 고구려[高句麗]의 요동[遼東], 발해[渤海]의 요동[遼東], 고려[高麗]의 백두산[白頭山]과 고려[高麗]의 요동[遼東], 조선[朝鮮]의 백두산[白頭山]과 조선[朝鮮]의 함경도[咸鏡道], 그리고 조선[朝鮮]의 요동[遼東], 이 태백산[太白山]과 요동[遼東]은,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근간[根幹]이며 분수령[分水嶺]이다.
구이[九夷]의 흐르는 정신[精神]과 역사[歷史]의 맥[脈]은 남방[南方]으로는 인도, 서방[西方]으로는 흑해를 넘어 동[東]유럽까지 서리고 있지만, 후대[後代]에 조선사[朝鮮史]의 역대[歷代] 왕조[王朝]들은, 백두산[白頭山]을 근간[根幹]으로 요동[遼東]을 기점[起點]으로 해서, 그 동[東]쪽은 대대로 근세[近世]의 조선[朝鮮]의 말엽까지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내지[內地]였다.
대륙사[大陸史]와 조선사[朝鮮史]의 원전[原典]의 기록[記錄]을 뒤로하고, 고대[古代]로부터 현재[現在]에 이르는 유적[遺跡]과 유물[遺物]의 길을 따라가 보면, 우리가 그동안 배워온 역사[歷史]라는 것이, 얼마나 거짓과 위선[僞善]의 탈을 쓰고 역사[歷史]의 진실[眞實]을 가리고 있는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고대[古代]의 유적[遺跡]과 유물[遺物] 중에서, 돌로 조각한 석상[石像] 하나만을 보더라도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歷史]의 상식은 그대로 산산히 부셔져 버리고 만다.
오늘날의 알타이산맥을 기점[起點]으로 하여 동[東]쪽과 서[西]쪽으로, 남[南]쪽과 북{北]쪽으로 이어지는 고대[古代]의 유적지[遺跡地]에 서 있는 석상[石像]들을 살펴보면,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그 역사[歷史]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조선사[朝鮮史] 역사[歷史]의 진실[眞實]과 그 본원[本院]을 보는 듯하다. 알타이산맥에서부터 드넓은 몽골[蒙古]의 대초원을 거치며, 요해지[了解地]와 유적지[遺跡地]의 곳곳에 서있는 고대[古代]의 석상[石像]들은, 동[東]으로는 한국[韓國]까지 이어지고, 서[西]쪽으로는 흑해와 동[東]유럽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서남[西南]으로는 터어키를 거쳐 아프리카 북부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석상[石像]들은 모두 같은 모습,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알타이산맥에서 시작하여 남[南]쪽 지역으로는 몽골[蒙古]의 내륙지역을 거치며 중국[中國]의 서안[西安]까지 이어지는 고대[古代]의 석상군[石像群]들의 모습을 보면, 문자가 없는 고대[古代]의 역사[歷史]를 한눈에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서안[西安] 인근의 고대[古代]의 릉[陵] 주변으로 이러한 석상[石像]들이, 머리가 잘리고 팔다리가 잘려 나간 체 수도 없이 버려진 채로 방치[放置]되고 있다.
그런데 이 석상[石像]들의 모습이, 알타이산맥에서 시작하여 몽골[蒙古]을 거쳐 한국[韓國]에 이르는 석상[石像]들과 동일한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점이다. 말없이 광활[廣闊]한 대륙[大陸]에 서있는 이러한 고대[古代]의 석상[石像]들은, 조선사[朝鮮史]의 역사[歷史]에 대하여, 과연 어떠한 역사[歷史]의 연원[淵源]을 들려줄 것인가 ?
우리가 역사서[歷史書]를 대할 때는 많은 부분[部分]을 종합적[綜合的]으로 필히 살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간과[看過]하지 말아야 할것이 있으니, 그것은 대륙사가[大陸史家]들의 더럽고 나쁜 버릇인, 바로 교치[僑治]에 대한 역사[歷史]의 기록[記錄]이다.
교치[僑治] : 어느 지역이 망한 뒤 다른 지역에다가 치소[治所]를 두고 명칭은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고전번역원 해설
해설 하시는 분은 교치[僑治]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허나, 대륙[大陸]의 사서[史書]를 보면 이러한 설명을 훌쩍 뛰어 넘는다. 그러한 수법의 한가지 예를 들면, 고려[高麗]의 00 왕[王]에게 벼슬을 높여주고 봉작[封爵]을 더 한다. 는 이러한 황당무계[荒唐無稽]한 내용을 역사서[歷史書]에 버젓이 기록[記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해관계가 없는 다른 나라의 영토[領土]를 관작[官爵]을 만들어, 자기 나라의 국토[國土]인양 가장[假裝]을 하고 있는데, 후대[後代]에 역사서[歷史書]를 보는 사람들이 이를 살피지 못하면, 교치[僑治]의 허구적인 행태가 역사[歷史]의 사실로 받아 들여 지는 것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현실을 오늘도 바라보노라면, 개탄[慨歎]을 금할 길이 없다. 반만년[半萬年]의 위대[偉大]한 역사[歷史]의 숨결은 어디로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인가 ?
국가[國家]의 역사[歷史]가 무너지니 선대[先代]의 가르침이 사라지고, 선대[先代]의 가르침이 사라지니 나라의 상도[常道]가 무너지는 것은 필연[必然]적인 것인가 ?
천하[天下]에 상도[常道]가 행해지고, 국가[國家]가 융성[隆盛]해짐은, 역사[歷史]의 본원[本源]으로부터 시작이 되나니,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역사[歷史]인 조선사[朝鮮史]는 대한민국[大韓民國]의 미래[未來]를 위하여 반드시 바로 세워져야 할 것이다.
|
첫댓글 오랫만에 주옥같은 글을 대하니, 마음마저 편안해집니다. 무더운 날씨가 이제는 서서히 기울어져 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조선사에 대한 애증이 깊을 수록 안타까운 심정은 더해 가는데, 조상의 역사조차 찾지 못하는 우리네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반성이 깊습니다. 가능하면 초심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좋은 글을 올리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