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득의 부산항 이야기 <28> 부산항 연안부두
사람·화물 넘쳐났던 '활기의 부두'…1960,70년대 남해안 해상교통 거점
1990년대 초 11개 항로에 20여 척의 여객선이 취항하던 부산항 연안여객부두 전경.
- 고속道·항공 등장에 내리막길
- 1998년 새로 지은 여객터미널
- 항내 크루즈선 개발로 살리자
오늘날 부산항에서 가장 쇠락한 곳을 찾는다면 어디일까? 아무래도 연안여객터미널이 아닌가 한다. 지금 이곳에선 여객선을 타려는 사람도 내리는 사람도 없다. 그러다보니 어디 배웅을 하거나 기다리는 사람이 있겠는가? 심지어 요즈음 갈매기는 사람이 없는 곳에는 먹을거리가 없다는 걸 알고 이런 곳에는 날아들지를 않는다. 그래서인지 부산항 연안여객터미널은 더욱 외롭고 적막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이곳은 1960, 1970년대만 해도 부산항에서 가장 활기찬 부두였다. 거제, 충무(통영), 삼천포(사천), 남해, 여수, 제주 등지로 오가는 연안여객선들이 모두 이곳에서 출발했고, 이곳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연안부두는 황금노선을 가진 남해안 해상교통의 거점으로서 항시 사람과 화물이 넘쳐났다. 이따금 부두에 접안하거나 출항할 때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나 조미미의 '바다가 육지라면' 같은 유행가가 울려 퍼지면서 분위기를 돋우기도 했다. 명성·금성·금양·경복·갑성·한양·원양·신진·영복·광신·해금강·새마을·비너스호 등이 당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객선이다. 여기에 군계일학(群鷄一鶴)처럼 바다 위를 잽싸게 달리는 수중익선 엔젤호가 등장해 기존 여객선과의 차별화를 하면서 한동안 '한려수도의 천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출현한 부산~거제도 항로의 쾌속 공기부양선도 거제 조선산업의 호경기와 맞물려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승용차의 보편화와 1973년 말 남해안고속도로의 개통은 곧 부산~충무~삼천포~남해~여수를 잇는 연안여객선의 경쟁력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그나마 명맥을 지키던 거제항로마저 거가대교의 개통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그 뿐 아니다. 저가 항공사의 등장이 부산-제주 항로 운항마저 어렵게 만들고 말았으니 말이다. 이처럼 육상과 항공을 이용한 교통 환경 변화는 부산항 연안여객운송 사업을 사양길로 내모는 주원인이 되었다.
부산항 연안부두의 태동은 일제강점기인 1931년 9월 30일에 준공한 북빈(北濱·1900년대 초 중앙동 일대 바다 매축지) 내 연안무역 설비공사에서 비롯된다. 1925년 연안무역을 위해 부산항을 오갔던 기선·범선은 연간 7700여 척으로, 화물은 60만t 승하선 인원은 2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부두시설이 없어 주로 부선을 이용해 화물을 물양장에 올리고 내려야만 했는데,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구축된 것이 연안부두였다.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지금의 부산세관에서 영도다리 아래까지의 해안지역을 북빈부두라 불렀다. 그러니까 연안부두는 북빈부두에 자리한 유일한 부두였던 셈이다. 이후 해방이 되면서 늘어나는 연안화물과 여객 운송은 남항의 자갈치해변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부산항 제1단계 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1978년에 연안부두를 새롭게 구축, 11척의 여객선이 동시 접안하는 시설을 갖추었다. 이렇게 완공된 부두가 연안여객부두였고, 지금의 연안여객터미널은 1998년 종전 터미널을 헐고 새로 지은 것이다.
연안여객운송도 항만을 움직이는 하나의 축이다. 그렇다면 사양화된 축이 다시 원활하게 돌아가게 할 방법은 없을까? 항내크루즈라도 새롭게 개발해 뱃길 따라, 관광객 따라 조속히 연안여객터미널의 부산갈매기가 날게 할 일이다.
부산세관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