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서 태어났고 대구에서 자라 70년대 이후 1:1 맞짱에서 져 본적이 없다는 조창조씨의 썰들.
현재 한국 주먹계의 최고 원로는 신상현씨와 정종원씨다. 신씨는 1950년대 이정재의 동대문사단에 맞섰던 명동파 이화룡 계열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 주먹계를 주름잡았던 신상사파의 보스였다. 이정재의 직계로 깐깐하고 대쪽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정씨는 지금도 주먹계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적어도 족보를 존중하는 주먹들은 두 사람을 최고 어른으로 인정한다. 조씨는 주먹계의 세대교체에 대한 언급으로 말문을 열었다.
“신상현, 정종원 형 두 분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어른이에요. 그 밑으로 우리 또래가 있지요. 우리 밑에는 이강환 등이 있고. 내 또래 주먹으로 조일환, 최창식, 구달웅, 대전 목포내기(김기영) 등이 있습니다. 최창식은 건달생활 안 한 지 오래됐지만. 우리 또래 밑으로는 다들 모임을 만들어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바로 아래 또래가 주먹계 실세입니다.
대구는 조씨의 실질적 고향이자 정신적 터전이다. 평양에서 태어난 조씨는 광복 직후 8세 때 월남(越南)했다. 서울 종로의 덕수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강원 묵호, 부산을 거쳐 대구에 정착했다. 대구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외삼촌 사업이었다. 당시 그의 외삼촌은 경북 달성군에 있는 광산에서 기계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조씨는 대구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월남과 전쟁통에 늦게 진학한 조씨는 같은 학년 친구들보다 세 살 많았다. 중학생 때 고등학생과 놀았다. 이명박 정부 실세인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그의 대륜고 3년 선배다. 그런데 최 위원장도 동급생보다 나이가 많았다. 학창 시절 그는 최 위원장을 형으로 부르며 가깝게 지냈다.
그의 주먹신화는 중학생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가방에 권투 글러브를 넣고 다니며 방과 후 적당한 상대를 불러내 판을 벌이곤 했다. 싸움이 그렇게 좋았을까.
“(웃음) 6·25 직후라 사회가 혼란하고 불안했습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권투를 워낙 좋아하긴 했어요.”
대륜중·고의 전설적 ‘가다’
그가 다닌 대륜중학교는 사립치고는 ‘공부 좀 하는’ 학교였다. 입학경쟁률이 7대 1이었다고 한다. 타고난 싸움꾼인 그의 존재는 단연 돋보였다. 전교생 중에 그를 모르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다.
당시 싸움 잘하는 학생은, 일본말로 ‘어깨’를 뜻하는 ‘가다’로 불렸다. 학교마다 ‘가다’가 있었다. 대륜중·고의 최고 ‘가다’였던 조씨는 어느 학교의 ‘가다’가 누구다, 혹은 누가 세다 하는 얘기가 들리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갔다. 학교로 쳐들어가 상대를 불러내 운동장이든 뒷동산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싸움판을 벌였다. 패싸움은 없었고 전부 1대 1 맞짱이었다. 대구 시내 중·고등학교의 이름난 ‘가다’들이 모두 그의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당시 대구는 유도와 씨름을 잘하기로 소문난 도시였다. 전국대회 우승자가 많이 나왔다. 운동을 잘해 조씨와 친하게 지냈던 몇몇 동급생은 뒷날 저명인사가 됐다. 유도에 능했던 전경환씨는 형이 대통령이 된 후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으로 권력의 중심에 섰다. 씨름을 잘했던 엄삼탁씨는 6공 때 안기부 기조실장을 지냈다. 역시 씨름선수였던 김학룡씨는 뒷날 민속씨름 초대심판위원장과 일양약품 씨름단 감독으로 활약했다.
“엄삼탁, 전경환과 친하게 지냈는데, 둘 다 학교 다닐 때 나한테 매 좀 맞았죠. 체격만 컸지 싸움할 줄은 몰랐거든요. 운동을 아무리 잘해도 싸움으로는 나한테 안 되죠.”
“싸움에서 진 적은 없느냐”고 묻자 조씨는 허허 웃으며 “운이 좋았던 것 같다”라고 겸손해했다.
“애들 말이, 내가 진 적이 없다니까. 내가 싸움할 때마다 따라다닌 친구들이 있었거든요. 대구 통학권 내인 왜관과 김천, 경주 출신 학생들까지 잡았지요. 당시 칼을 쓰는 애들은 사람 취급을 안 했어요. 그 친구들은 따로 놀았어요. 나약한 애들이죠. 그들에게 나 같은 사람은 열외였죠. 누구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조씨는 운동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육상을 했고, 중·고등학생 때는 권투와 씨름, 유도를 배웠다. 도장에도 다녔지만 혼자 집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 고1 때는 태권도를 연마했다. 형의 친구인 이준구씨한테서였다. 뒷날 미국 태권도 황제로 불리게 된 이씨는 당시 태권도 초단이었는데 조씨의 집에 자주 놀러왔다. 조씨는 이씨에게 발차기를 배우는 대신 복싱 기술을 가르쳐줬다고 한다.
고등학생 때 조씨는 체격이 큰 편이었다. 그때의 키가 지금의 키(176㎝)다. 반에서 셋째였다. 체중은 72㎏. 한국 남자 평균 체중이 42㎏이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의 무용담을 궁금해 하자 조씨는 “나한테 맞은 친구들 중에 아직 살아 있는 친구가 많은데…” 하며 웃기만 하다 거듭된 요청에 가장 힘들었다는 싸움 일화를 들려줬다.
영남고에 유도왕이 있었다. 전국대회 우승자였던 그는 80㎏이 넘는 거구였다. 양교의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둘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맞붙었다. 처음엔 조씨가 계속 당했다. 상대의 유도 기술에 대여섯 차례 나뒹굴었다. 주먹을 쓸 겨를이 없었다. 구경하던 친구들이 “창조, 오늘 죽는 날이구나” 하고 웅성거렸다.
때는 8월, 여름방학 때였다. 섭씨 38℃가 넘는 무더운 날씨가 변수였다. 조씨가 넘어졌다가 일어나 덤비기를 계속하자 상대가 그만 지쳐버렸다. 10분쯤 지났을까, 상대가 “졌다”라고 항복을 선언했다.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듬해엔 그해 유도 전국대회 우승자인 계성고 학생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 싸움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조씨의 기습적인 펀치 한 방에 상대가 기절해버린 것이다. 이후 학생들 사이에서는 “창조 왼 주먹에 맞으면 턱이 부서진다”라는 소문이 돌았다.
“운동선수마다 약점이 있어요. 나는 여러 가지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 약점을 다 간파하고 그것을 공략하는 방법을 터득했습니다. 한마디로 꾀를 부린 거죠. 권투 한 친구들과도 많이 붙었는데, 한 번도 진 적이 없어요. 권투하는 놈은 유도로, 유도하는 놈은 씨름 기술로 무너뜨렸지요. 실전에서 가장 덕 본 건 씨름입니다.”
실전에서 가장 덕 본 건 씨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상체를 구부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씨름은 몸 중심을 잡는 데 최고입니다. 유도는 상체를 세우지만 씨름은 구부리잖아요. 중심이 딱 잡히고 자세가 안정됩니다. 빠르게만 하면 씨름만큼 무서운 게 없습니다.”
고교 시절 대구 일대를 평정한 그는 유도 특기생으로 홍익대에 입학했다가 그가 속했던 법정학부가 폐지되자 중퇴했다. 서울역 근처 염천시장에서 외삼촌뻘 되는 친척이 국일상회라는 가게를 운영했다. 조씨는 학교에 다니면서 그의 가게 일을 거들었다. “공부도 하면서 운동도 하고 가게 일까지 돕자니 너무 힘들었다”는 게 조씨의 회고다.
대구로 내려간 조씨는 2년 후 다시 상경해 염천시장에 터전을 잡았다. 권투선수 출신인 정기복씨를 만나면서 그의 싸움 실력은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조씨와 마찬가지로 월남민인 정씨는 다양한 실전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의 별명은 빠지기였다. 조씨는 빠지기 형과 2년을 같이 지내면서 ‘싸움이 이렇게 묘한 거구나’ 하고 느꼈다.
“빠지기 형의 싸움 스타일이 지금의 종합격투기와 비슷해요. 이마까지 쓰니, 종합격투기보다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죠. 그 형한테 머리와 무릎, 팔꿈치 쓰는 법을 배웠습니다. 상대가 숙이고 들어올 때는 무릎으로 올려 치는 기술이 좋죠. 태권도는 발차기는 좋지만 실전에선 별로예요. 싸움은 태권도가 아니거든요. 붙잡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잖아요. 가장 중요한 건 스피드죠. 빠르지 못하면 싸움을 잘할 수 없습니다. 빠지기 형은 그런 기술을 시라소니 형님한테 배웠다고 하더군요.”
싸움기술 면에서 시라소니 계보인 셈이다. 조씨가 시라소니와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건 아니다. 정기복씨와 시라소니 계열인 김홍빈씨를 통해 알고는 지냈지만, 20년 가까운 나이 차 때문에 같이 어울릴 처지가 아니었다.
“전성기 때 실력이 어느 정도였느냐”는 질문에 ‘싸움의 기술’에 대한 그의 강의가 시작됐다.
“발을 잘 쓰긴 했어요. 싸울 때 상대 눈을 속입니다. ‘어이, 위 봐’ 하면 상대가 위를 쳐다볼 것 아니에요? 상대의 눈길이 아래로 내려올 땐 벌써 내 발이 상대 얼굴을 때리는 거야. 오래 할 것 뭐 있노, 빨리 끝내야지. 어떤 유도선수하고 붙을 때도 속임수를 썼어요. ‘치사하게 뒤에 사람 달고 왔냐’ 하면 상대가 ‘뭐?’ 하고 뒤를 돌아볼 것 아니에요? 그 순간 앞으로 쑥 들어가면서 한 방에 눕혀버렸지.
영화에 나오는 건 다 거짓말이에요. 인간은 쉬지 않고 5분을 못 싸웁니다. 5분 이상 싸울 수 있다면 극한의 세계로 들어간 거지. 1대 1이 아니라 서너 명과 상대할 경우엔 속으로 시간 계산을 합니다. 2분은 때리고 3분은 도망치는 걸로. 가장 센 놈부터 칩니다. 그놈의 옆에 있는 놈한테 ‘이 새끼, 참 나쁜 놈이네’ 하면서 다가서는 척하다가 그놈을 치는 거죠. 넋 놓고 있다가 맞는 겁니다.”
조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동작을 취했다.
“몸 따라 주먹을 돌리기 때문에 거리를 단축하면서 잔재주를 부릴 수 있죠. 다른 사람들이 보면 화려하죠. 세 놈을 개 패듯이 패니. 싸우다가 300~400m를 달릴 수 있겠다 싶으면 그때부터는 뛰어요. 그래야 망신당하지 않죠. 여러 명과 싸울 땐 그럴 수밖에 없어요. 1대 1은 그럴 필요 없지만. 아무리 잘 싸운다 해도 다섯, 여섯한테 어떻게 이깁니까.”
그에 대한 신비감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속임수를 쓰는 것도 실망스럽거니와 싸우면서 달아날 궁리까지 하다니…. ‘전설적 주먹’의 명성에 걸맞지 않아 보였다. 스스로 위신을 깎아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곰곰 생각하니 그가 옳은 듯도 싶다. 비록 정정당당하진 않을지 몰라도 현명한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한마디로 실전적이다. 게다가 솔직하지 않은가. 그의 실전 강의를 계속 들어보자.
“상대가 몸집이 크면 나의 움직임을 줄여야 합니다. 호흡을 조절하면서 상대를 자꾸 움직이게 해 지치게 해야 합니다. 좀 지나면 상대 입술이 파래집니다. 거기서 2분만 더 흔들면 주저앉아버리죠. 나는 어릴 때부터 뛰는 걸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때 육상을 했습니다. 권투도 뛰는 게 뒷받침돼야 합니다. 폐활량이 좋아야 해요. 힘만 믿고 덤비는 건 구시대 싸움이고 나처럼 싸우는 건 현대전입니다. 내가 이길 수밖에 없죠.
‘창조한테는 왼 주먹만 안 맞으면 된다’고 겁먹고 덤비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왼 주먹이 더 셉니까, 오른 주먹이 더 세지. 왼 주먹 피하다 오른 주먹에 당한 사람이 많았어요. 그것도 눈속임이죠. 비장의 무기를 가리는 것이니. 내가 또 이마를 잘 썼어요. 권투하는 친구들도 이거 한 방이면 다 날아가요. 요즘 이종격투기 대회에서는 이마도 못 쓰고 부자지도 못 차고 눈도 못 찌르잖아요. 만약 그런 게 허용되면 내가 지금 젊은 선수들한테도 이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잘한다기보다는 약은 거죠. 여우처럼. 시합과 싸움은 다릅니다.”
-실전에서 화려한 동작은 금물이지요?
“그게 가장 나쁜 겁니다. 큰 동작은 화려하죠. 하지만 싸움엔 전혀 필요치 않아요.”
조씨에 따르면 싸움에선 단순하고 빠른 동작이 좋다. 그리고 상대의 동작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염천시장에서 경비과장을 할 때 알게 된 서태현이라는 사람은 그에게 실전싸움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줬다. 전남 순천에서 오이를 싣고 올라와 염천시장에 내다 파는 사람이었다.
“그 양반이 내 싸움을 보고 놀랐어요. 싸움을 참 쉽고 재미있게 하거든요. 쓱쓱 들어가 어깨로 퉁 쳐 엎어뜨리고 다리 걸어 자빠뜨리고…. 자기가 하는 무술과는 영 다른데 참 잘하거든요. 그 양반이 ‘참 재미있게 싸운다’며 말을 걸어왔고 이후 친해졌습니다.”
조씨는 서씨의 요청으로 그의 고향인 순천에 갔다가 한 수 배우고 왔다. 서씨는 순천에서 태극권 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의 스승은 한의사였다. 조씨와 서씨의 스승은 서씨의 도장에서 일합을 겨뤘다. 조씨는 이날 그의 몸에 손 한 번 대지 못했다.
“틈이 없는 거예요. 내가 전진하면 그만큼 물러서고. 몸이 무척 가볍더라고요. 내가 들어가면 다리를 탁 차내면서 거리를 주지 않아요. 뱅 뱅 뱅 한 5분 돌았나. 땀은 비 오듯 나는데 때릴 데가 없는 겁니다. 잡히지도 않고. 정말 미치겠더라고요.”
서태현씨한테 “이게 뭐냐”고 물으니 “거리를 주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열이 난 조씨는 이번엔 서씨와 붙었다. 결과는 똑같았다. 조씨는 태극권을 통해 거리 조절하는 법을 배웠다. 서씨가 조씨에게 가르쳐준 귀한 기술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이마와 무릎이 동시에 들어가는 공격법이다. 조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시범을 했다. “둘 중 하나는 맞게 돼 있다”면서.
원문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62&aid=000000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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