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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0:5-9)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40: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 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 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 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본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도 같았습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에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이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돌에 맞아죽으면서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용서를 빌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는 이와 같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게 됩니다. 미움조차도 사라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스데반은 하늘의 영광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무조건 세상적으로 풍요하게 산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스데반처럼 핍박받고 죽기도 합니다. 역설적으로 오히려 이러한 신앙이 더 큰 상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못 본 사람들의 특징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 당시의 사람들도 돌로 쳐서 처형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오히려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60절은 스데반의 그러한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이 이렇게 죽어가는 현장에 사울이란 청년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이전의 모습이었습니다. 회심하기 이전의 사울은 스데반이 죽은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사도행전 7장 58절과 8장 1절에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난 이후에 사도 바울이 되어 성전에서 붙잡혀 바깥으로 끌려 나왔을 때 변론한 말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2장 20절입니다.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못 본 사울은 땅의 일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것을 마땅히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진정으로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이단인 줄 알았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못 보면 그렇게 됩니다.
사울은 그 당시 매우 경건한 사람이요 그런 방면에 상당한 식견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무지했습니다. 캄캄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참 빛이 비쳐졌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자신의 무지함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이전의 사울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자신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고백하는 말 가운데 나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4-6절에 나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러한 모습의 사울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이후로는 변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된 이후의 모습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의 고백을 계속해서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빌립보서 3장 7-9절에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180도 바뀌어졌습니다. 사도행전 22장 3-5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직전의 사울의 행적이 나옵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배척하던 자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도 바울로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곧이어 나오는 사도행전 22장 6-15절에 상세하게 나옵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하니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내가 이르되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들어가라 네가 해야 할 모든 것을 거기서 누가 이르리라 하시거늘, 나는 그 빛의 광채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의 손에 끌려 다메섹에 들어갔노라.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칭찬을 듣는 아나니아라 하는 이가, 내게 와 곁에 서서 말하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즉시 그를 쳐다보았노라. 그가 또 이르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네가 그를 위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네가 보고 들은 것에 증인이 되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과 못 본 것의 차이는 이처럼 큽니다. 못 보면 핍박하는 자가 되고 보게 되면 충성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전에는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서고 하나님의 영광을 본 후로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데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고귀한 변화입니까!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러한 하나님의 영광을 꼭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외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무엇이라 외치리이까”하자 8절에 보면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고 하였습니다. 외칠 것은 모든 것이 시들고 사라져 버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영원히 서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9절에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어떤 결과가 옵니까? 5절이 그 결과를 말해줍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다함께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을 보면 포로생활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70년이 차면 풀려난다는 것입니다. 전혀 풀려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풀려나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다함께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대로 이루어지는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변하지 않는 말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그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0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본문 5절에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고 하신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70년이 차자 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포로에서 풀려나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본문 5절의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는 말씀대로 그 지긋한 포로생활에서 실제로 풀려나게 되는 것을 서로가 다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살 길이 생깁니다.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던 것에서 눈길을 돌려 전심으로 하나님을 향하면 하나님께서도 돌이켜 살려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사는 게 좀 힘들다고 가는 길이 힘들다고 마음이 상해서 원망 불평했습니다. 그 원망불평 때문에 그들은 불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그러나 장대 위에 매단 놋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면서도 바라보자 멀쩡하게 다시 살아났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다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민수기 21장 4-9절을 보면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영광을 보게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려 하였다가 길로 말미암아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 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말하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함으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못된 행위를 보고 괘씸하게 여기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고 처벌 받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돌이켜 기도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앞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70년이 차면 고국으로 돌아오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하신 다음에 곧바로 다음의 약속의 말씀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29장 11-14절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세 번씩이나 강조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를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 살아납니다. 하나님이 바라보라고 하신 것을 바라보면 다시 살아납니다. 죽은 몸도 살아나고, 죽은 가정도 살아나고, 죽은 나라도 살아납니다. 여호와의 영광을 다함께 보게 됩니다.
장대 위의 놋뱀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바라보는 자는 살아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자는 모두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살 길이 생기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여호와의 영광을 다함께 보게 됩니다. 길이신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시면 꽉꽉 막힌 길도 뚫리게 됩니다. 답답한 길도 시원하게 풀립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3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피곤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보약도 먹고 휴식도 취하고 기분도 전환해야 하지만 예수님을 바라볼 때 힘이 납니다. 독수리가 날개 쳐 힘차게 날아오르듯이 힘이 샘솟습니다. 이사야 40장 28-31절이 그것을 약속해줍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본문 40장 5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여호와의 영광을 다함께 보게 됩니다. 이 말씀대로 실제로 다함께 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영광을 크게 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6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민수기 11장 2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이러한 영광이 신약 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신약 시대가 열리면서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말한 것이 있습니다. 본문 5절을 인용해서 전파하였습니다. 누가복음 3장 6절입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후 예수님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을 보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44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필요한 구절만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본문 5절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약속하신 대로 여호와의 영광을 다함께 보게 되었습니다. 다함께 실제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일시적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그때는 살아났습니다. 지금 간증하면서 집회 다니고 있습니까? “저는 나사로입니다. 죽어서 무덤에서 장사한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 나사로를 오늘날 더 이상 볼 수 없습니다. 왜 입니까? 이미 벌써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목숨이 필요한 것은 맞지만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건강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 땅의 목숨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병 고침을 받고 다시 살아나도 결국 모두 죽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광을 보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영원한 영광을 보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21장 27절은 그 영원한 영광을 드러내줍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영광이요 큰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보고난 다음에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큰 축제일이 됩니다. 다함께 일시적인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보게 됩니다. 그날은 영원한 영광을 보기 시작하는 날이 됩니다.
본문 5절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우리는 그날에 여호와의 영광을 다함께 보게 됩니다. 다함께 실제로 보게 됩니다. 포로에서 돌아오게 됩니다. 최후의 날에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게 됩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과 저주의 속박과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날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이 하나님의 영광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영광의 나라 속으로 들어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살다가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을 다함께 보게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