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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글 마당 스크랩 산토끼 노래비가 있다.창녕에 가면...
목화 추천 0 조회 83 11.01.04 20: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산토끼 노래비>창녕 이방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산토끼 노래비,노래의 발상지를 뒤늦게 알고 동문 독지가의 도움으로

                                      1978.11월 건립되었다.제막식때는 이일래 선생과 딸이 참석하였다.

 

창녕 이방초등학교, 창녕쪽에서 우포를 지나 이방쪽으로 2-3분정도 달리다 보면 대구와 의령으로 나누어지는 삼거리에 이방면 소재지가 있다.이곳에 위치한 이방초등학교는 여느 시골학교와 별반 다를바 없지만 그러나 이곳은 그 유명한 국민동요 산토끼 노래가 탄생한 곳으로 산토끼 노래비가 있다.

 

일제시대였던 1928년 가을 이 학교(당시 이방보통학교)에 재직중이던 이일래 선생은 딸아이를 데리고 학교 뒷산(고장산)에 올라 갔다가 자기 앞에서 두려움도 없이 자유롭게 뛰어노는 산토끼의 모습을 보고 우리 민족도 빨리 해방이 되어 저 산토끼처럼 자유롭게 살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면서 산토끼 노래를 작사작곡하여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된 노래가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불리어 지면서 일제는 산토끼가 민족혼을 일깨우는 불순한 노래라 하여 못부르게 하는등 탄압이 뒤따랐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해방이 되고 다시 6.25전쟁등 혼란한 사회 분위기를 겪는 와중에 산토끼 노래는 작사,작곡가 미상으로 음악 교과서에  실려 지고 누구의 노래인지도 모른채 불려져 왔다.

 

그러나 1938년에 발간된 이일래 조선동요 작곡집 한권이 1975년에 발견되어 그 영인본(복사본)을 발간하게 되면서 부터 이일래선생의 작품으로 빛을 보게 되었고 1978년 제2회 한국아동음악상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당시 선생이 작사한 산토끼 노래의 노랫말은

           산토끼 토끼야 너 어디로 가나/깡충 깡충 뛰어서 너 어디로 가나

         산고개 고개를 나 넘어 가아서/ 토실토실 밤송이 주우러 간단다

였으나 훗날 부르기 쉽고 어감이 편리한 현재의 노랫말로 약간의 수정이 가해 졌다.

창녕군은 이곳 학교주변 고장산 기슭에 산토끼등 여러가지 문화체험을 할수 있는 산토끼 노래마을을 조성중에 있다.

 

 

                                     <이일래 선생 흉상>총동문회의 성금모금과 경남교육청 후원으로 2007.8월 건립되었다.

 

이일래 선생(1903-1979)은...

 

선생은 1903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났다.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한 후 서울중동학교에 진학해 졸업을 하게 된다.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 했으나 우연히 천도교 낙성식에 갔다가 김영환 독주회를 보고 감동을 받아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김영환씨가 출강하는 연희전문학교 수물과에 입학해 김씨에게서 음악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인 공부를 하게 된다.
연희전문학교 재학때 홍난파,김영환과 트리오를 구성해 YMCA에서 연주회를 갖는 등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꾸준한 활동을 했다.

 
그러다 3학년을 중퇴하고 낙향하여 창신보통학교,다시 창녕 이방보통학교(현 이방초등학교), 마산 제비산에 있던 호주선교사의 어학교사로 재직했고 이후 일본에서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과에서 음악을 1년간 공부한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1938년에는 조선동요 작곡집을 발간하여 우리나라에서는 홍난파 동요집 다음으로 발행된 소중한 동요집으로서 산토끼등 21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선생의 동요는 노랫말 중심의 문학적인 요소와 곡을 전재로 하는 음악적인 요소가 결합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1947년에는 경북 초대 상공국장에 취임하여 2년간 공직 생활을 한 후 퇴직하여 일반서민의 생활로 돌아 갔다.
특히 선생은 마산의 호주선교사 와의 인연으로 영어 실력이 뛰어나 해방 후 미 군정 당시 CIC 마산대장의 통역을 맡기도 했고 51년 마산 민선시장 선출 때는 청년부 활동등 의욕적인 활동으로 출마설까지 나돌 정도로 많은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으며 이런 사회활동을 하면서 부터 음악활동은 소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선생은 호주선교사 어학 교사와 일본대학 예술학원 음악과에 다닐 때 많은 곡들을 작곡하여 약 백여곡의 노래가 따로 기록된 책자가 있었으나 6.25 당시 모두 분실 됐고 지금은 조선동요 작곡집에 수록된 동요를 제외하곤 발표된 곡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조선동요 작곡집도 국내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1975년 친구에 의해 책이 발견되어  영인본을 내게 됐는데 이때 마산의회예식장에서 출판기념회,서울 YMCA회관에서 한국동요 동인회 주최로 복간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선생은 이방보통학교 재직시 산토끼 노래를 만든 계기가 된 고장산을 자주 올라 시간을 보냈고 또한 부인과 딸을 데리고도 올라 산책을 하는 등 신학문을 공부해 개화청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당시 제자들은 회상한다.
슬하에 자녀가 2남 1녀로 1975년을 전후해 서울에 있는 딸(명주)집에 거주했으나 이후 경기도 양주로 이사 해 1979년 가을 76세로 작고 하여 양주 천마산에 선영을 두었다.

 

 

 

 

               <조선동요 작곡집에 수록된 동요비> 이 동요집엔 이일래 선생의 노래 21곡이 수록되어 있다.

 

 

 

                <학교전경> 

 

 

 

 

 

               <산토끼 놀이장> 

 

                <이곳 삼거리에 이방초등학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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