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코스
창원시청정문(07:00)- 마산 구암 한전앞(07:20)- 함안(07:30)- 백양사(10:30) -점심식사(산채정식10000~특정식13000) - 필암서원- 홍길동생가-축령산(추암리-모암쉼터)
*(축령산 코스 참고) 괴정마을 → 삼거리주차장(춘원 임종국 선생기념비) → 헬기장 → 우물터 → 모암갈림길 → 통나무집 → 산림욕장 → 우물터 → 삼거리 주차장(기념비) → 괴정마을(총 5.5㎞, 2시간 소요)
기행은 그 날 일정에 따라 시간을 축소할 수도 있습니다
백양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8교구 본사이다. 632년(백제 무왕 33) 여환(如幻)이 창건하여 백암산백양사라고 했으며, 1034년(덕종 3) 중연(中延)이 중창하면서 정토사(淨土寺)라고 개명했다. 1350년(충정왕 2) 각진국사(覺眞國師)가 3창하고, 1574년(선조 7) 환양(喚羊)이 현재의 백양사라고 개칭했는데 이것은 환양의 〈법화경〉 독성소리에 백학봉에 있는 흰 양떼가 자주 몰려온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1786년(정조 10) 환성(喚星)이, 1864년(고종 1)에는 도암(道巖)이 중건했다. 근세 이후에는 송만암(宋曼庵)에 의해 교세와 사운이 융성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본산 중의 하나였으며 현재는 26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극락보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사천왕문(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44호)·명부전·칠성각·진영각(眞影閣)·보선각·설선당(說禪堂)·선실(禪室)·요사채·범종각 등이 있다. 이밖에 백양사 재흥에 힘쓴 태능(太能)의 소요대사부도(逍遙大師浮屠: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56호)와 고려 때 각진국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절 주위의 비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153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이 절에서는 전통적인 재식(齋式)이 집전되는데 관조부(觀照部)·전경부(轉經部)·정근부(精勤部)·송주부(誦呪部)·범음부(梵音部)가 각각 행해진다.
필암서원
사적 제242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기리기 위해 건립했다. 1590년(선조 23) 김인후의 문인 변성온(卞成溫) 등이 주도하여 기산리(岐山里)에 서원을 세웠는데, 이 서원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1624년(인조 4) 복원되었다. 1662년(현종 3) '필암'으로 사액되었으며 1672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했다. 1786년 양자징(梁子澂)을 추가 배향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이 서원에 소장된 문서들은 보물 587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는데 총15책 65장의 필사본들로 고문서류이다. 이 자료들은 필암서원의 임원, 원생, 조선 후기 서원의 재정과 노비 소유, 서원의 운영사항과 지방관청 및 유림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을 닦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선조 23년(1590)에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서 그의 고향인 기산리에 세워졌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년(1624)에 다시 지었다. 현종 3년(1662)에 임금께서 ‘필암서원’이라고 쓴 현판을 직접 내려보내 주셨으며, 167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공부하는 곳을 앞쪽에, 제사지내는 곳을 뒤쪽에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로서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으로는 문과 담으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사당을 두고 제사를 지냈다.
청절당의 처마밑에는 윤봉구가 쓴 ‘필암서원’현판이 걸려있고, 대청마루에는 동춘 송준길이 쓴 현판이 달려있다. 또한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사당의 동쪽에는 경장각이 있는데, 보물로 지정된 서책이나 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이들 자료는 주로 18세기∼20세기초부터 전래된 것으로서, 당시 지방교육과 제도 및 사회·경제상, 그리고 학자들의 생활상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홍길동생가
의적 홍길동의 생가는 전남 장성에 있다고 합니다.
위 치 :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마을
홈페이지 : 장성군청 http://www.jangseong.jeonnam.kr/
연 락 처 : 장성군청 문화관광과 061-390-7225
개 요 : 홍길동은 한국인을 대표하는 민중영웅입니다.
역사상의 실존인물이며 허구적 소설의 주인공인데, 역사에서는 반역자, 또는 강도로 기록되어 있으나, 소설에서는 봉건제도에 맞서 만민평등의 이념으로 활빈당을 이끌고, 이상국인 일본 오끼나와의 율도국을 건설한 인물입니다.
역사상 홍길동은 조선초 15세기 중엽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신분이 첩의 자식이라 관리등용을 제한하는 국법 때문에 출세의 길이 막혔습니다.
좌절과 울분속에서 출가하여 양반으로부터 차별받던 소외된 민중을 규합하여 활빈당을 결성한 후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실천적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봉건적 조선왕조의 핍박을 받던 중 관군에 체포되어 남해로 유배 되었으나 탈출하여 무리를 이끌고 오끼나와로 진출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에서처럼 민중을 대변하는 민권운동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홍길동의 역사적 실체가 왜곡되어 왔으나, 이 문제를 바로 잡으려는 홍길동연구팀(장성군, 연세대학교국학연구회, 전남매일, 유구대학, 오끼나와관광국, 석원도문화원)의 3년에 걸친 끈질긴 노력 끝에 그 베일에 쌓인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축령산
※ 자연생태를 보호하고 방문객이 맑은공기와 쾌적한 산림욕을 즐길 수 있도록 2009. 9. 17일부터
축령산내 도로와 임도의 차량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분이나 노약자는 모암마을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하고 산림욕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괴정마을 → 삼거리주차장(춘원 임종국 선생기념비) → 헬기장 → 우물터 → 모암갈림길 → 통나무집 → 산림욕장 → 우물터 → 삼거리 주차장(기념비) → 괴정마을(총 5.5㎞, 2시간 소요)
장성 축령산! 한 사람이 있었다. 살아 있었을 때 그는 숲이었다. 숲이 될 거라고 누군가에게 약속한 적은 없다. 혼자서 묵묵히 숲이 되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어느 날 쓸쓸하게 죽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자신과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가 심은 나무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리고 천천히 자라면서 숲으로 변해갔다.
춘원 임종국 선생이 죽는 순간까지 나무를 심고 보살폈다는 그 숲, 축령산에 간다.
장성 서삼면 모암리와 북일면 문암리 일대를 뒤덮고 있는 50여년생 편백나무와 삼나무들, 그 넓이가 무려 258ha이다. 빈틈없이 자란 그 나무들, `숲으로 된 성벽’이다. 벌거숭이 땅에 1956년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해 87년 다른 세상으로 가는 순간까지도 그 나무들만 생각했다는 애림가. 임종국 선생은 자신의 땅도 아닌 국유지에 나무를 심고, 그 나무들이 곧게 자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세상을 떠날 때 그 나무들은 선생의 것이 아니었다. 나무 심는 일에 모든 가산을 내어주고도 그 일을 멈출 수 없었던 선생은 다 자란 나무를 담보로 빚을 얻어 계속 나무를 심었다. 결국 그 빚을 감당하지 못해 선생에게는 자식 같았던 그 나무들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위치(네이게이션 안내) : 서삼면 모암리 山 98번지 일대, 서삼면 모암리 682번지 일대,
북일면 문암리 山 233번지 일대, 서삼면 대덕리 山 113번지 일대, 서삼면 추암리 山 24-7번지 일대
나무에 모든 것을 내준 선생의 인생도 어느 정도 보상이 이루어졌다. 산림청은 2002년 그 숲을 사들인 후 `고(故) 임종국 조림지’로 이름지었다. 그 숲을 가꾼 공로가 인정되어 2001년에는 선생의 이름 석 자가 `숲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 선생은 자신의 숲으로 되돌아 왔다. 평생을 가꾸었던 그 숲에 수목장(樹木葬) 되었다.
사람들은 축령산 편백나무와 삼나무 숲에 기대어 삶의 위안을 찾는다. 우리 모두는 그 숲을 통해 얻은 만큼의 행복을 임종국 선생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전북 고창과 경계를 이룬 축령산(621.6m) 일대에는 4~50년생 편백과 삼나무 등 늘푸른 상록수림대 1,148ha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독림가였던 춘원 임종국선생은 6·25동란으로 황폐화된 무입목지에 1956년부터 21여년간 조림하고 가꾸어 지금은 전국최대조림 성공지로 손꼽히고 있다. 편백나무는 스트레스를 확 풀리게 하는 피톤치트라는 특유한 향내음이 있어 삼림욕의 최적의 장소로 널리 홍보되어 특히 국·내외 단체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축령산 입구 괴정 마을에는 민박촌과 관광농원이 조성되었고, 산 중턱에 40여명의 동자승들이 수도하는 해인사의 진풍경, 산 아래
모암마을에는 통나무집 4동이 있어 체험하고 체류할 수 있는 관광을 즐길수 있고, 휴양림을 관통하는 임도를 지나가면 태백산맥과 내마음의 풍금을 촬영하던 금곡영화촌이 연결되어 있다.
첫댓글 참 좋네요^^*
사무국장님 믿고 있었습니다. 꼼꼼히 짚어 주시니 저는 요로코롬 멀찍이서 한 줄 힘 보탭니다^^* (햇살님 부탁 받고 웹 문자 2통 남편 걸로 도용했다가..아차~ㅋ)
축령산 너머가 저의 고향 마을로 주인공 전도연이 홍연으로 출연하여 영화촌 금곡마을을 오가며 내마음의 풍금을 촬영한 산리초등학교가 저의 조산마을에 있었습니다. 축령산 편백숲에는 현대인의 마음의 병을 고치려는 사람들이 많이 와서 심신 수련을 합니다. 백양사는 비자림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종정 서옹스님이 주석하던 절이며 백양산 너머 정읍 내장산 단풍과 더불어 장성댐 수변지역의 경관이 뛰어납니다. 필암서원은 하서 김인후 선생이 고봉 기대승과 기호학파의 거봉을 이루고 영남학파의 태두 이황 퇴계 선생과 '4단칠정'논변을 벌려 16세기 조선조 성리학을 꽃피운 학문적 문예부흥을 이뤘습니다. 좋은 기행이 되시길 바랍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함께 하면 우리들의 기행이 더 빛날텐데 아쉽습니다~~
여정이 행복합니다
가신다는 말씀인지, 애매하구로예. 문자도 꿀꺽...정확하게 해 주셔야 만남의 장소를 알려 드린답니다.
우홍순, 이남순 선생님 동행 가능하시고 김시탁 선생님 불참을 알려 오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