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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24 - 당나라 측천무후와 현종을 거쳐 안사의난과 황소의난으로 멸망하다!
당태종 이세민은 645년 30만 대군을 몰아 고구려를 침공해 개모성,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등
4개 성을 함락했으나.... 이름모를(양만춘?) 성주가 지키는 안시성 공략에 실패해 철수합니다.
철수후에도 당태종은 고구려 침략을 포기하지 않았으니 적은 부대를 자주 보내 강역을 어지럽혀
저들을 피곤하게 해서는, 수년 사이에 천리가 황폐해지면 결국에는 이길 것으로 보았으니.....
647년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 1만명이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넙니다.
여기에다가 이세적을 요동도행군 대총관으로 삼아 3천명으로 신성도에서 들어가게
했으며.... 또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 을 청구도행군 대총관으로 삼아 병력
3만여명이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에서 바다를 건너서 고구려를 공격하게 합니다.
647년 8월에 강남에서 선박 수백척을 건조하고 648년 7월에는 사천의 검남, 8월에는 무주,
월주, 홍주 등지에서 전함 1,300척을 건조하는 중에 당태종은 12월에 신라에서 찾아온
김춘추를 성대히 환영하고는 나당동맹(고구려는 당이 차지하고 백제는 신라가 차지
한다) 을 성사시켰으며... 30만 대군을 일으켜 침공을 준비하던 중인 649년 4월에 죽습니다.
649년에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죽고 그 아들인 이치가 황제에 오르니 당 고종인데, 신라 "김춘추
의 부추김" 을 받아 마침내 군사를 내서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는.....
고구려인이 훗날 반란을 일으켜 나라를 다시 세울까 염려해 후환을 아예 없애기 위해 고구려인
들을 모두 중국으로 잡아가니 평양은 왕건때 까지도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황무지로 남았습니다.
고구려가 망한 직접적인 이유로는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서로 권력 쟁탈을 위해 내란
을 벌여서 싸웠으니 나라가 쑥대밭이 된데다가, 내전에서 패한 대막리지 남생이
수하 장수 밑 성주들과 함께 단체로 당나라에 귀순한 후에.... 그 향도가 되어
앞잡이로 쳐들어오면서 많은 성들이 전투의지를 잃고 싸우지도 않고 항복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당나라는 신라와 고구려 및 백제를 서로 나누어 가지기로 협약을 하고는
동맹을 맺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니, 이제 당나라는 군량을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직접 운송해 주는데다가.....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가 신라에 귀순해 당나라에
가서 작전계획을 협의하고 668년에는 신라군과 남북으로 협공하니 멸망하게 됩니다.
간접적인 원인으로는 당태종이 침략하기 3년전인 642년에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수나라와의
전쟁의 영웅인 영류왕과 대신 및 장군 100여명을 살해했으니.... 군사들을 지휘할 장군층의 40% 가
몰살된 것이라 당나라의 전쟁에서 전쟁을 수행할 대신과 장군계급 자원이 부족해진게 큰 이유입니다.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고구겨는 수나라 및 당나라와 70년간 전쟁을 치르면서 피로도가
쌓여 서서히 몰락해간 것인데..... 역사에는 “피로스의 승리” 라는게 있으니, 그리스 북서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대왕 이래 최고의 전략· 전술가로 이탈리아 남부
타렌툼의 원군 요청을 받아들여 이탈리아로 건너와 로마군을 상대로 여러차례 대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로마군과 첫 결전을 벌인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병력 3만 5천명 중 4천을, 그 다음
해에 치른 아스쿨룸 전투에서는 병력 4만명 중 3천명을 잃는 등 큰 손실을 입으니
이후 전투에서도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으나, 그에 따르는 병력 손실을
보충하지 못한 반면에..... 로마군은 계속 새 병력을 보충하는지라 결국 패해 물러납니다.
고구려군의 70년 전투를 보면 고구려 기마군단이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하지만 들판에서 적군
과 맞붙는 야전은 단 한두번 밖에 없었고 모든 전투는 성을 지키는 수성전이니..... 유일한
야전으로 645년 안시성 밖 들판에서 고연수와 고혜진이 지휘한 15만 고구려 기병과 보병은
당나라군에 허벌나게 깨지고 두 장수는 대부분의 병력과 함께 항복해 당태종을 섬기게 됩니다.
누구는 612년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얘기하는데.... 들판에서 처음부터 두 군대가 맞붙어 맞장을
뜬게 아니라 고구려군이 후퇴하면서 기짓 도주하니 30만 당군 별동대가 군량이 떨어졌음에도
평양성 까지 추격한 것은 내호아의 5만 수군으로 부터 군량을 보급받을 것이라는 기대 였습니다.
하지만 저 내호아가 공을 세울 욕심에 주법상의 만류에도 육군을 기다리지 않고 단독으로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외성 안에서 왕제 건무의 매복에 걸려 패퇴했으니 희망은 사라졌고.... 평양성은 견고
하니 절망감에 후퇴하다가 당한 것으로 이는 을지문덕 계략의 승리이지 통상적인 야전은 아닙니다.
고구려군이 당나라 군대와 들판에서 야전을 벌이지는 않고 성으로 들어가 수성전을 하자면
“견벽청야” 라고 해서 들판에 곡식을 불태우고, 마을 민가도 불지르며 우물에 독을 풀고
백성들은 모조리 성으로 불러들이니..... 설사 수성전에 성공했다고 해도 이후가 걱정입니다.
백성들의 소중한 재산이 모두 불타버렸고 수성을 하면서 양식이 모두 바닥이 났으니 이제 굶어
죽을 판이고, 전염병이 번지고 또 성을 사수했지만 군사와 백성이 엄청 죽었으며 게다가 농사
를 제대로 짓지 못했으니.... 고구려의 국력은 갈수록 쪼그라 들어 결국에는 무느지는 것입니다?
649년에 즉위한 고종은 무후를 총애하니.... 궁궐내에서 무후의 힘이 점점 커지고, 고종은 늙어 힘이
약해지면서 무후가 남편을 대신해 사실상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며 이후 무후는 몇명의
황태자를 죽이고, 두 명의 황제를 폐위시킨 뒤 690년에는 국호를 주나라(周)라 칭하고 스스로 제위
에 올랐으니.... 역사상 전례가 없는 중국 최초의 여황제 탄생으로 당(唐) 나라는 사라질 뻔 했습니다.
무후는 637년 당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해 정5품 재인(才人) 지위를 받았으며 태종에게서
별명을 받아 '무미랑(武媚娘)' 으로 불렸는데 649년 태종이 죽으니 출가해서 비구니
로 지내니 살아있어도 죽은 목숨보다 못한 처지였는데..... 태종의 9남인 고종의 명
으로 정2품 소의(昭儀) 에 복귀되어 651년에 황궁으로 금의환향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연을 보자면 고종의 황후 왕씨는 황제가 후궁인 숙비 소씨를 총애하자 질투에 눈이 먼 나머지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무소의를 궁중으로 불러들인 것인
데... 그러나 무후는 은혜를 원수로 갚았으니, 그녀는 딸을 낳은후 황후가 되기 위해 축하하러 황후
가 다녀가자 자기 손으로 아이 목을 졸라 질식사 시킨후 왕황후를 쫓아내고 황후 자리를 차지합니다.
왕황후와 소숙비를 모두 제거하고 655년 새로운 황후로 즉위하는 무후는 또한, 황후가 되는 과정
에서 자신의 친정이 한미한 것을 탓하며 이를 반대했던 장손무기나 저수량 등의 쟁쟁한 원로
대신들을 정치공작을 통해 모조리 죽이거나 귀양보내며 그 정치적 능력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은 선제였던 태종을 따라 국난을 수차례 해결하고.... 황제 못지 않은
권력을 쥐었던 무서운 인물들이었으니, 게다가 나약한 고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그
위세가 가히 황실을 쥐고 흔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러한 자들과 정치적인 대결을
벌여 제거해버린 일은 측천무후의 무서운 정치적 역량을 드러내는 예니 비범한 여자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감을 가진 중신들이 그녀가 병든 말년에 가서야 비로소 신룡정변을 일으키니 무후는
국권을 내놓게 되었고... 무후에 의해 폐위되었던 중종이 복위했다가 다시 제2의 여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황후와 황태녀를 생각하고 있었던 위후의 딸 안락공주에 의해 독살되니 경룡정변 입니다.
중국이 고구려와 70년간 전쟁에 몰두하는 사이 서쪽 티베트인들의 나라 “토번” 이 성장하는데, 그
역사는 570년 남리룬첸의 즉위에서 시작되니 지나친 확장에 대한 반발로 619년 남리송첸이
독살되고 속국들이 다시 독립하는 가운데 13세의 아들 손챈감포가 속국들을 평정하고 티베트를
통일했으며 633년, 스키타이 유목민들을 평정하고 수도를 라싸로 하는 토번(吐蕃) 왕국을 건설합니다.
634년, 손챈감포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물을 교환하였으며 토번의 남쪽에 위치하는 네팔의 릿체비
왕조에 사자를 보내 브리쿠티 데비(赤尊公主)를 왕비로 맞아들였고 636년, 당태종에게 당나라의 황녀
를 왕비로 맞기위해 사신을 보냈지만 토번이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을 위협한다는 이유로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손첸감포는 20만의 군사를 일으켜서 토욕혼을 정벌하여 멸망시켰고 내친김에 백란
등 강족 마을도 공략한후 송주(쓰촨성 쑹판현)를 내놓으라고 당나라에 요구했지만
당군에 패했으며.... 그 다시 당태종에게 특사 가르통첸을 보내, 금 5천령을 납폐로서
주었고 당나라는 토번의 상승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641년 문성공주를 왕비로 보냅니다.
원래 문성공주는 손챈감포의 아들 궁송궁첸에게 시집갔으나 그가 낙마사고로 사망해 유목민
의 형사취수제와 정략에 의해 시아버지와 재혼했는데.... 손챈감포는 문성공주가 '자면의
풍습' (얼굴에 적토를 바르는 풍습)을 싫어하자 이를 폐지하는등 정성으로 대했으며 또한
친당 정책을 시작해 당나라와 교역하며 인도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649년에 당태종과 손챈감포가 죽자 양국 관계는 완전히 파탄나고 마니 당시 토번
왕국의 국력은 정점에 달한 시기였고, 명신 가르통첸의 개혁과 이로 인해 강화된 가르
가문의 집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성과가 필요했기 때문에 669년 9월 토번이 천산남로
를 급습하자 670년 고구려 땅에 주둔한 설인귀(薛仁貴) 부대가 황급히 청해에 투입됩니다.
토번의 침공으로 당나라 대군이 고구려에서 철수하자 670년 3월 신라군의 한 부대는 고구려
부흥군과 함께 일시적이지만 압록강 이북까지 작전반경을 넓힐 수 있었으며, 한편
670년 7월 청해 남쪽 대비천(大非川)에서 나살도행군총관(邏薩道行軍總管) "설인귀"
가 이끄는 당군이 가르친링의 토번군에게 전멸을 당하는지라 설인귀는 서인으로 강등됩니다.
대비천전투에서 대패로 서역에서 당나라 위상은 실추되었고... 가르친링은 여세를 몰아 670년에
당나라가 장악하고 있는 서역을 공격해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속한 4개 도시인 안서사진
(安西四鎭), 카라샤르(焉耆)ㆍ쿠차(龜玆)ㆍ호탄(于闐)ㆍ카슈가르(疏勒)가 토번의 영토가 되어
서역이 토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완충지대였던 당의 속국 토욕혼도 토번에 명망당합니다.
672년 4월 토번의 사절이 장안에 도착하여 당 고종과 측천무후를 접견하면서 협상이 되자 같은
해 8월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 이 이끄는 정예기병이 황해도 서흥(石門)에서 신라 중앙군단
을 전멸시켰으며 12월에 당군은 고구려 유민이 지키던 백수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구원
하려고 온 신라군마저 격파했으며 673년 윤 5월에 임진강 서쪽에서 고구려인들을 몰살시킵니다.
당나라 설인귀군의 반격이 실패하고 요지인 안서 4진을 뺏긴 것은 토번 왕조는 대외적인 제도 정비에
성공하고 군사력도 증가된 때문이었는데.... 그러나 699년 치둑송첸의 대숙청으로 가르친링이 제거
되고 710년 금성공주의 혼인으로 일시적으로 화평했지만, 715년경 부터 당나라가 토번에 대공세
를 가해 토번의 영향력을 점차 조금씩 줄였고 당의 명장 고선지의 원정으로 성과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고선지 장군 역시 751년에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 아바스 왕조군과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안사의 난 이후 하서 및 농우, 안서 및 북정 지역의 군사들이 반란 진압에
소모되면서 당나라의 빈자리는 다시 토번이 차지하게 되니 당나라는 옛날
한나라가 흉노에게 조공했듯이 토번에 매년 공물을 바치며 이들을 달래고자 했습니다.
측천무후와 고종의 딸인 태평공주는 무후 몾지않은 크나큰 야심을 가졌던 올케인
위황후 및 조카 안락공주와 대립했으며.... 이런 가운데 예종의 아들인 이융기
가 고모인 태평공주와 손을 잡고 아버지를 복위시켰으니 당륭정변 이라고 합니다.
정변에 승리하면 이번에는 동지들 끼리 권력투쟁을 벌이는 것이니....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원로원파를 그리스까지 쫓아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는 서로 싸웠으며 이집트의 나세르는 혁명 성공후 동지 나기브
대통령을 축출했고 5.16후 박정희 재건최고회의 부의장도 의장 장도영을 제거합니다.
당륭정변에서 위황후와 안락공주를 제거하해 정치적으로 큰 힘을 얻은 태평공주
와 황태자가 된 이융기는 권력투쟁에 들어가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고,
이융기가 황제 현종으로 즉위한 후에는 태평공주가 숙청되니 선천정변으로
이제 당나라는 당태종의 시대에 이어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현종의 시대는 국가의 재정비와 교류의 발달로 개원성세(713년 ~ 741년)라는 태평
성대를 열게 되었으니 성당(盛唐)으로 황제는 여러 명재상들의 보필로 내치와
외치를 갈고 닦았으니 내적으로는 "화적법" 을 반포해 국내의 조세/군량 체제를
안정시키는 데에 성공했고, 부병제를 폐지한 후 "모병제" 로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당나라는 다민족 정책으로 선비족 문화의 면모를 보여 외적으로는 돌궐 · 토번 ·
거란과 같은 유목세력들과 협력하여 실크로드를 이용했는데 하지만
결국 토번에 이어 위구르족에 의해 당나라의 세력은 다시 약해지게 됩니다.
또한 현종의 치세 말년(742년 ~ 756년, 천보난치)에 하필이면 현종이 며느리인 양귀비에 푹
빠지게 되었으니 양귀비에 의해 현종은 아예 정사에서 손을 놓게 되었고, 정국은
재상 이임보 그후에는 양국충 등 몇몇 지도층과 양귀비의 일족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한 절도사들의 세력이 점차 커지고, 그중 가장 힘이 강했던
안록산이 “안사의 난” 을 일으키면서 장안의 궁궐이 함락당하고, 양귀비가 그녀에게 반감
을 품은 군병(軍兵)들의 강요에 의해 자살하는 사태가 일어났으니 마외병변이라고 불립니다.
안사의 난(安史之亂)은 755년 12월 16일 부터 763년 2월 17일에 걸쳐 당나라의 절도사인 안록산과
부하 사사명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으로 천보의 난(天寶之亂)이라고도 하니 안록산은 나라 이름
을 연(燕)으로 하고 스스로 황제(稱帝)라고 선포해 9년간 지속했는데 이 기간동안 당나라의 인구는
3,600만명이나 줄었으며 당은 위구르족에 의해 구출되나 위구르인에 의해 수도 장안은 황폐해집니다.
당나라 말기 율령제 변질, 균전제와 조용조의 변화, 부병제의 붕괴 등이 원인이라고 하는데 “개원의 치”
를 이끌었던 현종은 “양귀비”즉 수왕의 비 양옥환에게 반했으니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수왕과
양옥환을 이혼시킨후 양혹환을 도교 사원에 가게한 후 그녀를 다시 궁중에 불러들여 귀비로 삼았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양귀비와 놀며 그녀가 말하는 것은 다 들어주었으니 백거이(白居易)가 〈장한가(長恨歌)〉
에서 노래한 바와 같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궁정에서 환락의 생활에 빠졌는데 양귀비
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재물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조차 넘겨주는 일을 서슴없이 행한 현종은
여산(驪山)의 온천에 있는 별궁을 수리하여 화청궁(華淸宮)이라 하고 사시사철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현종은 정치를 고력사등 환관들에게 넘겼고, 때문에 양국충 등 외척과 환관들의 본격적인 환관-외척
정치가 시작되었으니 재상 이임보는 양귀비를 조종하여 독재정치를 하였고 현종은 명신 장구령
의 충언은 무시하고 이임보만 절대적으로 신임하였는데 그로 인해 746년 과거 응시자를 전원 탈락
시키는 사건을 내는데... 그보다 우수한 관리가 나오면 그의 정치가 흔들릴 것 같았기 때문이랍니다.
이임보가 죽고 난 후에 양귀비의 사촌인 양국충이 재상이 되는데 현종은 양국충뿐만
아니라 양귀비의 언니들 세명에게도 호화 저택을 하사하고, 그 친척들을 고관으로
임명하는 등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과 부패 속에서 제도와 관리들은 타락할 수
밖에 없었으며, 권력 다툼은 결국 755년 안녹산에게 난을 일으킬 명분을 주게 됩니다.
부패한 관리와 환관정치로 인해, 수탈을 당할 대로 당한 농민의 소외로 자립 소농민층이 해체된
것도 원인이니 해체된 자립 소농민층은 떠돌이 유민화 되었으며 당나라는 측천무후 때 억압
받던 귀족 세력이 현종 때에 다시 집권했으니 구집권층과 지주, 상인층 출신과 갈등이 시작됩니다.
755년 안녹산은 간신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서는 756년 1월
낙양에서 제위에 올라 연(燕)이라 칭했고 6월에 수도 장안(長安)을 점령하니 7월
양국충이 처형되고 양귀비가 자살했으며 757년 원군으로 온 위구르족이
장안을 정복하고 유린했고 1월 안녹산은 그의 맏아들인 안경서에게 처형당합니다.
759년 안경서가 안녹산의 부장이던 사사명에게 처형당했고 사사명은 761년 맏아들 사조의에게
처형당했으며 762년 당 현종이 사망한후 763년 사조의의 자살로 난이 평정되지만 8년간의
전란에 시달려 농민들이 죽고, 나라의 정치 제도는 무너지게 되며 당은 쇠퇴기로 접어들게 됩니다.
또한 위구르족 등 이민족에 의해 수도 장안이 함락되면서 당나라 전 국토가 유린당하며
황폐해졌으니 이 전란으로 인해 전국의 인구는 293만호로 13년 전의 890만호
에 비해 무려 “70% 의 인구가 감소”하게 되었으며.... 753년 52,880,488명의
인구는 764년에는 16,900,000명으로 기록되었으니 중국인 3분지 2가 죽은 것입니다.
결국 당나라는 조세 제도는 양세법, 군사 제도는 모병제로 바뀌는데 수많은 반란 속에서
절도사 세력이 성장하였고, 중앙정부에서는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다툼을 벌였으며,
그후 강남의 풍부한 경제력 덕분에 명맥을 유지했으나 875년 “황소의 난” 으로
당나라는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되어 907년 절도사인 주전충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당나라는 국력이 쇠락하니 중당(中唐)이라 불리는데 바로 절도사의 난립에다가 티베트인 토번의
흥성 때문이었으니, 당나라는 건국 당시 균전제와 연계한 군사 제도인 부병제를 실시했는데
토지 지급량이 줄어들면서 과중한 군역에 못 이겨 군역을 피해 도망치는 도호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당의 전성기라고 할수 있는 측천무후, 현종 시기부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은 번진을 설치했는데 이때까지의 번진은 어디까지나 변경지역에
국한되었는데 안사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내지에도 번진을 설치하는 내지 번진
이 설치되었고 이로서 당제국은 수도 장안 인근 지방 일부와 당을 지지하는
강남지방의 번진(순지 번진)을 제외하곤 잠재적인 적들에게 둘러 싸인 형국이 됩니다.
절도사들의 군사력은 급속히 강해졌고, 절도사들끼리 서로 결탁하여 중앙 정부로 조세를
보내지 않았으며 게다가 중앙 정부의 군사력은 규모와 훈련, 사기 모두에서 최악의
군대가 되는 등 당나라는 총체적인 쇠퇴를 겪게 되니 특히나 번진은 물론 당 황실
에서도 부병제를 대신하여 용병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재정 부담도 그만큼 늘어났습니다.
그래도 대륙을 호령한 나라라 한때는 절도사들을 진압해 지방 통치를 반짝 복구해서
(원화중흥) 그럭저럭 120년을 버티지만..... 외부적으로는 토번과 회흘의
강성으로 당은 수도 장안까지 위협받게 되었으며 또 안사의 난에서 위구르는
당나라 요청을 받고 장안을 침입했는데 이 때 장안 시내가 대단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고조 이연의 자손은 남자든 여자들 모두 노예로 끌려 가서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받기도 하였고 황폐화
된 장안은 한동안 재기불능 상태에 있었으며 또 요동과 만주 지방은 거란과 발해의 세력권이 되었고
또 고구려 유민 출신인 이정기의 치청 번진 등은 사실상 반독립 왕국이 되어 손자 이사도까지 무려 4대
를 이었고 결국 당나라는 신라에 지원군을 보내달라 할 정도로 국력을 쏟아 간신히 이사도를 토벌합니다.
활약한 황제가 두 사람 있는데 바로 덕종과 헌종이니 덕종은 양세법을 실시하여 재정을 충실히 했고,
당조에 적대적인 하북 3진을 치러 나섰지만 전선이 지지부진했던 사이에 장안에서 주차- 이회광의
난이 터지고 진압한 후에도 토번-회흘과 중앙아시아를 두고 계속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화해합니다.
헌종 시기가 되면 친위 부대인 신책군이 설치되고 이를 이용해 적대적인 번진을 모두 진압
했는데 이에 번진의 재정과 군사력을 회수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등 큰 소득을
거두었으니 원화중흥인데 그렇지만 헌종은 말년에 마약 금단에 빠지고 불교를 맹신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가 환관에게 독살당하고 말았으니..... 다시 당왕조는 쇠퇴의 길을 걷습니다.
이후 당나라는 만당(晩唐)으로 불리니 환관들이 좌지우지하는 나라로 서서히 몰락해 갔으며
최후의 중흥 군주였던 선종 때부터 시작된 연속된 반란은 희종 때 터진 황소의 난을 통해
당나라에게 그야말로 치명타를 가했으니 당조가 적대적인 번진에 맞서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당에 충성하던 순지였던 강회(강남-회수) 지역에 의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강남 개발이 어느 정도 진전되었고 상업이 발달하자 강회 지역은 부유해졌으니 당조는 지역
에 과중한 세금을 매기고 이를 이용해 신책군을 만들어 당조에 적대적인 번진에 맞섰던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 지역은 당의 착취에 저항하게 되니 이미 구보의 난, 방훈의
난이 있었고, 끝내 소금 밀매상 출신인 황소가 일어서니 당은 확실하게 망하는 길로 갑니다.
농민 반란군에 불과했던 황소군은 허약한 중앙군을 격파하면서 장안에 입성하였고, 주민들의
지지까지 얻으며 다음 왕조를 예고하였으나,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에 포위되고 심복이었던
주온(주전충)이 배신하여 관군에 합류하면서 황소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주전충은 자신의 이름
을 파자해 '인왕중심(人王中心)' 이라고 해석하는 등 이미 천하를 가질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막가는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불가피한 일이기도 했는데 주전충은 황소의 잔당군을 자기
세력으로 흡수하는등 세력을 키운후 당나라를 멸망시키니, 전충(全忠)이란 이름이 무색해져
버렸고 이후 당은 그저 이름만 유지한채 몇년 더 굴러가다 애제를 끝으로 289년 만에 멸망합니다.
오대십국시대에 5대의 하나인 후당과 10국의 하나인 남당은 당나라의 후계 국가를 자칭했으나
명분이 부족한 자칭 후계국으로, 후당의 이씨 황가는 튀르크계 사타족이었으니 혈통적으로는
연결성이 없고 당 말기에 이국참이 공을 세워 당나라의 국성인 이씨 성을 하사받았고
그 손자 이존욱이 나라를 세워서 이씨이며 그리고 남당은 남오의 승상 서온의 양자였던
이변이 남오를 찬탈하여 세운 나라 인데도..... 이변은 당 황족인 이각의 후손을 자칭합니다.
당나라의 행정은 3단계이니 도(道)-주(州)-현(縣)인데.... 원래 춘추전국시대에 각 나라는 자신의 영토에
군(郡) 또는 현(縣)을 설치하였으니 그 중 진나라에서는 군을 최상위 행정구역, 현을 하위 행정구역
으로 군-현 2단계 체제였는데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36군(郡)을 설치했으며 한나라는 진나라
행정제도를 거의 계승했고 군의 상위 행정구역으로 주(州)를 설치하고 전국을 13주(州)로 나누었습니다.
원래 주(州)는《삼국지》에 나오는 형주나 예주같이 광역 행정 구역이었으나 진(晉)과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많은 주(州)가 새로 설치되고 주(州)의 의미는 광역 행정 구역에서
그 치소를 가리키는 지역명으로 변화했으며 당(唐) 태종은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10도(道)를 설치하였으니 이 광역 행정 구역의 "도(道)는 한국과 일본" 에도 도입이 됩니다.
군대는 절충부가 전국에 600곳이 존재했는데, 소속 병사는 상중하로 나뉘어 초기에는 상 1,000・
중 800・ 하 600명, 후에 1200・1,000・800명으로 증원되었으며 10명이 1화(火), 5화가
1대(隊), 4대가 1국(國)을 이루었고, 각각의 지휘관을 화장(火長) ・ 대정(隊正)・ 교위(校尉)・
절충도위(折衝都尉)로 불렀으니 600 × 1,000= 60만 명으로 이것이 당제국의 정규 병력이었습니다.
선비족이 한족을 정복한 후 그들의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북위 때부터 진행된 호한
융합이 완성된 침투 왕조의 전형이자 최종형으로 꼽히는데 당나라는 한국사에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시대를 종식시킨 바 있으며 또한
당은 탈라스 전투에서 패배했는데, 이는 유럽까지 제지술이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후한 이후 대륙에서는 《삼국지》부터 시작된 위진남북조시대라는 혼란기를 겪었는데 이 혼란기는 근
370년이나 이어지는 긴 시기였으니.... 흔히 한나라는 유럽의 고대 로마와 비교되곤 하는데, 로마
또한 고대 통일 제국을 완성하였으나 서로마의 멸망 이후 다시는 통일 제국을 등장시키지 못했습니다.
당나라의 존재 의의는 대륙 재통일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그것을 성공하지 못한 유럽 및
서양 사학계에서는 위진남북조시대와 함께 연구 대상으로 분류되는데 당나라 황실인 농서
이씨는 관롱집단이라고 해서 오호십육국시대에 대륙으로 유입된 선비족이 한족에 동화된 자들
이었으니 이러한 기원에 당나라는 중원 바깥의 이민족들도 인재라면 적극적으로 등용했습니다.
이정기, 고선지, 흑치상지, 설계두, 장보고, 최치원, 최승우, 최언위는 본국이 아니라 당나라로
진출해서 명성을 떨쳤으며, 당은 외국인 유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는데 837년
당나라 국학에서 공부하는 신라인은 216명이었고 이조차 사비 유학생은 제외한 기준이었
으니 국비 장학생은 당에서 왕복 교통편과 의복이나 식비 같은 체제비에 책값까지 지원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외국인 고용 기조는 측천무후처럼 관롱집단과 문벌귀족에게 일정 이상의
지지를 받을수 없었던 일부 권력자들이 이들 외의 인재들을 고용하기 위해 실행한
것이었으니 무천진 관롱집단과 문벌귀족은 역사와 혈통에 대한 차별이 대단했습니다.
때문에 관롱집단이거나 역사적인 문벌귀족 또는 당나라와 동맹을 맺었던 신라인들 처럼 사이좋은
이민족이 아니면 마음대로 다니기도 어려웠으며, 원나라 시대까지도 중국은 외국인 유학생들을
받아들였는데, 명나라 극도로 폐쇄적인 사회로 변하면서 유학생 응시제도 까지 폐지하게 됩니다.
현대 중국인들에게 중국 역사상 가장 좋아하는 왕조 시기를 꼽으라 하면 대부분 한나라와
더불어 당나라 시기를 꼽을 정도로 중국인들 사이에서도 영광스러운 과거로 인식되는데
역대 중국 왕조 중 군사, 경제, 문화, 정복 등 다방면에서 모두 좋은 나라였기 때문인가 합니다.
중국 역대 왕조 중 가장 활발한 대외 팽창정책과 삼국시대부터 이어진 혼란기를 최종적으로 마무리
지었다는 점과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태평성대를 이룩한 당태종과 당현종이 있었으며 심지어
당태종과 위징의 관계는 가장 이상적인 군신관계 중 하나라고 치켜세워진다는 점, 또 중국
역대 왕조들 중 송나라와 더불어 가장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 같은 이유로 인해 인기가 있습니다.
사실 송나라가 더 개방적이고 융성했으나 송은 대신 군사력이 약해서 역사 내내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에게 굴욕도 많이 당하고 해서 당에 비하면 평이 높지는
않으며 그리고 중국인들이 당을 좋아하는 마지막 이유는 중국 경내 소수민족을
흡수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로 현 중국에서 밀어주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나라가 멸망한지 500여 년이 지난 명나라 치세에서도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대명(大明)'이 아닌 '대당(大唐)' 인이라고 소개하는 부분이 조선인 최부의
표류기인 《표해록》에 나오며, 현대의 차이나타운도 중국인들은 '당인가(唐人街)'
라고 부르며 일본이나 류큐에서 '당(唐/Kara)' 은 중국을 지칭하는 대명사였습니다.
그보다는 사정이 나은 한반도에서도 중국 한족풍의 문화를 '당풍(唐風)' 이라 일컬었는데 한(漢)'
이 한족(漢族) 의 어원이 된 민족적인 개념이라면 '당(唐)'은 문화적인 개념의 중국을 상징
하는 것이니 서양에서도 당과 실크로드로 인한 활발한 교류가 있었기에 인식이 좋은 편입니다.
사회ㆍ문화적으로 동아시아에 분류되는 통일신라, 발해, 일본, 베트남에서는 당나라
의 문화를 받아들여 율령, 불교, 유교를 통해 국가 체제를 갖추었으며 또한
균전제 - 조용조 - 부병제 - 율령제 - 3성 6부제로 대표되는 당나라 중기까지의
국가체제는 고대 중국 국가체제의 완성으로 여겨지니 한국과 베트남이 따라 했습니다.
당삼채로 대표되는 도자기는 이전 시대와 비교했을때 화려하면서도 이국적이고, 자유로운
풍조를 띄게 되었으며, 이러한 문물은 이슬람을 거쳐 유럽에도 영향을 주게되고
종이가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이슬람 문명으로 넘어가 전 세계로 퍼졌으며 불교와
도교 교단이 확립되어 다양한 종파들이 활발히 활동했던 것도 당나라 시대이며, 문학적
으로도 이태백, 두보, 백거이, 한유, 이고 등의 업적이 후에 고문(古文)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반면 절도사나 환관 등의 문제에서 보이듯이 권력의 통제와 국가 통치의 구조라는 부분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 계속 펼쳐졌으며, 결국 이러한 문제에서 유발된 내전과
국력의 소모는 당의 멸망의 하나의 원인이 되었는데 환관들의 전횡은 후한과 명나라
이상으로 심각해서 헌종 이후 황제들을 환관이 옹립하고 시해하거나 폐위했을 정도였습니다.
오대십국시대에만 해도 당나라에게서 이씨 성을 하사받았다는 이유로 국호를 당으로 한 후당, 당나라
황실의 후손을 사칭하며 국호를 당으로 한 남당 같은 국가들이 있었으며 후당의 경우, 장승업은
후당의 이존욱이 스스로 황제가 되려고 하자 당나라 황실의 후손을 황제로 세울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이존욱도 숙적인 주전충을 당나라 황제를 쫓아내고 자기가 황제가 되었다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당나라는 관료제의 발달과 행정력의 정교함으로 유명하니 일본 승려 엔닌이 당을 여행하며 집필한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당에서는 입국하는 외국인들을 모두 체계적으로 관리했음
을 알수 있으니 각 도시마다 외국인이 오고가는 것을 관료들이 중앙에 보고하고, 일본에서 온
외국인인 엔닌 일행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도착지에서는 엔닌의 정보를 훤히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름길이지만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이라 엔닌은 뇌물을 써서 통과하게 해달라고 고위 관료에게 청탁
했더니 당나라에서는 관리가 뇌물을 받지 않는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기록했으며 그것도
이때가 행정력이 무너져가던 당 말기에 접어들던 9세기 중반 시절이며, 공무원들이 예나 지금
이나 봉급 문제와 지위 문제 때문에 뇌물을 받아먹는다는 걸 생각한다면 놀랍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은 3세기 동안이나 존속했던 대제국인 만큼 한국의 국가들과 전쟁만 벌인건 아니고 활발한 교류도
이루어졌는데 8세기 초반에 신라와, 8세기 중반 발해와 관계가 개선된 이후에는 당나라 영토 내에
신라방, 발해방 등 남북국 상인들의 집단 거주지가 만들어졌으며 입당구법순례행기에 따르면
일본 승려 엔닌이 당나라에 가는데도 신라어 통역관을 고용해서 다닐 정도로, 당나라에 신라인 사회
는 폭넓고 뿌리깊게 존재했으니 대표적으로 4대에 걸쳐 당나라에서 출세한 김씨 부인 가문이 있습니다.
당의 장안성 모델 역시 신라의 금성(서라벌)과 발해의 상경용천부, 그리고 일본의 헤이조쿄
(나라), 헤이안쿄(교토) 구획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또한 많은 신라와 발해 유학생
들이 당나라에 유학해 외국인 상대로 치라는 과거인 "빈공과에 급제" 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반도 출신 공녀를 눈에 불을 켜고 잡아갔던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와는 다르게 당은 거절하기도
했으니 오히려 몇번은 신라 쪽에서 자발적으로 당 황제에게 공녀를 바치려고 시도를 했으나
당에서는 푸짐하게 선물까지 인겨주면서 공녀들을 돌려보냈는데 하지만 신라의 끈질긴
시도 끝에 당덕종 때 김정란이라는 신라 여인을 공녀로 받아들인게 유일한 예외라고 합니다.
한자(漢字)는 한(漢)나라 글자니 2천년전 한나라 시대때 한반도에 전해진지라 산 山(한국말 뫼),
강 江(한국말 가람), 해 海(한국말 바다), 태양 太陽(한국말 해) 등 한나라인들의 발음이
전해지니.... 우리 말 뫼나 가람 대신 중국 말 산과 강이 쓰이고 방향을 가르키는 한국말은
아예 없어지고 대신에 중국말인 동서남북(東西南北) 이 통용되며, “큰가람은 한강” 이 되고
“샛바다는 동해” 가 되며 “흰머리뫼는 백두산” 이라는 중국 한나라인들의 말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민족은 문자를 만들지 못했으니 글자가 없이 오랜 세월을 살다가 훗날 중국에서 한자
가 들어온 것인데.... 저 한(漢)나라 사람들의 한자 발음 한가지만 우리가 현재까지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또한 당(唐)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의 한자 발음이 현대 한국
한자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연구 결과도 있는 등, 한국에 큰 영향을 준 나라 입니다.
일본 와카야마현에 高野山(고야산)은 승려 구카이(홍법대사)가 '단상가람(壇上伽藍)' 절을 지으니
히에이산과 함께 일본 불교의 성지인데, 804년 사이초와 함께 견당사(遣唐使)로 당나라에 가서
유학했으니... 사이초는 히에이산(比叡山)의 천태종(天台宗)을 세웠고 구카이는 당나라 청룡사
(靑龍寺) 밀교의 고승 혜과(惠果) 에게 배워 고야산(高野山) 에서 진언종(眞言宗)을 개창했습니다.
저 高野山(고야산)을 일본에서는 “타카노야마” 라고 훈독하지 않고 한국인들 처럼 こうやさん(고야산)
이라고 음독하는데... 오늘날 중국 베이징의 발음으로 표준어인 보통화로는 gāoyĕshān (가오예싼?)
라고 발음하니, 베이징등 화북 지방은 북방민족이 침입해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 몽골
족의 원나라에 이어 만주족(여진족)의 청나라가 섰으니 당나라시대 발음에서 많이 달라졌는가 합니다.
“티켓 Ticket” 을 베이징 표준어로 “퍄오(피아오)” 라 하는데 강남의 안후이성이나 저장성에서는
한국인들 처럼 "표” 로 발음하며, “身分證” 은 베이징 표준어로 “신펜장 shēn‧fenzhèng) 이라
하지만 강남에서는 우리처럼 정확히 “신분증” 이라고 발음하며... 寺 는 중국 표준어로는 쓰(sì),
한국은 사(절), 일본은 지(데라) 라고 하는데 모두 당나라시대 발음이 조금 달라진 것으로 봅니다.
그럼 한나라와 당나라시대 중국인들의 발음은 당시 이민족이었던 양자강 이남 월나라인들의
거주지 강남 지방과 한국에서는 원 발음이 유지되어 왔으나, 베이징은 북방민족과 혼거함
에 따라 발음이 변한 것이니 저 高野山 은 당나라때 발음은 현재 중국 표준어 gāoyĕshān
(가오예싼?) 이 아니고.... 한국이나 일본에서 발음하는 “고야산” 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