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와 같은 위서론을 견지하는 자들은 <한단고기>와 <규원사화> 류의 내용을 일제시대 민족정신 고양의 방안으로 창출되어진 위작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대개 일제식민사학의 거두인 이병도 또는 이병도의 1회 제자인 이기백 교수로부터 사대주의사학과 일제식민사관의 맥을 이어 받은 자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민족의 정체성, 주체성을 잃어버려 한마디로 혼이 나간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한단고기>와 <규원사화>를 위서라고 주장하면서 내 세우고 있는 근거로는,
첫째, 저자들과 저술연대에 대한 의혹
둘째, 인용고서의 불분명
셋째, 사서에 쓰인 용어사용의 부적절하다는 점 등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이들이 제대로 자료확인도 안하고 짧은 지식의 잣대로 '위서(僞書)'라고 주장해 왔던 <한단고기>, <규원사화> 등 우리의 사서(史書)들에 있는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해 주는 유물, 유적, 사료, 첨단기술을 통한 결과 등이 하나둘씩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천시(天時)가 되니 우리역사의 참모습이 온 천하에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1. 1915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발견된 불상의 광배명에는 '건흥5년 병진...'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 <삼국유사> 어디에도 '건흥(建興)'이라는 연호의 기록은 없습니다. 하지만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장수왕의 연호가 건흥(建興)이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년이 되니, 이 유물이 <한단고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장수홍제호태열제(20대 장수(長壽), A.D.413∼491)는 건흥(建興)이라고 연호를 바꿨다. 인의로써 나라를 다스려서 강역을 널리 넓혔다. 이에 웅진강 이북이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어 북연(北燕) 시위의 여러 나라들이 모두 족속의 서열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 신라 매금 백제 어하라와 남쪽 평양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2. 또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이 태조(太祚), 할아버지 이름이 자유(子遊), 증조할 아버지 이름이 광(廣)이라고 <조대기>를 인용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조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하면 어떤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남양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아들 남생의 묘지에는 남생의 증조부가 자유(子遊)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단고기>의 사료적 가치가 또 한번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조대기>에 가로대 '연개소문은 일명 개금이라고도 한다 성은 연씨. 그의 선조는 봉성 사람으로 아버지는 태조라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子遊)라 하고, 증조부는 광(廣)이라 했으니, 나란히 막리지가 되었다. 홍무 14년 5월 10일 태어났다.」<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
3. 1949년 중국 길림성 돈화현 현성 근처의 우정산 고분에서 발해의 4대 왕인 광성문황제의 둘째딸 정혜공주의 묘비가 출토되었습니다. 그 묘비에는 '大興寶歷孝感000法大王之二女也'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대흥(大興)은 4대 광성무황제(世宗)의 연호인데, 이것을 기록한 사서는 <태백일사>밖에 없으니, <태백일사>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게 해주는 자료라 하겠습니다.
「19년 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광종(光宗)이라 하고 시호(諡號)는 무황제라 했다. 태자 흠무(欽茂, 4대 세종(世宗), A.D.738∼794)가 즉위했다. 개원하여 대흥(大興)이라 하고 도읍을 동경의 용원부로부터 상경의 용천부로 옮겼다.」<태백일사 대진국본기>
4. 중앙일보 1997년 10월 2일자 기사에 "중국 당나라 때에는 761년부터 819년까지 4대 58년 간 당나라에 맞서서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독립국가인 '평로치청(平盧)왕국'이 있었다."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나라인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어느 사서에도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태백일사> 대진국본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으니, 이 또한 <한단고기>가 위서가 아님을 증명해 주는 자료라 하겠습니다.
「大興四十五年淄靑節度使李正己擧兵拒唐軍帝遣將助戰李正己高句麗人也生於平盧二十二年師衆逐軍帥李希逸立正己卒子納統父衆五十六年納卒子師古代其位及卒其家人不發喪潛使迎師道於密而奉之
대흥(大興) 45년(B.C. 782) 치청의 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당나라 군사에 항거하니 제는 장수를 보내어 전쟁을 돕게 했다. 이정기는 고구려 사람인데 평로(平盧)에서 태어났다. 22년 장수들은 군수 이희일을 쫓아내고 정기를 즉위시켰다. 정기가 죽은 후 아들 납이 아버지의 백성들을 통솔하였고 56년 납이 죽고 아들 사고가 그 대를 이었으며 사고가 죽자 그의 집안 사람들이 상례를 치르지 않고 은밀히 사도를 맞이하여 그를 받들었다.」<태백일사 대진국본기>
5. 1993년에 <한단고기>, <단기고사>의 사료적 가치를 높여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서울대학교 천 문학과 박창범 교수팀이 슈퍼컴퓨터를 이용해서 천문현상을 역추적 함으로써 <한단고기>, <단기고사>에 기록된 고조선 시대의 천문현상이 사실임을 증명해 낸 것입니다. 그간 위서(僞書)라는 이유로 무시되어 오던 두 사서(史書)의 진위(眞僞)를 첨단기술을 동원해서 밝혀낸 것입니다. 찬란했던 단군조선 2096년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고구려가 망한 것은 A.D. 668년이요, 발해의 건국을 A.D. 699년이라고 볼 때 고구려가 망한지 불과 31년 사이에 만주에서 고구려족은 사라지고 마치 말갈의 7부족이 만주 전체를 뒤덮은 것으로 오도(誤導)하고 있고 이들이 발해를 건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대진국본기>에는 발해(大震國)의 건국은 고구려가 멸망한 A.D. 668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건국자는 고구려의 진국장군(振國將軍)인 대중상(大仲象)이다.
※ 대중상(大仲象) : 발해의 1대 세조(世祖, A.D.668), 휘(諱)는 중상(仲象) 혹은 걸걸중상(乞乞仲象). 국호는 후고구려, 기원은 중광(重光), 시호(諡號)는 진국열황제
2)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 중국대륙에는 서기 761년부터 817년까지 4대 58년간 당나라와 맞서며 산동반도 일대를 장악했던 독립국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고구려 유민 이정기가 세운 평로치청왕국이다.
이정기는 서기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보장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온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다. 그의 본명은 '이희옥'이며, 평로에서 태어나 평로군 부장이 되었다. 서기 755년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평로에서 산동으로 건너온 그는 치청의 절도사 ' 우희일을 몰아내고 절도사가 된다.
서기 765년 당은 유화정책으로 이정기를 치청의 절도사로 임명하지만, 그는 반당세력으로서 독립노선을 추구한다. 서기 778년에 그는 수도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기고, 계속적으로 당에 대항 하는데, 이 당시 치청의 인구는 약500만, 넓이는 18만 평방 킬로미터 정도 되었으며, 군대는 10만이었다고 전 한다.
(당시에 신라의 넓이가 약 13만 평방킬로미터 정도 되었음을 볼 때, 상당한 국력을 가 지 나라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참고로 당시의 당의 인구는 5000만 정도 되었고 군대는 60 만 정도였음)
서기 781년 평로치청군은 제음에서 격전을 벌이는데, 이때 이정기(732-781)는 사망하고 서 기 782년 그의 아들 이납이 제왕에 오른다. 서기 813년 이납이 죽고 이사고가 즉위한다. 서기 815년 이사고가 죽고 동생인 이사도가 즉위한다. 이때에 이르러 당은 치청을 칠 목적으로 하음전운원에 있는 150간의 창고에 200만석의 군량 미를 비축하지만 이사도의 공격으로 불타게 된다.
서기 817년 당나라 헌종은 당군, 선무군, 위박군, 무령군(장보고의 군대)을 동원하여 치청을 공격하는데, 이사도가 전장에서 돌아오던 중 부관인 유오에게 시해당하여 사망함으로써, 서 기 818년에 4대 58년간 의 짧은 역사를 뒤로 하고 평로치청왕국은 멸망한다.
다음은 중국 청주박물관 부관장 씨아밍차이씨의 말이다.
"언젠가는 당신들이 찾아 올 줄 알았다.... 이정기는 당신들 한국인의 선조다. 이정기의 나라는 형식상 당나라에 속했으나 실제로는 조세, 법률 등을 독자적으로 시행하던 산동성 전체와 하북, 하남, 안휘성을 다스린 독립왕국이었다......" 아직도 청주 범공사에 이정기가 심었다는 당추(唐楸)라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위 글은 1997년 10월2,3일 KBS-1 TV에서 개천절 특집으로 방송됐던 "고구려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 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 '평로치청왕국'에 대한 기록
(1) 국민 조선 역사(최남선) : 이정기는 북지나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는 짤막한 기록이 있음
(2) 삼국사기 : 이사도가 당나라 헌종을 거역하여 신라가 군사 3만을 동원하여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음
일제식민사학에 빌붙어 사는 자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지요. 대개는 "실증자료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의 자료에 맞지 않으니 인정할 수 없다" "종교다..." 등등이지요. 이런 자들은 자기 조상 무덤을 하나하나 다 파보아서 뼈다귀가 나와야 인정해야 하는데 족보는 어떻게 믿는지 모르겠군요...
그럼 일제식민사학에 발끈해서 나온 감정을 열등감이라고 부르는지요? 또 일제식민사학에 반대하면 국수주의가 되나요? 그런 논리라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도 열등감에서 나온 국수주의자 내지 폭력주의자가 되겠군요... 그런데 일제식민사학을 두둔하는 이유가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모르겠군요.
제가 언제 식민사학을 찬성한 적도 없고, 님의 흑백논리에 발끈했을 뿐입니다. 물론 우리 학계가 아직 식민사학에서 탈피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님의 주장처럼 그렇게 매도당할 게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최소한 학계에서 주장하는 인간들보다 더 났군요. 님의 주장이 옳다는 편견은 버리십시요.
첫댓글 짧은 지식의 잣대로 어설프게 주장한다고요? 귀하는 기본적인 예의도 못배웠나요?
친일 사학계라는 것이 이마에 써서 붙이고 다니는 것도 아니니 정확히 가려내기는 어렵겠지요. 그런데 일제식민사학자들 주변에서 얼쩡대면서 한마디라도 거드는 자들도 마찬가지지요. 우리가 언제까지 일제총독부사관에 의존해야 하는가요?
일제식민사학에 빌붙어 사는 자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지요. 대개는 "실증자료가 없다", "일본이나 중국의 자료에 맞지 않으니 인정할 수 없다" "종교다..." 등등이지요. 이런 자들은 자기 조상 무덤을 하나하나 다 파보아서 뼈다귀가 나와야 인정해야 하는데 족보는 어떻게 믿는지 모르겠군요...
이러한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쓴 역사책의 말미에 있는 인용저서를 보면 거의다 일본학자가 쓴 역사책이지요. 못믿겠으면 확인해 보시길... 그리고 이런 자들한테서 배운 후학들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비슷하게 흉내를 내고 있지요..
이상하게 언제부터인가 역사를 바로 잡는다는 <바로사>에 일제식민사학에 빌붙어 사는 자들이 많이 들어와서 활동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럼 일제식민사학에 발끈해서 나온 감정을 열등감이라고 부르는지요? 또 일제식민사학에 반대하면 국수주의가 되나요? 그런 논리라면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도 열등감에서 나온 국수주의자 내지 폭력주의자가 되겠군요... 그런데 일제식민사학을 두둔하는 이유가 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모르겠군요.
제가 언제 식민사학을 찬성한 적도 없고, 님의 흑백논리에 발끈했을 뿐입니다. 물론 우리 학계가 아직 식민사학에서 탈피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님의 주장처럼 그렇게 매도당할 게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최소한 학계에서 주장하는 인간들보다 더 났군요. 님의 주장이 옳다는 편견은 버리십시요.
결국에... 이번엔 거의 10탕 정도 되나요? 개인적으로 발해고 봤지만 발해고는 신구당서를 원본으로 했는데 발해고에 발해 연호가 줄줄이 나온다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