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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초호와 갯배, 아바이 마을 청호동
실향민 공동체, 「청호동 아바이 마을」 갯배를 타고 속초시내에서 청호동으로 수로를 건너가면 바닷가로 길게 형성된 부락이 있다. 청호동. 이곳은 함경도 실향민들이 6.25전쟁으로 피난 나와 북상하다가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한 남한 유일의 실향민 공동체 ‘아바이 마을’이다. 함경도 아바이들의 집단부락인 이곳 청호동은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남북관계가 개선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면, 언론에서 가장 먼저 찾아와 실향민의 심정을 인터뷰하는 곳. 이곳의 주민들은 게딱지같이 닥지 닥지 붙은 집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담장이 없어 이웃끼리 터놓고 살고 있다. 굳이 고향을 놔두고 사는 타향살이에언 제 통일이 되면 돌아가리라는 마음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않은 탓도 있다. 청호동 마을을 관통하는 좁은 길을 걷다보면, 어디선가 터져나오는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 이제 실향민들이 한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갈 통일의 날은 언제 올까.
탐방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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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황제와 장승의 마을 외옹치
해돋는 마을 외옹치는 속초시 대포동 끝자락에 위치한 전형적인 바닷가 마을이다. 성황당을 모시고 80여 세대의 가구가 옹기 종기 모여사는 외옹치 마을 사람들은 조상대대로 이어온 생활터전을 지키고 사는 소박한 꿈을 갖고 있다. 이곳 외옹치는 속초 8경의 하나로 아직 본격적인 관광지로 개발되지 않아 청정바다를 자랑하는 속초의 마지막 처녀바다인 셈. 항아리(독)를 엎어놓은 형상을 한 옹치산에서 지명이 유래했다(밧독재)는 외옹치는 80여 세대중 70여 세대가 대를 이어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토박이들이다. 마을에서는 동해가 훤히 내다뵈는 양지바른 곳에 성황당을 모시고 있다. 외옹치의 성황제는 춘천시 동면 조양리 전치곡 마을과 함께 장승을 세우는 풍속이 살아있는 몇 안되는 부락제로 민속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기도 하다. 외옹치의 문화유산 - 장승 : 마을 입구에 3년에 한번씩 장승을 새롭게 깎아서 세운다. 남녀 장승 한쌍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 속초에서는 유일하게 장승을 볼 수 있는 곳. - 성황당 : 성황당 뒷편으로 노송이 우거지고, 앞으로는 동해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꼭 한번 이 성황당으로 올라가 전망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 전망대 : 속초8경으로 선정되면서 조성된 전망대. 아직 주변조성이 안돼어 썰렁하지만 이곳에서 속초시내가 한눈에 들어오고, 바로 일출을 볼 수 있는 위치이다. 길을 따라서 외옹치 언덕까지 올라가보면 우거진 숲으로 해안절벽이 내려다 보인다. - 일출여행 : 해마다 1월 1일에는 이곳 외옹치에도 많은 일출여행객이 몰려든다. 무엇보다도 속초와 고성일대의 콘도니미엄과 숙박시설에서 쉽게 접근이 가능하고, 유명 일출명소보다 사람이 많지 않아 혼잡함이 덜하다. 특히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지금까지는 민간인이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외옹치 바닷가 언덕을 오를 수 있게 되어 일출여행으로는 그저 그만이다. 먹거리 외옹치언덕 남쪽에 속초에서 가장 작은 항구인 외옹치항에 난전회집이 8곳 있다. 대포항에서는 해안절벽 오솔길을 따라서 걸어들어오면 10분 정도. 회값은 대포항과 같이 저렴한 편이며, 혼잡함이 없어 한가롭게 회를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주변환경도 깨끗하다. 요즘 속초를 잘 아는 사람은 대포항의 혼잡함을 피해서 이곳 외옹치로 회를 먹으러 오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
교통 대중교통 : 외옹치항은 속초에서 버스가 들어가지 않는 유일한 바닷가 마을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대포항에서 내려서 대포항 횟집거리를 따라 계속 동쪽으로 걸어오면 해안절벽 오솔길이 나오며, 길이 끝나는 지점에 외옹치항이 나온다. 대포항에서 외옹치항으로 들어오는 오솔길은 차량이 다니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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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때 창건,신몽으로 중건된 설악의 주찰
설악산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찾아갈수 있는 사찰이 바로 소공원에 위치한 신흥사이다. 소공원 일대가 사실상 신흥사의 경내라고 할 수 있는데, 소공원 매표소에서 본당까지 걸으면 10분 정도 소요되어 가볍게 다녀올 수 있는 탐방코스로 인기가 높다. 신흥사는 1912년부터 본산 건봉사의 말사였으나 1971년 대한불교 조계종 제3교구 본사로 종무를 관장, 본사로 승격되어 설악산 외설악의 주찰로 가장 역사가 깊은 사찰의 하나이다. 지난 97년 조성된 통일대불을 모신 사찰로 통일을 염원하는 불심을 발현하고 있다. 사찰 입구에 들어서면 일주문 앞에 이르게 되는데 화려한 단청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게 된다. 동양최대의 청동좌불인 통일대불을 지나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속세에 찌든 마음을 씻으라는 나무다리, 세심교(洗心橋)를 건넌다. 신흥사는 신라 진덕여왕 6년(652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하여 절이름을 향성사(香城寺)라 불렀으며, 앞뜰에 9층 석탑을 세우고 석가세존의 사리를 봉안했다고 한다. 옛 기록에 의하면 이 사리는 자장율사가 왕명을 받고 당나라에서 불법을 닦고 귀국하여 건립한 사리탑에 있는 10개의 사리중의 하나라고 한다. 향성사라는 이름은 중향성불국토(衆香城佛國土)라는 말에서 따서 붙였다. 향성사는 현재의 절 위치에서 동쪽으로 1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 향성사는 신라 효소왕 10년(701년)에 소실 ,앞뜰에 세워진 9층석탑도 화재로 파손되어 현재 3층탑만이 남아있다. 이에 고승 의상대사가 지금의 신흥사에서 북방 약 1,500m지점인 현 내원암 자리에 선정사(禪定寺)를 중건했으나 인조20년(1642년) 다시 화마로 소실되었다. 선정사가 불타버리자 많은 승려가 떠나버렸으나 운단, 연옥, 혜원 등 세 승려만은 수 백년 내려온 유서 깊은 절이 허무하게 폐허가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재건을 염원했다. 그러던 어느날 세 승려가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향성사 옛터 뒤의 소림암으로부터 백발 신인이 나타나 현 신흥사 터를 점지하며“이곳은 수만대 3재가 미치지 않는 성역이니라”고 말하고 사라져 이곳에 절을 중건했다. 신흥사는 신몽으로 중건된 절이라하여 절이름을 신흥사(神興寺)라 부르게 되었다. 1995년에 사찰이름을 신흥사(新興寺)라 고쳤다. 신흥사에는 사천왕문, 보제루 등 많은 불교 문화유산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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