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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진 육체에 심은 꽃씨 하나
증 언 자: 김용대(남)
생년월일:1952 4. 15(당시 나이 28세)
직 업: 회사원(현재 무직)
조사일시: 1988. 12
개요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내기 위해 온몸으로 싸우다 총에 맞아 하반신 불구가 된 김용대씨의 증언이다.
세 시간 이상 침대에 엎드린 채 고통을 참으며 성의껏 증언해 준 내용을 김용대씨께서 평화민주당에 광주의
거 부상 피해 및 신고서'를 제출할 때 자술한 기록에 덧붙여 정리했다.
1980년 5월 21일
나는 5 · 18 광주항쟁 당시 예비역 장교로 수십만 광주시민좌 선두에 서서 탱크를 앞세우고 계획된 학살만
행을 저지른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총에 맞아 불구가 된 뒤 꿈처럼 단란했던 가정이 두 동강 나고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총상의 아픔 때문에 엄청난 액수의 치료비를 소비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아내에게조차 그 사실에 대해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5년 전 내가 부상당
하게된 경위에 대해 정확히 기술하여 광주항쟁의 올바른 국민적 이해와 조명을 통해 다시는 짐승만도 못한 동
족살상극이 땅에서 되풀이되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무자비한 군화발에 짓밟힌 내 상흔을 S년이 아니라 평생이
지나도 되새기려 하지 않았으나 꼭 밝혀져야 할 중대사건임을 인식하여 이렇게 증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도청 앞 집단사격으로 Ml6총알이 척추에 박힌 후 갈비뼈 이하 전신마비로
남성기능마저 상실한 채 대소변을 타인이 받아내야 하는 불구가 됐습니다. 그 뒤부터 자포자기하고 절망하여
죽음을 결심했으나 그대로 죽기는 너무나 억울했습니다. 5 · 18 광주항쟁의 진상규명을 다음 세대로 미루지
말고 직접 경험한 우리 세대가 올바로 밝혀내야 하고 그 일이 성공할 때까지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래서 개인적으로 부상자들에게 연락하여 부상상태를 알아보고 자료를 수집하는 일을 해왔습니다. 그동안의 노
력으로 1982년말 무진교회에서 20여 명의 부상자를 중심으로 5 · 18 광주의거부상자회(당시의 명칭은 무등산
부상자회)를 발족하게 되었습니다.
회원자격 심사는 당시 부상당한 경위, 장소에 관해 자세히 듣고 난 후 병원에서 진단서를 끊어 제출하면 그
것을 근거로 가입여부를 결정하였습니다. 1987년까지 80여명의 회원이 활동했으나 보상금 문제가 대두된 현재
에는 회원이 450여 명(박옥재 씨가 회장으로 있는 곳)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개인의 정권탈취 야욕으로 빚어진 광주 시민의 대량학살에 항거하여 싸운 광주항쟁은 민주의 금자탑인데도
불구하고 지난 8년 동안 전두환 정권의 공작정치에 얼마나 갈기갈기 찢기고 짓밟혀 왔습니까!
처음 극회 청문회가 열린다고 할 때 단 한마디의 말도 못 한 채 민주화에 대한 열망 하나로 장렬히 산화하
신 5 ·18 영령들께 크게 위로가 될 것이라고 사뭇 기대가 컸습니다. 그러나 광주항쟁이 광주 시민의 문제만
은 진정 아닐진대 타지역 국회의원들의 태도가 '보상이나 해주고 명예회복만 시켜주면 될 텐데 뭘 그리 질질
끄는가'라는 식으로 변해 버린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전보다 훨씬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본 적 없는 유복자입니다. 내가 어머님 뱃속에 있을 때 6 · 25가 발발하여 당시 경
찰로 계시던 아버님은 인민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 같은 환경이 나로 하여금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게
했고, 어린시절 싹튼 김일성에 대한 증오심이 직업군인이 되려는 일관된 생각을 갖게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쭈욱 반장을 지내고 고등학교 때는 학생 연대장을 할 정도로 남한테 지기를 싫어했습니다. 1980년 2월 단기
임기가 만료되어 중위로 예편할 때까지 군대에서도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여 표창장도 많이 받았습니
다. 예편 후 곧바로 삼양타이어에 취직하여 다니던 중 5·18 광주항쟁을 겪게 되었습니다.
5월 역사의 현장에서
5월 16일 전남대병원에서 해산달이 된 아내의 뱃속의 태아가 건강하다는 검진을 받았습니다. 온 세상이 내것
처럼 보이고 기쁘기만 했습니다. 느긋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아내의 손목을 잡고 병원에서 가까운 전남도청 앞
분수대를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벌이는 열띤 토론과 태극기는 지금도 내 가
슴에 벅찬 감동으로 남아 있습니다. 학생들 사이를 뚫고 깊숙히 끼여들었습니다. 만삭이 된 아내가 불편해 하
는 것이 보기 민망하여 집으로 그냥 돌아왔지만 웬지 어린 학생들만 남겨두고 와버린 것이 못내 안타까웠습니
다.
5월 19, 20일 회사에 가니 '공수들이 시민을 죽였다', '공수들이 학생을 닥치는 대로 잡아간다'는 등의 갖가
지 소문으로 들썩거렸고, 조회시간에는 그런 상황이 정식으로 거론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때도 난 소문들을 완
전히 믿지는 못했고 '설령 시민이 죽었다 하더라도 공수들이 실수로 그랬지 일부러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라
고 굳게 믿었습니다.
21일 아침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출근버스를 타기 위해서 서부경찰서 앞 시외버스 정류장에 7시 10분경 도착
했습니다. 그 시간이면 출근버스가 오는데 그날은 8시가 되어가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무슨 일일까 이상스럽
게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회사에서 야근을 하고 오던 직장동료가 "회사가 문을 닫았으니 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날 밤에 시민군들이 회사에 와서 폐기처분된 타이어를 가져갔다"면서 연락이 있을 때까지
쉬라고 했다는것입
바로 그때 한전 부근에서 일반보병이 완전군장을 하고 시내진입을 시도하는 것을 관망하고 있는데 시민,학
생들이 길옆의 가로수를 통으로 쓰러뜨려 한전 앞 육교 근처에 가로수 4, 5개씩을 쌓아 군인들의 진입을 방해
하고 있었습니다. 나도 시민들을 도와 톱과 도끼로 가로수를 베어 서부경찰서 옆 시외버스 정류장 부근에 하
나 한전과 서부경찰서 중간지점에 하나 이렇게 두 군데에 걸쳐서 비지땀을 흘리며 바리케이드를 완성했습니
다. 그때 계엄군이 지프차와 트럭을 타고 시내진출을 시도하달 시민군과 격렬한 충돌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계
엄군은 완강한 시민군의 저항에 못 이겨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전방 근무를 오랫동안 한 탓으로 항상 미안했던 아내와 걸음마 연습에 한창인 딸아이 그리고 1
6일 밤에 보았던 엄숙하게 시위하던 학생들의 모습 등이 겹쳐서 떠을랐습니다. 갑자기 나는 아내와 딸이 보고
싶어 단숨에 월산동 집으로 달려가서 얼굴을 들여다보고 붙잡는 아내를 뿌리치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토
록 화창한 5월에 군인의 신분으로 시민,학생을 찌르고 두들겨 패서 연행해 가는 것을 방관만 하는 것은 비경
자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소문 확인을 위해 도청으로
'사람의 운명에 우연은 없다던가!' 나는 그 길로 양동을 거쳐 유동 삼거리 쪽으로 부리나케 뛰어갔습니다.
갖가지 소문의 진상을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유동에서 방직공장 다니는 아가씨들이 똑같은
작업복을 잎고 버스에 탄 채 손뼉을 치고 노래하면서 차량시위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오전 9시경 금남로 5
가 쪽으로 가다 가마니에 덮인 채 다리 4개가 밖으로 나와 있는 시체 2구를 리어카에 싣고 가는 것을 목격하
고는 두 눈이 뒤집힐듯한 분노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본 시민들은 너나할것없이 다 울었습
니다. 그동안 들었던 무수한 소문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한 물증이었던것입니다. 이토록 잔인한 진
압을 했으면서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고 방송으로 떠들어대던 위정자와 언론의 허구성을 드러낸 광경이었
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떠돌던 말들이 한치의 거짓도 없었음이 확인되자 나는 뒤틀리는 가슴을 누르면서 공수
가 진을 치고 있다는 도청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도로에 꽉찬 시민들을 헤집고 가는 사이 며칠전에 봤던 대학
생들의 얼굴이 떠을랐습니다. 이 교육의 도시에서 살상이라니‥‥가자!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공수들이 사
람을 죽이는지.
전일빌딩 앞에 탱크를 세워놓고 얼룩무늬의 공수들이 완전군장을 한 채 5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구YMCA에
서광주우체국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질러 서 있었습니다. 헌 앞에는 중령, 대위 등이 마치 사열하는 듯한 상
태로 전있고 그 뒤로 사병들이 밀착해서 길을 막고 도청을 등지고 서 있었습니다. 몇 개 대대병력 정도 되게
보였습니다. 나는 5월 21일 도청 앞 상황을 강조해저 설명하고 싶습니다. 내가 그곳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
시경이었는데, 주위 시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차량방송을 듣고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나는 죽어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다친 기억 때문만은 절대 아닙니다. 대한민국 최정예부대가 맨주먹의 광주
시민을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던 장면을 처음부터 목격한 내가 어찌 그날을 잊을수 있겠습니까!
그곳에 모인 광주 시민들은 "우리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면서 동참을 호소하고 '계엄령을 해
제하라!',군인들은 과잉진압의 잘못을 시민 앞에 사과하고 제위치로 돌아가라!' 등의 구호를 목이 터져라 외쳐
댔습니다. 12시까지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하기로 약속을 했다는데 그 약속을
어겼다고 시민들이 공수들에게 항변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격분한 젊은이들이 20여 명의 시민을 태운 관광버
스 한 대를 밀고 도청을 향해 서서히 나아갔습니다. 차가 쏜살같이 달린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밀면서 나갔기
때문에 공수들이 피할 수 있는 시간은 넉넉했습니다. 버스가 YMCA 앞에서 약간 속력을 내며 공수들을 뚫고
분수대를 돌아 상무관쪽으로 가자 공수들이 버스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러자 총알이 차에 부
딪혀 불꽃이 튀겼고,그 속에 있던 시민들은 한 사람도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똑똑히 봤습니다. 관광
차가 공수들을 스치고 지나간 후 공수 2명이 배낭을 고쳐했고, 한 명은 다리를 다친 듯 절룩거리며 길가로 나
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순간 벌떼처럼 모여 있던 공수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길옆에 붙어 무릎을 꿇고 '
전투자세'를 취했습니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하고 멍해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해 있는 순간 또다시 귀를 찢는 총소리가 들리자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LMG 기관총 사격이었는데 관광호텔쪽 가로수 가지들이 총알에 맞아 뚝뚝 떨어졌습
니다. 위협사격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나는 YWCA 쪽으로 가는 전일빌eld 건물 벽에 붙어서 금남로를 보니
그렇게 많던 시민들이 다 흩어지고 없었습니다. 그사이 장갑차 한 대가 도청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그
에 대고 총을 쏘았습니다. 잠시 총성이 그치자 시민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모여든 시민을 향해 조
금 전 LMG 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했을 때와는 달리 Ml6으로 조준사격을 했습니다. 10여 명 이상의 시민이
금남로에 쓰러졌고 부상자를 데리러 도로로 나가던 사람들이 또다시 고꾸라졌습니다.
전일빌딩 건물 벽에 기대 있다가 금남로로 나온 나는 또다시 들리는 총소리를 뒤로 하고 동구청 쪽으로 달려
갔습니다.
그쪽으로 도망가면 사람들이 많아서 피하는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축해서 데려온 부상 자들을
시민들이 동구청 뒤쪽 길로 옮기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금남로에서는 군인의 모
습이 단한 명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디에서 총을 쏘길래 시민들이 쓰러지는 것일까‥‥ 나는 하도 기가
막혀 동구청앞에서 여기저기 군인들의 모습을 찾았습니다. 수협 옥상에서 3명의 공수가 '서서쏴'자세로 총을
쏘고 있었습니다.
척추관통으로 하반신 불구
맨 처음 총소리가 들린 지 30분 정도 지난 뒤였습니다. 동구청 앞에서 나도 Ml6 총알을 허리에 맞았습니다.
아마 수협 옥상에서 쏜 총에 맞았을 것입니다. 쓰러져 있는 나를 주위에 있던 시민이 기독병원으로 옳겨줬습
니다.
그 살상의 현장에서 비록 갈비뼈 이하의 하반신이 불구가 되긴 했으나, 어떻게 살아남아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볼 수 있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꿈만 같습니다. 내 호주머니에 있던 직장 신분증으로 집에 연락이
가능해 해산달이 된 아내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병원에 왔다고 합니다. 수술해도 소생이 불가능하다면서 의사
들이 나를 밀쳐뒀다고 합니다. 피를 흘리며 구석에 밀쳐진 나를 본 아내가 울면서 의사를 붙들고 수술이라도
받게 해달라고 통사정을 .하여 그나마 수술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수술이 끝나고 한 시간쯤 후 아내는 그 병원
에서 딸을 낳았습니다. 딸아이의 별명이5·8로 지어진 것이 기 때문입니다. Ml6총알이 척추를 뚫고 배와 옆구
리에 1백여 개의 파편이 모래알처럼 퍼져 있어 제거가 가능한 것만 몇 개 쁩아내고 지금도 무수히 박혀 있습
니다.
그날의 상흔을 극복하며
당시 기독병원에는 신경외과가 없어 삼양타이어 사장이 사비로 조선대병원으로 옮겨줘서 그곳에서 신경치료
를 받았으나 되살아나지 않아 지금껏 신경이 마비된 채 살고 있습니다. 갈비뼈 이하는 바늘로 찔러도 감잔이
없으나 총에 맞은 부위는 지금도 통증이 너무 심해 하루라도 약을 거르면 밤에 잠을 이를 수 없어 서너 시간
씩 몸부림치다 지쳐 쓰러지곤 합니다. 하반신이 마비된 상태인데도 통증이 심한 것은 총알이 척추신경을 끊어
버리면서 감각이 없어졌고, 또 총에 맞는 순간 총알이 척추를 지져버리면서 생긴 화상 쇼크 때문이라고 의사
는 말했습니다. 그 후 전대병원에서 수술도 해보고 서울대병원에서도 두 차례에 걸쳐 수술을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또전기로 파편을 없앴으나 그것이 어찌 다 없어 지겠습니까.
최근에도 순천향병원을 찾아 약물치료를 했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습니다. 날마다 계속되는 통증을 못 이겨 병
원장의 승인 없이는 판매가 불가능한 향정신성이라는 일종의 마약을 아내가 어렵게 구해다가 주사를 맞으면
통증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가격도 엄청나게 비싸고 구하기도 힘들어 지금은 약물로 치료하는 중입니다. 요
즘은 한 알이라도 약을 줄여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무척 어렵습니다.
1983년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김영삼총재가 단식하다 쓰러져 입원해 있던 병실을 횔체어를
타고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링게르만 꽃고 거의 죽어가는 것을 보고 나를 소개한 후 "우리 모두 힘을 내어
좌절하지 말고 열심히 살자"면서 격려하고 돌아왔으나 야윈 얼굴이 무척 걱정돼 며칠 후 다시 방문했습니다.
내가 병문안 온 것을 계기로 여러 민주인사들이 그분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나는 퇴원하여 광주
로 왔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안기부 직원과 보안대에서 날마다 집 앞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루 한시간을 교대로 감시하는데 그것이 어찌나 부담스럽던지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대문 앞에서 떨고 서 있는 것이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불쌍해서 방으로 들어오
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족끼리의 사생활을 침해당했습니다.
나를 감시하던 자들은 처음에는 안기부 직원인 김동진 다음으로는 기획관 전근간, 조정관 정중전, 또 기억나지
않는 몇 사람이 더 있었고, 정보과 직원은 주로 경사 계급이었으나 뒤죽박죽 이였습니다.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