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한경희
lupinus2@empas.com
온통 희뿌옇다. 누군가 진한 쌀뜨물을 풀어놓은 것 같다. 자동차 전용도로는 거대한 그릇이 되어 이리저리 출렁이고 있다.
국도에서 전군도로로 들어서자마자 해풍에 눅진해진 밤안개가 차를 덮쳤다. 비상등, 미등, 상향등까지 켰지만, 이깟 것은 우습다는 듯 안개는 보닛 앞부분을 뭉텅 잘라 먹었다.
1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다. 2차선으로 옮기려는데 녹록지 않다. 걸음마를 떼는 아이로 돌아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희미한 앞차의 후미등을 따른다. 내 차도 누군가의 길잡이가 될 것이었다.
안개에 젖어 시간도 축 늘어졌다. 평소라면 목적지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어디쯤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잠시 물티슈를 찾느라 한눈을 판 사이 앞차가 사라졌다. 안개는 무엇이든 소리 없이 삼킬 수 있다. 오싹 소름이 인다. 뒤차는 잘 따라오고 있나. 아니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안갯속에 나 혼자 갇힌 것인지도. 과거의 서늘한 건널목이 불쑥 기억을 헤집고 나온다.
전날까지도 반갑게 인사했던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복사실엔 직원 아주머니 혼자 분주했다. 아저씨 안부를 묻자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밤늦게 귀가하다가 학교 앞 건널목에서 차에 치여 죽었다고…. 안개가 짙어 택시 기사가 보지 못했다고. 아주머니는 켜켜이 쌓인 논문 더미에서 내 것을 건네주며 말했다. "다행히 아저씨가 제본해 놓고 퇴근했던 모양이네."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건지. 하루 전까지 나랑 글자 폰트를 의논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식의 죽음에 전혀 익숙해 있지 않았던 청춘의 나는 급작스러운 비보보다도 아주머니의 무심한 어조가 적이 당황스러웠다.
아저씨의 손이 탄 논문집 다발을 들고 사고가 났던 건널목을 건넜다. 내가 걷던 수많은 길이 실은 누군가 사라져갔던 행로였다는 사실이 섬뜩하면서도 숙연하게 다가왔다. 한동안 건널목을 지날 때마다 짙은 안개가 아저씨를 집어삼키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절로 운전대에 힘이 들어간다. 안개는 한 치의 양보가 없다. 손끝이 저리다. 식은땀이 흐르고 목이 탄다. 딱 물 한 모금만 마시면 원이 없겠다. 여기저기 더듬어 봐도 생수병이 잡히지 않는다. 느닷없이 옆 차선으로 푸른색 차가 휙 지나간다. 꽁무니를 쫓아가려다 바로 단념한다. 소형차의 촉수 낮은 헤드라이트와 내 서툰 운전으로는 역부족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렌이 울린다. 경찰차 경고등이 무겁게 내려앉은 안개 입자를 비집고 힘겹게 돌아간다. 곧 일그러진 트럭이 갓길에서 나타난다. 좀 전에 내달렸던 차다. 운전석에서 친척 할아버지를 본 건 나의 착각일 것이다.
할아버지는 관공서 납품 업체를 운영했다. 가내수공업에서 차차 공장을 늘려갔다.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댔다. 어음거래가 늘고 현금이 바닥을 보였지만 경기를 낙관했다. 주변에서 말려도 개의치 않았다. 아무도 IMF를 예상치 못했던 호시절이었다.
지금껏 할아버지의 소식을 아는 이가 없다. 부도 후 외국으로 갔다고도, 노숙자가 되었다고도 하고, 스스로 생을 놓았다는 소문도 들렸다. 할아버지가 왜 가속페달을 제어하지 못했는지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오늘 아침까지도 기상청은 이 무지막지한 안개를 내다보지 못했었다.
어깨가 결리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목마름이 별것 아닌 것으로 물러난다. 잠시 쉬고픈데 한 번 들어선 안개 도로에서는 멈출 수가 없다. 청승맞게도, 외롭다…. 병원 복도에 앉아 검사 결과를 기다리던 한때에도 그랬다. 병든 내 처지보다 외로움과 막막함이 매번 더 힘들었다.
‘아직 약을 더 먹어야 한다’는, 무표정한 의사의 말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태연함과 내 절망의 간극에 외로움이 깊이 파고들었다. 의사의 등 뒤 넓은 창에선 봄 햇살이 눈부시게 들이치고 있었다. 둥둥 떠다니는 먼지가 부러웠다. 내 스무 살 인생은, 정작 의사는 보지 못하는 그 찬란한 빛을 환자인 내가 비애의 통각을 온몸으로 겪으며 바라보는 것이었다.
병원 앞 4차선 도로가 회색 안개에 휩싸인 날이었다. 버리고 싶은데 무거워도 아니, 무거워서 버릴 수가 없는 한 달 치 약봉지를 들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죽비로 내리치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누굴 죽일 셈이야. 똑바로 안 걸어?" 급제동한 운전자가 차창 밖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따금 안갯속에 서 있으면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개가 옅어지고 어렴풋이 도심의 윤곽이 잡힌다. 안개 속에 갇혔던 스무 살의 나는 살고 싶지 않았으나, 생의 반환점을 지난 현재의 나는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쉰다.
방심한 틈을 타 한 무더기의 안개가 다시 몰려온다. 종착지에 도착하기까지 한눈을 팔아서도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된다는 경고다. 언젠가는 안개 낀 여정도 끝이 날 것이다. 생각보다 짧게, 혹은 길게. 나만 그 길을 가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지만 가끔은 몹시 외로울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고 일렁이는 운전대를 꽉 잡는다. 안개 낀 생을 응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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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전북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6년 <에세이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시간이 건네는 말》
☞ 2023. 09.15(금) 좋은 수필로 소개한 글입니다.
첫댓글 유병덕 수필가님.
감사합니다. 좋은 수필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수필 작품 <안개>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문학적인 감동이 컸습니다.
감사합니다. 수필을 공부하시는 분께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