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2일 총신대학교 사당캠퍼스에서 열렸던 운영이사회에서 제기된 ‘새벽기도 무용론’ 논문 소동이 확인 결과 ‘사실 무근’인 것으로 밝혀졌다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운영이사회에서 모 운영이사가 자신의 교회에 새로 부임한 부교역자가 새벽기도 참석을 계속해서 거부하고, 논문을 제출하라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아 곤혹스러워하던 중, 그가 ‘새벽기도 무용론’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총신대에서 학위를 받았음을 알게 됐다고 보고하자, 운영이사들은 “총신대학교의 정체성과 위상이 달린 문제”라며 “사실이라면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몇몇 이사들은 ‘논문과 학위를 취소시켜야 한다,’ ‘지도 교수에 징계 처분을 내려야 한다’ 등 강경책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단 소식지에 따르면 그 논문은 ‘새벽기도 무용론’과는 무관한 역사신학 논문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새벽기도 무용론 논문 소동은 한 차례의 해프닝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러나 작은 불씨에서 산불을 보고, 눈송이 하나에서 산사태를 볼 수 있듯이, 신학교 한 귀퉁이에서 일어난 새벽기도 무용론에 대한 강경한 자세에서 한국교회 전체의 비참한 현실을 볼 수 있다. 문제의 부교역자가 새벽기도 참석을 계속 거부했다는 것은 그 교회의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를 거부했다는 뜻인즉, 이 새벽기도회가 그 신학교의 정체성과 위상을 결정지을 정도로 중요한 종교행위라면, 새벽기도회를 부인하는 곳은 그것이 교회이든 신학교든 한국에서는 교회나 신학교로서의 정체성이 전무하고 위상이 없는 곳이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 나라에서는 새벽잠을 자는 사람은 믿음을 인정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새벽기도회가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며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들은 1년 365일 잠에서 덜 깬 부스스한 교인들을 교회로 불러들여 억지 춘향이들을 만들고 있다. 새벽기도회에 반드시 나와 수청을 들어야 한다는 변사또 목사들, 그들에게 아첨하는 이방(吏房) 교역자들의 주리를 트는 듯한 전화압력에 못 이겨 새벽부터 교회 예배당에 몸을 바친 교인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인생의 황혼을 지나 죽음의 밤을 맞이해야 할 노인들은 그 어지러운 발걸음으로 새벽기도회에 충성하려다 차에 치여 자기 명보다 일찍 돌아가시고 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불신자들이 반문했을 때 그들은 그 희생자들이 ‘순교’했다고 말하려는가? 그들은 새벽기도회의 근거를 예수님에게서 찾았다고 변명하나, 주님은 그분 자신이 새벽에 기도하기를 즐겨하셨을 뿐 단 한 번도 새벽기도를 강조하지 않으셨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새벽기도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하라는 것 아니겠는가? 교회가 회(會)를 만들어 안 그래도 생계로 피곤한 교인들을 억지로 끌어들일 일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 영원하신 능력으로 창조하신 유(有)를 담아놓은 보고(寶庫)이다. 인간에게는 성경에 있는 것을 찾아 믿고 실행해야 할 의무만이 있다. 이 의무를 저버리고 성경에 없는 것을 지어내는 것은 나태가 아니라 반역이다. 주님께서 개인적으로 하신 새벽기도에서 새벽기도회를 만들어내 강요하는 것은 분명 인본주의적인 반역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그들만의 ‘교회 나라’에서 자기들끼리 해보겠다는 것이다. 새벽기도회란 성경에 없는 것(無)인즉, 육신의 생각으로 지어낸 그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았다면, 그 교회들의 정체성은 실로 아무것도 아닌(無) 것이다. 성경은 그런 교회를 두고 『그들을 저울에 달면 모두 합쳐도 헛것보다 가볍도다.』(시 62:9)라고 말씀하신다. 한국교회는 너무도 가벼워 주님의 작은 입김에도 폭풍에 휩쓸린 듯 훨훨 날아갈 지경이다. 『그들은 바람 앞에 그루터기 같고 폭풍에 휩쓸려 가는 쭉정이 같도다』(욥 21:18).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인간 조상들의 잘못된 전통을 완고하게 답습하는 지독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바른 말씀과 바른 진리로 성령의 은혜와 자유 안에서 바르게 섬기는 것이다. 『이제 주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이 얼마나 선하고 복된 말씀인가! 누가 이 자유를 거부하는 것인가? 구원을 자기 힘으로 이뤄보려는 자들이 그러는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속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새벽기도회에 가는 일이 또 하나의 율법이요 속박이요 행위구원이 되어 버린 한국교회는 자유를 주시는 주님의 영이 없는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분의 사람도, 그분의 교회도 아니다(롬 8:9). 말로는 은혜를 남발하면서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그들은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되는 줄 알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의로워지고자 함이라. 이는 율법의 행위로는 아무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음이라... 만일 의가 율법으로 인하여 온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갈 2:16,21). 새벽기도회로는 주님을 위해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행위자 자신을 위해서도 무가치할 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행 16:31). 성경에 없는 행위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하는 자들의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과 같을 뿐이다(약 2:26). 은혜를 저버리고 행위로 온전케 되려는 자들은 누구든지 저주 아래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갈 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