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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면서 확실하게 깨달은 게 있다면, 역시 나는 주인공감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의 영화는 유난히도 지랄맞아서, 내가 성숙하면 할수록 고난도 성숙해버린다…. 따뜻하고 훈훈한 결말 따위는 없었다.”
-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이혜린, 소담)에서
그녀가 ‘또라이’ 된 사연
장편소설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의 주인공 ‘이라희’는 자신은 주인공감이 아니라고, 이건 ‘지랄맞은’ 이야기라고 한사코 손사래를 쳤지만, ‘훈훈한’ 이야기를 곧잘 만들어 온 <반창꼬>(2012)와 <애자>(2009)의 감독 정기훈은 그녀를 주인공으로 불러들여 기어코 따뜻하고 발랄한 코미디영화를 만들어냈다. 단, 성씨를 갈아 ‘도라희(또라이)’가 되는 굴욕쯤은 감수해야만 한다.
주인공 이름 하나 바꾸었을 뿐이지만, 이는 곧 영화 <열정같은 소리 하고 있네>가 원작과 완전히 다른 길을 갈 것이라는 선포였다. 제목을 봐서는 요즘 자주 회자되는 ‘열정 페이’나 ‘×포 세대’를 연상시키며 청년세대의 고민과 좌절을 다루는 청춘드라마일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으나, 영화는 의외로 지나간 SBS드라마 <피노키오>(2015년 1월 종영)의 뒤를 바짝 따른다.
한때 ‘신방과 천재’로 불리던 도라희(박보영)는 ‘언론고시’에 족족 낙방한 끝에 별볼일 없는 신문사 <스포츠동명>의 연예부 수습기자로 입사한다. 하지만 뾰족구두에 정장 단정히 차려입고 첫 출근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연예부 부장 하재관(정재영)의 욕설이 난무하는 고함과 무시뿐이었다. 그는 최근에 할리우드까지 진출한 대스타 우지환(윤균상)과 그의 소속사 JS를 못잡아먹어서 안달이 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라희는 수습으로서는 이례적으로 단독과 특종을 따내며 부장과 회사의 인정을 받게 되지만, JS의 대표 장유진(진경)과 우지환의 갈등의 중심에 착취와 부당거래, 뇌물수수와 협박을 일삼는 연예기획사의 비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게다가 언론과의 유착관계까지. 그녀는 과연 경영난으로 구조조정을 앞둔 신문사와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조작된 증거로 특종을 터뜨릴 것인가, 증거는 없지만 진실을 밝히는 기사를 쓰고 홀로 장렬히 전사할 것인가. 이름이 ‘또라이’인 이상, 답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밥그릇’이라는 ‘알리바이’
여전히 사랑스러운 박보영과 여전히 정확한 발음으로 시종일관 버럭대는 정재영, 언제나처럼 ‘게편인 가재’로 등장하는 오달수가 있고, 심지어 친숙한 TV드라마와 비슷하기까지 해서 영화는 통쾌하면서도 재미있다. 게으르다 핀잔을 들을망정 대중영화로서 가장 안전한 길만 택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류의 영화가 지닌 한계란 늘 분명하다. 또라이가 될 용기를 말하지만, 스스로 영화계의 ‘또라이’가 될 용기까지는 없었더라는 불편한 진실. 그럼에도 <열정같은 소리 하고 있네>에는 몇 가지 기억해둘 만한 문제의식이 포진되어있다.
‘밥그릇’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도라희가 더 이상 하부장의 독설과 변덕을 견딜 수 없어 울분을 터뜨리자, 사수 한선우(배성우)는 그가 비록 ‘쌈마이’처럼 굴지만 부장 때문에 연예부가 살아남은 거라고, 그래도 제 식구 하나는 확실히 챙겨준다고 하부장을 두둔했다. 사회부 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 국회의원을 잘못 건드렸다가 길에 나앉을 처지일 때 그를 거두어 준 이가 하부장이었다는 것을 후에 도라희는 다른 회사 선배 기자(류현경)를 통해 들었다. 증거가 조작됐음을 알고도 도라희 대신 하부장이 직접 우지환을 성폭행범으로 모는 기사를 써올렸을 때도, 어렵게 완성한 도라희의 기사가 외압으로 묻혔을 때 국장(오달수)이 꺼낸 변명도 역시 ‘밥그릇’과 ‘밥줄’론이었다.
그들의 얄팍한 논리를 혐의를 피하기 위한 알리바이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알리바이’(alibi)가 본디 ‘현장부재증명’을 의미할진대, 그것은 증명 가능한 물리적 실체의 부재(여기 없었음)와 존재(거기 있었음)를 전재로 한다. 따라서 실체를 증명할 수도 없고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밥그릇’(또는 일자리나 ‘돈’)을 만능 알리바이로 제시하는 것은 익숙한 기만이다. 진짜 또라이라면 당장 기죽어서 입을 닫는 대신 이 시점에 이렇게 물어야 마땅할 것이다. “밥그릇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의 도라희는 과연 그렇게 따졌다. 그게 기자가 할 짓이냐고.
그게 언론이 할 짓인가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그 모든 것을 초월한 ‘더 고상한’ 정의가 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제식구 밥줄 하나는 확실히 챙기는’ 것이 좋은 상사의 기준이라면, 그리고 ‘폭력적이지만 속정은 깊은’ 상사의 마음을 알아서 헤아리는 것이 유능한 직원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아름다운 직장은 조폭집단 아니겠는가 하는 삐딱한 마음까지 드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진실과 정의야 어찌되었건 ‘제식구만은 끔찍이 챙기는’ 윗대가리들 때문에 반세기 넘도록 이 땅이 이렇게 황망(확, 망)하지 않았더냐 묻고 싶어지는 것이다. 팽목항과 안산의 애도가 지역 상권을 무너뜨리고, 우울한 정서가 서민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궤변이 이상하게 만능처럼 통하는 것을 지금도 눈 똑바로 뜨고 보고 있지 않으냐고.
그들이 소위 ‘언론인’이기에 문제는 더 심각하다. 첫 번째 세월호 청문회가 진행되던 사흘 동안 침묵으로 일관한 지상파 방송3사를 향해 광주시민들이 정확하게 도라희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느그가 언론이냐?” 다행인 것은 하부장도 스스로 과오를 인정하고 기꺼이 또라이의 대열에 동참하기로 한다는 점이다. 그가 지켜주고 싶어 했던 밥그릇의 주인들이 도라희에 대한 질시와 비난을 멈추고 함께 나섰다는 점도 중요하다.
원작자의 말처럼 “따뜻하고 훈훈한 결말 따위”는 요원해 보이는 대략 600번째 4월 16일. 이렇게 해서 팬심 가득한 애정으로 가볍게 찾아간 극장에서 이 “지랄맞은” 현실을 잊어보는 일에 오늘도 나는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실패’는 계속되어야 한다. 도라희 같고 회심한 하부장과 그 똘마니 기자들과 같고 광주시민들과 같은 또라이들의 질문과 미련한 열정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살아서 볼 때까지.
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