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교육 36 :
주교교육(1968년 12월호)
고신교회가 총회적으로 교육에 힘쓰지 못했던 1960년대, 고려신학교에 재학중인 전도사들이 주일학교 교육의 발전을 위해 연구, 토론, 기도하던 모임이 있었다. 각 교회에서 교육을 맡은 전도사들로서 총회적으로 적절한 교재가 공급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이들은 1965년 7월호로 ‘주교교육’을 창간하여 전도사들과 교사들에게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1967년 11/12월호를 끝으로 당시 교단지 ‘개혁주의’와 합병했다. 나는 ‘전국주일학교연합회 30년사’(1997)를 집필하면서 이들을 ‘1960년대 교단교육의 아침 이슬’이라 불렀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교회마다 주일학교는 수요기도회를 하고 있었고, 믿음 좋은 어린이들이 몰려왔다. 전도사들이 신학교에 간 사이에 헌신적인 교사들이 교육자료도 없던 때에 설교 혹은 동화로 어린이들의 신앙을 지도하였다. 초대회장은 정주성이 맡았고, 김남식, 김태윤, 조성관, 심군식, 신현국, 김석영 등이 핵심 멤버였는데, 기독교 도서도, 관련된 책도, 교육자료도 빈약했던 당시에 스스로 기도하며 지혜를 모으고자 했다.
고려신학교 안에서 자생적인 기구였던 이 주교교육연구회는 총회교육부 산하기관으로 인준받았다. 그들은 신학생으로 공부와 교회 봉사로 힘겨웠던 시기에 ‘주교교육’ 잡지를 등사판으로 간행하였다. 이 시기에 김석영은 어린이 설교집을 간행하였고, ‘주교교육’과 ‘개혁주의’에 동화를 연재하였던 심군식은 그 동화들을 모아 ‘바이올린 할아버지’ 같은 주옥같은 동화집을 발행하였다.
‘주교교육’은 주일학교 교육에 32면 정도의 등사판 인쇄물로 김동철 목사가 오랫동안 인쇄인으로서 등사를 책임졌다. 그는 그러한 경험으로 ‘개혁신앙’의 운영인으로 봉사하였고, 그러한 개인적인 경험이 축적되어 여러 종류의 교육관련 자료들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 책자 ‘주교교육’은 기존의 잡지와는 달리 ‘교단의 문서운동’, ‘교회 주소록’을 30면으로 발행되었다. 김동철 전도사가 발행인.교단지 ‘개혁주의’가 계속 간행될 수 있을 것인가 걱정스러웠던 때에 특집으로 꾸민 것이었다. 이 잡지에는 항도교회 박정규 집사의 ‘교단의 문서운동’을 발표했는데, 그는 이 글에서 ‘문서운동의 필요성, 우리 교단의 문서운동의 현황, 부진한 문서운동의 책임은 지도층이 지라, 교단 생명을 걸고 문서운동을 전개하라. 온 교회는 문서운동에 적극 참여하라’ 등을 주장한다.
다른 내용은 없고, 고신교회 주소록을 실었는데, 경기 29, 부산 105, 경남 134, 진주 101, 경북 78, 경동 24, 전라 23, 성진 15교회, 모두 509교회이다. 합동 당시에 590교회였는데, 환원 후 5년이 되었지만, 겨우 500교회를 넘었다. 당시는 경기노회는 수도권 교회가 적어 서울과 경기도, 인천, 충청남북도 등 국토의 절반이 포함된 광활한 지역 포함되었고, 부산노회는 부산과 김해, 울산, 양산이 포함되었으며, 경북노회는 대구와 경북지방이, 전라노회는 전라남북도 지방이 포함되었다. 나환자촌을 중심으로 성잔노회가 구성되었는데, 나중 영남노회라 개칭했다가훗날 지역교회에 편입되었다.
고신교회에서는 1948년 12월에 창간되었던 ‘파수군’이 발간되어 꾸준히 교회쇄신운동을 이끌었지만, 합동과 환원으로 이는 합동측 소유가 되었고, 합동측은 마지막에 순간(10일마다 발행)으로 발행하다가 이를 기반으로 ‘기독신보’(현 기독신문)을 창간하였다.
고신교회 문서운동은 1960년대 ‘개혁주의’, 1970년대 ‘교회생활’과 ‘고신대학보’를 거쳐 1980년대 이후 ‘월간고신’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년대에 간행을 시작했다가 중단되었던 ‘기독교보’도 1989년에 복간하여 오늘날 고신교회 언론의 양대산맥을 이루고 있다. 고신교회보다 규모가 큰 합동 측과 통합 측도 신문과 잡지를 함께 발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문서운동을 향한 우리 선진들의 수고의 땀이 참으로 컸던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