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世 이식(李栻),
[생졸년] 1767년(영조 43) ~ 1837년(헌종 3)』 / 수(壽) 70세
[세계] 경주이씨 국당공파
이식(李栻, 1767~1837)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경로(敬老)이다. 1791년(정조 15)에 백의(白衣)로 정조의 부름을 받고 장용위(壯勇衛)에 들어가 이후 훈련주부(訓鍊主簿), 비변랑(備邊郞), 도총경력(都摠經歷), 파주방어사(坡州防禦使) 등을 역임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 320-4번지에 있다. 봉분은 원형으로 봉분 앞에는 묘비와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등의 석물을 배치하였다. 묘비는 방부원수(方趺圓首)양식으로 만들었으며, 앞면에는 ‘조선국령좌병마절도사이공식지묘(朝鮮國嶺左兵馬節度使李公栻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비신은 높이 144cm의 크기이고, 아들 이현욱(李顯郁)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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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도병마사 이식 묘표(慶尙左道兵馬使 李栻 墓表)
부군(府君)은 성이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식(栻)이고, 자는 경로(敬老)이니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신라(新羅) 개국공신(開國功臣) 알평(謁平)의 후손이다. 국조(國朝: 조선)에는 휘(諱,이름) 정보(廷俌)가 관찰사(觀察使)로서 청백리(淸白吏)에 뽑혔고, 휘(諱) 잠(箴)은 헌납(獻納)이었다.
휘(諱) 탕(宕)은 사직령(社稷令)으로, 넓은 학문과 독실한 행위를 하였고, 문하생이 명성(名聲)을 이룬이가 70명에 이르고, 호는 오재(悟齋)이고, 영상(領相)에 증직되고, 진위(振威)에서는 고을 사당에서 제사를 받는다. 휘(諱) 정형(廷馨)은 이조참판(吏曹參判). 부제학(副提學)으로서 호는 지퇴당(知退堂)이고, 춘천(春川) 문암서원(文巖書院)에서 제사를 받는다.
휘(諱) 숙(潚)은 음직(蔭職) 찰방(察訪)으로서 혼조(昏朝,광해군 조정)에서 벼슬하지 않았다. 휘(諱) 경상(慶相)은 한림(翰林)이었는데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바다를 건너 명나라에 조회가는 궁료가되어 심양(瀋陽)에 모시고 따라 갔다왔다.
휘(諱) 후(煦,29世)는 한림(翰林). 응교(應敎)를 거쳐 관찰사(觀察使,오늘날의 도지사)가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니 이분이 부군의 고조(高祖)이다. 증조(曾祖)는 휘(諱)가 언기(彦基)로 음직(蔭職)으로 현감(縣監)이고, 문필(文筆)로 이름 있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 되었으니, 아들의 귀함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휘(諱)가 원(鎱)으로, 젊어서 학문을 하였으나 일찍 죽었고,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아버지는 이름이 징만(澄萬)으로 무관(武官)으로 방어사(防禦使)였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으니, 부군이 곤수(閫帥=평안도와 함경도의 병마절도사)를 맡은 것에 대한 <임금>의 은혜로운 전례에 의하여 2대(代)가 증직된 것이다.
어머니는 증 증부인(贈貞夫人) 기계유씨(杞溪 兪氏)로, 한종(漢宗)의 딸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 아들은 이름이 억(檍)으로 방어사(防禦使)이고, 둘째는 이름이 익(榏)으로 수사(水使)이고, 부군(府君)이 막내이다. 부군(府君)은 영묘(英廟=영조) 정해(丁亥=1767) 11월 28일에 태어났는데 용모가 빼어나고 재주가 일찍 빛났다.
정묘(正廟=정조) 신해(辛亥,1791)에 백의(白衣)로 임금의 부름을 받아 은혜와 포상이 전례에 없었고, 특별히 정원(定員) 이외의 장용위(壯勇衛)에 부쳐 임금의 가까이에 두니, 밤낮으로 친하게 모셨다. 임자(壬子,1792)에 이르러 내시사(內侍史)에서 특별히 과거 합격을 내렸다.
갑인(甲寅,1794)에 이르러 과거 합격을 발표하는 날에 정승까지 올라간 이존수(李存秀,1772~1829)를 대교(待敎)에 임명하고, 부군을 장용위 초관(哨官,9品 무관직)으로 삼으니, 문관과 무관이 쌍으로 사은숙배(謝恩肅拜)하여, 온 시대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겼다.
훈련원주부(訓鍊院主簿). 비변랑(備邊郞,從六品). 선전관(宣傳官). 도총 경력(都摠經歷)을 역임하면서, 모두 10년 동안 모두 외방에 벼슬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경신(庚申,1800)에 이르러 정조가 승하(昇遐,임금이 죽음)하시고, 8월에 신광진(神光鎭)에 부임하여 수비하였다.
이로부터 쓸쓸하게 되었다가 계해(癸亥,1803) 봄에 승전선전관(承傳宣傳官)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6월에 외방으로 나가 운산군수(雲山郡首)가 되고, 임신(壬申,1812)에 충주영장(忠州營將)으로 승진하고, 정축(丁丑,1817)에 삭주부사(朔州府使)로 승진하고, 임오(壬午,1822)에 장단부사(長湍府使)로 임명되고, 병술(丙戌,1826)에 봉산군수(鳳山郡守)로 임명되고, 경인(庚寅,1830)에 파주방어사(坡州防禦使)로 승진하였는데, 봉산. 파주에 모두 유애비(遺愛碑)가 있다.
이듬해(1831) 병으로 교체를 꾀하여 양강(楊江)에 거쳐하면서 마치 일생을 보낼 것과 같이 하였다. 임진(壬辰,1832) 가을에 외국 배가 호우(湖右,전라우도)에 표류하여 이르렀는데 상당히 괴이하였다. 조정(朝政) 논의에서 수군(水軍)의 절도(節度,지휘)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을 골랐는데, 부군이 명령에 응하여, 즉시 이르자 배는 이미 도주하였다. 갑오(甲午,1834)에 해임되어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이해 겨울에 순묘(純廟,순조)가 승하하자 행수(行首,수석) 선전관으로 <서울>에 돌아와서 감히 갑자기 해임하지 못하였다. 정유(丁酉,1837) 봄에 이르러 영좌병마절도사(嶺左兵馬節度使,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승진 임명되자 병을 이유로 굳이 사절하였으나 조정에세 허락하지 않아 마침내 부임하였다.
겨우 7개월 만에 병이 갑자기 심해져서 8월 29일에 마침내 돌아가니 수(壽)가 71세였다. 영구(靈柩)를 과천(果川)으로 되돌려 와서 선영(先塋)에 임시 매장 하였다가 무술(戊戌,1838) 4월에 과천현(果川縣) 동쪽 곤좌(坤坐,뒤가 서남형)언덕에 완전히 안장했다.
배(配)는 정부인(貞夫人) 전주유씨(全州柳氏)이다. 부사(府使) 인철(仁喆)의 딸로, 다만 2녀를 두었다. 불초(不肖)는 사종자(四從子,11촌 조카)로서 양자를 들어와 후사가 되었는데, 무자(戊子,1828)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맏딸은 전(前) 첨정(僉正) 이종혁(李種赫)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전(前) 설서(說書) 유치숭(兪致崇)에게 시집갔다.
불초는 해주정씨(海州鄭氏)에게 장가 들었는데, 생원(生員) 시항(時恒)의 딸이다. 1남을 두었는데 시원(蓍元)으로 일찍 죽었다. 딸은 민재진(閔載晉)에게 시집가고 측출(側出,서자)로 1남이 있는데 아직 어리다. 부군은 기상이 높고, 성품이 단정하였다.
집에 있어서도 효도. 우애. 돈독 화목하여 타인이 비난핳 수 없었고, 관직에 있어서는 자애. 진실. 청렴. 신중하여 백성들이 믿고 두려워 하지 않았다. 평생토록 남의 결점을 말하지 않으니, 지자(智者). 우자(愚者). 귀자. 천자를 막론하고, 모두 그 환심을 얻었다.
당시 논의의 기대가 어찌 한낱 병사(兵使) 뿐이겠는가 마는 4임금을 섬기면서 <낮은> 지위가 공덕에 맞지 못해 품은 바를 펴지 못했으니, 또한 장차 운수가 맞지 않음으로 돌려야 하겠는가? 그러나 불초의 용렬함이 그 만분의 일도 형용하지 못하니, 통탄스럽고 통탄스럽다.
불초자(不肖子) 현욱(顯郁)은 피 나듯하는 눈물에 삼가 짓다.
성상(聖像,헌종) 4년 무술(戊戌,1838) 4월 일 <끝>
과천시지 금석문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 320-4번지에 있는 조선후기의 무신 이식(李栻)의 묘.
ⓒ과천시 분묘석물관 금석문
비석은 1838년에 오석(烏石)으로 건립되었고, 방형 받참에 지붕돌이 올려져있다.
비문은 아들(양자: 11촌 조카) 이현욱이 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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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관]
무보(武譜)
1794년(정조 18) 3월 18일(을사)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장용영(壯勇營) 호관(好官)이 되었다. 이후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 선전관(宣傳官), 도총경력(都摠經歷), 등을 역임하고 경상좌도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인물요약]
◇자(字) : 경로(敬老)
◇생년 : 丁亥>1827년(순조 27)
◇본관 : 경주(慶州)
[이력사항]
◇초직 : 별(別)
◇타과 : 갑인(甲寅,1854, 철종 5) 정시(庭試) 장원(壯元) 급제
[가족사항]
◇부(父) : 이징만(李澄萬) / 32世
◇관직 : 방어사(防禦使)
◇과거 : 무과(武科)
[조부(祖父)/31世]
◇이원(李鎱 )
[曾祖父)/30世]
◇성명 : 이언기(李彦基)
◇관직 : 현감(縣監) 및 현령(縣令)
◇관직 : 음관(蔭官)
[高祖父)/29世]
◇성명 : 繼子 이후(李煦) / 生父>慶集
◇관직 : 승지(承旨)
◇과거 : 문과(文科)
[五代祖/28世]
◇이경상(李慶相)
◇호(號) : 묵암(默庵)
◇관직 : 문학(文學)
◇과거 : 문과(文科)
[六代祖/27世]
◇성명 : 이숙(李潚)
◇관직 : 찰방(察訪)
◇관직 : 음관(蔭官)
[七代祖/26世]
◇성명 : 이정형(李廷馨)
◇호(號) : 지퇴당(知退堂)
◇관직 : 참판(參判)
◇과거 : 문과(文科)
[八代祖/25世]
◇성명 : 이탕(李宕)
◇호(號) : 오재공(悟齊公)
◇관직 : 현령(縣令)
◇관직 : 음관(蔭官)
[九代祖/24世]
◇성명 : 달존(達尊)
◇관직 : 판서(判書)
[외조부(外祖父)]
◇성명 : 유한종(兪漢宗)
◇본관 : 未詳
[처부(妻父)]
◇성명 : 류인철(柳仁喆)
◇관직 : 부사(府使)
◇과거 : 무과(武科)
◇본관 : 未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