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톤 체호프
올렌까(올리가의 애칭)는 퇴직한 팔등관 쁘레만니꼬프의 딸이다. 지금 올렌까는 자기 집 정원으로 내려가는 조그마한 계단에 앉아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날씨가 덥고, 파리가 성가시게 달라붙었다. 그러나 이제 곧 저녁이 온다고 생각하면 무척 기뻤다. 동쪽에서 검은 비구름이 몰려오고 이따금 습기찬 바람도 불어왔다.
안뜰 한가운데에는 '띠보리 유원지(로마 근교에 있는 명승지의 이름을 딴 것)'의 지배인인 꾸낀이라는 남자가 서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꾸낀은 올렌까 집의 별채를 세를 얻어 살고 있었다.
"빌어먹을, 또야?"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또 비가 올 모양이군! 매일매일 하루라도 비가 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군.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 이래서야 차라리 목이라도 매서 죽으라고 하지 그래! 파산하라는 얘기나 똑같아! 매일 엄청난 손해를 보고 있으니 말이야!"
그는 두 손을 탁 치더니 올렌까를 향해 말을 이었다.
"바로 이런 겁니다, 올리가 쎄묘노브나. 우리가 살아간다는 게 말입니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별 고생을 다하고 정성을 들이죠. 끙끙거리며 밤잠을 못 자면서 말입니다…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만들어 올리려고 온갖 머리를 다 짜내죠… 그런데 결과는 뭡니까? 무엇보다 우선 저 구경꾼들 말씀이죠… 저 사람들은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야만인들이다, 이 말씀입니다.
이쪽은 온갖 정성을 다해서 고르고 골라 고상한 오페레타니, 무언극이니, 훌륭한 가수들이 부르는 가요곡이니, 준비를 다해서 보여주지만 과연 그들이 그걸 원할까요? 그 작자들한테 그걸 보여주면 그게 뭔지 알기나 하는 줄 아세요? 그 작자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그저 광대를 요구할 뿐입니다. 저속한 유랑극단의 신파극 말이죠! 그리고 또 이 날씨 좀 보세요. 밤에는 반드시 비가 내리죠.
오월 십일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오월과 유월 내내 비가 내리다니 정말 이렇게 기가 막히는 일이 어디 있겠어요! 구경꾼은 얼씬도 하지 않는데 나는 장소 사용료를 꼬박꼬박 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배우들에게 주는 급료도 빼먹을 수 없지요!"
다음날도 저녁 무렵에 또 비구름이 몰려왔다. 꾸낀은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래, 어쩌겠다는 거야? 쏟아지려거든 맘대로 쏟아지려무나! 차라리 극장을 아예 물바다로 만들어 버려라! 차라리 나를 물 속에 집어 넣어다오! 이 세상의 내 행복, 아니 저 세상의 행복 따위도 어떻게 되건 알게 뭐람! 배우들이 고소하려면 고소하라지! 법원 따위가 뭐 말라 비틀어진 수작이야? 시베리아로 유형을 보내도 난 상관없어! 단두대도 두렵지 않아! 하하하!"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올렌까는 아무 말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꾸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가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마침내 그녀는 꾸낀의 불행에 감동하여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키가 작고 비쩍 마른 사나이였다. 얼굴 색이 누렇고, 조금밖에 남지 않은 귀밑 털은 산뜻하게 다듬어 붙이고 있다. 음성은 가느다란 테너였다. 말할 때는 입을 실룩거렸고 얼굴에는 언제나 절망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의 가슴에 진정한 깊은 감동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고, 사랑이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를 몹시 따랐으나 지금 아버지는 병이 들어 어두컴컴한 방안의 팔걸이 의자에 걸터앉아 괴로운 숨을 몰아쉬고 있을 뿐이다. 한때 숙모를 몹시 좋아하기도 했으나 그녀는 어쩌다 이 년에 한 번 정도만 브리안스끄에서 나올 뿐이었다. 그보다 훨씬 전 여학교 시절에는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남자 교사를 몹시 좋아한 적도 있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마음씨가 착한, 다정다감한 처녀였다. 눈매가 부드럽고 다정했으며 몸도 무척 건강했다. 뺨은 토실토실한 장미빛이며 목덜미에는 까만 점이 하나 붙어 있었다. 뭔가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을라치면 그녀의 얼굴에는 상냥하고 귀여운 미소가 떠오르곤 했다. 사내들은 으레 그 미소를 바라보며 속으로 "거 참 괜찮군…"하면서 덩달아 미소를 짓기 마련이었다. 상대방이 여자 손님일 경우엔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마음이 밝아져서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정말 귀여운 아가씨로군!"
그녀의 집은 도시의 끝 집시 마을에 있었고, 띠보리 유원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줄곧 이 집에서 살아 왔고, 아버지의 유언장에도 이 집은 그녀 앞으로 되어 있었다. 매일 밤 초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유원지에서는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와 펑 펑 하고 불꽃놀이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에게는 그 소리가 마치 꾸낀이 자신의 운명과 싸우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가 자신의 가장 큰 적인 저 냉담한 구경꾼들을 상대로 돌격하고 쳐부수는 소리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럴 때면 그녀의 마음은 달콤하게 저려오고, 잠은 저만치 달아났다. 이른 새벽에 그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녀는 자기 침실의 창문을 안에서 조용히 두들겨 커튼 사이로 얼굴과 한쪽 어깨만을 내밀면서 정답게 쌩긋 웃어주곤 했다.
꾸낀이 청혼하여 두 사람은 결혼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목덜미와 터질 듯이 건강한, 토실토실한 어깨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쳐들며 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당신은 정말 귀여기 짝이 없어!"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결혼한 그날 낮에도 비가 왔고, 밤이 이슥해서도 또 비가 내렸다. 그의 얼굴에서는 그래서 결국 절망의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즐겁게 살았다. 그녀는 남편의 사무실에 앉아서 입장권을 팔기도 하고, 지출을 장부에 기록하거나, 급료 주는 일을 하곤 했다. 그녀의 장미 빛 뺨과 사랑스럽고 귀여운, 티없이 맑은 미소가 방금 사무실 창구에 나타나는가 하면 다음 순간에는 무대 뒤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런가 하면 가설 극장의 식당에도 모습을 보였다. 그녀는 이렇게 언제나 그 부근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 자기와 친해진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것, 가장 소중하고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연극이라는 얘기였다. 연극을 통해서만 인간은 진정한 위안을 얻으며, 교양이 있고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길은 연극을 제외한 다른 것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과연 구경꾼들이 그걸 알아줄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 사람들이 정작 원하는 것은 그저 싸구려 유랑 극단의 광대극이란 말이에요! 어제 우리는 <파우스트>를 고쳐서 무대에 올렸답니다. 그랬더니 자리가 거의 텅텅 비고 말았겠지요. 하지만 만약 우리 주인 바니치까하고 내가 뭔가 저속한 광대극을 공연했다면 틀림없이 극장은 만원사례, 미어터졌을 테지요. 내일은 바니치까하고 둘이서 <지옥의 오르페우스>를 공연한답니다. 꼭 보러 오세요, 네?"
이렇게 그녀는 연극이나 배우에 대해서 꾸낀이 말한 의견을 그대로 흉내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관객들이 예술에 대해 냉담하고 무식하다는 얘기를 그대로 하면서 업신여겼다. 또 무대 연습에 끼어들어, 대사나 포즈를 고쳐주는가 하면 악사들의 행동거지를 단속하기도 했다. 어쩌다 지방 신문이 자기들의 연극을 혹평하기라도 하면 그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러다가 결국 그 신문사에 직접 해명하러 가기도 했다.
배우들은 그녀를 잘 따랐다. '또 하나의 바니치까' 또는 '귀여운 여자'라느니 하고 부르곤 했다. 그녀도 그들을 보살펴주고, 그다지 많지 않을 경우 돈을 꾸어주기도 했다. 어쩌다가 돈을 떼이는 일도 있었지만 이때도 그녀는 남몰래 혼자서 눈물을 흘릴 뿐, 남편에게 하소연하는 일은 없었다.
그해 겨울에도 두 사람은 즐겁게 지냈다. 한겨울 내내 시내의 극장을 빌려 우크라이나 극단이나 마술사, 지방의 아마추어 극단에게 짧은 기간 동안 다시 임대해주었던 것이다. 올렌까는 점점 뚱뚱해졌고,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몸이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꾸낀은 반대로 점점 몸이 마르고 얼굴이 누렇게 떴다. 그해 겨울에는 사업이 줄곧 잘되는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며 투덜거리곤 했다.
그는 밤마다 기침이 무척 심했다. 그녀는 나무딸기의 즙이나 보리수 꽃을 이겨서 짜낸 즙을 그에게 먹이곤 했다. 또는 오데꼬롱으로 몸을 문질러 주거나 자기의 푹신한 숄로 그의 몸을 감싸주기도 했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그녀는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진심으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당신은 정말 좋은 분이에요!"
사순절(부활절 이전 7주간을 기념하는 것)에 그는 극단원을 모집하려고 모스크바로 떠났다. 그녀는 남편이 없으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줄곧 창가에 앉아 별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자신을 암탉과 비교해보곤 했다. 암탉 역시 닭장에 수컷이 없으면 밤새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걱정하지 않는가.
꾸낀은 모스크바에서 일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더 걸려 부활절 무렵에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편지를 보내왔다. 그리고 띠보리 유원지와 관련해 이것저것 지시를 적어 보냈다. 그런데 하루만 지나면 수난 주간이 시작되는 어느 월요일 밤, 느닷없이 대문에서 왠지 불길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물통이라도 두드리듯 쿵쿵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녀가 잠이 덜 깬 채로 물이 괸 마당을 맨발로 철벅거리며 대문으로 달려 갔다.
"문 좀 열어주세요. 대단히 죄송합니다!" 누군가 문 밖에서 우울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보가 왔어요!"
올렌까는 전에도 남편에게서 전보를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쩐지 소스라치게 정신이 아찔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전보의 봉투를 뜯었다. 전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었다.
'이반 뻬뜨로비치 오늘 갑자기 사망. 급래 요망. 장례식은 화요일.'
전보에는 '장례식'이라는 말 뒤에 도무지 뜻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말도 적혀 있었다. 서명란에은 오페라단 감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여보, 사랑하는 당신!" 올렌까는 울기 시작했다. "내 사랑하는, 그리운 당신! 나는 왜 당신을 만났을까요? 왜 당신을 알고 사랑했을까요? 당신은 이 가련한 올렌까, 이 가련하고 불행한 여자를 버렸군요. 이제 난 도대체 누구를 의지해 살라는 거예요?"
꾸낀의 장례식은 화요일에 모스크바의 바가니꼬프 묘지에서 치러졌다. 수요일에 자기 집으로 돌아온 올렌까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침대 위에 쓰러져 큰 소리로 목을 놓아 울었다. 그 울음 소리는 길거리와 이웃집 마당에까지 들렸다.
"정말 저렇게 귀여운 여자가...” 이웃 여자들은 십자를 그으며 말했다. “아주머니, 귀여운 올리가 쎄묘노브나가 저렇게 슬퍼하지 뭐예요!”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올렌까는 미사를 마치고 상복에 몸을 감싸고 쓸쓸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우연히 바실리 안드레이치 뿌스또발로프라는 이웃 남자가 그녀와 나란히 걷게 되었다. 그 역시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이었다. 그는 바바까에프의 대규모 제재소의 주인이었다. 그는 맥고 모자를 쓰고 흰 조끼에는 금 시계줄을 늘이고 있었다. 상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돈 많은 지주 비슷한 인상이었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운명이란 것이 있기 마련이죠, 올리가 쎄묘노브나." 그는 의젓하게 위로의 말을 했다. "그러니까 누군가 소중한 친척이 죽었다 해도 그것은 곧 하나님의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굳게 먹고 슬픔을 참고 견뎌야만 하는 겁니다."
그는 올렌까를 대문까지 바래다주고 작별 인사를 한 다음 돌아갔다. 그 후 매일 그녀의 귓가에는 그의 의젓한 말이 맴돌았다. 잠시만 눈을 감아도 당장 그의 새까만 수염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를 몹시 좋아하게 된 것이다. 그 역시 그녀에게서 무척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그를 처음 만난 이삼 일 후 평소 별로 친하지 않았던 어느 중년 부인이 그녀 집으로 커피를 마시러 와서 구구절절 그의 칭찬을 늘어놓은 것도 아마 그것 때문일 것이다.
그 부인은 테이블에 앉자마자 곧장 뿌스또발로프의 얘기부터 끄집어냈다. 그 사람은 건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둥, 그 사람이라면 어떤 색시라도 기꺼이 시집을 갈 것이라는 둥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 사흘 뒤에는 장본인인 뿌스또발로프가 직접 찾아왔다. 그는 아주 잠깐, 십 분 정도만 집에 머물렀을 뿐 별다른 얘기도 하지 않았지만 올렌까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올렌까는 완전히 그에게 반해 버렸다. 그날 밤은 뜬눈으로 지새웠다. 마치 열병에라도 걸린 사람처럼 몸과 마음을 불태워, 날이 새기가 무섭게 그 중년 부인을 심부름꾼을 시켜 그 부인을 불러오라고 시키는 등 소동을 피웠다. 두 사람은 곧장 약혼 예물을 교환하고 마침내 결혼식을 올렸다.
부부가 된 뿌스또바로프와 올렌가 두 사람은 무척 즐거웠다. 그는 보통 점심때까지 제재소를 지키고 있다가 그 후에는 밖으로 일을 보러 나가곤 했다. 이럴 때면 올렌까는 그를 대신하여 저녁때까지 제재소 사무실에 앉아 계산서를 정리하거나 직접 물건을 팔고 보내기도 했다.
"요즘 몇 년간은 해마다 목재 값이 20퍼센트씩이나 뛰어오르고 있답니다." 그녀는 목재를 사러 온 손님이나 아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예전에는 우리도 이 지방의 재목을 취급했죠. 하지만 요즘은 바시치까가 해마다 모기료프 현까지 재목을 사러 가야 한답니다. 그 운반비가 또 엄청나다구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면서 소름이 끼친다는 듯 두 손으로 볼을 감싸는 것이었다. “아이구, 그 엄청난 운반비를 생각만 해도…"
올렌까는 벌써 오래 전부터 자신이 목재상을 경영해온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또 목재야말로 인간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코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들보, 통나무, 서까래, 판자, 각목, 창문 재료, 기둥, 톱밥 등등 이런 말들이 어릴 적부터 귀에 익숙했던 것처럼 다정하게 들리는 것이었다. 잠을 잘 때에도 목재의 꿈을 꾸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두껍고 얇은 판자의 산더미, 도시 밖 어디론가 나무를 운반해 가는 우마차의 기다란 행렬... 길이 30자가 넘는 일곱 치 들보 통나무가 곤두서서 마치 군인들처럼 목재 저장 창고로 행진해가는 꿈을 꾸기도 했다. 통나무, 들보, 판자 따위 말린 목재들이 한꺼번에 요란한 소리를 내고 서로 부딪히며 무너져 내린다... 그랬다가는 다시 저절로 쌓아올려지는 꿈도 있었다. 이럴 때마다 올렌까는 소스라쳐 놀라 잠에서 깨어나곤 했다. 그러면 뿌스또발로프는 마치 어린애를 달래듯 말하곤 했다.
"여보 올렌까, 왜 그래? 자, 어서 성호를 그어요."
그들 부부에게 남편의 생각은 바로 아내의 생각이었다. 가령 방이 너무 넓다거나, 장사가 시원치 않다고 남편이 생각하면, 그녀 역시 똑같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남편은 오락이라곤 전혀 좋아하지 않았다. 공휴일에도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고, 그래서 아내도 마찬가지로 지냈다.
"매일매일 집하고 사무실에만 틀어박혀 있지만 말고, 극장 같은 데라도 좀 다녀보지 그러세요?"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이렇게 권하기도 했다.
"우리 바시치까와 나는 극장에는 가지 않는답니다." 사람들이 그럴 때면 그녀는 아주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우리 일하는 사람들은 그런 우스꽝스러운 구경이나 하고 다닐 여유가 없답니다. 극장 같은 데를 가 봤자 뭐 하나 이로울 게 있어야죠."
뿌스또발로프 부부는 토요일에는 저녁 기도, 일요일이면 아침 미사에 참석했다. 교회를 나오면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부드러운 표정으로 길을 걸었다. 아내는 기분 좋게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비단 옷을 입었다. 남들이 보기에도 두 사람은 무척 행복한 것 같았다. 집에 돌아와서는 버터 빵에 여러 가지 잼을 발라서 차와 함께 마셨다. 그 다음에는 케이크를 먹었다.
매일 점심 무렵에는 이 집에서는 수프나 양고기, 오리 따위를 굽는 냄새가 대문 밖 한길까지 풍겨 나왔다. 고기 먹는 것을 금하는 절기 때에는 생선으로 요리를 했다. 누구나 이 집 앞을 지나는 사람들은 군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무실에는 언제나 싸모바르가 끓고 있어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차와 도너츠를 대접했다.
일 주일에 한 번쯤 두 부부는 목욕탕에 갔다. 목욕이 끝나면 둘 다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나란히 집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우리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답니다." 올렌까는 아는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바시치까와 저처럼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곤 하지요."
뿌스또발로프가 목재를 구입하러 모길레프 현으로 출장을 가 있는 동안 그녀는 너무나 외롭고 적적해서 밤에 잠도 자지 못하고 눈물만 짜고 있었다. 저녁 때에는 그녀의 집 건넌방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젊은 스미르닌이 가끔 놀러오곤 했다. 그는 군 부대의 수의사였다. 그는 올렌까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도 해주고 트럼프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이것이 여간 위로가 되는 게 아니었다.
스미르닌의 가정 얘기가 특히 그녀의 관심을 끌었다. 수의사에게는 아내와 아들이 하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행실이 좋지 못해 이미 헤어졌다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아내를 무척 미워하고 있지만 그래도 아들의 양육비로 매달 40 루블씩 아내에게 보내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올렌까는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가 불쌍했던 것이다.
"당신을 구원해 주십사고 주님께 기도하겠어요." 층계까지 촛불을 들고 나와 그를 배웅하며 올렌까는 말했다. "심심한데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주님께서 당신에게 건강을 주시고, 또 성모 마리아도 당신을..."
그녀의 말투는 남편을 닮아서 침착하고 위엄이 있었다. 수의사가 아래층 현관 문을 열고 나가려는 것을 일부러 불러 세우고 그녀는 이렇게 충고했다.
"블라디미르 플라토니치, 부인과 화해하셔야 합니다. 아드님을 봐서라도 부인을 용서하셔야 하는 거예요! 어린 자식의 마음에 그늘을 만들어서는 안 된답니다."
뿌스또발로프가 집에 돌아오자, 그녀는 남편에게 수의사의 불행한 가정사 얘기를 소곤소곤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들 내외는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흔들면서 그 어린아이를 동정했다. 그 아이는 얼마나 아버지가 보고 싶을까... 남의 일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럴 때 이 부부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왜 우리에게는 아이가 없을까? 그들은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자기 부부에게도 아이를 줍시사 하는 기도를 드렸다.
뿌스또발로프 내외는 이렇게 깊은 사랑 속에서 말다툼 한 번 하는 일 없이 6년 동안 조용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바실리 안드레이치는 감기에 걸렸다. 사무실에서 뜨거운 차를 한 잔 마시고 목재를 내가는 것을 지켜보기 위해 밖으로 나간 것이 그만 잘못된 것이었다. 그는 앓아 눕게 되었다. 유명한 의사들을 불러서 진찰을 시켰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네 달 동안 앓아 누웠다가 그만 죽어버리고 말았다. 올렌까는 다시 한 번 과부가 된 것이다.
"여보, 나만 혼자 남기고 당신은 어디로 가신 거예요?"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그녀는 이렇게 통곡했다. "당신 없이 나 혼자 앞으로 어떻게 살란 말이예요?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이웃의 여러분들이 나를 보살펴 주시지만, 나는 이제 사고무친 고아가 되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올렌까는 상장(喪章)을 단 검은 옷을 입고 모자나 장갑도 끼지 않았다. 교회나 남편의 묘지에 갈 때를 빼면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없었다. 마치 수도원의 수녀와 같은 생활을 했다. 뿌스또발로프가 죽고 나서 6 개월이 지나자 올렌까는 상복을 벗었고, 창문에 무겁게 닫혀 있던 덧문을 열어놓았다. 아침이면 이따금 하녀를 데리고 시장에 가는 모습도 이웃 사람들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녀가 집안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하는 것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그저 이것저것 추측을 해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뭔가 추측을 할 만한 재료는 있었다. 그녀가 뜰에 앉아 수의사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다느니, 수의사가 그녀에게 신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을 누군가 보았다느니 하는 얘기가 떠돌았다. 어떤 사람은 우체국에서 올렌까가 친구를 만나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고도 했다.
"이 고장은 가축을 엉망으로 관리하고 있어요. 그게 바로 여러 가지 좋지 못한 병이 생기는 원인이랍니다. 우유에서도 병이 생기고, 말이나 소들도 사람에게 무서운 질병을 옮긴다는 사실 정도는 다들 알고 있어야 할 텐데 말이예요. 사실 사람의 건강 못지 않게 가축의 건강이란 것도 무척 중요해요. 그래서 아주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문제예요."
그녀는 즉 수의사의 하는 말을 그대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제 무슨 일에 있어서나 수의사와 똑같은 의견을 갖게 된 셈이었다. 올렌까가 그 누군가 사랑하지 않고는 1년도 살아갈 수 없는 여자인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집 건넌방에서 새로운 행복을 찾은 것이다.
만약 다른 여자의 경우였다면 사람들은 올렌까를 비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올렌까만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올렌까와 수의사는 자신들의 관계가 달라졌다는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올렌까는 도대체 비밀이란 걸 가질 수 없는 여자였던 것이다.
수의사와 같은 연대에 근무하는 동료들이 집으로 놀러오면 올렌까는 차를 대접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간식을 차려 내놓기도 했다. 그런 자리에서 그녀는 페스트나 결핵 등 가축의 질병이나 도시의 가축 도살 시설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이것은 수의사에겐 무척 난처한 일이었다. 그래서 손님들이 돌아가고 나면 수의사는 화를 내며 그녀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나무랐다.
"잘 알지도 못하는 그런 얘긴 제발 꺼내지 말라고 그러지 않았소! 우리 수의사들끼리 얘기할 때에는 제발 나서지 말아요. 내 꼴이 뭐가 되느냔 말이오!"
그러면 올렌까는 놀라고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면서 묻곤 했다.
"그럼 볼로치까, 난 거기서 무슨 말을 하면 좋아요?"
그리곤 눈물이 글썽해져서 그를 껴안으며 화를 내지 말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이렇게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나 그 행복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연대가 다른 곳, 시베리아처럼 먼 곳은 아니지만 아무튼 아주 먼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의사도 연대와 함께 결국 영영 떠나버린 것이다. 그래서 올렌까는 다시 혼자만 남겨지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말 그대로 외톨이가 되고 말았다. 아버지도 이미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가 앉아 있던 의자는 다리가 하나 부러진 채로 지붕 밑 다락방에 처박아 두어서 먼지만 가득 뒤집어 쓰고 있었다. 복스럽던 그녀의 얼굴도 이제 살이 빠지고 귀엽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예전처럼 그녀에게 미소를 보내거나 그러지 않았다.
이제 젊고 아름답던 시절은 분명히 다 지나가 버렸다. 이제 젊음은 두 번 다시 그녀에게 돌아올 수 없다. 그리고 이제 행복 따위는 꿈에도 그려볼 수 없는 그늘지고 우울한 생활이 새로 시작된 것이다. 해가 저무는 무렵이면 올렌까는 현관 계단에 나와 앉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예전처럼 야외 극장에서 연주하는 음악 소리와 폭죽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지금 올렌까는 그런 소리를 들어도 아무 감흥도 생기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리고 아무런 욕망조차 없이 그저 멍하게 텅 빈 정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밤이 깊으면 잠자리에 들어가 꿈속에서도 마치 폐허나 마찬가지인 자기 집 정원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먹는 것도 그저 마지못해 먹는 시늉만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가 불행했던 것은 이제 무슨 일에나 자기의 의견이란 것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자기 주위의 사물은 여전히 눈에 띄었고, 또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들에 대해 자기 의견을 전혀 가질 수 없었고,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없다는 것 - 이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무서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병이 하나 놓여 있다. 비가 오기도 한다. 농부가 수레에 올라타서 길을 간다... 이런 것들을 보아도 그녀는 도대체 그 병이 왜 있는 것인지, 무슨 이유로 비가 오는 것인지, 그 농부는 무엇 때문에 수레를 타고 가는지 자기 생각을 갖고 얘기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 1천 루블을 주면서 뭔가 얘기를 해보라고 해도 그녀는 입을 뗄 수 없었을 것이다.
꾸낀이나 뿌스또발로프나 그 다음엔 수의사와 함께 지낼 때만 해도 그녀는 그런 모든 일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고, 자기 나름대로 의견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머리 속과 가슴은 그녀의 집 정원만큼이나 텅 비어 있었다. 그것은 정말 소름끼치도록 무섭고 괴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도시가 점점 커지면서 그녀가 사는 마을도 이제는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띠보리 극장과 제재소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서 이리저리 골목길이 뻗어 있었다. 정말 세월이 빠르기도 하다. 올렌까의 집은 연기에 그을리고 지붕에는 녹이 슬었다. 헛간은 한쪽으로 기우뚱하게 기울었고, 뜰에는 잡초와 가시나무 따위만 잎이 무성했다. 집 주인인 올렌까의 얼굴에도 보기 싫은 주름이 늘어만 갔다.
올렌까는 여름철에는 하릴없이 허전한 마음으로 층계에 나와 시름없이 앉아 있었다. 겨울에는 눈이 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창문께에 앉아 있었다. 훈훈한 봄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그 봄 바람을 타고 멀리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오면 그녀는 문득 지난날의 추억이 한꺼번에 되살아나서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눈물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녀의 가슴 속에는 다시 무엇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것인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공허감이 자리를 잡는 것이다. 브리스까라는 이름의 새까만 고양이가 야옹야옹 하면서 곁에 와 재롱을 부리곤 했지만 그런 고양이 따위의 재롱이 올렌까의 마음을 달래줄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고양이의 재롱 따위가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이었다. 자기의 모든 존재, 자기의 이성과 영혼을 꽉 틀어쥐고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생활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식어가는 그녀의 피를 다시 한 번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옷자락에 매달리는 고양이를 떼 내 저리 밀어내며 짜증 섞인 소리를 냈다.
"저리 가! 귀찮단 말이야!"
날이면 날마다 아무 기쁨도, 아무 자기 주관도 없이 이렇게 세월은 한 해 한 해 흘러갔다. 살림은 하녀 마브라가 하고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무더운 6월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교외로 나갔던 가축들이 돌아오며 내는 먼지가 온통 집안에 가득 차는 그런 시간이었다.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올렌까는 나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밖을 보았을 때, 그녀는 하마트면 기절할 뻔했다. 문밖에는 벌써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 수의사가 민간인 복장을 한 채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그녀는 잊고 있었던 과거가 그대로 되살아났다.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한 마디 말도 입밖에 꺼내지 못하고 그녀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마냥 흐느꼈다. 걷잡을 수 없는 흥분에 사로잡혀, 그녀는 두 사람이 어떻게 집으로 들어오고 어떻게 식탁에 가서 마주앉아 차를 마셨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당신이 돌아오셨군요!" 기쁨에 목소리를 떨며 그녀는 속삭이듯 말했다. "블라디미르 쁠라또니치! 그 동안 어디 계시다 이렇게 찾아오신 거예요?"
"이젠 아주 이 고장에 와서 살 생각입니다." 수의사가 입을 열어 말했다. "군대도 그만 뒀지요. 이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마음껏 해서 생활의 자리를 잡고 싶어요. 그리고 아들 녀석도 이제 학교에 보낼 때가 됐습니다. 많이 컸지요. 나는... 알고 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내와 화해를 했습니다."
"그럼 부인은 지금 어디 계셔요?" 올렌까가 물었다.
"지금 아들 녀석과 함께 여관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셋방을 얻으러 다니는 길입니다."
"아니 셋방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이에요? 우리 집에 와서 계시면 되잖아요? 여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세요? 방 값은 한 푼도 받지 않을 테니 아무 걱정 마시고 우리 집에 와서 있어요, 네?"
올렌까는 다시 흥분해서 눈물을 흘렸다. "이 방을 쓰시도록 하세요. 저는 건넌방 하나면 충분하니까요. 그렇게 해주시면 전 너무나 좋을 거예요."
이튿날, 지붕에는 벌서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벽도 하얗게 새로 바르도록 했다. 올렌까는 가슴을 쫙 펴고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집안을 이리저리 다니며 여러 가지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예전의 그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온몸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수의사의 아내가 아들과 함께 이사를 왔다. 못생긴 얼굴에 머리는 짧게 자르고, 성미가 까다로울 것 같은, 비쩍 마른 여인이었다. 아들 사샤는 열 살 먹은 어린아이치고는 키가 작고 똥똥한 편이었다. 눈은 파랗고, 볼에는 보조개가 오목하게 패어 있었다. 아이는 뜰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고양이를 쫓아 달려갔다. 그리고 곧 이어 명랑하고 즐거운 웃음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아줌마, 이거 아줌마네 고양이 맞아?" 사샤가 올렌까에게 물었다. "새끼를 낳으면 우리도 한 마리 줘요. 우리 엄마는 쥐새끼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해요."
올렌까는 차를 따라주며 사샤와 이야기를 하노라면 가슴이 훈훈해졌다. 마치 이 아이가 자기 자식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랑스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저녁에 사샤에 책상에 앉아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복습이라도 하고 있으면 그녀는 그 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참, 귀엽기도 하지... 어쩌면 어린 아이가 저렇게 똑똑하고, 저렇게 깔끔하게도 생겼담..."
"섬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종이다."
'섬은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종이다...' 올렌까도 사샤가 읽는 글을 마음 속으로 따라서 읽었다. 여러 해 동안 침묵 속에서 살아오며 자기의 의견이라는 것을 입밖에 낸 적이 없던 그녀에게는 이것이 오래간만에 자신을 갖고 입 밖으로 소리내어 말한 최초의 의견이었다. 이제 올렌까도 비로소 자기의 의견이란 걸 가지게 된 것이다.
밤참을 먹을 때 그녀는 사샤의 부모와 얘기를 나눴다. 중학교의 학과목들은 어린애들이 배우기에 더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냥 직업 교육을 받게 하는 것보다는 역시 기본적인 고전을 배울 수 있는 중학교 교육이 아이의 장래를 위해 더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사샤는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하로조프에 있는 자기 언니네 집에 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인 수의사는 매일같이 가축을 검사하러 출장을 나가곤 했고, 어떤 때는 2, 3일씩 있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러고 보면 사실 사샤는 자기 집에서 거추장스러운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완전히 버림받은 것이나 별로 다름이 없는 것이다.
올렌까는 이러다가는 사샤가 굶어죽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가 사용하는 건넌방에 붙은 조그마한 방 하나에서 지내도록 마련해 주었다.
사샤가 올렌까에게 와서 살게 된 지도 벌써 반 년이 지났다. 아침이면 그녀는 아이 방으로 들어간다. 사샤는 한쪽 뺨 밑에 손바닥을 괴고 죽은 듯이 자고 있다. 아이를 깨우는 것이 너무 가엾어서 그녀는 늘 망설이곤 했다.
"얘, 사센까!" 올렌까는 애처롭다는 듯이 아이를 불러 깨운다.
"이젠 일어나야지, 학교에 갈 시간이란다!"
사샤는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고 아침 기도를 드린다. 그런 다음 차를 세 잔 마시고 커다란 도너츠를 두 개, 버터를 바른 빵을 조금 먹는다. 아침을 먹을 때면 잠에서 미처 깨지 않아 늘 부루퉁해져 있기 일쑤였다.
"그런데, 사센까야, 너 학교에서 배우는 그 우화를 똑똑히 따라 외우지 못했잖니?" 마치 아이를 먼 곳으로 떠나 보내기라도 하는 말투로 그녀는 이렇게 타이른다. "나는 항상 네 일이 걱정이야.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선생님 말씀도 늘 새겨 들어야 한단다. 알겠니?"
"에이, 이제 제발 그런 말 좀 그만 해요!" 사샤는 이렇게 내쏘곤 했다.
이윽고 소년은 자기 머리통보다 훨씬 더 큰 모자를 눌러쓰고 책가방을 둘러멘다. 그리고는 한길에 나가 학교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올렌까도 그 뒤를 슬금슬금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사센까야!" 그녀는 그럴 때면 뒤에서 아이를 불러 세워서는 대추나 캬라멜 따위를 손에 쥐어주곤 했다. 학교가 있는 골목길로 접어들면, 사샤는 이렇게 나이 많은 여자가 뒤에서 따라오는 것이 창피해서 뒤를 돌아보며 말하곤 했다.
"이젠 그만 돌아가요, 아줌마. 나 혼자서 얼마든지 갈 수 있단 말이에요."
올렌까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소년이 학교 문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소년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녀는 과거에 사랑했던 어떤 사람에게도 이렇게 깊은 애정을 바친 적이 없었다. 어머니로서의 사랑이 날이면 날마다 더욱 열렬하게 불타올랐던 것이다.
이렇게 헌신적이고, 이렇게 순결하며, 이렇게 자기에게 기쁨을 안겨주는 그런 사랑을 그녀는 아직 맛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자신의 영혼을 독차지하는 그런 사랑의 경험은 처음이었다. 자기와는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소년인데도, 그녀는 소년의 볼에 오목하게 들어간 그 보조개와 커다란 학생 모자를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저려오는 것 같았다. 자기의 한평생 동안, 자기의 눈물과 기쁨을 거기에 바칠 수 있다! 왜 그렇게 됐을까? 하지만 누가 감히 거기에 대답할 수 있으랴!
사샤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나면 올렌까는 무척 흡족하고 평온한 마음으로 천천히 집으로 돌아왔다. 이 반 년 사이에 한결 젊어진 그녀의 얼굴에는 쉬지 않고 밝은 미소가 떠올라 떠날 줄을 몰랐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도 옛날처럼 그녀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그녀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아리따운 올리가 세묘노브나! 요새는 어떻게 지내시나요?"
"요즘 중학교 공부는 너무 어려워졌어요!" 올렌까는 시장에서 사람들을 만나 이런 말을 했다. "글세, 어제는 1학년 학생들에게까지 우화를 암송해오라느니, 라틴어 번역을 해오라느니 하지 뭐예요? 게다가 수학에서도 숙제가 있죠! 그건 너무 한 것 아닐까요? 세상에나!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너무 무거운 부담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올렌까는 중학교 교원들이나 학과, 교과서 등에 대하여 사샤에게 들은 얘기를 그대로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오후 세 시에는 점심을 먹고, 저녁이 되면 사샤와 함께 예습을 하면서 진땀을 빼곤 했다. 사샤를 잠자리에 눕힐 때가 되면 그녀는 몇 번이나 성호를 긋고 입 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그런 다음에야 자기도 잠자리에 누웠다. 그러고는 사샤가 대학을 마치고 의사나 훌륭한 기사가 되는 날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커다란 저택을 장만한다. 거기에는 마구간과 마차 따위가 갖춰져 있다. 그리고 결혼도 해서 아이를 낳는다... 이렇게 아득히 먼 미래의 일을 환상처럼 그려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면 그녀의 뺨에는 어느새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겨드랑이 밑에서는 고양이가 가랑가랑 코를 골고 있었다.
밤중에 느닷없이 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올렌까는 겁에 질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숨이 막힌다. 가슴은 방망이질을 해댄다. 대문에서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한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리코프에서 전보가 온 모양이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올렌까는 이렇게 생각했다. '사샤의 어머니가 그 애를 하리코프로 보내라고 전보를 친 모양이야! 아... 이 일을 어떡하면 좋을까?'
올렌까는 절망에 빠져들었다. 머리와 손발이 얼음장처럼 얼어붙는 것만 같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신처럼 불행한 사람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잠시 후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의사가 클럽 외출을 나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속을 꽉 채웠던 묵직한 것이 시원스레 풀려 내려가는 것 같다. 가슴이 다시 가벼워졌다. 올렌까는 옆방에서 곤히 잠든 사샤를 생각하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이따금 사샤가 잠꼬대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싫어, 저리 가란 말이야! 때리지 말라니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