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누가복음 13장 1-9절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망한다는 것, 이 사실을 좀 더 확증하기 위해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미 누가복음 12장에서부터 예수님께서는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 시대를 분간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즉 지금이 어떤 시대인지를 분간한다면, 그래서 무엇을 하는 것이 옳은지를 안다면, 회개하고 열매를 맺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대한 요청은 신학 주제 안에서 볼 때 구원의 서정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주제를 따라 생각해 보자면, 우선 성경에 대한 고백(제1장)에 이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제2장), 그리고 그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고백(제3장)으로 이어집니다. 작정의 실행으로서 창조와(제4장) 섭리를 말하되 섭리 안에서 죄 문제가 논해집니다(제5장). 제5장 섭리에 대한 고백 4항에 보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세와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한 선하심은 그의 섭리 안에서 그 [속성들] 자체를 보여주는 한, 섭리 자체가 심지어 첫 타락 및 천사들과 사람들의 모든 죄들까지 확장된다(롬11:32-34, 삼하24:1, 대상21:1, 왕상22:22,23, 대상10:4,13,14, 삼하16:10, 행2:23, 4:27,28).”고 고백합니다. 다만 “그들은 단순한 허용에 의해서가 아니라(행14:16) 가장 지혜롭고 권능 있는 제한에 매이되(시76:10, 왕하19:28),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 여러 경륜 안에서 그들을 명하고 다스리심에 매인 자들이다(창1:20, 사10:6,7,12).”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죄됨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피조물로부터만 나온다.”고 고백하며,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죄의 저자도 승인자도 될 수 없다(약1:13,14,17, 요일2:16, 시50:21).”고 고백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죄가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6장은 아담의 타락과 그로 말미암은 보편 인류에게 주어진 결과들에 대한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제7장에서는 언약에 대하여 고백하고, 제8장에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고백한 후 제9장에서 자유의지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타락 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10장에서 18장까지의 내용인 구원의 서정은 결코 사람이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서정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더불어 한 가지 더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서정을 베푸시는 대상은 오직 택자 외에 없다는 것도 분명히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구원의 서정에 해당한다고 할 때 이 일의 주체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성경은 깨어 있어야 한다,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시대를 분간해야 한다고도 가르칩니다. 지금 너희가 어떤 시대를 살아가는지 알고 더욱 회개하면서 열매 맺는 삶,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가르친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가 회개하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9장 자유의지에 대한 고백 4항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인을 회심시켜 은혜의 상태로 그를 옮길 때, 하나님은 죄 아래 놓여 있는 본성상 노예의 신분으로부터 그를 자유케 하시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그가 영적 선에 속한 것을 의지하거나 행할 수 있도록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은혜 없이 영적 선에 속한 것을 의지하거나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여전히 남아 있는 부패성 때문에 선을 행할지라도 선에 속한 것을 완전하게 행하지도 의지하지도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없이, 순수하게 우리의 것으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것 때문에 깨어 있어야 한다, 준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명하시고 명하신 바를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실지라도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방식은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사용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대한 열정과 노력을 주심으로 이루십니다. 말씀이 주어지는데도 불구하고 회개가 없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다면 우리의 죄성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나님 탓을 하려고 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살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선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악한 것은 언제나 우리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라고 말씀합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그들의 피를 그들이 드리는 제사 제물에 섞은 일인데, 이 일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의 경우 사도행전 5장 37절에 나오는 ‘갈릴리의 유다’가 많은 백성을 꾀어 자신을 추종하게 하다가 죽었다는 사건과 연관시켜 말하기도 합니다. 즉 갈릴리 유다에 속한 자들의 일부가 유월절 예루살렘에 올라와 희생제사를 드리는 동안에, 빌라도가 그들을 덮쳐서 살해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해석들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 시대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들의 피를 그들이 드리는 제사 제물에 섞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2절과 3절을 보시면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러니까 두어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아뢴 내용은 단순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뢴 것이 아니라, 그들이 끔찍하게 죽은 것은 그들의 죄가 더 심각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으로, 오히려 이런 일을 보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4절과 5절 내용도 동일합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앞의 내용은 빌라도의 학살에 대한 것, 즉 인위적인 일이라면 여기서는 소위 자연적인 재난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졌는데, 그 일로 죽은 사람이 열여덟 명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이 일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는 동일하게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함께 섭리를 믿는 자들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5장 1항에 보면 “만물의 위대한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의 무오한 예지와(행15:18, 시94:8-11) 그 자신의 뜻의 자유롭고 불변하는 의논을 따라(엡1:11, 시33:10,11) 그의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과 자비의 영광을 찬양토록 하기 위해(사63:14, 엡3:10, 롬9:17, 창45:7, 시145:7) 그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하신 섭리에 의해(잠15:3, 시104:24, 145:17)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마10:29-31) 모든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모든 행동들과 [그(것)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단4:34, 35, 시135:6, 행17:25,26,28, 욥38-41장) 유지하고(히1:3) 지도하고 배치하고 다스린다.”고 고백합니다. 특히 후반부에서 가장 큰 것으로부터 가장 작은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조물들과 그것들의 모든 행동들, 그것들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유지하고 지도하고 배치하고 다스린다고 할 때 하나님의 섭리에서 제외되는 것은 결코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역사도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4항에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세와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무한한 선하심은 그의 섭리 안에서 그 [속성들] 자체를 보여주는 한, 섭리 자체가 심지어 첫 타락 및 천사들과 사람들의 모든 죄들까지 확장된다(롬11:32-34, 삼하24:1, 대상21:1, 왕상22:22,23, 대상10:4,13,14, 삼하16:10, 행2:23, 4:27,28).”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단순한 허용에 의해서가 아니라(행14:16) 가장 지혜롭고 권능 있는 제한에 매이되(시76:10, 왕하19:28),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목적들을 위해 여러 경륜 안에서 그들을 명하고 다스리심에 매인 자들이다(창1:20, 사10:6,7,12).”고 고백하며, “그러나 죄됨은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피조물로부터만 나온다. 하나님은 가장 거룩하고 의로우시며, 죄의 저자도 승인자도 될 수 없다(약1:13,14,17, 요일2:16, 시50:21).”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나온 인위적인 재난이든 소위 자연적인 재난이든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 신자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재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저들의 죄가 더 크기 때문에 그런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최근 이태원 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자로서 핼러윈 축제 문화는 결코 좋은 시각에서 볼 수는 없습니다. 핼러윈(Halloween)은 본래 켈트인의 전통 축제인 ‘사윈’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켈트족은 한 해 마지막 날이 되면 음식을 마련해 죽음의 신에게 제의를 올림으로써 죽은 이들의 혼을 달래고 악령을 쫓았다고 합니다. 이때 악령들이 해를 끼칠까 두려워 한 사람들이 자신을 같은 악령으로 착각하도록 기괴한 모습으로 꾸미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핼러윈 분장의 기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켈트족 전통 축제가 기독교가 전파 되면서 토속 신앙에서 기독교 축일로 대체가 되었는데, 가톨릭에서는 11월 1일 혹은 성령강림절 이후 첫 번째 일요일을 만성절로 지켰습니다. 만성절은 천국에 있는 성인들 모두를 기리는 축일인데, 800년 경 이 날을 11월 1일로 고정시키고 켈트족의 전통 축제를 바로 이 만성절 바로 앞날로 정하여 지키게 된 것이 핼러윈의 유래입니다. 핼러윈이라는 말도 ‘만성절 전야’(All Hallows’ Eve)라는 의미의 단어가 변형된 것인데, 이런 모든 내용들은 사실 성경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미신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악 된 모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라면 핼러윈 축제와 같은 것은 결코 참여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이 12월 25일 많은 교회들이 성탄절로 지키고 있지만, 성탄절의 기원도 태양을 섬기는 날을 기독교화 한 것입니다. 토속 신앙을 기독교 축일로 바꾼 것입니다. 이런 날에 대하여 지킬 수 있다, 일부지만 지킬 수 없다는 말들을 하기도 하지만, 개혁주의 역사 안에서는 성경에 명령된 것도 아니고 보증되는 것도 아니기 폐해야 한다는 결정까지도 있었습니다. 성경으로부터 명령된 것도 아니고 보증되는 것도 아니기에 저희 교회는 소위 기독교 절기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활절, 성탄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주일 안에 그리스도와 관련된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한 절기를 지키지 않습니다. 다만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에도 있는 것처럼 공적으로 감사의 날을 정할 수는 있는데, 한 예로 지난주가 저희 교회 10주년이 되는 날이라면 그런 날을 공적인 감사주일로 정하여 지킬 수 있습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핼러윈에 대하여 말씀드리다가 교회 절기에 대한 내용까지 왔지만, 재난과 같은 일들이 있을 때, 특히 이태원 참사가 핼러윈 축제에 일어난 일이라고 할 때 이 일에 대한 신자의 시각이 저들의 죄가 더 크기 때문에, 저들의 죄가 더 심각하기 때문에 이런 재난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될 부분입니다. 사람들 안에는 다른 사람의 재난에 대하여 그런 재난을 받을 짓을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혹은 재난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본처럼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역사 속에서 자신들이 잘못한 일에 대하여 잘못했다고 하지 않을 때 천벌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실제로 일본에게 어떤 재난이 닥쳤을 때 저들의 죄 때문에 재난을 당한 것이라고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물론 재난 이면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조건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홍수 심판만 하더라도, 또한 소돔과 고모라의 재난만 하더라도 분명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모든 재난을 그렇게만 볼 수 있는가 할 때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재난과 같은 일이 있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다음과 같은데, 잠언 24장 17절과 18절입니다. “네 원수가 넘어질 때에 즐거워하지 말며 그가 엎드러질 때에 마음에 기뻐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보시고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의 진노를 그에게서 옮기실까 두려우니라” 사람의 본성은 어떠합니까? 일본에 대한 예를 통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원수가 넘어질 때 즐거워합니다. 그들이 엎드러질 때 대놓고 기뻐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마음에 기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고소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율법의 요약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누구까지 포함되어 있는가? 원수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도 하셨던 겁니다.
로마서 12장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4-21) 특히 19절에서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 사람이 잘못했지만 그것을 내가 갚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말은 어떤 재난이 나를 괴롭게 한 사람에게 있을 때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혹 하나님께서 그렇게 심판하시는 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은 언제나 선으로 악을 이기는 데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는 재난이 있을 때 사랑의 마음,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재난에 대하여 안타까워해야 합니다. 우는 자들이 있을 때 함께 울어야 합니다. 울고 있는데 웃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원수 같은 자가 있다 할지라도 긍휼의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신명기 29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재난에 대하여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실제로 저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일 수 있습니다. 무조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럴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호와께 속한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알리신바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에 대한 세 친구들의 자세를 생각해 보십시오. 욥의 고난에 대해 세 친구들은 욥이 잘못했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자면 맞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의 많은 말씀들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 친구의 그런 말들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의 많은 말씀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할지라도 그것이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愚)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갖춰야 할 자세는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주심으로 행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고, 저들이 웃을 때 웃을 수 있고 저들이 울 때 울 수 있는, 그런 긍휼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만 저들이 죄와 함께 웃고 있다고 할 때 그런 죄에 대하여 웃는 자로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법 앞에서 올바른 자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웃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죄는 혐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와 함께 먹고 마시는 자들에 대하여는 안타까워하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그런 마음을 가지신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9:13)고 하셨던 겁니다.
더불어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좀 더 생각해야 할 것이 있는데, 다시 2절과 3절을 보시면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5절도 보시면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즉 재난의 일들을 보면서 함부로 비판하고 쉽게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재난 이면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무조건 없다고 할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욥과 같은 그런 고난의 측면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좀 더 세분화해서 말하자면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죄에 대한 심판으로 재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도 택자와 유기자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택자에게는 그런 심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죽음을 통해 완전 성화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이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유기자에게는 공의의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욥과 같은 그런 일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욥과 같은 일은 유기자가 아닌 택자를 향한 일로 있는데, 혹 그런 일로 죽게 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런 죽음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귀한 것이 되어(시116:15) 하나님이 그를 받으십니다.
이런 다양한 면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의 내용은 죄의 결과로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죄 아래 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고통의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고통 받고 있는 자, 울고 있는 자가 있다면 함께 고통스러워하고, 우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을 통해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며 살고 있고, 그 죄로 말미암아 언제 어떤 모양으로든 심판을 받아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결단코 영원한 심판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일시적인 심판을 받는 경우는 있겠지만, 그리고 그런 심판을 통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영원한 심판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멸망의 형벌 가운데 놓이게 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패한 본성을 가지고 죄를 지으며 사는 삶에 대하여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누누이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성경은 바로 그 일을 위하여 구약의 수없이 많은 사건들을 본보기로 보여주셨다고 까지 설명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을 보시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1절부터 보겠는데,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12)
그러므로 우리는 재난과 같은 일이 있을 때 죄의 경중을 따지면서 정죄하는 입장이 아니라, 긍휼히 여김과 동시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재난만이 아니라 성경의 기록된 수없이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한 본보기요, 성도를 위한 본보기로 이런 저런 사건들을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회개하지 않는 자들, 오히려 악을 즐거워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와 악에 대하여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오늘 본문 전체적인 내용 안에서 보자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까지 맺도록 자신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측면에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6절 이하 9절은 이와 관련해 한 가지 비유로 설명하시는 내용입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여기서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목적은 무화과나무로부터 열매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과 같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러나 열매를 얻기 위하여 심은 나무에서 열매를 얻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쓸모가 없습니다. 땅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그 나무를 돌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헛된 수고를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1년 그리고 2년, 그 이상을 기다리면서 열매가 있는가 보실 때 없으면 찍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한 사람 즉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어 3년 동안이나 열매를 바랐지만 열매를 얻지 못하여 찍어버리려고 할 때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얼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예수님 당시로 하자면 유대인들이 멸망 받지 않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열매가 없지만 그래서 구약 시대 북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남유다조차 멸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대민족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포도원지기의 이 간청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포도원지기의 간청과 주인의 기다림, 긍휼 때문에 멸망 받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의 수고와 노력,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없다면 결국에는 어떻게 되는가? 찍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 회개해야 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좀 더 확장해서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 말씀은 모든 신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열매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없다면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택자를 버리는 일은 결코 없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이때 유대인은 어떻게 된 것인가 물을 수 있지만 로마서 9장을 통해 분명한 답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6-8) 육신적으로 볼 때 혈통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해서 다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혈통 이스라엘 안에 육적 이스라엘과 영적 이스라엘이 함께 섞여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버리신 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정확하게 말하면 육적 이스라엘뿐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을 버리신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과 같은 경고를 하시는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교훈을 위해서입니다. 택자로 하여금 열매 없는 자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죄를 돌아볼 수 있는 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요, 죄에 대하여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반면 육적 이스라엘, 다시 말해 멸망 받게 될 유대인들, 그리고 신자라 하면서도 참된 믿음 가운데 있지 못하는 자들은 이런 말씀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없습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 로마서 2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이런 말씀이 교훈이 되어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쌓는 자가 되지 마시고, 이런 저런 일들이 있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여전히 남아 있는 부패성이 있다는 사실과, 그것으로 인해 끊임없이 죄를 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서 죄를 드러내실 때마다 말씀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자가 훔치지 않는 것을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훔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특별히 가난한 자들이 있다면 도와줄 수 있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정도로만 만족해서는 안 되고, 적극적으로 하지 말라고 한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한 조금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마치겠습니다. 신명기 22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 누군가 다른 사람을 죽였을 때 우리는 살인죄를 저질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집 지붕에 난간을 만들지 않음으로 죽게 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이 주인의 살인죄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위한 관심과 수고와 배려까지 원하십니다. 사람을 직접 죽이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잘 한 것이지만, 더 잘하는 것은 만일에 일어날지도 모를 사고를 다른 사람이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꼼꼼히 살펴주고 안전한 대책을 마련해 주는 것, 그 일에 열심을 가지고 수고하는 것까지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란 이런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열매가 없으면 찍혀 버려질 것이라는 두려움은 우리가 선택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이상 결코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오히려 선택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때가 되어 우리를 효력 있는 부르심으로 부리시고 믿음을 주시면서 의롭다 하셨다면,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과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말씀을 통해 또한 우리의 실제 경험을 통해 알고 더욱 이런 열매까지도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는 자로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