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2 선조 35년,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자 정3품 上>
敎旨
魏大器爲折
忠將軍行龍
驤衛副護軍
者
oo三十年八月十四日
●내용 및 특징
1602년(선조 35년) 8월 14일 선조(宣祖)가 魏大器에게 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문서이다.
절충장군은 정3품 西班 무관에게 주던 上階 품계이고, 용양위부호군은 조선시대 五衛에 속한 용양위의 종4품 무관직이다.
품계가 관직보다 높으므로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관직 앞에 '行'자를 붙였다.
☞ 부호군(副護軍) :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둔 종사품(從四品) 서반 무관직(武官職)이다.
관계상 (官階上)으로는 정략장군 (定略將軍)·선략장군(宣略將軍) 이라 별칭되었다. 태종 초에는 섭호군(攝護軍)이라 하였다가 5위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1467년(세조 13)의 관제개혁 때 종4품 부호군으로 개칭되어 법제화 되었다. 『경국대전』 당시에는 정원이 54인이었으나 후기에 5위의 기능이 유명무실화되면서 문·무관의 보직이 없는 자, 혹은 친공신(親功臣)·공신적장(功臣嫡長) ·군영장관(軍營將官), 여러 잡직 등이 부호군직을 띠게 되어 그 수가 69인으로 늘어났다. 『대전회통』에서 부호군으로 배정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친공신 5인, 승습군(承襲君) 1인, 공신적장 2인, 금군별장(禁軍別將) 6인, 호위별장(扈衛別將) 3인, 선전관(宣傳官) 1인, 훈련도감장관(訓鍊都監將官) 8인, 군병(軍兵) 2인,
금위영장관(禁衛營將官) 6인, 어영청장관(御營廳將官) 7인, 총융청장관(摠戎廳將官) 3인, 내의원의원(內醫院醫員) 4인, 사자관(寫字官) 1인, 포도군관(捕盜軍官) 5인, 금군(禁軍) 13인, 통제중군(統制中軍) 1인 이었다.
충청수사공의 현존 교지는 4매로 마지막 교지입니다. 장흥위씨 대동보 지장록 내 충의록은 존재공(휘 백규, 1727~1798)께서 쓰셨습니다. 49분의 선조 충의록 내용 중 p 111에 수사공의 이력, 공적 등이 수록 되어 있으나, 현존 교지를 기준하면 많은 차이가 있어 의문점이 제기 됩니다.
1)무과 급제 시기와 임진왜란 이전 관직과 행장
2)1597~8년 정유재란 때 관직과 장흥 중령산 전투 참전에 관해 3)충청수군절도사(정3품 상,
군영 : 현 충남 보령시 오천면) 제수에 대한 정확한 년도 및 타계 년도 등
선대 각종 기록에서는 정유재란 직후 충청수군절도사에 제수 되었으나 병환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타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3)교지에 의하면 1601년 임에도 타계하지 않고 정4품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그 이전에 정3품인 수군절도사를 제수 받았음은 타당치 않으며, (4)교지에 의하면 1602년에도 관직을 알 수 있어 1598년경 병환으로 타계함은 맞지 않는다고 사료됩니다.
교지가 4개뿐이라 안타갑습니다. 좀더 있을텐데~~,
후손이 보관하고 있으면 이번 기회에 연구자료로 활용하면 좋겠습니다. 의문점은 시간을 갖고 차근차근 풀어가길 요청합니다
栢江 위성록 (34세, 장흥 방촌) 님
자세한 설명에 머리에 쏙쏙 들어 옵니다
휼륭하신 문중 조상님의 옛발자취와 조선시대의 역사공부를 하게 되는군요.잘보고 갑니다.
栢江 위성록 (34세, 장흥 방촌) 많은 분들이 늘 관심을 두고 많은 조사와 연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할 일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