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莊子』
안동림 역주, 현암사
<外篇>
<內篇>은 철학적 독창성, 순수성, 사상적 통일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 <外篇>, <雜篇>은 내용이 잡다하고 요지를 부연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이런 면이 일반인들에게는 더 친근하고 흥미로울 수 있다. <內篇>에 비해 설화와 우화가 많고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대화체 표현이 많다.
<外篇>, <雜篇>은 어느 시기 한 사람이 쓴 저작이 아니고, 장자 이후의 후계자들이 오랜 시기에 걸쳐 집필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이 두 편은 장자 사상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제목이 없이 단지 그 앞머리 글로 제목을 삼고 있다.
騈拇(변무) 第八
騈拇枝指 出乎性哉.
네발가락과 육손이는 태어날 때부터 그러했다.
騈拇枝指 出乎性哉 而侈於德 附贅縣疣 出乎形哉 多方乎仁義 而用之者 列於五藏 哉 而非道德之正也 是故騈於足者 運無用之肉也 枝於手者 樹無用之指也 騈枝於五藏之情者 淫僻於仁義之行 而多方於聰明之用也.
네발가락과 육손이는 태어날 때부터 그러하며 일반 사람보다 군더더기가 많다. 군살이 달라붙고 혹이 매달리는 것은 몸에 생기는 일이지만 태어날 때는 없었다. 갖가지로 수를 써서 인의를 행하는 자는 그것을 五臟에 의거하여 배열하는데 이는 도덕의 참모습이 아니다. 그러므로 네발가락은 쓸모없는 군살을 이어 붙이고 있으며, 육손이는 쓸모없는 여분의 손가락을 세워 두고 있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오장의 자연스런 모습에 군더더기를 덧붙이면 인의의 행위에 치우쳐서 눈과 귀의 작용을 갖가지로 혹사하게 된다.
性長非所斷, 性短非所續.
본래부터 긴 것을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부터 짧은 것을 이어 주어서도 안 된다.
彼至正者 不失其性命之情. 故合者不爲騈 而枝者不爲跂. 長者不爲有餘 短者不爲不足. 是故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 故性長非所斷 性短非所續 無所去憂也 意仁義其非人情乎 彼仁人何其多憂也.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발가락이 붙어 있어도 네발가락(騈拇)이라 생각지 않고, 손가락이 더 있어도 육손이(枝指)라 여기지 않는다. 길다고 그것을 여분으로 생각지 않으며 짧다고 그것을 부족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물오리는 비록 다리가 짧지만 그것을 길게 이어주면 괴로워하고, 두루미의 다리는 길지만 그것을 잘라주면 슬퍼한다. 때문에 본래부터 긴 것을 잘라서는 안 되며 본래부터 짧은 것을 이어 주어도 안 된다. 그러니 여기에 대해 근심하고 두려워할 까닭은 없다. 생각건대 仁義란 사람의 참된 모습이 아니다. 저 仁德을 갖춘 사람들은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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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라는 책을 읽었다. 그때는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읽었다. 이제야 그 말의 前後를 함께 읽으니,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天性을 강제로 고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타고난 천성이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하다면 얼마나 좋으랴. 타인을 해코지하며 제 삶을 챙기고 즐기는 자들에게도 <장자>의 가르침을 적용해야 하는가? 성인들은 사회 규범으로 다스리면 되지만, 어린 아이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답이 어렵다. <장자>는 자기 수양을 위한 책이지 사회생활에 적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책이다.
盜跖亦伯夷.
도척 역시 백이와 마찬가지였다.
臧與穀 二人相與牧羊 而俱亡其羊 問臧奚事 則挾筴讀書 問穀奚事 則博塞以遊 二人者 事業不同 其於亡羊均也 伯夷死名於首陽之下 盜跖死利於東陵之上 二人者 所死不同 其於殘生傷性均也 奚必伯夷之是而盜跖之非乎 天下盡殉也 彼其所殉仁義也 則俗謂之君子 其所殉貨財也 則俗謂之小人 其殉一也 則有君子焉 有小人焉 若其殘生損性 則盜跖亦伯夷已 又惡取君子小人於其間哉.
臧과 穀 두 사람이 양을 치고 있다가 둘이 다 그 양을 잃었다. 장에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으니 독서를 하고 있었다 하고 곡에게 물으니 노름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한 짓은 같지 않지만 양을 잃었다는 점에서는 같다. 백이는 명예를 위해 수양산 아래에서 죽었고, 도척은 利慾 때문에 동릉산 위에서 죽었다. 이 두 사람이 죽은 곳은 같지 않지만 목숨을 해치고 본성을 상하게 한 점에서는 같다. 어찌 백이가 옳고 도척을 잘못했다고 하겠는가! 천하가 다 그 몸을 희생하고 있다. 그가 인의를 위해 몸을 바치면 세상에서는 군자라 하고, 재물을 위해 몸을 바치면 그를 소인이라고 한다. 둘 다 그 몸을 희생한다는 짓은 같은데 혹은 군자라 하고 혹은 소인이라 한다. 목숨을 해치고 본성을 상하게 한 점에서는 도척 역시 백이와 마찬가지였다. 어찌 군자와 소인이라는 차별을 그 사이에 둘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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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家 사람들은 도덕 하면 仁義를 들고 나와 그것을 좇기에 정신이 없다. 참된 도덕은 인위적인 규범에 있지 않다. 속박이 없어 본성을 해치지 않아야 온전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인의의 테두리 속에서 군자다 소인이다 하고 구별하는 편견에 장자는 조소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