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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공조 참판 이공(李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이공 중습(李公仲習)이 젊어서 과거 공부를 할 적에 나는 그와 붓과 벼루를 함께 하였고 신묘년 진사시에 함께 합격하였으며, 중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또다시 거주하는 곳이 서로 가까워서 오고간 지가 여러 해였다. 이 때문에 나는 공을 가장 자세하고 또 깊이 알게 되었다.
공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온 덕을 말하면, 조부는 좌찬성으로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진 충정공(忠定公) 휘 귀(貴)이고, 백부는 영의정으로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진 충익공(忠翼公) 휘 시백(時白)이고, 선고는 호조 판서로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진 충정공(忠靖公) 휘 시방(時昉)이니, 세 부자분의 공업(功業)이 크게 드러났다.
충성과 근로는 당 나라의 곽씨(郭氏)이고 돈독하고 후덕함은 한 나라의 석씨(石氏)였다. 그러므로 여러 자제들이 부지런히 몸을 닦고 삼가서 부귀한 집안 자제들의 오만하고 방자한 습관이 전혀 없으니, 이는 가정의 교육이 그러한 것이었다.
그의 인품을 말하면, 도량이 넓고 커서 남과 거슬림이 없었으나 일을 당하여 취하고 버릴 때에는 의연하여 빼앗을 수 없는 지조가 있었으며, 지모와 생각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일을 계획하면 많이 적중하였으나 겸손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여겨서 일찍이 털끝만큼도 자랑하고 높은 체하는 뜻이 없었다.
평소 화락(和樂)하고 조용하여 비루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입으로 말하지 않았으며, 사납고 거만한 얼굴빛을 외모에 나타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일이 비록 심히 노여워할 만한 것이라도 끝내 얼굴빛과 말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할 적에 한결같이 정성과 진실함으로써 대하여 친하고 소원함에 관계 없이 각각 그 뜻을 만족시켰다.
이 때문에 유생으로 향교와 성균관에 있을 적에 사람들은 이미 공보(公輔)의 기국(器局)으로 기대하였다. 충익공은 공을 가장 소중히 여겨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질문하였으며, 또 말씀하기를 “내 임무를 대신할 자는 이 아이이다.” 하였다.
가정의 행실을 말한다면, 충정공(忠靖公)이 건강했을 때에 공의 형제 네 분이 각각 이미 결혼하고 벼슬하였으나 함께 슬하에 있으면서 매우 화목하였다. 부모를 잃자 선친의 뜻이 결성(潔城)에 물러가 쉬고자 하신 것을 추념하여 함께 돌아와 복을 입었으며, 상을 마친 다음 십수 리의 사이에 나누어 살았는데, 늘 모이는 일이 많았고 헤어지는 날이 적었다.
공은 말년에 이르러 오히려 이것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여겨 다시 백씨의 집 부근에 집을 지어 서로 지키며 노년을 마칠 계책으로 삼았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형제가 함께 있으면서 화락하고 부모를 사모하도다. 형제가 이미 화합하여 화락하고 즐긴다.〔兄弟旣具 和樂且孺 兄弟旣翕 和樂且湛〕” 하였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비록 공이 별세한 뒤라도 그 소문을 들은 자들은 또한 우애하고 공경하려는 마음이 크게 일어날 것이다.
벼슬한 업적을 말한다면, 세 번 호조의 낭관을 맡아서 봉직한 기간이 거의 10년이었는데, 전후에 걸쳐 장관이 된 자들은 성품의 느리고 급함과 친분의 가깝고 소원함을 막론하고 모두 공을 강하고 분명하고 사무를 환히 숙달했다고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지방의 고을에 제수된 것이 모두 여덟 번이었는데, 당시 장관이 번번이 유임하여 자신을 도울 것을 청하였다.
고을을 맡았을 적에는 총명하게 살펴 빠뜨림이 없었고 물이 흐르듯이 판결하여 진실로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났으나 공이 정사한 근본으로 말한다면 여기에 있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온 집안이 녹봉으로 먹고 사니, 이 또한 만족스럽다.” 하였다. 이 때문에 아침저녁의 끼니 이외에는 몸에 가까이하는 모든 물건과 피복을 모두 집안의 사사로운 재물로 마련하였다.
공은 친척과 친구들이 가난하다고 하소연하는 자가 있으면 말씀하기를 “내 몸은 관청에서 녹을 먹어 집안에 곡식이 남아 있으니, 이 또한 벼슬살이해서 얻은 것이다.” 하고는 그들로 하여금 많고 적음에 따라 가져가게 하였으니, 이는 자신을 다스리기를 엄격히 한 것이다.
공은 또 일찍이 말씀하기를 “수령이 된 자가 구휼하는 곡식을 사사로이 장만하는 것은 정도가 아닐 수 있고, 또 이로 인하여 포상을 요구한다면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굶주린 자들을 먹인 것이 비록 많았으나 상사(上司)에 보고할 때에는 조정의 명령에 응하여 약간만을 보고했을 뿐이었다.
그후 전조(銓曹)의 관원들은 수령들이 사사로이 마련한 곡식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그 포상을 높이고 낮추려 하였는데, 문서를 참고하다가 공이 경주(慶州)에 있을 때에 보고한 것을 보고는 한탄하며 말하기를, “구휼할 시기를 당하여 작은 군(郡)과 하찮은 현(縣)에서도 곡식을 장만한 것이 혹 수천 석에 이르는데, 경주와 같이 큰 부(府)에서 겨우 10여 석을 마련하였으니, 이는 뜻이 진실로 딴 데 있는 것이다.
실제의 수효를 보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니, 많이 장만하였다고 포상을 받은 자들은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였으니, 이는 그 마음을 세우기를 바르게 한 것이다. 또 공은 평소에 청탁하는 것을 큰 금기로 여겨 비록 친한 벗과 가까운 친척이라도 지위가 요로(要路)에 있으면 일찍이 찾아가 청탁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전후에 빈번히 외직으로 나갔는데 나쁜 지방이 아니면 모두 피폐한 고을이었지만 공은 항상 여기에 개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명예를 구하는 것을 깊은 수치로 여겨서 일찍이 백성들의 정상적인 조세를 정지하거나 꿔주지 않고 준례에 따라 바치는 고을의 수입을 감면해 주지 않았으며, 오직 정성을 미루고 법을 지켜서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관직에 있으면서 조처한 것이 자연히 사람들을 복종시킬 수 있었고, 이미 떠나간 뒤에도 공이 시설한 것이 모두 후일의 법이 될 만하였다.
아, 내 입장에서 공이 마음속에 간직한 것을 살펴보건대, 그 돈후함은 충분히 사람을 진정시킬 수 있었고 충성스럽고 신실함은 충분히 중한 임무를 맡길 수 있었고 관대함은 충분히 여러 사람을 포용할 수 있었고 지모와 계획은 충분히 일을 결단할 수 있었고 청렴함과 결백함은 충분히 세속을 독려할 수 있었고 다스림은 충분히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으니, 한때 조정의 재주를 구비한 자를 찾는다면 공보다 더 나은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은 홍지(紅紙)에 이름을 쓰지 못했다 해서 섭렵한 벼슬이 오직 낭서(郞署)와 주군(州郡)이었는데, 노년이 된 뒤에 실제의 공적이 저절로 드러나서 공경(公卿)들이 서로 천거하여 비로소 아경(亞卿)과 총융사(摠戎使)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공의 재주와 계책을 다 펴지 못하였고, 또 이미 노쇠한 지경에 이르러서 일 년이 못 되어 조정을 떠났으며, 하늘이 또 공을 남겨 두지 않고 빼앗아 가서 기록할 만한 것이 여기에 그칠 뿐이니, 참으로 서글프다.
옛날 공이 별세했을 적에 나는 제문을 지어 곡하고 이때 이미 후사(後事)를 공에게 허여하였는데, 이제 공의 아들 익저(益著)가 가장을 나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감히 묘소에 새길 신도비문을 청합니다.” 하였다. 아, 이는 나의 평소 뜻이니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가장을 살펴보면 공은 휘가 관(慣)이고 선비 정경부인(貞敬夫人) 청주 이씨(淸州李氏)는 학생 수검(守儉)의 따님이다. 천계(天啓) 갑자년(1624, 인조 2)에 출생하니, 순서는 둘째이다. 나이 32세에 처음 전설사 별검(典設司別檢)에 보임되고,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 조지서 별제(造紙署別提), 형조 좌랑, 호조의 좌랑과 정랑, 균전랑(均田郞), 남원 부사(南原府使), 충훈부 도사(忠勳府都事), 상주 목사(尙州牧使)를 역임하였는데, 부임한 곳마다 정사가 뛰어나므로 말을 하사받았으며 진상하는 물건을 가로채는 도둑을 붙잡아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여주 목사(驪州牧使), 담양 부사(潭陽府使),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내니, 문음(門蔭)으로 경주 부윤을 맡음은 특별히 선발된 것이었다. 암행어사가 장계를 올려 공을 칭찬하여 상은 또다시 말을 하사하셨는데, 장려하여 타이르는 글에 “자상하고 화락하며 청렴과 지조로 스스로 힘쓴다.〔慈祥豈弟 廉操自勵〕”는 등의 말씀이 있었다.
이때 조정에서 인재를 천거할 것을 의논했는데, 공을 천거하는 자가 가장 많았으므로 발탁하여 등용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며, 또 장수를 의논하여 천거하게 하였는데 상국(相國) 김수항(金壽恒)이 공을 첫 번째로 천거하였다. 판결사(判決事), 형조 참의, 호서 병마절도사(湖西兵馬節度使)와 호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조정에서는 더욱 공을 등용하고자 하여 남한산성의 수어(守禦)와 강도(江都)의 보장(保障)에 결원이 있으면 공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대신이 또 공을 위하여 임금께 아뢴 자가 있어서 특별히 한성부 우윤과 좌윤으로 승진하였다. 특진관(特進官)으로 경연(經筵)에 출입하고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하였으며, 기보총융사(畿輔摠戎使)와 공조 참판을 지냈다.
얼마 안 있어 조정에 큰 진퇴가 있으니, 공 또한 편안히 조정에 있을 수가 없어서 먼저 군권(軍權)을 해임해 줄 것을 청하고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나갔다가 병을 칭탁하여 체직되었으며, 안동 부사(安東府使)에 제수되었는데 일을 다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임신년(1692, 숙종 18) 5월 홍주(洪州)의 옛집에서 별세하니, 유의(遺意)에 따라 보령(保寧) 효치(孝峙)에 있는 선영 옆에 장례하였다.
초취 부인 신씨(申氏)는 세마(洗馬) 익륭(翊隆)의 따님이니, 1남 의저(義著)를 두었으나 일찍 죽었다. 재취 부인 박씨(朴氏)는 승지 안제(安悌)의 따님으로 1남 익저(益著)를 두었으니 통정대부로 목사이며, 삼취 부인 이씨(李氏)는 봉사 유즙(維楫)의 따님으로 1남 규저(奎著)를 두었으나 또한 일찍 죽었다.
세 부인의 장지는 공의 묘소 옆 등성이에 있는데 별도로 묘표가 있다. 의저(義著)의 한 딸은 도사 임형(任泂)에게 출가하였으며, 익저가 공의 뒤를 이어 재종형의 아들 침(沈)을 양자로 삼았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연안 이씨(延安李氏)는 큰 가문이니 / 延維大家
두 대에 세 공신이 나왔네 / 兩世三勳
가지와 잎이 은택을 입어 / 條葉被澤
후손에까지 미쳤다오 / 可及仍雲
더구나 공의 어짊은 / 矧公之賢
그 아들에 그 손자였네 / 其子其孫
공이 처음 벼슬함은 / 公之始仕
문음(門蔭)에 의탁하였으나 / 乃庇以門
뒤에 여러 벼슬을 거치며 / 及後歷試
자신의 공로로 발신하였네 / 其發由身
직무는 바쁜 부서의 낭관을 잘 해내었고 / 職辦劇郞
정사는 곤궁한 백성들을 소생시켰도다 / 政蘇凋民
신라의 고도인 경주를 잘 다스렸고 / 羅都是釐
호서의 병영을 또 맡았는데 / 湖閫且分
공적이 많고 명망이 크니 / 績茂望蔚
사람들이 천거하고 자문하였네 / 僉擧衆詢
반열은 이경에 오르고 / 班晉貳卿
권병은 삼군을 맡았다오 / 柄掌三軍
얻기는 어렵고 잃기는 쉬우니 / 難得易失
참으로 빠른 세월이라오 / 儵忽之辰
버리자 은둔하여 / 舍之則藏
산림에서 별세하니 / 歿于丘樊
나이가 많지 않은 것 아니요 / 匪年不多
지위가 높지 않은 것 아니나 / 匪位不尊
다하지 못한 것은 공의 재주요 / 未盡者才
보답하지 못한 것은 군주의 은혜라오 / 未報者君
그러나 공의 사적 전해질 만하고 / 然公可傳
또한 사람들에게 알려질 만하네 / 亦足聽聞
공은 훌륭한 자제 두어 / 公有能子
묘에 비문을 청하였네 / 請述墓文
나의 말 부화하지 않으니 / 我言不華
거의 후인들에게 질정하리라 / 庶質後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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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慣 碑銘[南九萬]
李公仲習其少業公車也, 余與之同筆硯, 同成辛卯進士, 其中歲還鄕也, 又與之居止相近, 還往者屢年, 以此知公最詳且深。
以言其世德, 大父左贊成、延平府院君、忠定公諱貴, 伯父領議政、延陽府院君、忠翼公諱時白, 皇考戶曹判書、延城君、忠靖公諱時昉, 父子三人勳業奕舃。 忠勤則唐之郭氏, 篤厚則漢之石氏, 故其群子弟斤斤修飭, 絶無紈袴敖放之習, 家敎然也。
以言其爲人, 宇量寬弘, 與物無忤, 而臨事取舍, 毅然有不可奪之志, 智慮過人, 策事多中, 而謙退若虛, 未嘗有一毫矜高之意。 平居和樂雍容, 鄙倍之言不出於口, 暴慢之色不設於容, 事雖有甚可怒者, 終不形色辭。 待人一以誠信, 無親疎各滿其意。 以此在儒冠游庠序, 人已以公輔期之, 忠翼公最器重之, 事有疑輒質問, 且曰: “可代我任者, 此兒也。”
以言其家行, 忠靖公無恙時, 公兄弟四人各已婚宦, 而同在膝下, 怡怡如也。 旣孤, 追其先志之欲退休于潔城也, 同歸而守制。 旣終喪, 分居十數里之間, 會合常多, 離違常少。 公至暮年, 猶以爲未足也, 更築室於伯氏之家旁, 爲相守終老之計, 《詩》云“兄弟旣具, 和樂且孺。 兄弟旣翕, 和樂且湛”, 此之謂也。 雖沒世之後, 聞其風者, 亦可以油然有友悌之心矣。
以言其宦業, 三任戶部郞, 莅職殆十年, 前後爲官長者, 無論人品緩急、分誼親疎, 皆以剛明練達許。 公凡除外郡者八, 輒請留以自助焉。 其宰邑也, 聰察之無遺, 剖決之如流, 固自絶出於人, 若其爲政之本, 則不在此。 嘗曰: “擧家仰俸祿, 亦已足矣。” 以此朝夕饔飧之外, 凡親身被服之資, 率皆取辦於家私。 親戚、知舊有以貧窶告, 則曰: “身食於官, 穀餘於家, 是亦因官得之者。” 使之隨多少取去, 此其律
己之嚴。 又嘗曰: “爲守令者私備賑穀, 未必正道, 且因以要賞, 可羞之甚。” 以此哺飢雖多, 其報上司應朝命如干而已。 其後銓官將以私備之多寡, 高下其賞, 考閱文簿, 得公在慶州時所報, 嘆曰: “當賑時, 小郡、末縣亦或至累千石, 以慶之大, 僅十數石, 意實有在。 不報實數可知也, 彼以多備受賞者, 獨不愧於心乎?” 此其立心之正。
且公平日以屬託爲大禁, 雖親交、密戚, 位在要路, 則未嘗造請。 故前後之外除頻繁, 非病鄕則弊邑, 皆非公意之所及。 以干譽爲深恥, 民之常賦, 未嘗停貸: 邑之例入, 未嘗減削, 惟推誠守法, 爲所當爲而已。 故在官擧措自有以服人, 而旣去設置皆可爲後式。
嗚呼! 以余觀公之所存, 其敦厚足以鎭物, 其忠信足以託重, 其寬大足以容衆, 其謀畫足以斷事, 其廉潔足以礪俗, 其治理足以救時, 求一時廊廟之具, 宜無踰於公者。 然公以不得題名於紅紙, 踐履之職惟郞署與州郡, 晩暮之後, 實績自著, 公卿交薦, 始有亞卿、摠戎之拜。 然猶不足以盡公之才猷, 且已侵尋於衰遲, 而未帀歲去朝, 天又不憖遺, 所可紀者止於斯而已, 其可悲也已。
昔公捐館, 余操文以哭之, 已以後事許公。 今公之胤益著以狀授余曰: “敢以墓刻爲請。”
噫! 此余素志, 烏可辭也?
按狀: 公諱慣。 妣貞敬夫人淸州李氏, 學生守儉之女。 以天啓甲子歲生, 於倫序爲仲。 年三十二, 始補典設別檢, 歷濟用直長、造紙別提、刑曹佐郞、戶曹佐郞・正郞、均田郞、南原府使、忠勳都事、尙州牧使, 以政最賜馬, 以捕得截上供賊, 加通政階, 驪州牧使、潭陽府使、慶州府尹, 門蔭之尹是府, 用特選也。 繡衣啓褒, 又命賜馬, 奬諭之書, 有“慈祥豈弟, 廉操自勵”等語。 時朝家議薦人才, 擧公者最多, 有擢用之命, 又議薦將帥, 金相國壽恒首擧公, 判決事、刑曹參議、湖西兵馬節度使、戶曹參議。 朝廷滋欲進用公, 凡南漢守禦、江都保障之有闕, 未嘗不擧公名, 大臣且有爲之言于上者, 特陞漢城右尹、左尹。 以特進出入經筵, 兼都摠府副摠管、畿輔摠戎使、工曹參判。 未幾, 朝廷有大進退, 公亦不安在朝, 先乞解兵柄, 出羅州牧使, 引病遞。 除安東府使, 以不樂莅事彈罷。
壬申五月, 考終于洪州舊第, 以遺意葬于保寧孝峙先兆之旁。
初配申氏, 洗馬翊隆女。 有一男義著, 早歿。 次配朴氏, 承旨安悌女。 有一男益著, 通政、牧使。 三配李氏, 奉事維楫女。 有一男奎著, 亦早歿。 三夫人葬在公墓之旁岡, 別有表。 義著一女, 適都事任泂。 益著嗣公, 以再從子沈爲後。 銘曰:
延維大家, 兩世三勳。 條葉被澤, 可及雲仍。 矧公之賢, 其子其孫? 公之始仕, 乃庇以門。 及後歷試, 其發由身。 職辦劇郞, 政蘇凋民。 羅都是釐, 湖閫且分。 績茂望蔚, 僉擧衆詢。 班晉貳卿, 柄掌三軍。 難得易失, 儵忽之辰。 舍之則藏, 歿于丘樊。 匪年不多, 匪位不尊。 未盡者才, 未報者君。 然公可傳, 亦足聽聞。 公有能子, 請述墓文。 我言不華, 庶質後人。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