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동부 문인협회의 토대를 마련하고 숭산스님 미국포교 동기 제공한 이계향 보살

1965년 이계향 보살님은 이방자 여사와 함께 조계종 깃발들고 일본 조동종의 하와이 행사에 참석하였다. 이 사진은 미국에서 찍은 한국불교계의 최초의 사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계향 보살님은 미국에 살고있는 재미동포중 이민오기 전 한국에서 가장 폭넓은 사회활동을 한 사람중의 한분으로 1950년대부터 60년대 말까지 약 20년동안 한국사회 각계 각층의 여론 주도층과 인연을 맺고 활동을 하였다. 이계향 보살님의 전집에 나오는 사진속의 인물들을 일부 살펴 보면 모윤숙, 전숙희, 한명덕, 양유찬 주미한국대사, 손원인 해군참모총장, 미국경제조정관 우드 박사, 박마리아, 이중신 재무부 장관, 이기붕 국회의장, 최순주 국회부의장, 조병옥 박사, 조경희, 장기영 체신부 장관, 정일권 국무총리, 이재학국회부의장, 여성국회의원 김철안, 홍진기 내무부장관, 홍성욱 전 뉴욕 총영사, 한명덕, 김홍일 자유중국대사, 유석현 광복회장, 쌍룡의 김미희 여사, 이 방자 여사, 김자경 성악가, 소설가 정비석, 이승만 전 대통령을 하와이에서 모신 윌버 최, 최두선 국무총이, 박준규 국회의장, 월탄 박종화, 유진오 박사, 운보, 고은, 김기영, 박두진, 정한모, 구상, 김충현, 김구용 씨등 모두가 한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정치계, 재계, 학계, 문화계, 언론계, 외교관 등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중추 인물들인 이들과 약 20년을 사교하면서 보낸 이 계향보살님은 한국현대사의 한 복판에서 있었던 사람이다. 한국사회는 정치적 격변기였고 갈등이 심한 사회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각계 각층과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대단이 어려운 일이다. 이계향 보살님은 만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다. 이 계향보살님은 또한 따뜻하고 다정하고 남을 배려하고 가식이 없는 진심으로 항상 사람들을 대한다. 그리고 자기보다 연하의 사람,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게도 존중하는 태도로 대한다. 이러한 이 보살의 태도 때문에 자유당 국회의원인 남편 김원규의원과 정치적으로는 다른 길을 가는민주당 지도자 조병옥 박사가 스스럼 없이 찾을 수 있었고 회오리 바람이 부는 갈등의 한국 사회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

1960년 여름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 리셉션에서.왼쪽부터 둘째가 이계향 보살,
그 옆이 최호중 전 한국외교협의장

흥국사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오성장군 김홍일 자유중국대사가 귀국했을 때, 가회동 집에서 베푼 석찬. 앞줄 왼쪽부터 두 번째가 유석현 광복회장, 공자의 72대손 공 덕성, 김홍일 대사, 필자의 부군, 뒷줄 중앙이 이계향보살
이계향 보살님은 또한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미국에서 36년간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관게를 유지 하며 주고 받은 만통이 넘는 수 많은 편지를 한통도 버리지 않고 서울, 전주, 영남 등 지역별로 문화, 언론, 종교계 등 분야별로 잘 분류하여 보관하는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이 보살님은 숭산스님과 법안스님과 주고 받은 엽서와 편지들, 사진들을 고스란히 보관하여 미주현대불교에 기증하였다. 이 편지, 엽서, 사진들은 현재 미주현대불교 자료실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미주현대불교에서는 앞으로 빠른 시일내에 이 자료들을 정리하여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계획이다.
자타가 인정하는 미인인 이 보살님은 한국의 백악관으로 불리던 서울 가회동 1,200여평의 대저택에서 1950년대 초부터 1960년대 말까지 사흘이 멀다하고 한국사회의 지도자들이 참석하는 정부주최 성격의 공적 파티를 비롯한 각종 성격의 파티를 하며 사회활동을 왕성하게 하다가 1970년에 3명의 아들과 함께 뉴욕으로 이민을 왔다.
이계향 보살의 문학활동은 1959년 가을 자유문학지에 ‘이국소녀시절’로 데뷔했다. 이후 문학활동은 이 계향 보살의 삶의 가장 큰 기둥이 된다. 1963년 첫 수필집 ‘부운의 변두리’를 출간하고 1970년 뉴욕으로 이민을 와 이때부터 세 아들의 교육과 무사독학으로 고전문학을 병행하면서 이계향 문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74년 수필집 ‘세월의 그림자를 출간하고 다시 문학활동을 시작한 이 보살님은 이후 총 9권의 책을 출판하였고 뉴욕지역에서 발행되는 중앙일보와 한국일보에 장기간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이며 원형갑 전 한성대총장은‘이계향의 고전문학을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글에서 “전고적(典故的)인 이야기를 소개할 때마다 이계향은 반드시 그 전고의 역사적인 내용을 분명하고 상세하게 밝혀놓고 있다. 그만큼 이 작가는 전고인 한 철저한 조사 분석을 거친 후에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선악의 판단 등 이성적 비판도 반드시 가해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독자도 분명히 이 작가의 개인적인 의견이나 이성적 비판에 공감할 수 있으며 뜻을 같이 하게 된다. 확실히 이 작가의 역사적인 식견에 입각한 고전들의 해석에는 심취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다. 이 작가의 전고에 입각한 문장의 전개들은 그것이 심각하면 할수록 가혹하면 할수록 우리의 이성적 판단력을 몽롱하게 흐려놓고 우리! ! 스스로 식견이나 판단을 멈춘 채 멍청해져 버리는 것이다. 그 어떤 순수한 창작물 이상으로 기존의 모든 가치관을 유보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제 3의 경지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이계향의 사물이해부터가 우리의 의식구조와 달리 서양적이 아니라 동양적이고 전고적이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확실히 이계향의 전고적 발상법은 우리의 새로운 충격이 아닐 수 없다.”라고 쓰고 있다.
이민사회가 커지고 뉴욕에서 문학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계향보살님은 1989년 미동부문인협회를 창립하고 초대부터 3대 회장을 역임하면서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현재는 이 단체의 고문으로 있다.
이계향 보살님의 불교와 인연도 극적이다. 1950년대 말에 집안에 들어온 골동품과 불상이 인연이 되어 30대에 불교신자가 된 이 보살님은 조계종 종정이던 송광사 효봉큰스님으로 부터 여래성이란 불명을 받고 불교신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후 숭산스님이 이끄는 달마회에서 삼보사 창건주 이한상거사와 부인 상품화 보살, 샌디에이고 초대 한인회장을 역임한 한국불교미술계의 알리지지 않은 거장 송두영 화백 등 미주한국불교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인물들과도 달마회에서 만난 도반들이다. 1960년도부터 미국을 드나들던 이 계향 보살님은 1965년 10월 하와이에서 열린 국제불교부인대회에 이방자 여사와 대표로 참석하였다. 이 행사에서 이 보살님은 한국대표로 연설을 하였다.


이계향 보살의 출판기념식에 참석한 숭산스님과 화계사 스님들
뉴욕으로 이민 온 후 숭산스님과 뉴욕에서 만나게 되었는데 숭산스님을 동생 남편 김판기씨에게 소개하였다. 뉴욕 한인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던 음악사 김판기의 안내로 맨하탄 일본선원을 방문한 숭산스님은 미국에 잠깐 여행하고 가려던 마음을 바꿔 미국 포교를 결심하게 된다. 이후 숭산스님은 이 보살님 집에서 한달여 동안 지내다가 로드 아일랜드로 가 홍법원을 개원하고 미국불교 포교에 큰 행적을 남겼다. 한국에서부터 시작된 이보살님과의 이러한 인연으로 숭산스님은 동구와 유럽, 아프리카 등지를 다니면서 이 보살님에게 보낸 엽서가 무려 30여통이다. 하와이 국제불교부인대회에 참석하는 이 보살님을 김포공항에 전송나오기도 했던 숭산스님은 서울에서 가진 이 보살님의 출판기념회에 화계사 대중들과 함께 참석하여 축하를 해주었다.! 법안스님과는 1970년대 초뉴욕에서 처음 인연을 맺고 이후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다. 법안스님의 초창기 미국생활시절 많은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고자 애썼던 이 보살님은 뉴욕에서 독학으로 중국 고전문학을 공부하다가 의문점이 있을 때 법안스님에게 전화를 하여 많은 도움도 받았다고 회상하였다.
미국에 1970년 이민 와 터를 잡은 로치몬트의 아파트에서 36년간 살면서 벌였던 문학활동, 종교활동을 이제 조용하게 정리하고 있는 이계향 보살님. 그는 남은 생애를 불교신앙에 좀더 매진하며 미주현대불교 후원사업을 마지막 불사로 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다음은 이 보살님의 연보를 간략하게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1928년 6월 16일(음 4월 29일) 중국 간도에서 태어나 北滿洲 뻬이안(北安)에서 成長. 父親은 3대로 내려오는 한의사(韓醫師)였고 한학(漢學)과 묵화(墨畵)와 서예(書藝)에 독특한 재능을 겸비하신 분이셨다.
-北安高女 2학년을 마치고 하르빈(哈爾濱) 사이꼬(霽紅) 高等女學校로 전학하여 졸업하고, 1945년에 創立된 만주적십자사 하르빈 의학원(滿洲赤十字社 哈爾濱醫學院)에 입학함. 2차대전 戰時 중이어서 이미 醫學院만 몇군데 있었으므로 終戰후에는 滿洲國立女專으로 계획한다 했으며 8월 10일까지 存續했다.
-1945년, 8·15 해방으로 가족이 한국에 나오다. 1947년 9대독자 오빠가 죽고 이어 형부도 죽었다. 이해부터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까지 미군정청(美軍政廳) 경무부장(故 趙炳玉 박사) 官房에서 근무하다.
-1951년 10월, 6·25 전쟁 중에 피난지 부산에서 前室 소생 5남매를 두고 喪配한 김원규(金元圭)(3대·4대 자유당 국회의원)와 결혼.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다. 이후 부친이 1·4 後退 때, 강원도 묵호와 포항을 거쳐 부산으로 오다.
-1957년 부친이 별세하다(1898-1957).
-1968년 모친이 별세하다.(1898-1968)
-1970년 8월 아들 3형제를 데리고 뉴욕으로 移住.
-1988년 3월 남편이 별세하다.(1910-1988)
-2009년 L.A로 이사
-2017년 6월 8일 로스 엔젤레스에서 운명. 6월 16일 태어난 날, 가족묘가 뉴욕주 Kensico Cemetery에 안장.
文學活動
1959년'自由文學'誌에 '異國小女時節의 追憶'으로 文壇에 데뷔.
著書
제1집 = '浮雲의 변두리' (수필집, 1963년. 凡潮社刊)
제2집 = '歲月의 그림자' (수필집, 1974년. 成文閣刊)
제3집 = '이마음 푸른 波濤' (書簡수필집, 1975년, 一志社刊)
제4집 = '뉴욕하늘 서울하늘' (日記體수필집,1976년, 螢雪出版社刊)
제5집 = '春秋戰國時代' (古典수필집, 1983년,隆盛出版社刊)
제6집 ='中共에 다녀왔습니다' (中共紀行文, 1988년, 隆盛出版社刊)
* 1988년 제 21회 文化公報部 추천도서로 선정됨.
제7집 = '續 中共에 다녀왔습니다' (中共紀行文, 2001년, 隆盛出版社刊)
제8집 = '한국 고전문학에 핀 漢文수필'(2001년, 융성출판사刊)
-고대 수필문학의 기원- 중국의 산문. 일본의 산문,한국의 산문
고구려의 을지문덕편.
신라시대의 설총 편, 혜초 편, 최치원 편.
고려시대의 이인로 편, 이규보 편, 이제현 편
조선시대의 서거정 편, 성현 편, 남효온 편, 이_*****펀, 유희춘 편, 사명대사 . 유정 편, 김상헌 편, 박지원 편, 박제가 편, 한말사가(韓末四家)편 (강위, 이건창, 황현, 김택영)
제9집 = '시공의 서 (時空의 書)'
화랑정신의 재조명(花郞精神의 再照明). 조선시대의 궁정문학(宮廷文學). 조선시대의 규방문학(閨房文學). 조선시대의 기행문학. 민족과 6·25전쟁문학. 객지문학. 유골이민(遺骨移民).
<이계향전집>(全9卷 6冊)>을 간행함.2001년 隆盛出版社刊.
經歷 = 한국文人協會와 한국 女性文學人會 회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와 미국본부의 회원
미동부한국문인협회를 創立하고,初代·2代·3代 會長을 역임함(1989-1995)
北京大學(중국)·民族大學(北京所在)·大阪經濟法科大學(日本)·모스크바 國立大學 및 미시간 州立大學(미국) 등의 국제학술회의에 참석하여 論文을 발표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