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초 서울(京城) 인구는 40만 정도였다. 이중 일본인은 10만 정도였는데 이 10만 명 중에는 별의 별 잡놈들이 다 있었다. 그러니까 일본 말로 낭인(浪人)이라는 건달, 무식쟁이, 심지어 소매치기, 뚜쟁이 같은 일본 내지에서는 하등 쓸모없는 하급인간들이 일본 본토인이라고 경성(京城)에서 설쳐 대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부락민(部落民) 이라는 불가촉천민도 많았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00부락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의도적으로 우리 조선의 마을을 백정만도 못한 아주 최하층 천민들이 사는 지역이라고 낮추어서 쓴 말이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아직도 00부락이라고 쓰고 있다. 지금도 일본의 부락민 300만명은 일반인들과 혼인도 못하고 취직도 할 수 없고 천대 받으며 사는 마이너리티 최하층 백성이다. 일본인들은 하천변, 산기슭 같은 사람이 살지 못할 곳에 이들 하층민을 모아놓고 부락이라는 명칭을 주어서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았던 것이다. 우리나라 마을 단위를 앞으로는 부락이라고 절대 부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부락민부터 건달, 낭인, 불량배까지 조선에 와서 분탕질을 하고 순진무구한 조선인들을 등쳐먹고 있었다.
일본 군부 정권에서 고의적으로 금산(金産) 정책을 펴면서 금값이 오르자 일본인 조선인 갈릴 것 없이 금에 미쳐 돌아 갈 때 일본인 건달 하나는 희한한 생각을 떠올려 떼돈을 번 자가 있었다. 규슈(九州) 구마모토현(熊本縣) 출신 건달 유하라(湯原)는 하릴 없이 무위도식하며 건달 낭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31년 12월 일본정부에서 금 수출을 금지 하면서 금값이 치솟자 온통 신문 잡지에서 금 이야기이고, 금광 이야기와 노다지 캔 것만 떠들어 대고 있는 것에 자극을 받아 유하라도 망치와 괭이를 메고 산골을 헤매고 다녔다. 어느 때는 한강에 나가 모래를 퍼서 사금을 찾기도 하고 남산에 올라 애꿎은 바위덩어리를 깨보기도 하였다. 이렇게 금을 찾고자 조선천지를 헤매던 유하라는 지금의 아현동을 지나다 화장장터를 발견한다.
당시 아현리 화장터는 1905년 개장하여 홍제동으로 옮겨간 1929년까지 25년간 일본인들의 화장터였다. 일본인들은 화장하는 습관이 있어서 일본인 전용 화장장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일본인들은 4촌간에 결혼하는 근친혼이 많았는지라 거의 모두가 뻐드렁이에다 치아가 부실하여 보철(補綴)을 많이 하였다. 더구나 그때는 누런 금이빨이 부의 상징처럼 유행하여 어느 넋 나간 친구는 생니를 뽑고 금이빨을 하기도 하였다. 유하라는 이 폐화장터에서 틀림없이 송장태운 재를 처분한 잿더미가 있을 것이고 그곳을 뒤져보면 금이빨이나 금반지 같은 금속이 있을 거라고 추측하였다.
유하라는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경성부로 달려가서 화장장 정리허가를 받아냈다. 세상일은 그야말로 요지경인지라 그 추측이 그대로 적중하여 유하라는 하루아침에 거금을 거머쥔다.
유하라의 예상대로 송장태운 잿더미를 정리하니 금이빨이 쏟아져서 며칠 만에 2,500원어치의 금붙이를 수확 하였다. 당시 최고 인테리 신문기자의 급료가 40원 할 때이니 어떤 파장을 몰고 왔는지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소문과 신문 기사가 전국에 퍼지고 난 다음이다. 황금에 눈이 어두운 황금광들이 앞다투어 지방 도시의 화장장 정리 청원을 하느라 화장장이 있는 곳에서는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부산과 대구 같은 곳에서는 이 청원을 놓고 고소와 고발 등의 송사로 그 지방이 시끄러울 정도였다.
다행히 우리 조선 사람들은 화장을 하지 않고 매장을 하여서 이 소동과 무관하였지만 일본 신문에 난 기사에는 일본인들은 애비 에미가 죽으면 먼저 금이빨 뽑을 궁리부터 한다는 가십 기사가 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어느 부호집 마나님이 금반지를 끼고 마차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가 손마디를 잘리었다는 소문까지 들리던 터에 경성에서도 코 베어간다는 풍문 대신 사람들은 코가 아니라 손가락 조심 하라는 이야기가 돌기도 하였다.
이러한 소동을 거치면서 일본군부에서는 조선에서 막대한 양의 금을 수탈하였다. 일본은행의 앞잡이 노릇을 한 조선은행이 매입한 금은 수시로 삼엄한 경계 속에 일본으로 실어갔는데 1934년의 경우 1월부터 5월까지 한 번에 대략 200kg 이상의 금을 44회나 송출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매년 수 10톤이 넘는 황금을 일본이 수탈하여 간 것이다. 결국 조선은행은 일본은행을 대리하여 금을 수집하면서 종이돈을 찍어 맞바꿔 주었으니 우리 조선의 물자 중의 물자인 그야말로 천금 같은 황금만 생으로 강탈당했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939년 한해 우리나라의 금 생산은 31톤이라는 경이적인 생산량이었다. 물론 이 많은 금을 몽땅 일본이 강탈 해 갔지만....
이러한 것은 일본정부에서 조선산금령(1937) 금광업설비장려금교부규칙(1937) 조선중요광물증산령(1938) 일본산금주식회사법(1938) 조선광업진흥주식회사령(1940) 금산정비령(1943) 등 금 생산을 독려하는 정책들을 매년 쏟아놓았기 때문이었다. | |
첫댓글 옮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