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파리>
우린 왜 영화를 보는 걸까요? 왜 영화를 만드는걸까요? 좀더 깊이 들어가 물어 본다면, “왜 예술은 존재하는 걸까요?” 그러니까 “글이든, 음악이든, 사진이든 뭐든 왜 우린 예술작품을 만들고 즐기는 걸까요?” 화면 속 파리 밤거리로 들어가 길과 함께 산책 하노라면 그 답이 서서히 떠오릅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예술 대가들을 동시다발적으로 자정 무렵 만나 뒷골목, 클럽과 비스트로, 센느강변등을 누비는 시청각 발라드를 하노라면 데카당할수록 멋져 보이는 예술인생론에 빠져들게 됩니다.
영화를 본다는 것은 들뢰즈의 말처럼 내면세계의 이동인데, 우디 알렌이 펼쳐내는 파리 미드나잇 발라드는 중층적 세계이동입니다. 주인공 길의 관점에선 미국에서 관광차 파리로 이동한 후 벌어진 환상여행이니 일단 시간이동이죠. 주로 1920년대 방문인데요, 잠시 벨르 에포크시대까지 넘어갔다 현재로 돌아온 길은 드디어 결단을 내리죠.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생활을 떠나 파리에서 소설을 쓰며 살겠노라고. 파리여행 동반자였던 약혼녀 이네즈와의 결별이자, 비내리는 밤거리 발라드를 즐기는 파리지엔느와 새로운 삶으로의 이동이지요. 인생살이와 예술을 하나로 돌리는 마법이 작동한 결과겠죠.
길의 판타지를 구경하던 관객은 어느 순간 마법적인 파리로의 공간 이동과 1920년대 시간이동 발라드에 빠져드는 감성 세계로의 이중적 이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세계의 이동은 과거로의 이동이지요. 이걸 생생하게 재현하는 영화 기법은 플래쉬백으로 불리우는 촬영-편집기법입니다. 그런 플래쉬백은 흔히 인물의 과거를 보여주는 데 사용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주인공 길은 현재적 실존으로 재현된 채 주위풍경과 인물들 모두 과거 자체가 현재인 색다른 비동기화 플래쉬백이 관객에게도 주술을 겁니다.
이런 분리 설정은 환상적 예술산책 장면화의 매혹을 보여줍니다. 우디 알렌이 아이디어 차원에서 천재적인 영화작가인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가 왜 영화예술을 하는지, 왜 오스카 수상식엔 안가고 칸느에는 가는지, 거쉰과 미넬리가 전설적 뮤지컬로 구축한 ‘파리의 미국인’을 노스탤지어 코드로 불러내는지 슬슬 풀려나갑니다.
영화의 주인공은 인물들을 관장하는 파리라는 공간 자체, 시간을 뛰어넘는 무대이지요. 파리는 자유와 예술이 살아있는 공간, 그러니까 프랑스의 수도 파리가 아니라 억압과 규율로부터 벗어난 세계 예술가의 도피처이자 안식처, 놀이터 같은 또 하나의 예술세계입니다. 도입부에 소개된 관광엽서 풍경같은 낭만과 멋이 가득한 이미지, 노천 카페, 공원, 센느강변, 노트르담 성당, 개선문과 오페라좌, 에펠탑과 굴뚝달린 지붕들, 그리고 빨간 풍차와 좁고 구불구불한 뒷골목들... 그러나 그건 그저 파리의 피부에 불과합니다. 그런 피부를 한 꺼풀 젖히고 들어가는 핵심 서사는 1920년대로 넘어가 자정부터 열리는 빛의 도시 파리 북쪽 몽마르트르지역과 센느강변에서 벌어지죠. 마법적 발라드를 한 후 결국 파리에 남기로 한 길이 홀로 노천카페에서, 세익스피어 앤 컴퍼니 책방에서, 뒷골목에서 숨쉬는 길의 일상을 통해 파리의 속내가 피어납니다. 즉 공간 이미지의 수미일관 법칙이 인간 주인공 길 (장기알)을 공간 주인공 파리 (장기판) 속에 안착시키는 게임의 묘미를 부린 셈이겠지요.
이 정도 틀을 잡고 마법 발라드 갈피 속으로 마음을 울리는 뉴올리안즈 재즈와 샹송들, 특히 홀로 걷고픈 욕망을 자극하는 클라리넷 선율 (<Si tu vois ma mere 만일 내 어머니를 본다면>) 을 타고 이동해보는 겁니다. 그런 발라드는 ‘예술 노마드 되기’, 라고 말해도 좋겠지요.
드라마 첫 씨퀀스부터 차이로 인한 갈등이 예고됩니다. 약혼녀 이네즈와 부모를 따라온 길은 예술공간 파리를 한풀듯이 즐기기로 작정한 예술지망생으로 보입니다. 모네의 그림과 현실이 교차하는 장면, 거기서부터 예술과 현실의 관계를 논하는 관점에서 격차가 벌어집니다. 부유한 사업가 이네즈 부모는 물론 이네즈에게도 부자로 살기가 미래 결혼생활의 토대 개념으로 작동하죠. 그런 이네즈와 함께 하려면 길은 잘나가는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비싼 동네 말리부해변에 둥지 틀고 아내에게 다이아몬든 큰 사이즈 반지 사주고 비싼 고가구로 치장하고 사는 상업작가로 성공해야 합니다. 그런데 헤밍웨이나 T. S. 엘리어트, 핏츠제랄드등 한때 파리에서 작업한 문인들을 흠모하는 길은 노스탤지어 소설을 쓰며 ‘올디스 밧 구디스’ (oldies but goodies) 취향의 삶을 꿈꿉니다. 그건 최근 우리 사회에 돌풍을 불러일으킨 ‘세시봉’ 신드롬과 유사한 것이니, 특이한 현상으로 치부할 것도 못됩니다.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는 사회에서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이니까요.
이제 길의 노스탤지어 욕망은 또 다른 판타지 세계로의 이동을 불러들입니다. 이네즈는 비오는 파리를 걷기 싫어 차타고 가고, 길은 홀로 파리를 걷지요. 비오는 파리, 밤이면 조명미학으로 더 아름다운 파리 뒷골목은 매혹적이니까요 (그래서 새로운 현실로 이동하는 마지막 장면도 바로 비오는 파리의 밤이 주인공이지요). 마차가 디니던 조각난 돌들이 여전히 깔린 좁은 뒷골목, 자정 종소리가 울리고, 운전석이 열린 마차형 푸조가 나타나 길을 픽업합니다.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과거로의 이동수단이지요. 그를 강요하듯 초청한 여성은 젤다 핏츠제랄드, 옆에는 <위대한 겟츠비>로 유명한 (훗날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로 몰락한) 스캇이 멋지게 차려입고 등장합니다. 이들과 찻 속에서 샴페인을 즐기며 찾아간 곳은 장 콕토 주최 파티입니다. 세상에! 핏츠제랄드 등장에 이어 콜 포터라니! 그가 피아노치며 노래하는 <Let's do it>, 그러니까 스페인부터 아르헨티나, 태국등 세계를 돌며 인간 동물 가릴 것 없이 모두 사랑을 한다, 라며 흥을 돋우는 선율을 타고 카메라가 돌면 아는만큼 전설적인 예술가들을 만나게 되지요. 이런 파티도 지겨워 빠져나온 젤다를 따라나선 길은 비스트로에서 헤밍웨이를 만납니다. 이 기막힌 사실에 너무 놀라 숨이 멎을 정도로 눈이 휘둥그레진 길의 얼굴 클로즈업은 이런 매혹적 세계 이동에 놀란 관객의 심정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비스트로는 이후 여러차례 등장하는데, 헤밍웨이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스페인에서 온 예술가들,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계를 그린 초현실주의 대가 달리, 영화 교과서에 나오는 초현실과 욕망의 대가 루이스 브뉴엘, 그리고 현대 사진을 발명한 맨 레이등이 이어집니다. 특히 헤밍웨이는 가장 깊이 소개되지요. 그는 문학은 무엇인가?, 예술가로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의미심장한 논쟁도 하는 씨니컬하고 용감한 패기어린 멋진 남성성을 보여줍니다. 그에게 400장짜리 소설평을 부탁했다 거절당한 길은 그의 소개로 거트루드 스테인의 살롱에 갑니다. 이 공간도 재미있어요. 형성중인 피카소와 길이 곧 사랑에 빠지게 되는 아드리아나, 예술가들의 뮤즈를 만나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길은 피카소나 다른 남자 예술가들처럼 여러 여자들을 사랑합니다. 이 대목에서 핵심 인물은 아드리아나로 보입니다. 그녀는 매력적인 외모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뮤즈니까요. 이미지 없이 이름으로만 등장하는 이탈리아 미남 모딜리아니의 연인이기도 하지요. 길이 그녀와 함께 하는 센느강변이나 밤거리 산책은 진부하고 각박한 현재와 로맨틱한 과거를 대조시키는 논쟁판이 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노스탤지어 코드의 힘이 느껴지죠. “과거는 죽는게 아니며, 실제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포크너식 명언은 이 영화산책의 힘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길에게 1920년대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 자신의 소설이 피어날 현재겠지요, 그렇지만 1920년대 인물 아드리아나에겐 마차로 이동한 벨르 에포크시대가 돌아가고픈 과거지요. 외로움을 절묘한 데생으로 풀어나간 로트렉, 드가, 고갱등이 등장해 패션을 꿈꾸는 아드리아나 일자리까지 주선해주는 정겹고 낭만적인 물랭 루주. 그곳에서 치마 속 구경시키는 캉캉춤을 보는 도발적인 맛이 기막히겠죠. 길을 탐색하는 탐정은 베르사이유 왕정시대로까지 넘어가는 코믹 판타지가 살짝 들어왔다 빠져나가고 결국 길은 1920년대 코드를 갖고 현재로 돌아와 비내리는 파리 밤 발라드로 돌아옵니다. 여기 곁들여지는 (다시 나오는) 뉴올리안즈풍 재즈 클라리넷 선율 <Si tu vois ma mere 만일 내 어머니를 본다면>은 이제 예술가 길을 가는 길과 우리의 마음을 동시에 통과합니다.
화면 속 발라드로부터 빠져나오면 이런 몽상과 상념과 성찰이 벌어질만해요. “난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내 자신의 본질, 꿈을 추구하는 그런 삶을 염두에 두고 있는걸까? ”, “어디건 홀로 걷고 싶다!” 그야 제각각이겠지만, 그건 영화의 힘, 예술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팁: 영화의 핵심인 1920년대 파리 밖은 어지럽고 부당한 세계였지요.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문제와 1,2차 대전 사이라는 세계의 불안이 온갖 곳에 난무합니다. 한반도는 거기 있지요. 그걸 생각하면 이 영화의 매혹적인 그 시대풍경은 예외적인 예술세상판이지만, 바깥세계에 앙가주망한 에술가들도 파리에서 발라드를 했다는 약간의 위로도 느낍니다. 예술은 부당한 현실세계에 대한 저항행위이기도 하니까요.
유지나
13/01/27
첫댓글 <오늘의 영화>에 막 보낸 글입니다.
저 또한 잠시 다른 세계로 이동했다 옵니다. 발라드죠!
와! 대단한 문화 여행입니다. 율리우스도 잠시 몽롱한 시간과 공간 이동을 같이 다녀왔네요.
이렇게 생각과 느낌을 잘 정리해 주시니
다시 꼭 한번 봐야겠네요.
늘 그러시지만 또 한번 감상의 방법을 풍요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중층적 세계이동' '시간과 감성의 이중 이동 발라드' '전설적 예술가들의 만남'...
젊은 날 좋아했던 헤밍웨이까지 등장하니...
저도 이영화 첫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답니다. 파리에 대한 환상을 이렇게 멋지게 표현하다니요! 그리고 처음 홀로 떠난 그 장소들이 나올때마다 무어라 말할수 없는 감정들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시간과 감성의 이중 이동이라! 너무 적절한 표현입니다. '파리에서 단 하루라도 살아보았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누가 그랬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어쩜 공기마저도 그렇게 자유롭고 낭만적인지요. 언제 가도 파리는 늘 그렇게 날 반겨줄거란 믿음이 더 그런 기분을 들게합니다.
글 너무 감사드립니다. 다시 영화를 보고싶어졌습니다. 내일 지각하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