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 더욱 그리워지게 하소서
- 10월 길위의학교를 다녀와서 -
점점 가벼워지는 길
요즘 학교는 참 숨 가쁘다. 밖에서 이러니 저리니 말이 많아도, 학교 안에 있어본 사람들은 안다. 학교가 얼마나 숨 가쁘게 돌아가는지... 그런데 그 바쁨이 배우는 기쁨과 만나는 즐거움 때문이라면 참으로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돌아보면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일들로 하루하루가 채워져 가는 것만 같다. 왜 이렇게, 무엇을 위해서 바쁜 건지 생각할 틈을 쉬 주지 않는다.
그 바쁜 와중에 한 달의 한 번 1박2일로 ‘길위의학교’에 나서는 것은 제법 결심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한 달에 겨우 2번 있는 정말 꿀맛같은 ‘놀토’가 낀 주말, 그 가운데 절반을 뚝 떼어내 또다시 ‘학교’에 가야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길위의학교’에 대해서 주변 선생님들은 ‘좋고 의미있는 일이다. 나도 언젠가는 한번 가보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처음 ‘길위의학교’ 계획을 세울 땐 참 거창했다. ‘주말과 방학을 이용해서 적어도 1년에 40일 이상의 커리큘럼을 만들고, 길 위에서 학생들에게 책과 만남을 제공하고, 1년차에는 국내를, 2년차에는 해외 기행을 하는 학교’를 꿈꿨다. 학교교육과 대안교육의 접점에서 새로운 돌파구, 혁명적인 학교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 멋진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는 나 자신이 정말 ‘훌륭한 교육자’라는 생각에 잔뜩 어깨에 힘을 주기도 했다.
그런데 요즘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머릿속 ‘길위의학교’가 많이 소박해지고 가벼워졌다. 적당히 걷다 보면 몸에 남아있던 불필요한 긴장이 풀어져 오히려 몸이 가볍고 부드러워지는데, 여러 차례 길 위로 나서보니 머릿속에 들어섰던 불필요한 긴장과 욕심이 많이 사라진 모양이다. 마치 먼 길 떠나는 여행자의 가방처럼.... 점점 가벼워지는 그 과정이 즐겁다.
일단 떠나면 본전 뽑는다
‘길을 걸으며 사람을 만나고 자연을 만나는 학교!’, ‘길위의학교’는 참 매력적이다. 걷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자연을 만나는 것도 모두 매력적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가장 큰 매력은 ‘길 떠남’에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떠남’에 있다. 허겁지겁 일상의 이런저런 일들을 정리하고선 버스에 몸을 올리고, 집도 아니고 직장도 아닌 낯선 공간이 버스 창에 비치면 느껴지는 낯섦. 그 낯섦이 익숙했던 생활을 돌아보게 한다. 긴 숨을 내쉬며 ‘후~ 내가 참 바쁘게 살았구나. 왜 이렇게 바쁘게 달려왔지? 무얼 위해서..’ 하며 돌아보게 된다. 하늘도 보게 되고, 멍하니 먼 산도 보게 된다. 바둑을 직접 두는 사람보다 한 발 떨어져 훈수를 두는 사람이 바둑판의 흐름일 잘 보이듯이, 떠나게 되면 그 전의 삶이 잘 보인다. ‘역시 오길 잘했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다른 것 볼 것 없이 떠나는 버스 안에서 이미 본전을 뽑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번 10월 ‘길위의학교’는 안동으로 떠나기로 했다. ‘강아지똥’으로 유명한 권정생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권정생 선생님께선 지난 2007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밀양의 이계삼 선생님으로부터 안내를 받기로 했다. 이계삼 선생님은 예전부터 권정생 선생님의 삶을 흠모했고, 선생님의 글을 좋아했고, 선생님에 대한 글을 써왔다. 이계삼 선생님은 안동에 오기 전에, 권정생 선생님의 수필집인 ‘우리들의 하느님’과 자전적 소설인 ‘한티재 하늘’을 읽고 올 것을 추천해주었다. 특히 ‘한티재 하늘’은 권정생 선생님의 삶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이 땅 민중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빼어난 작품이라며 극찬했다.
‘한티재 하늘’은 정말 가슴이 저리는 글이었다. 이 땅을 지켜왔던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이 그러했듯이, 아프면서도 아름답고, 애절하면서도 담담했다. 그러나 나는 사실 이계삼 선생님이 쓴 글(녹색평론 등에 여러 차례 썼다.)이 더 좋았다. 이계삼 선생님의 눈에 비친 권정생 선생님을 보는 것이 참 좋았다. 그 중에서도 ‘우리들의 하느님’ 책 뒤에 실린 ‘이 땅 ‘마지막 한 사람이었던 분’이라는 글이 특히 좋았다. 그 글은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선생님을 곁에 계셨던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것인다.(가능하면 ‘한티재 하늘’을 읽은 뒤 이 글을 읽기를 권한다)
나는 그 글을 떠나기 전날 밤 학교에 남아 야자 감독을 하며 읽었다. ‘그리하여 가난하고, 불쌍하고, 쓸쓸한 것들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갈 수 있기를….’하며 끝을 맺는 마지막 문장을 보는데 가슴이 뭉클 움직였다. 금요일 늦은 밤 학교에 남아 야자하는 아이들, 건조하고 삭막한 느낌의 교실, 교탁 앞에 서 있는 나, 이 모든 풍경이 참 낯설게 다가왔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한참 달린 뒤에는 반드시 잠시 멈춰서 기다렸다고 한다. 무엇을 기다렸냐고? ‘너무 빨리 달려오느라 미처 따라오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그날 저녁 난 미처 따라오지 못한 내 영혼을 보았던 것 같다. 마음이 따뜻해졌고, 약간 슬펐으며,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권정생 선생님이 보고 싶어졌다. 내일 안동으로 떠날 수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렇게 나의 여행은 하루 빨리 시작되었고, 전날 밤에 본전을 뽑아버렸다.
그리운 사람 더욱 그리워지게 하소서
다음날 안동에서 이계삼 선생님을 만났다.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으로 찾아가서 박물관을 구경했다. 친필원고, 초등학교 생활기록부, 사진, 책, 평소에 쓰시던 물건들이 있었는데, 특히 선생님 쓰시던 부채가 인상 깊었다. 나뭇가지에 비료포대를 노끈으로 묶은 것인데, 아마도 꽤 오래도록 쓰셨던 물건인 듯 했다. 작고 여린 것을 사랑하셨던 선생님, 집 마당에 풀 조차도 함부로 베지 않으셨던 선생님은 비료포대 같은 물건조차도 함부로 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던 ‘강아지똥’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박물관을 나와선 버스를 타고 조탑리 마을로 갔다. 선생님이 사셨던 집은 늘 아프셨던 선생님 몸처럼 조그맣고 허름했다. 풍수를 좀 볼 줄 아는 사람 얘기로는 이 집터는 너무도 안 좋은 집터라고 한다. 얼마나 안 좋은 곳인고 하니 상여나 장례도구 따위나 보관할 법한 그런 곳이란다. 설마 알고 정했겠냐마는 선생님께선 땅조차도 가장 여리고 아픈 땅을 품으셨다.
그 집마저도 없었을 때, 선생님은 일직교회에서 종지기를 하며 교회 문간방에서 사셨다고 한다. 교회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문간방에서 이창식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들이 가장 바쁘다는 주일 전날의 토요일이었건만 흔쾌히 맞아주셨다. 흙 묻은 농부 차림이다. 가을 추수철이라 목사님도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 모양이었다. 오늘 우리가 3번째로 찾아온 손님이란다. 지금까지 얼마나 여러번 권정생 선생님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이런 만남을 하셨을까? 감기까지 걸리셨다는 목사님의 목소리엔 흔쾌한 열기가 느껴진다. 결국 그 문간방에서 안성탕면을 끓여먹는 것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물론 국물이 끝내줬다.
해가 참 짧아졌다. 금세 깜깜해졌다. 선생님께서 남긴 유서에 당신의 시체를 맡겨달라고 부탁했던 이태희 어르신을 만났다. 이태희 어르신은 젊었을 적부터 선생님과 함께 마을에 사셨던 분이다. 약속이 잘못돼서 자칫하면 못 만날 뻔 했다. 저녁 8시가 넘은 시간, 추수철의 시골에서는 깊은 밤이다.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동네 할아버지께 급히 얻어온 양초 두 자루, 목사님 차를 얻어 타고 사온 약간의 술과 안주를 권정생 선생님 집 마당에 펼치고 어르신과 술 잔을 기울였다. 이태희 어르신의 이야기를 통해 만나는 권정생 선생님은 참 인간적이고 따뜻했다. 야한 농담을 주고 받으며 웃었다던 이야기에 이르르선 가슴이 시원해지는 느낌마저 들었다. 평생을 ‘가난’과 ‘병’ 속에서 사셨던 선생님.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너무도 엄격한 삶을 사셨기에 선생님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당신을 너무도 높게 그리게 되는 듯하다. 그러나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멀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태희 어른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선생님이 참 다정한 이웃처럼 다가왔다. 선생님이 사신 삶은 엄격하게 자신을 채찍질하고 반성하는 금욕적인 가난과 청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서 당신을 내어놓는 자연스러움, 그 속에서 느끼는 자유로움과 따뜻함으로 당신의 삶을 채우셨던 것 같다.
교회 종탑 옆에 이런 팻말이 붙어있다.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가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권정생 선생이 하신 말씀이랍니다. 소외받고 아픈 이와 함께 하기 위해 한겨울에도 장갑도 끼지 않고 종을 쳤다고 한다. 선생님이 장갑을 끼지 않은 것은 아마다 마음이 아프셔서 그랬을 것 같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신호를 보냈으리라. 그 작고 여린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셨으리라. 아들을 군대 보낸 엄마가 따뜻한 물에 손을 적실 때 아들 생각에 가슴이 아리는 것처럼. 엄마처럼 친구처럼 그렇게 그들 옆에 있어주고 싶었으리라.
당신이 전해주신 삶의 향기가 그토록 좋았던 모양이다. 온 종일 너무도 멋진 만남으로 안내해준 이계삼 선생님도,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의 최윤환 이사님도, 이창식 목사님도, 그리고 이태희 어르신도, 모두 돈 한 푼 받지 않고 권정생 선생님의 이야기를 전하는데 그리 열심인 걸 보면 말이다.
마을회관에서 잠을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똥물로 가득찬 회관 푸세식 화장실에서 똥을 눴다. 똥덩어리가 떨어지자 분수처럼 튀어오르는 똥물에 엉덩이가 봉변을 당했다. 간신히 사태를 수습하고 마을을 둘러보는데, 신기하게도 한번도 뵌 적없는 권정생 선생님의 삶의 향기가 느껴진다. 참 좋은 느낌이다. 단 한번 만난 적 없는 권정생 선생님이 그리워진다.
10월 여행이 끝나고도 가끔씩 그 아침처럼 선생님의 향기가 느껴지고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리움이 더욱 깊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운 사람이 더욱 그리워지면 조금은 그 사람을 닮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당신이 점점 더 그리워지면 참 좋겠다.... 그리운 사람은 더욱 그리워지게 하소서!
첫댓글 함께 하고 싶었는데 함께 못하여 아쉽고 미안합니다. 이계삼 샘도 보고 싶었는데...
항상 보여주시는 관심만으로도 행복하답니다. 건강하시지요?
와!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특히 중간 부분의 <무엇을 기다렸냐고? ‘너무 빨리 달려오느라 미처 따라오지 못한 자신의 영혼을!’ >은 가슴이 뛸만큼 공감이 가는 표현입니다. 맛깔나게 써 내려간 글귀가 선생님을 한번 뵙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2011년에는 동참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