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지지대
이용희
농장이다.
새 봄은 사람의 발을 자연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엄동설한에는 접근도 하지 않고 잊혀졌던 농장이 발을 끈다. 지난해에 수확을 하고 돌아보지 않은 밭에는 뒹구는 부산물들이 여기저기에서 흉물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건물을 부수고 난 후의 잔해인 것처럼 이제는 모두 치우고 쓸어내야 할 때다. 새봄에 다시 자리를 잡아야 할 모종들이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라고 있어 시간은 많지 않다.
이제 새 작물로 새 밭을 채워야 할 때인데 남아있는 저 무성한 밭은 마치 쓰레기 더미 같기만 하다. 가위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밭으로 들어선다. 도구는 이것 하나면 되겠지 하며 비닐 걷을 준비를 하는데 만만치 않다.
비닐을 고정시키려고 꽂아 놓은 U 자형과 T 자형 핀이 꿈쩍을 않는다. 농기구 창고로 가서 호미를 꺼내 온다. 홈의 끝으로 들어 올리면 될 거라고 생각하며 힘을 쓰는데 끄떡도 않는다. 이것을 박을 때의 힘이 얼마만큼 이었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끙끙대다가 곁에서 일하던 남편의 눈에 띄었나 보다 남편은 창고로 들어가더니 지렛대를 들고 나온다. 호미와는 겨룰 수조차 없이 큰 장비에 의해 핀이 양손을 놓고 항복이다.
그뿐이 아니다. 고춧대를 묶었던 끈을 가위로 잘라가며 하나하나 쓰레기봉투에 담는다. 물을 담아 작물에 매달아 해충을 쫓아내던 플라스틱 물병도 모두 쓰레기다. 농작물을 키워내기 위해 이 밭에서 지난 한 해를 함께 살아왔던 이 도구들이 이제는 모두 치워야 하는 부산물이다.
작물이 바로 서도록 지지해 주기 위한 지지대들도 그 종류가 하나 둘이 아니다. 비닐을 덮고 자란 잡초들을 걷어내고 비닐을 걷으면서 작업은 끝나 가는데 작기만 한 밭에서 나온 쓰레기의 양은 비닐 봉투 두 개를 가득 채운다.
저절로 자라고 해님이 주시는 줄만 알았는데 이렇게나 많은 부속물들이 이 밭의 농작물들을 지키고 함께 존재하였다는 것이 놀랍다. 작물 한 포기도 결실을 보기까지 이렇듯 많은 도구가 필요하였음을 깨닫는다. 나의 삶에는 누구인가가 소중한 나의 울타리와 기둥이 되어주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모든 인생의 걸어온 길이 대 서사시가 되는 것은 당연한듯하다,
이제 우리도 떠나야 할 때가 가까워 온다. 그때 이렇게 무엇인가의 부산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참 많은 부산물들이 있다. 옷과 살림살이뿐이 아니다. 애장 물, 추억을 담는 박스, 책장 가득한 지인들의 책, 카메라와 핸드폰, 그리고 지갑, 귀중하다고 여기며 철 해 놓은 파일, 귀중품이라고 감추어 둔 몇 냥의 금붙이, 유행 지난 액세서리 등등 많기도 하다.
신발장 안도 만만하지 않다. 등산화, 털신, 바닷물에 들어갈 때 신는 샌들 등이 우두커니 숨을 죽이고 언제나 나를 불러줄까 기다리고 있겠지. 나는 누구의 팔을 붙잡고 살았을까. 내게는 그 누가 잡초를 막아주는 비닐이 되었을까
허덕대고 살아오면서 나와 함께 나를 보호하고 동행하던 그 모든 지인들도 나에게는 소중한 추억의 산물이 된다. 영혼 한쪽에 차지하고 있는 빚을 진 이웃과 살펴드려야 했던 사람들의 슬픈 눈빛도 나에게는 덮어두고 떠나야 할 부산물인 듯 남았다.
나 혼자라도 거뜬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느끼던 생각들이 부서진다. 툇마루에 앉아 눈물을 흘리던 때다. 어머니의 꾸중 때문이었는지, 나를 욕했던 친구의 따가운 눈빛 때문이었는지. 녹아 흐르는 고드름의 눈 물 때문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그 때마다 내 발 밑에 앉아 내 눈물을 받아 주던 흰둥이의 눈빛부터가 나의 편이 되어 주던 지지대였다는 것을 느낀다.
아침이면 내 책가방을 들어다 주던 아이도 버스에서 책가방을 무릎에 놓아주던 이름 모를 선배들도 모두 나를 키우기 위해 존재했던 나의 편, 나의 응원군이 아니었던가.
가까운 거리인데도 초등학교 일 학년생을 위해 학교까지 함께 걸어와 주시던 어머니의 발길은 내가 자라는 동안 얼마나 많은 자신의 온기를 내놓으셨을까. 격려의 박수를 쳐 주시던 언니와 오빠들은 또 얼마나 나의 편안한 성장을 위해 자신들의 몸을 움츠리고 살았을까.
열매를 맺고 그 열매마저 수분이 빠지기 시작하는 뜨거운 인생의 가을날이다. 그 뙤약볕을 함께 받고 즐기고 견디어 준 나의 이웃들도 하나 둘 잡았던 손에서 힘을 잃어 간다. 잎이지는 가을날처럼 절대자께서는 순리라는 이름으로 당신의 밭에서 수확하시고 부산물을 정리하시겠지.
이제 나의 새 밭에 심을 작물을 기획하고 가꾸어야 하는 봄인데 나의 봄은 아지랑이처럼 잡히지 않는다.
25.02.
첫댓글 새 작물을 심기위해 묵은 밭을 정리하듯 나의 남은 삶을 위해 무엇을 정리 정돈 해야할지 생각하게됩니다. 또 나를 지탱해준 지지대에게 나도 지지대가 되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