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랜 동안 대학에서 디자인․ 構成學 교육에 종사해 왔습니다. 많은 학생들을 접하면서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공통된 의식이나 감성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기하학적 바탕이나 평면구성을 실습하면서 때때로, 깜짝 놀랄만한 작품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10년전쯤, 보스톤의 MIT(매세추세츠 공과대학)을 방문했을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디어․ 라보>라고 하는 연구소에서 강연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황망히 가지고 있었던 학생들의 실습작품의 슬라이드를 소개하면서 나의 전문적인 입장으로 구성학(構成學)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으로, 급작스러운 시간을 메꾸었습니다. 그러자 앞에 계신 교수들이나 대학원 학생이 일제히 놀라운 표정으로 “일본학생들은 어떻게 이렇게 디자인 센스가 좋은가” “당신이 잘된 작품만을 엄선해 온 것은 아닌가?”하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나로서는 극히 일반적인 구성교육의 과제작품을 보여주었을 뿐인데 이것은 의외의 반응이었습니다.
이 때 이후,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한 가지는 디자인계 학생의 작품들이고, 그 가운데 일본인 본래의 미의식과 평면구성에 의한 조형능력의 높이를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강하게 잡아끄는 논법(論法)이기는 하지만, 나는 예전에 재패니즘의 원점은, 지금의 일본인의 피에 흐르고 있는 미의식과 조형력에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잠재적인 의식을 쭉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기점이 되어 나의 재패니즘론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제까지의 재패니즘론은 우키요에나 일본의 미술공예가 유럽 미술에 끼친 영향과 문화의 변용을 중심으로 해서, 인상파나 아르․누보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한 검증이 중심적인 테마가 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미술사적인 논고는 미술사․예술학의 전문가들에게는 아주 흥미있는 연구 대상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너무 전문적인 것처럼 여겨졌다고 생각합니다. 또 재패니즘이 근대미술이나 현대 디자인에 어떤 관련이 있으며, 오늘날의 사회와 어떻게 결합되고 있는 것인가와 같은 소박한 의문에 부응하는 일반서로서의 조건을 훨씬 넘어선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와 같은 관점에서부터 종래의 재패니즘론을 다시 보면서, 재패니즘의 발생에서부터 역사적인 변천을 파악할 뿐만 아니라, 장식미술․ 디자인․ 건축․ 복식․ 텍스타일 로 말하는 폭 넓게 미술․ 디자인 영역으로 눈을 돌려, 다각적인 관점으로 <재패니즘>을 재고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재패니즘의 원점인 일본인의 미의식과 그 조형원리에 대해서, 본인의 전공인 구성학으로 파악해 본 재패니즘을 非定形과 아신메트리(asymmetry)의 고도한 조형원리에 있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 비정형에 무한한 애착을 갖고 있는 일본인의 조형원리에는 확실히 이유가 있었다는 것도 해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차원분열의 기하학이라는 1970년대에 제창된 복잡계의 이론이기도 합니다. 또 차원분열로는 황금비와 깊은 관계가, 결과로서 미정형의 미에도 황금비율이 포함된다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21세기를 앞에 두고 있는 오늘, 일본인이 이제껏 가지고 미의식의 근거로 여기고 있는, 와비(わび), 사비(さび), 풍류라고 하는,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덧부친 감성의 중요성으로 말해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재패니즘을 말하는 것은, 즉 현대사회에 있어서도, 이 감성이 정말 미의 원천이 되고, 풍요로운 문화를 키워나간다는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일본인이 지니고 있었으나 현재는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생각되는 우수한 미의식은 현재 여전히, 우리의 피에 흐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독자 여러분들이 알고, 조금이나마 감성 풍부한 미적 생활을 보낼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면 더없이 행복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제1장 근대 디자인과 재패니즘
1. 디자인과 재패니즘
시노와즈리와 오리엔탈리즘
역사를 근원으로 보자면,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 지역에서 꽃피웠던 문화는 그 이후 다른 문화 사이의 교류에 의해서 서로 영향을 주면서 변용해갔다. 그것은 남아있는 역사상의 유물, 미술공예품이나 기록을 보면 일목요연하다.
유럽의 역사를 보아도, 로마제국은 그리스 시대의 樣式美나 동방의 아시아․ 아프리카 문화와 융합했던 헬레니즘의 양식을 그대로 계승해나갔는데, 그러나 완전히 그대로만은 아니고, 보다 화려하게 어떤 것인가 말하자면 장식이 과다한 것으로 무르익었던 것으로 변화시켜왔다. 남구라파의 스페인은 8세기, 사라센 제국에 수용되어, 회교문화의 세례를 그 당시 받았고, 이베리아반도에 쌀과 사탕을 퍼뜨렸다. 현재 여전히 북구라파와 한 선을 그리는 그 문화의 색채는 건축이나 장식미술에 색 짙게 남아있다.
같은 시기에, 일본의 나라(奈良)시대에는 실크로드를 통해서, 페르샤의 문양의 공예품, 가라스器, 공작․ 코끼리․ 사자 등의 남아시아 동물․ 식물의 장식품이 다수 유입되었다. 불교 전래와 함께 이러한 異文化가 일본에서 반추反芻, 음미되는 가운데, 세련된 양식으로 승화시켜, 일본 독자의 문화로서 깊이 침투해 갔던 것이다.
당연한 것이면서 근세 유럽에 있어서도
p. 80
2. 근대 디자인 사상과 재패니즘
산업혁명과 인쇄미디어
현재 그라픽 디자인이라고 하면 인쇄디자인과 동의어로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래픽 디자인과 인쇄와의 결합은 밀접하다. 인쇄는 원화나 도판의 畵像과 조금도 다르지 않을 정도로 같은 것을 대량으로 복제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회화나 조각 등의 순수미술과 달리, 인쇄된 한장 한장 각각이 질이 같은 오리지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신문․잡지나 길거리에 게시된 포스터처럼, 대량 인쇄된 인쇄물은, 한번에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미디어(매체)로서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15세기에 발명된 쿠텐베르그의 활판인쇄기는 일대 정보혁명이었다고 말한다. 그 이전에 구두로 또는 손으로 써서 하는 정보전달, 시각전달의 커뮤니케이션에 비해, 비약적인 정보의 효율화를 꾀할 수 있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서구 사회에 있어서 근세까지의 그리스도교의 절대적인 권력과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은, 활판인쇄 된 대량으로 유포된 성서라고 하는 미디어 없이는 생각해 볼 수 없었을 것이리라.
산업혁명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 공업화사회는 공업제품의 증대와 더불어 제품 코스트를 끌러내려, 급격한 경제발전을 달성했다. 이 테크놀로지의 진보는 인쇄술에서도 마찬가지로, 구식의 목판 활판인쇄기로부터 1800년 초에는 주철제의 활판인쇄기가 되어, 수동식 인쇄에 비해 10분의 일의 힘으로 가동시킬 수 있고, 판면도 2배의 크기가 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증기기관에 의한 원통으로 된 실린더 방식으로 해서 인쇄 스피드는 비약적으로 향상 되었다. 이러한 인쇄기계의 혁신은 신문․잡지․서적, 지라시 등 인쇄물을 대량으로 유통시켜, 프린트․미디어의 정보혁명을 가져왔다. 런던, 파리, 뉴욕에서 많은 신문이 발행되고, 하루의 뉴스가 그전보다 5~6시간 빨리 일반가정에 배달되게 되었다. 또 많은 잡지․주간지가 창간되고 많은 서적이 출판되고, 그리고 발행부수도 비약적으로 증대되어, 인쇄업계는 활황을 맞이하였다. 여기에는 인쇄기의 기술혁신과 문자나 활자 등, 타이포그라피의 기계화도 잊을 수 없다. 1888년에는 손으로 활자를 골라서 하는 조판으로부터, 라이노 타이프 라고 불리어지는 주입식자기가 개발되어, 신문의 단가는 10분의 일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전 세계의 번영을 한손에 거머쥐고 있던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왕조는 경제의 발전과 함께 시각정보미디어가 일거에 꽃피어, 그래픽․아트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중응용 예술이 번화함을 보여주었던 시기였다. 그 가운데서도 컬러플한 다색인쇄의 지라시나 포스터의 출현에 의해서 사람들은 이전에도 증대되었던 자본주의공업화 사회의 물질적인 은혜를 입게 되고, 일상생활에 여유가 생겨 레져-나 여가를 엔조이하는 분위기가 사람들에게 생겨났다. 이 다색으로 인쇄하는 포스터의 실현은 석판인쇄에 의한 것으로서, 평판에 연마한 석탄암을 인쇄원판으로 하는 인쇄방법으로서, 다색인쇄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 리트 그라피라고 불리어지는 석판인쇄는 1796년, 독일의 아로이스․제네페르다-가 발명을한 것으로, 이것이 후에 화려한 다색인쇄에 의항 포스터의 벨․에포크(파리의 요키 시대)를 구축한 프린트․ 테크놀로지-이었던 것이다.
석판인쇄는 그때까지의 목판이나 활자에 의한 요철판 인쇄와는 달리, 석회암을 평평하게 연마한 평면 위를 판면으로 하는, 옵셋 인쇄의 원점이라고도 하는 평판인쇄로 현대 인쇄산업의 주류가 된 인쇄방식으로, 물과 기름이라고 하는 단순한 물리적 원리를 응용한 전사인쇄법이다. 현재, 석회암(대리석)의 석판은 아연이나 알루미판의 금속제품의 윤전기에 바뀌어졌지만, 원리는 같은 것이다. 1881년 프랑스에서 포스터 등 출판의 자유에 관한 법률제정이 되지 않고, 검열제도를 철폐시켜 포스터를 자유롭게 게시할 수 있게 되어서 이 다색으로 인쇄하는 석판인쇄에 의한 포스터제작은 급격히 성행하게 되었다. 향수, 비누, 식품 등 일용잡화부터 서적이나 유행하는 팻션, 자동차, 오페라, 발레 등의 연극, 전람회 등의 개최에 이르기까지, 다색으로 인쇄하는 포스터라고 하는 새로운 프린트 미디어의 대상이 되어, 벨․에포크의 응용예술로서 서민들에게 친숙하게 되었다.
아르․누보와 재패니즘
세기말 빛나던 파리, 데카당과 탐미주의의 로망이 풍기는 아름다운 시대, 벨․에포크는 인생의 기쁨을 미의 희구에 받치는 기개를 사람들에게 부여하고, 감성대로 조형하기도 하고, 장식하는 것을 제일로 하는 예술지상주의의 시대였다.
인간 본래의 장식하는 기쁨을 끌어내어, 인생을 구가하는 사조는 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볼 수 있는 현상으로, 그것이 화려하고 눈부시게 화려한 호화주의 이었거나, 검소하고 수수해서 장식이 없는 시대 배경이었다 하더라도, 장식이라고 하는 개념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원시시대 고대인의 생활양식에서부터 금세기의 합리주의․기능주의를 내세운 근대주의의 장식배제를 구가했던 인터내셔널․스타일에서 조차, 장식은 결국 어느 곳에서나 조형상의 중요한 시각적 요소가 되고 있다. 장식은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힌 욕구이기도 해서, 장식미술이나 장식적인 행위는 순수미술과는 한 선을 긋는 조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본미술의 수집가로 미술잡지 「예술의 일본(29)」을 간행한 열렬한 재포니잔인 사미엘․빙그는, 1895년 말 「아르․누보」(새로운 예술)라고 이름 붙여진 일본미술공예품을 중심으로 동양미술을 취급하는 화랑을. 파리의 프로방스 거리에 개점했다. 이 화랑의 이름이 후에 아르․누보라고 불리어지게 된 유래다.
오늘날, 일본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은 19세기말의 유럽장식미술을, 일반적으로 아르․누보라고 부르고 있다. 쥴․세레, 로트렉, 뮤샤, 비아즈리 등 벨․에포크의 포스터․서적․회화․ 그 외 보석장식품, 공예품, 에밀․갸레나 돔․낭시- 등의 유리공예, 라릭의 유리보석장식품, 도자기, 인테리어, 가구, 건축, 의상, 무대에서 타이포그라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표현영역에 이르고 있다.
아르․누보는 프랑스를 비롯해 영국, 독일, 벨기에, 스페인, 이탈리아와 대부분의 유럽 전역에 걸친 것으로서, 그 명칭도 각국에서 제각각으로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아르․누보의 딴 곳에 유행하고 있는 뮤샤의 포스터로부터, 뮤샤 樣式, 구불구불 구부러진 곡선 양식에서 스파케티 양식이라고 불리어 지는 것도 있다. 독일에서는 잡지 「유-겐트」에 기인하여 유-겐트 樣式(청춘양식)이나 촌충양식, 백합양식,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 양식(런던의 리버티 商會의 브랜드 이름에서 온 것), 꽃양식, 벨기에의 뱀장어 양식으로, 주된 명칭들만 전부 들어보아도 25개가 넘는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아르 누보는 식물적 곡선의 조형과 달리, 직선이나 기하학적형체를 많이 사용한 장식미술운동 「제셋션」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 영국에서도 챨스․ 래니․맥킨토시등의 그래스고-파의 가구를 중심으로 한 조형은 직선 양식이었다.
이렇게 구미 각 지역에서 각각 의 특징이 있는 조형의 아르 누보가, 종래의 미술공예와 동화해 나가면서 개화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어느 것도 일반적으로 일본미술의 표현양식에 루트를 구하는 유동적이고 식물적인 곡선모양, 유기적인 형체, 비대칭의 레이아웃, 음영을 배제한 평면적 표현이 혼연일체가 되어, 전체로서 장식적인 추상성에 풍부한 조형표현이 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최근까지 아르 누보의 조형표현은 재패니즘의 영향을 과소평하기도 하고, 겔트 모양이나 로코코 양식, 유럽의 자연주의 혹은 아트 앤드 크라프츠 운동의 양식이 서로 영향주면서 생겨난 양식이라는 연구가 대부분을 점하고, 재패니즘이라고 하는 일본미술의 영향을 부정하는 논문까지 볼 수 있다.
아르 누보의 유리공예연구에 제일인자, 由水常雄씨는 1970년대 초, 교토의 학회에서의 토론을 저술한 『재패니즘에서부터 아르 누보로』(中公文庫, 1993)에서 「…중략, 참가한 일본의 서양미술사가도 프랑스의 학자도 미술사 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아르 누보에 일본의 영향이 있고, 에밀 갸레의 작품에 일본미술의 투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격하게 부정했다」고 술회했다. 美術史상, 아르 누보의 재패니즘에 의 영향이 정설로 된 것은 최근 일이다.
분명히, 1910년대에 들어서자 유럽에 있어서 재패니즘도 차츰 식어갔고, 약간 늦은 미국의 재패니즘이라고 하는 일본 붐도 쇠퇴 일로에 있었다. 이 이유는 앞에서도 기술했던 것처럼,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근대의 기능주의 합리주의를 절대적인 것으로 해서, 기능주의가 사회의 주류를 점하는 것처럼 되었기 때문에, 데카당스와 유미적인 아르 누보의 미의식이 이제는, 시대적인 사조에 걸맞지 않게 되고 말았던 것에 기인한다. 또 재패니즘니 본가인 일본 자체, 근대국가를 지향해서, 구미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까지의 제국주의국가로 성장해서, 구미에 있어서 그 존재가 위협이 되기도 하고 그 식민지정책이나 군비증간 등 때문에 이미 배일운동 조차 일고 있는 상황하에서는 일본취미나 일본 붐이 계속될 이유가 없었으리라. 이러한 과정을 거친 아르 누보는 1920년에 들어서자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고, 거기에 대신해 직선적인 아르 데코의 장식 미술양식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렇고 구미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 재패니즘 영향의 과소평가 요인이기도 하고, 더한층 다음과 같은 이유가 복선으로서 생각되어지는 것은 아닐까. 구미의 연구자는 두개의 대전을 사이에 두고 일본의 제국주의에 반발하고, 구미의 전통적 미술의 우위성이라고 하는 애국적 정신에 따라, 아르 누보를 향한 일본미술의 영향을 전면적으로 인정하려고 하지 앟는 정신적 토양이 고양되었던 것은 아닐까. 내 손안에 있는 자료에서도 30년도 더 전에 발표되었던 모두가, 아르 누보의 기술에 관해서, 일본미술의 영향을 과소평가 하는 양태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p.88
벨․에포크와 포스터
컬러로 인쇄하는 석판인쇄(리트그라피)에 있어서 1880년대부터 많이 만들어졌었던 포스터라고 하는 새로운 매체는 거리를 장식하는 새로운 미술, 응용미술로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으며, 급속하게 보급되어 갔다. 과학기술의 성과인 공업사회의 출현에 의해서 사람들의 생활은 이전과 비교해 풍요롭게 되고, 여유롭게 살기 시작했다. 일반서민도 오페라나 무대를 즐길 수 있게 되고, 캬바레나 클럽은 번성하게 되었다. 특히 꽃의 도시, 예술의 도시라고 불리어지게까지 된 화려한 파리의 거리에는 많은 사람들이 매일 밤마다 모여서 활황을 드러냈다. 세기말 요키(よき)시대, 「벨․에포크」의 시대적 풍조는 이처럼 해서 생겨나, 거리의 상징적인 비주얼은 포스터에 의해서 연출되었던 것이다.
새로운 서민을 위한 예술, 포스터의 출현은 당시까지 유럽인들이 일본의 미술의 우수함의 하나로 들었던 예술의 일상화에 보다 더 가까운, 생활에 뿌리를 둔 미술이라고 하는 것이지 않을까.
이제까지 회화나 조각처럼 예술을 위한 예술만으로 시종일관해온 구미인들에게 있어서, 포스터의 출현은 최초의 매체이고 재포니즘의 컨셉과 공통이 되는 예술을 일상생활의 일부로서 받아들인 새로운 시점이었던 것이다. 재포니즘의 대상이 일본인의 일상생활에 뿌리가 된 도자기, 칠기, 우키요에, 수묵화, 그릇, 장식품, 빗, 머리 장식품, 기모노․기모노에 두르는 오비 등의 염직품, 작은 상자, 검 등의 생활용품으로, 결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해서 만들어진 용구가 아니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포스터도 제품을 판매하기도 하고 연극이나 전람회 등의 개최를 알리기 위한 미디어이고, 신문이나 게시판에 바뀌는 정보전달을 위한 루-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무렵 유럽에서는, 이러한 포스터을 포함해 오늘날의 그래픽 디자인에 해당하는 그래픽․ 아트가 신시대의 미디어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의 순수미술인 화인 아트와 한 선을 이루었고, 쓰임을 가졌던 미의 의미에서 응용미술로서 그래픽․ 아트라고 불리어졌다.
1850년대, 이 무렵의 대영제국은 산업혁명후의 최고의 번영기를 구가하면서, 그 성과와 국위선양을 위해 런던에서 제1회 만국 박람회를 개최했는데, 영국은 당시인쇄 기술로도 세계를 리드하고 있어, 대형의 지면을 인쇄할 수 있는 다색인쇄 석판인쇄기기에 의해서 타이포그라피를 활용한 포스터가 속속 만들어져 길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포스터의 아버지라고 불리어지는 프랑스의 쥴․쉐르(1836-1932)는 1858년, 영국에서 최신 석판인쇄기를 도입해, 오페레타 「天國과 地獄」를 2색 인쇄로 제작, 그 이후 의욕적인 포스터 제작에 임하여서, 초기 포스터 디자인의 구성법이나 디자인․테크닉의 기초를 만들어 냈다. 조목을 끌기 위해 타이틀 문자의 레이아웃이나, 자간 행간 등에 있어서 글자 배치라고 하는 활자의 디자인, 타이포그라피에서부터 배색법, 화면의 생략, 강조, 생명력과 약동감이 넘치는 일러스트레이션 등, 그러한 것들은 오늘날의 그래픽․디자인의 조형기법이나 표현법의 베이스멘트가 되고 있다.
쉐르에 이어, 스위스에서 태어난 위젠느․그라세(1841-1917), 툴르즈․로트렉(1864-1901), 오-브리․비어즈리-(1872-1898), 알퐁스․뮤세(1860-1939) 등과 같은 뛰어난 작가들에 의해서, 포스터는 여기 저기 벨․에포크 거리의 꽃이 되었다.
특히 로트렉이, 1889년 파리에서 문을 연 물랑․루즈(31) (빨간 풍차)를 테마로 제작한 일련의 포스터(1891)들은, 쉐르의 작품과 같은 평판을 불러, 포스터의 지위를 부동의 것으로 했다.
단순화된 상징적인 화면구성, 동적인 대담한 구도, 데포르메된 대상, 線畵표현에 의해 평평(平板)한 묘사와 산뜻한 색채, 그 어느 것이나 우키요에나 北齊 漫畵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되어지는 표현이었다. 사실, 로트렉 자신이 우키요에의 열렬한 펜이고, 수많은 우키요에를 수집하고 있었다. 로트렉의 스승인 드가도 열렬한 미술애호가이고, 그 영향도 있어서 당시 진취적인 성질이 풍부한 예술가가 그랬던 것처럼, 로트렉 자신도 일본취미에 빠져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생전에 일본에 여행하기를 꿈꾸고 있었다고 말한다.
p.91 화보
1. 쥴․․쉐르 「엘리제․몽마르트 가면무도회」(1896) 2. 윌리엄․H․부라트르-「찰즈․스크리브나즈․선즈, 뉴욕․모던․포스터-」(1895) 3. 앙리․T․로트렉「자르댕․드․파리」(1893) 4. 위젠느․ 그라세「에스탕푸․오리지날」誌T를 위한 포스터-(1894) 5. 알퐁스․뮤샤 「퍼펙트 자전거」(1902) 6. 알퐁스․뮤샤 그리스 고전극 「Medee」(1898) (크림톤과 같이 세로로 긴 사이즈의 포스터-, 일본 족자(掛軸-가케지쿠)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p.92
당시 유럽 사회에서 특히 상류계급이나 예술가들은 재포니즘에 심취되어 수년만에 개치되는 만국박람회의 일본관에서는 우키요에를 비롯해 일본의 미술공예품, 생활잡기가 인기를 극도로 끌어, 박람회 종료 후에는 거의 전시품 전부가 완매되는 상황이었다. 유럽사회 전체가 재포니즘의 조용한 붐으로 끌어오르는 가운데, 로트렉은, 그 자신의 전통적인 사실적 묘사를 기반으로 한 재포니즘 표현기법을 다색으로 인쇄하는 인쇄를 빌어 나타내는 것으로서, 독자적인 포스터-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여러 가지 실험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삽화화가이기도 하고, 현대에 말하자면 에디토리얼․디자이너이고, 포스터-․디자이너였던 그라세는 쉐레에 이어서 등장, 인쇄를 미디어로 삼는 새로운 그래픽․디자인의 경지를 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 분야에서 W․모리스의 게름스콧트․프레스(32) 의 裝丁이나 타이포그라피, 에디토리얼 디자인의 선구적인 실험이나 장식미술의 성괃 있었지만, 그랏세는 인쇄기술이 향상된 19세기말, 프린트․미디어의 특성을 충분히 숙지했을 뿐만 아니라 장식적인 서적 디자인에 신경지를 개척했다. 全面線畵로 녹색을 사용한 일러스트레이션과 창틀 모양의 양식화된 장식적 처리, 능란한 꽃장식이나, 괘선, 장식문자는 우키요에나 에도(江戶)의 장식미술을 방불케 한다.
또 영국은 오프리-․비아즈리의 아르․누보풍의 곡선과 섬세한 펜그림의 삽화로 「아더왕의 죽음」을 발표함으로써, 일약 각광을 박게 되었다. 그 컬트적인 표현은 모리스를 격노시켰던 것으로, 강한 힘과 기하학적인 조형과 유기적 패턴의 기묘한 콘트라스트와 상징적으로 데포르메된 인물표현은, 일본의 목판화나 켈트모양이나 로코코양식 더한층 겔름스콧트․프레스의 영향이 서로 퓨전화된 세기말의 양상이라고 말해야 되지 않을까. 비어즐리는 「살로메」의 삽화에서도 찬부양론의 물의를 불러일으켰지만, 불과 26세의 약관의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단지 포스터의 작자로서 19세기말, 완성된 구도와 장식적인 기법, 능란하게 양식화된 인물표현에서는 알퐁스․뮤샤의 오른쪽에 더 나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의 포스터표현은 흔히 「뮤샤양식」등의 동의어로 사용되어지는 정도가 되었다. 이러한 포스터 주도형의 곡선주의의 응용미술이나 장식미술의 세기말의 데카당스와 로망의 향기는 일찍 아메리카대륙에 불이 번져서, 바로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돌입한 아메리카의 잡지나 서적을 장식했다.
에밀․가레와 낭시파 p.93
사무엘․빙그가 파리의 프로방스거리에 「아르․누보」를 개점(1895)한 이래 아르․누보(신예술)은 장식미술운동의 대명사처럼 되어서, 세기말 유럽을 석권했던 재포니즘 최대의 미의 결정이 되었다.
그런데 아르․누보가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여러 가지 표현으로서, 건축을 제외하고, 원래 일본 미술공예품에서 볼 수 없었던 대상으로서, 유리공예를 들 수 있다. 물론 에도시대, 유리공예는 포르투갈 전래의 「비이도로」로서 만들어져 왔던 것으로, 유럽으로의 수출품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아이템이었다.
아르 누보의 표현양식으로서는 물흐르듯 이어지는 것같은 식물적인 곡선의 유기적인 형체가 주요 특징이 되고 있었는데, 이 양식이 가장 충실하게 표현되고 있었던 것이 프랑스의 낭시지방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낭시파라고 불리어지는 에밀․가레와 돔 형제에 의한 유리공예이지 않을까.
에밀 가레는 작가로, 강렬한 재포니잔이기도 했던 에드몬 드 콩쿠르의 컬렉션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일본의 자연주의의 동식물 모티브를 유리공예에 받아들여 새로운 표현에 도전을 계속했다. 또 1880년대, 일본인의 高島北海와의 만남도 가레로서는 일본미술을 향한 마음을 깊게 했다.
가레는 유리공예 즉, 여러 가지 유리 표현기법(33) 의 실험과 개발에 평생을 시종일관했다. 다양한 종류, 다양한 모양의 금속산화물을 혼합시킨 새로운 색조나 텍스추어의 유리 표현을 개척했다. 또 에나멜채색․金屬箔의 封入 등의 기법과 대담하게 동식물의 모티브를 조합시키는 것과 같은 가레의 독자적인 유리 공예를 만들어냈다. 가레는 北齊漫畵 등의 일본미술의 사생적인 묘사법에 깊이 감명을 받고, 또 그 자신이 곤충을 좋아하는 것도 더해져서, 모티브에 좋아하는 잠자리, 나비, 귀뚜라미, 나방을 채집해 넣었고, 당시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잉어(鯉), 게(蟹), 개구리, 닭 등도 자주 등장시켰다. 또 식물로는 벚꽃, 매화, 국화, 창포, 목단, 패랭이꽃, 백합, 나팔꽃, 마타리(가을철 일곱 풀의 하나), 대나무, 소나무, 등나무 연꽃, 오이 등과 풀고사리나 해초까지 모티브가 되어, 마치 北齊나 廣重의 세계를 낭시-의 유리공예에 옮겨놓은 것같은 미술공예품이었다.
같은 낭시시의 유리공예작가로서 돔-형제를 잊을 수 없다. 형 오귀스트, 동생 앙트․․낭․ 돔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던 가레의 유리공예품에 자극을 받아, 유리공예, 스테인드글라스, 금속공예, 가구를 정력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당시, 이미 파리에서는 가레가 일본미술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쟈포니즘이 붐을 이루고 있어서, 돔형제는 자신의 공방에 공예부분을 설치하고 일본양식을 받아들인 유리공예를 만들어, 성공을 얻었다. 아르 누보의 장식미술의 특징이라고 불리어지는 식물적 곡선의 조형에 옴 마음을 다 쏟았던 낭시-파라고 불리어지는 작가에 가레, 돔-형제 외에 칠보공예의 뮤쟝형제, 가구의 루이․마죨레, 위젠느․부아랑, 화가의 빅토르․푸르뷔에, 건축가의 에밀․앙드레 등이 있어, 일괄해서 일본 미술공예와 표현성에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또 宝飾品으로는, 이 시대에 뛰어난 재능을 활짝 꽃피운 르네․라릭크(1860-1945)기 일본미술의 조형요소와 모티브를 능숙하게 받아들여, 더욱더 그 독자의 여성상을 더해서, 환상적이고 유미적인 네-크레스, 부롯치, 빗, 펜단트, 가슴장식, 브레스렛트 등의 보식품을 만들어냈다. 좌우비대칭의 구성에 일본 자연주의적인 모티브와 식물문양 나아가 여성의 머리나 나체와 유리, 칠보와 보식요소를 조합시킨 라릭의 가라스공예는, 그 후의 구미 주얼리 디자인에 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라릭크는 가레가 그랬던 것처럼 일본적인 모티브에서 근원을 구하여, 엉겅퀴, 개암나무, 야생포도, 솔방울, 벌, 나비, 개구리, 여치 사마귀, 제비 닭을 보석 디자인의 주제로 선택했다. 아르 누보의 꽃이라고 불리어지는 이러한 라릭의 보식품․유리공예품은 1920년대의 원숙기에 들어서자 단정한 조형과 정리된 추상성이 더해져서, 아르 데코양식으로 변형되어 간다.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현대국제장식미술․산업미술전(아르․데코전)에서는 라릭社로서 단독으로 출전, 아르 데코의 방가드(先兵)가 되었다. 라릭은 1921년 이후, 일부 보식품을 공장에서 생산하게 되어 양산해서, 그때까지 부루조아 층만의 양식미로부터 아르 데코를 횃션처럼 일반서민들에게까지 유행이 될 정도로 확대시켰다.
아르․데코와 바우하우스
세기말인 1890년경부터 금세기 초인 1910년 무렵. 유럽의 거의 전 지역을 뒤덮던 아르 누보의 유려에서, 식물적인 곡선의 낭시-파나 벨기에, 스페인, 또 맥킨토시처럼 곡선보다 오히려 직선적인 조형을 지향하던 가구를 만들었던 영국의 글라스코파와 여러 지역에 의해서 직선과 곡선이 한데 섞여있는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포스터나 삽화, 책의 장정 디자인에서는 어떤 나라에서도 전체적으로 물 흐르는 듯한 곡선을 많이 사용했고, 유기적인 표정을 보여주고 있다. 또 다소 늦게 아르 누보의 영향이 미친 오스트리아. 독일에서는 글라스코-파에 동조해서, 종래의 전통적인 미술로부터 분리시킨다고 하는 의도에서 제셋션(分離派)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이 일개의 아르 누보라고 말해도 유럽 각국의 미적환경에 따라서 각각의 포름을 찾고 다양한 양상을 드러내, 결코 통일된 양식미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글라스코-파의 양식을 보아도 일본의 수직․수평으로 분할된 직선적인 구성주의적인 표현을 방불시키고, 윈-파로 불리어지는 오스트리아의 아르 눕에서는 일본의 자연주의적인 식물문양과 곡선과 직선의 에렉티크한 스타일(절충양식)로, 어느 것이나 다 그 원천은 재포니즘에 도달한다.
그런데 1910년대를 지나자 어느 정도 열렬했던 일본열도 점차로 식어져 갔다. 앞에서 기술했던 것처럼, 금세기에 들어와 산업의 근대화가 진일보해서, 공업제품이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되어간 사회구조 속에서 아르 누보의 데카당스와 유미주의적인 사조는 시대로부터 필연적으로 도태되는 숙명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 갈림길에는 과학기술신앙이 뒷받침된 기능주의와 합리주의가 거의 구미근대사회를 제패하고 있었다. 결국,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고가의 아르 누보 장식미술공예품의 구매층은 귀족이나 부루조아 같은 자산계급에 한정되었던 것이다. 이러했던 부유층은 1920년경 아르 누보로부터 아르데코에 이르기까지 점차로 흥미를 옮겨갔다. 아르데코는 제셋션의 조형언어를 베이스로 해서, 모더니즘과 신고전주의적인 창조성을 같이 가지고 있던 직선과 신메트리의 컴포지션의 새로운 장식양식이다.
기능미와 합리주의가 시대의 슬로건이 되었던 구미 근대공업화사회에는 디자인의 의미가 더욱더 중요시 되어, 지금까지의 개인적인 감성에 무게를 두었던 탐미적으로 신비성이 넘치던 아르 누보의 장식미는 벌써 시대에 걸맞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공업화사회에 있어 생산의 증대는 필연적ㅇ로 기계생산에 의한 프로텍트의 형체찬미를 재촉하고, 신메트리와 직선과 단순한 기하학적 형체를 받아들인 장식양식 아르 데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아르 누보에는 자연의 동식물의 유기적형체를 표현의 모티브로 했었지만, 아르 데코는 기하학적형체나 추상화시킨 모양과 여성상 등을 조합, 재질의 하이테크한 이미지를 추구했다.
미술 분야에서도 금세기 초두부터,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변화하는 사회정세에 가세하여, 차차 새로운 운동을 전개시켜, 미의 해체가 시작되었다. 포비즘(야수파), 큐비즘(입체파), 다다이즘, 미래파, 신조형주의, 슈-프레마티즘, 러시아구성주의와 여러 가지 미술 운동이 잇달아 전개되는 가운데, 아르 데코는 공업화사회의 기계주의나 인간성회복을 충족시키기를 바래 기하학적형체를 모티브로 한 양식미라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장식미술이 산업과 분리되고, 대치되었던 관계에 있던 것에 대해, 아르 데코는 처음으로 공업화사회와 예술이 융합되고, 승화된 장식미술이었다고 말 할 수 있으리라
「아르․데코」라는 명칭은 이러한 기계주의사회, 「머쉰․에이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바우하우스와 재포니즘
p.104
19세기 이후, 유럽사회에서는 재포니즘의 미의 구성원리를 음미했던 시간적 경위를 거치면서 바우하우스는 미술․디자인에 공통되는 조형의 원리를 체계화 하였으며, 커리큘럼으로해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결국 근대 디자인의 원리는 재포니즘의 조형문법을 완전히 소화한 위에, 현대 디자인이나 광고․에디토리얼의 활동이 있는 콤포지션이나 아신메트리-의 레이아웃으로 소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러시아 구성주의나 다다이즘(36) 미래파에 있어서 20세기 신흥미술의 증거로서 呪文처럼 사선의 레이아웃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헤이안(平安조)의 우아미의 세계를 표현한 병풍이나 에마키에 등장하고 있었다. 가나문자의 레이아웃, 무로마치(室町)시대의 지가이 선반, 방의 배치(間取리), 다도에 있어서 기본 컨셉, 정원만들기, 의상의 모양, 꽃꽂이, 마키에(두루마리그림) 등의 공예품의 디자인 등, 일본에서는 신메트리-의 디자인과 같은 정도로 균형을 파괴한 아신메트리의 동적인 레이아웃이나 구조에 독자적인 미의식을 가지고 있다. 또 신메트리의 레이아웃이나 콤포지션에도 잘 보면, 완전히 신메트리-성이 아니라 좌우 어느 쪽인가에 액센트 정도로 균형을 의도적으로 붕괴시키는 얄미울 정도로 고도한 미학을 사용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대해서 유럽에서 미술이나 장식에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이상사회를 메타포로 하는 완전무결한 균형이 요구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기하학이나 수리성을 중시해온 유럽의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에 뿌리를 둔 신메트리라고 하는 개념은, 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미에 대한 구도였던 것이다.
p.194
自然과 프랙탈
일본인이 이런 정도까지 자연의 좋ㅇ에 구애를 받았던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풍요로운 자연의 모습이나 현태에 美를 보가도 하고, 사람의 손으로 재차 자연을 그려서 취하기도 하고, 「진품」이나 「借景」이라고 하는 대부분의 일본인 독특한 자연에 대해 접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드디어 일본인의 독자적인 미의식을 보호육성, 일본문화를 지탱하는 미학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자연을 관찰하는 일본인의 섬세한 정서가 들판에 핀 산초, 잡초나 작은 동물들에게도 눈을 돌려 미의 대상으로 삼았다. 회화나 조각만이 유일하게 예술의 대상이 되었던 예술지상주의적인 유럽에 대해서, 일본인은 이처럼 자연을 일상생활에 끌어들여, 생활공간 속의 예술에서 회화나 조각이라고 하는 틀을 없애고, 공예나 염직 등의 장식미술,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도구나 집기에까지도 생활미학을 누리는 토양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자연의 조형을 모방하기도 하고, 이것에 비기는 조형원리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별로 언급된 것이 없었다. 확실히 자연계에 있어서 星雲의 소용돌이, 물의 소용돌이, 달이나 태양의 원, 방사상으로 확산되어가는 빛, 혹은 동식물에서 볼 수 있는 나선구조나 대칭성 등의 수리적 분석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자들의 보고가 있지만, 자연의 경관이나 복잡한 모양에 대해서는 똑같이 자연계에 보이지 않는 신의 손길의 일정한 질서에 기초를 두고 만들어진 형으로밖에 설명되어오지 않았다.
이 보이지 않는 질서는 1975년 IBM 와트슨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과학자인 베노아․만델후로(62)에 의해서 제창되었던 프랙탈이론으로, 카오스와 함께 오늘날의 복잡계라고 말할 수 있는, 아주 새로운 기하학이다. 이 프랙탈 기하학은 自己相似性이라는 성질을 지난, 그 프랙탈 차원이라는 파라메-탈에 의해서 형의 복잡함을 규정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유크리트 기하학과는 일선을 점하는 개념이다. 자기상사성과는 어떤 모양의 일부를 잘라내 보아도, 전체 모양의 인상과 다르지 않는 성질을 말한다. 즉 모양의 일부와 전체가 닮은(相似) 모양이고, 어떤 부분을 취해서 보아도, 그것만으로는 상사성 때문에, 어느 배율로 측정되어질 수 있는 것인가를 바로 알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실은 자연계의 다양한 모양이나 현상은, 이 자기상사성이라는 성질을 내포한 프랙탈의 형태로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 해명되었던 것이다. 구름의 모양, 산맥의 능선, 산림의 모습, 뱀이 기어가는 것 같은 물의 흐름, 갈라지는 구조(64), 수목의 가지 갈라짐, 지진 등으로 갈라지는 땅의 패턴, 묵 번짐의 패턴(마불링그), 星雲, 번개 등 자연의 모습은 프랙탈 차원에 의해서 규정되는 프랙탈 조형으로 있었던 것이다.
프랙탈조형은 프랙탈 기하학에 의해서 증명될 수 있기 때문에, 재현성을 가진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가지 자연계의 형태는 복잡해서 과학적으로 설명 불가능하다고 했었던 만큼 180도 역전시킨 이 사고방식에 대해서 불신감을 가진 독자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프랙탈 차원의 막대하게 반복해서 연산하는(65) 것으로, 답을 산출하고, 또한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해서 시각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실에는 없지만 사진과 오인하게 되는 산맥이나 구름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의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복잡함이 끝이 없이, 정량화 할 수 없는 형태로 생각되어지던 자연경관의 조형요소를 일정의 수식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프랙탈 차원이라고 하는, 어떤 파-라메타를 부여하자면, 모조리 컴퓨터 그래픽에 의해서 영상으로서 재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인이 종래, 미를 배우는 스승과 숭배되었던 자연의 조형에 일정의 질서와 같은 섭리가 잠재되어 있어서, 이것이 프랙탈 조형이라고 할만한 형태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가지 일본인은 무의식에 의해 자연에 대해서 동경을 품고, 본능적으로 자연의 조형을 미술이나 공예에 재현하려고 노력해왔다. 다시 말해 이것이 일본문화의 엣센스이고, 재포니즘의 원점인 것이다. 창조의 세계에서 가능한한 자연적인 소재나 텍스추어, 거기에 모티브자체를 그대로 자연으로부터 끌어들여, 예술적 표현에 이용해 왔다고 하는, 지금까지의 일본인의 미의식에는 자연계에서 만들어낸 미의 원리, 프랙탈을 잘 이용하력 하는 의식이 본능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새삼스러운 말 같지만 일본인의 자연주의관과 미에 대한 탁월한 선견성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p.198
프랙탈과 黃金比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자연계에는 프랙탈성을 가진 형태가 많이 있고, 종래 정량화할 수 없는 복잡ㅎ해서 결정할 수 없는 형태와 결정지을 수 없었던 형태에도, 일정의 질서를 가진 프랙탈이라고 하는 성질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프랙탈에는 자기상사성이라는 성질이 있고, 부분과 전체가 항상 상사가 된다는 것도 기술했다. 그런 말에서 보자면 우리들이 풍경화를 그릴 때, 구름이나 이어져 있는 산들, 산허리의 삼림 표현에는 구름이나 수목의 하나하나를 극명하게 그리지 못하고, 붓에 그림물감을 무쳐서 여러번 반복해서 가볍게 두드리는 것처럼 해서 무언가 구름의 느낌, 삼림의 모습을 표현할 수는 없는가. 즉 이 붓터치는 무의식에 무수한 상사형, 자기상사성을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항상 황금비의 분할로 연속되는 수열에 휘보낫치 數列(66)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을 독자 여러분은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앞의 항에서 두개의 和 가 다음 항이 되는 수열로, 1, 1, 2, 3, 5, 8, 13, 21, 34, 55, 89, 144,......으로 계속 된다. 앞에 기술했던 것처럼 황금비를 整數比로 환산해서 55:89의 근사치로 되고, 이 휘보나치수열 가운데 같은 비가 등장한다. 즉 55:89 이후의 항은 무한하게 황금비의 정확한 수치에 가깝게 된다. 따라서 휘보나치 수열은 연속한 황금비이고, 무수의 상사형을 내포하는 자기상사성의 프랙탈과 지극히 가까운 관계인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면, 비정형으로 복잡한 형의 대표처럼 생각할 수 있는 자연계의 조형에 프랙탈성이 있는, 거기에는 황금비와 깊은 관계인 미의 프로포션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자연의 조형과 황금비와 관계가 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복잡한 수리성과 관계가 멀다고 생각되어졌던 자연의 조형 속에서도 소용돌이 모습의 나선구조는 이질적인 존재이다. 나선은 수리성에 수많은 기하학적 형체이고, 소용돌이 성운, 태풍의 눈, 물흐름, 천체의 운행으로부터 식물의 조개의 나선형, 동물의 뿔이나 상아, 토키의 부리부터 소나무의 나이테나 해바라기의 발단, 국화의 꽃, 사보텐의 색대의 배열, 끝내는 인간의 머리 가르마, 반고리관, 지문이나 DNA의 이중나선구조에 이르기까지, 소용돌이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가운데서 특히 對
수나선구조(67)가진 소용돌이는, 항상 일정한 각도를 가지면서 크게 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오움 조개는 이 전형적인 예로서, 격실이라고 불리어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