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성지주일 때 드렸던 말씀의 한 부분을 반복해 봅니다. “서는 자리가 바뀌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서는 자리가 달라지면 해석도 달라진다는 말이겠죠.
이를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살아가는 것 같고, 그 목표한 곳에 이르면 그 자리에서 보게 되는 풍경을 다르게 본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발생한 사건을 놓고도, 전혀 다르게, 다른 정도가 아니라 서로 상반된 반응이나 해석을 내리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봅니다. 각자 자기 입장대로 해석을 하는 것이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믿고 싶은 대로 믿어버리는 ‘확증편향’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빈무덤을 바라보는 경비병과 여인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둘 다 빈 무덤을 통해 예수 부활을 체험했지만, 그 부활을 해석하는 증언 내용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한쪽은 기뻐하며 제자들에게 달려가 소식을 전하는 식으로, 한쪽은 ‘어? 시체가 없어졌네’라면서 혹시라도 불똥이 자신에게 튈까봐 쪼르르 달려가 수석 사제들에게 보고를 하는 식으로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에 위기감를 느껴 겁을 집어먹고, 예수를 제거시키면 그 하느님 나라 운동이 멈출 거라고 여겨 예수를 고발했던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은 빈무덤을 보고 또 다시 머리를 모아 작당모의, 흉계를 꾸밉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주겠다.” 나라의 미래나 국민엔 1도 관심도 없고, 오로지 자기 이익만 챙기는 우리나라의 못된 정치인들, 퇴출시켜야 할 적폐 세력들이 연상됩니다. 그들의 특기는 밀실에서 뭔가를 꾸미고, 덮어씌우고, 거짓, 모략, 회유, 협박, 갈라치기, 경쟁과 혐오를 부추김 등 ‘진리를 가리는 행위’ 등이 그들의 특기입니다.
그리고 오늘 눈여겨 봐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이런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예수님의 정식 제자로서 선택받았던 제자들이 아니라, 당시에 차별받고 천대받던 여인들이었다고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 역사 창조는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래아에서, 그리고 제자직을 받은 기득권자가 아니라 당시 아무도 축에 끼워주지 않았던 여인들을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이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새 역사를 굴려 가는 주인공은 힘을 과시하면서 말발이 센 유명인사가 아니라, 사회의 밑바닥에서 묵묵히 일하는 보통 사람들이 역사를 꾸려 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맞다면 우리는 여태까지의 우리의 생각을 돌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던 곳으로 관심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역사의 새로운 출발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를 다시 갈릴래아로 부르시는 주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화려하지만 망할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에 눌러있기보다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는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깨우침을 일깨워 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