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랫장터’로 불리는 김천시 감호동과 용두동 일대는 조선 3대 장시 중 한 곳이던 김천장이 열린 곳이다. 김천시 용암네거리에 우뚝 선 아치가 옛 김천장이 누렸던 영화를 말해주는 듯하다. |
백두대간에서 발원한 감천이 시내로 도착하는 길목에는 김천의 풍요로운 역사가 서려있다. 김천시내의 감천변에는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 최대의 장시(場市)’ 중 한 곳으로 명성을 떨친 김천장이 들어섰다. 김천장은 당시 전국의 장시 중 가장 큰 축에 속했고, 대구의 서문시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조선 3대 장시’로 불렸다. 지금도 김천에 사는 노인 상당수는 옛 김천장의 번성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들의 기억 속에는 숱한 사람과 각종 물산으로 넘쳐났던 김천의 호시절이 있다. ‘감천150리를 가다’ 28편은 한반도 내륙 최대 장시였던 김천장과, 제2의 중흥기를 꿈꾸는 김천시에 관한 이야기다.
조선 3대 장시가 들어선 곳
김천장을 비롯한 장시의 시작은 조선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농산물을 다른 물건과 교환하는 형태의 향시(鄕市)는 조선시대 이전부터 발달했지만 상업적 이익 창출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 장시는 임진왜란(1592)을 계기로 전국각지에 퍼진다. 숙종(肅宗, 1661~1720)대에 이르러서는 정치·군사적 요충지를 중심으로 장시가 열렸으며, 점차 산간 내륙지역까지 확대된다.
장시의 확대는 자본주의의 태동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가 서구열강이나 일본처럼 잠재적 발전 동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자본주의 맹아론’이 제기될 정도로 조선후기의 상업활동은 활발했다. 실제로 조선후기에는 화폐의 유통이 활발했으며, 농업생산력이 높아지며 농산물의 상품화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김천장은 자본주의 맹아론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큼 대단한 장시였다. 김천장은 평양·개성·강경·대구의 시장과 더불어 전국적인 명성을 떨쳤다.
향토사학계에 따르면 김천장이 최고의 호황기를 누렸던 시기는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시장경제’라는 책에는 김천장을 비롯한 전국장시의 규모가 상세히 기록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1908년 대구 서문시장의 매출이 108만원으로 전국 1위였는데, 김천장의 매출이 72만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 나머지 장시의 매출은 김천장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1928년, 김천장의 매출은 130만원으로 불어났다. 이는 각각 259만5천원과 150만원을 기록한 대구 서문시장과 개성장 다음의 매출규모였다.
김천장과 감천은 불가분의 관계다. 김천장은 감천변을 시장의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922년 감천제방이 축조되기 전까지 감천변의 모래사장 위에 김천장이 섰다. 감천철교 부근의 모래언덕이 김천장의 중심이었고, 지금 아랫장터로 불리는 감호·용두동 역시 김천장에 속했다. 또한 김천장의 서쪽은 원래 늪지였다. 1905년 일본인들이 정착하면서 늪지를 매립, 시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김천장의 최고 거래품목은 단연 축산물이었다. 1931년, 김천장의 무역거래액 124만여원 중 소의 거래액이 36만여원으로 최고를 차지했다. 대규모 우시장이 형성돼 있어서 소가죽의 거래도 활발했다. 자연스럽게 김천은 소가죽을 수출하는 무역 중심지로 떠올랐다.
특히 소가죽 상인 김기진에 대한 일화는 김천장이 누렸던 화려한 시절을 짐작하게 한다. 김기진은 일제강점기 소가죽 유통으로 부를 쌓은 인물로 조선 최고의 장사꾼 중 한 명이었다. 당시의 감천변은 가공 중이거나 가공을 앞둔 소가죽으로 뒤덮여 있었을 정도로 소가죽 거래가 활발했다. 상인들은 가공된 소가죽의 등급을 판별해 값을 매기곤 했다.
하지만 색깔과 촉감만으로 품질을 가려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소가죽 유통으로 잔뼈가 굵은 상인이라 할지라도 엄청난 물량 앞에선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김기진은 달랐다. 그는 다른 상인들과 달리 신기에 가까운 감각을 발휘했다. 보통 사람이 검사하는 데 하루 종일 걸릴 분량의 소가죽 일지라도, 김기진은 단 한 시간 만에 검사를 끝낼 수 있었다. 손만 슬쩍 대고도 가죽의 질을 단번에 식별했던 김기진은 김천장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거상(巨商)이었다.
근대산업의 태동기를 함께하다
예로부터 김천은 경상도에서 충청·전라도로 향하는 물산의 중간기착지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온갖 농산물의 집산지로 명성이 드높았으며 쌀의 유통이 활발했다. 덕분에 김천에서는 쌀을 가공하는 도정(搗精)업을 비롯해 농기구제조업, 유기(鍮器)제조업, 제과업 등의 공업이 발달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많은 일본인들이 도정업에 종사했다. 이들은 중개인을 앞세워 벼를 사들인 뒤 도정작업을 거쳐 일본으로 보냈다. 도정업은 조선의 쌀을 수탈하는 도구로 이용됐지만 광복 이후에도 도정업은 번성했다. 368곳의 도정공장이 김천 일대에 흩어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천은 경기도 안성과 더불어 유기로 이름이 높은 고장이었다. 지금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지만, 과거 김천시 황금동의 국도변 일대에는 수십곳의 유기공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하지만 1970년대 스테인리스 그릇이 등장하자 김천의 유기제조업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다행이 징과 꽹과리는 옛 유기를 만들던 공법으로 제작되고 있으며, 김천유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김천은 제과업으로도 유명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과자를 만들어 판 것이 김천 제과업의 시작이었다. 이후 과자를 맛본 김천시민들은 제과업에 뛰어들었고, 엿을 원료로 양과자를 만들어 팔았다. 태평양전쟁 당시 과자의 원료인 밀가루와 설탕이 부족해지자 잡곡으로 양과자를 만들어 전국에 공급하는 등 사업적 변통(變通)에 능했다. 광복 이후까지 김천의 제과업체는 40곳이 넘을 정도로 전성기였지만, 대기업이 제과업에 뛰어들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김천은 농산물의 집산지답게 농기구제조업이 발달했다. 6·25전쟁이 끝난 뒤 김천의 농기구 공장에서는, 당시로서는 매우 유용한 농기구가 생산됐다. 농민들 사이에서 ‘호롱구’로 불리던 ‘족답식 탈곡기’가 그것이었다. 발로 탈곡기 아래의 페달을 누르면 원통 모양의 탈곡기가 회전하면서 벼의 낱알을 쓸어내리는 방식이었다. 김천에서만 족답식 탈곡기를 만드는 공장이 20곳에 이르렀다. 하지만 1965년 동력식 탈곡기가 출시되고, 현대식 농기구가 속속 등장하면서 족답식 탈곡기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
2013년 12월 부지조성사업을 완료하는 김천혁신도시가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김천혁신도시에는 총 12개 공공기관·기업이 입주하며, 매년 200억원 이상의 부가가치 창출과 함께 적지 않은 지방세수 증대가 기대된다. |
번영의 물길, 이번엔 ‘혁신도시’를 품다
김천시내를 지난 감천 물길은 김천 발전의 새로운 축인 김천혁신도시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지방화’가 국가발전의 새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은 21세기, 김천은 국토 균형발전의 선두에 서 있고 ‘김천의 젖줄’ 감천 또한 미래를 향한 변화의 흐름을 함께하고 있다.
김천시 농소면과 남면 일원의 381만5천㎡(115만평) 부지에 건설 중인 김천혁신도시는 전국 혁신도시 중 가장 먼저 그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토지주택공사와 경북개발공사가 시공하는 부지조성 사업은 2013년 현재 99%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이대로라면 12월말 김천혁신도시의 부지조성이 완료된다.
혁신도시 건설은 수도권 과밀해소와 지방자립을 위해 주요 공공기관을 분산배치하는 국책사업으로, 김천혁신도시에만 8천676억원의 사업비가 투입됐다. 한국도로공사,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한국전력기술<주> 등 총 12개 공공기관·기업이 김천혁신도시에 입주할 예정이다. 지난 4월 우정사업조달사무소가 가장 먼저 김천혁신도시에 입주, 혁신도시 완공을 향한 첫 단추를 뀄다.
혁신도시의 경제적 파급효과는 김천시민을 웃음짓게 하고 있다.
김천의 경우 인구감소와 경기침체라는 이중고를 겪어왔기에 혁신도시에 거는 김천시민의 기대는 어느 때보다 크다. 5천65명의 공공기관·공기업의 임직원이 김천혁신도시에서 일할 예정이다. 총 1만500개의 일자리 창출과 2만6천127명의 인구증가가 예상된다. 김천시는 김천혁신도시가 매년 200억원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역발전을 이끌 새로운 동력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