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자연이다. 인간이 꿈꾸어 온 이상향은 모두 자연과 결부된다. 자연을 향한 그토록 오랜 희구는 취향과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내면의 불가피한 본능으로 살아 숨쉰다. 자연과 벗하며 살고 싶다는 꿈은 곧 자연이 베푸는 생기와 심미적 체험을 바탕으로 나와 세계[자연] 사이에 참다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삶을 세우고 싶다는 꿈이다. 이 꿈이 자연스러운 것은 자연은 그 자체로 영원한 진리인 까닭이다. 인류의 조상은 “금지된 열매”를 따먹고 저 태초의 야생 자연에서 영원히 퇴출되었다. 자연에서 퇴출된 영장류는 살기 위해 도시를 건설하고 비로소 인간으로 진화한다. 자연을 신이 설계하고 창조한 삶의 토대라면 도시는 인간이 설계하고 건설한 인공낙원이다. 그러나 만화경 같은 인공낙원에서 인간은 재미와 쾌락을 찾았지만 근본적으로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결핍감 때문이다. 모든 불행의 시초가 되어버린 그 결핍감은 바로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파괴하고 은폐해버린 야생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숲이 우거지고 그 안에 물이 흐르고 온갖 새들이 제각각의 목소리로 우짖는 자연 속에서 우리가 내면으로 느끼는 평화와 안정은 곧 나와 세계가 따로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공감각적 체험에서 나온다. 그 안에서 우리의 자아는 자연과 더불어 하나로 있다. 그 더불어 하나로 있음은 우리가 세계로부터 내침을 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고요한 기쁨과 함께 생명됨의 충만으로 이어진다. 자연 속에서 주체와 객체는 상호조응하며 서로를 끌어안으며 자아를 전체적인 조화 속에 있다는 안정감으로 이끈다. 사람은 자연에 있을 때 감각의 통제력을 완벽하게 유지하지만 도시의 소음과 속도에 방치될 때 그것을 잃어버린다. 감각의 통제력을 잃어버린 육체는 탈육체화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세계를 내 감각의 통제력 안에서 보고 겪으려는 욕망은 세계와 나 사이의 근원적인 평화와 질서를 찾으려는 열망이자, 우리를 끊임없이 탈육체화하는 도시의 미궁에서 빠져나와 야생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인간의 영원한 본능이다.
우리 조상들은 산과 물이 수려한 곳에 집을 짓고 사는 것을 지고한 꿈으로 그리고 있다. “생계를 꾸려가려면 반드시 먼저 지리를 잘 선택해야 하는데, 지리는 수로와 육로가 모두 잘 통하는 곳이 가장 좋다. 따라서 산을 등지고 호수를 내려다보는 지형이야말로 가장 빼어난 곳이다. 그러나 그러한 곳이라도 반드시 훤히 트이고 넓어야 하며, 또 긴밀하게 에워싸여야 한다. 그 까닭은 휜히 트이고 넓어야 財利를 만들어낼 수 있고, 긴밀하게 에워싸여야 재리를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閑情錄』) 이른바 禍와 災殃을 피하고 삶의 건강과 안녕을 누리는 집이 들어서는 첫 번째 지리적 조건으로 “산을 등지고 호수를 내려다보는” 背山臨水의 지형을 꼽은 것이다. 우리가 그런 자연 지형에서 구하는 것은 심미적 기쁨만이 아니라 사람이 타고 난 바 본래적인 것으로의 회복이다. 정약용도 『택리지』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물길과 나뭇길이 멀면 사람의 힘이 매우 허비되고 오곡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으면 흉년을 자주 만나게 된다. 풍속이 文만 숭상하면 말썽이 많고, 武만 숭상하면 싸움질이 많게 되며, 商利만 숭상하면 백성들이 간사하여진다. 경박한 무리가 농사만을 애써 지으면 고루하면서도 독살스러워지고, 산천이 탁하고 나쁘면 뛰어난 인물이 적고 심지도 깨끗해지지 못하는데, 이것이 그 대개이다.”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은 자연 지리가 그곳에 사는 인물의 됨됨이를 키우는데 중요한 요소이며, 청정한 인격의 뿌리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서유구나 정약용은 이렇듯 자연이 우리 삶의 큰 테두리로써 인격을 고양하는 바탕이며, 심미적 동기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셸리는 시를 가리켜 “세계의 공인되지 않은 입법자”라고 했다. 그 입법자의 전언에 따르자면 자연의 있음은 심미적 감각의 기초이자 준거이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더불어 있음을 추구해야 할 삶의 場 field이다. 그 삶의 장을 여기가 아닌 저기에서 구하는 것은 낭만주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태도다. 신석정(1907 ~ 1974)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깊은 삼림지대를 끼고 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들장미 열매 붉어
멀리 노루새끼 마음 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세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삼림지대, 고요한 호수, 그 위를 나는 흰 물새, 들길, 들장미 열매, 노루새끼, 비둘기가 있는 “먼 나라”는 곧 시인이 꿈꾼 이상향이다. 그 이상향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여기의 현실에 부재하는 것들이다. 이 시가 어딘지 모르게 우리 정서와는 다른 외래의 것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토속적인 경관의 체험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이상향으로 제시한 “먼 나라”는 실제 경험이 아니라 시인의 감각에서 무르익지 못한, 박래적인 것을 일방적으로 기리고 추수하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혐의를 두게 한다. 신석정이 삶의 이상향으로서 제시한 “먼 나라”가 삶의 체험으로 익히고 녹여낸 것이 아니라 잠시 빌려온 것, 즉 설익은 서양 취미의 산물이라 할지라도, 자연과 함께 하는 있음 속에 행복이 있다는 이 시의 전언 자체가 무효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전북 부안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시인이 왜 유년시절의 고향 체험을 녹여서 이 시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스쳐간다. 누구에게나 고향의 자연 지리는 그 “있음”의 대표적 표상 공간이자 장소이다. 김우창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향과 풍경은 이러한 ‘있음’을 하나의 전체성으로 드러내 준다. 자연물과 자연의 배경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하여 이러한 교훈을 배울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그런 ‘있음’ 속에 있었던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김상용(1902 ~ 1951)의 「남으로 창을 내겠오」는 신석정 시인의 서양 취향의 시와 달리 동양적 擬古 취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남으로 창을 내겠오
밭이 한참가리
괭이를 파고
호미로 풀을 매지오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오
새 노래는 공으로 드르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오.
「남으로 창을 내겠오」의 “왜 사냐건 / 웃지오.”라는 마지막 구절은 “왜 산에 사느냐기에 / 그저 빙긋이 웃을 수밖에 問余何事棲碧山 笑而不答心自閑”라는 이백의 「山中問答」을 분명하게 차용한 것이다. 이 구절은 밭을 갈고 씨앗을 뿌려 자연과 더불어 있음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뿌듯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저와 제 식솔들의 입에 들어갈 양식을 구하는 이 농업노동은 순박하며 아울러 숭고하다. 이 노동의 고요한 몰입을 숭고함으로 견인하는 것은 한가로이 떠가는 구름과 새의 지저귐이다. 사람은 불가피하게 자연을 彼岸으로 구하는 본능을 갖고 태어난 존재다. 이 시가 독자의 마음에서 행복에 대한 직관을 자극하는 바가 있었다면, 그것은 이 풍경 속에서 사람과 자연은 따로 있지 않고 하나로 움직인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2. 감각과 세계
지각은 경험의 산물이다. 경험이라는 퇴비 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지각이라는 튤립이 솟아나 붉은 꽃을 피우는 것이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맛보고 촉지하며 세계를 겪는다. “감각이란 세계와 나 사이에 놓인 창이다.”(다이앤 애커먼) 우리는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시각, 거기에 구체적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기억과 인상을 탐지하는 공감각까지, 그 감각의 총체를 통하여 세계와 만나고 세계를 받아들인다. 하나의 예로써 “촉각은 만지는 대상에 관한 여러 기초지식들인 형태, 무게, 열, 저항성, 짜임새들을 뒤섞어 놓는다.” 대상 세계의 모든 것들은 “주관적인 부정확성”이라는 제약 속에 놓여 있는 감각의 향연 속에서 접촉과 향유가 이루어진다. 감각이 없다면 대상의 세계도 없다. 우리 감각 앞에 대상의 세계는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온몸으로 “열려” 있다.
열린 채로 세계 속에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범주는 자연일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감각 앞에 전적으로 열려 있다. 그것은 체험되는 것이면서 해석되는 대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보이는 세계 속에 산다. 그러나 보이는 세계는 더 큰 보이지 않는 세계의 테두리 속에 있다. 대상의 세계를 바라볼 때 우리는 은연중에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더 큰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보는 것만 보지 않는다. 한 경관학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객관적인 시각상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 나아가서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문화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의미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대상의 일부다. 우리는 남이 보고 의미화한 내용까지를 그 대상에 겹쳐서 바라보는 것이다. 대상의 현실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그 여러 겹 중의 하나이다.
3. 수련예찬 : 모네, 바슐라르, 채호기
수련은 여름꽃이다. 그것은 여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물 위로 솟은 꽃을 본다. 그 꽃은 수련이다. 수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건만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여름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불현듯 깨닫는다. 이 깨달음은 보이는 대상 세계에 대한 체험에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해석에서 비롯된다. 수련은 말 하지 않음으로 말한다. 여름은 지나가는 것이고, 세상을 밝히는 발현체인 이 세상의 모든 피어난 꽃들은 머지않아 지고 말 것이란 사실을. 그리하여 수련이 피어 있던 이 여름은 한 번 지나간 뒤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임을. 수련은 우리가 단 한 번 왔다 가는 소멸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전언을 주기 위해 피는 여름꽃이다. 아아, 다시 돌아오지 않는 여름이라니 ! 수련의 줄기와 뿌리를 품어 안고 있는 물은 깊고 어둡다.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물의 깊이가 수련을 물 밖으로 밀어낸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수련은 어느 여름날 새벽 홀연히 피어난다. 이것은 우주적인 사건이다. 물의 깊이 속에 은닉되어 있던 해의 알들이 천상의 빛들을 끌어당기며 스스로 개화를 추진한 결과이다. 해의 빛과 열을 받고 덥혀진 물은 이 알이 스스로 부화할 수 있도록 말없이 도왔을 것이다. 꽃 이전에 잎이 먼저다. “태양열을 빨아들이는 집광판 같은 둥근 말발굽 모양의 잎은 물속의 잎자루에서 태어나 수중 창 블라인드처럼 도르르 말린 채 있다가 공기와 빛에 닿는 순간 팽팽하게 펼쳐진다.”(채호기, 「(수련 1)」) 빛에 반응하는 잎을 따라서 꽃이 반응한다. 꽃과 잎은 똑 같은 방식으로 세계 속에 저를 펼쳐낸다. “푸른 물 위에 수련은 섬광처럼 희다”(채호기, 「수면 위에 빛들이 미끄러진다」). 꽃은 꽃잎을 수평으로 펼치며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든 것을 받을 자세를 취한다. 스스로 무엇을 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것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이 햇빛이선 이슬이건 빗방울이건 수련은 마냥 기다린다. 여덟 개의 꽃잎을 팔방으로 펼치고 또한 펼친 꽃잎을 꽃받침이 받치고 있는 형국이니 이 꽃은 하나의 잔이다. 꽃은 聖杯이다. 독생자의 고귀한 피가 성배에 고이듯 천상의 빛이 꽃의 잔에 고일 것이다. 꽃은 내면에 잠재된 수동성의 원리 때문에 흔히 여성과 동일시되는 상징이다.
연못은 온통 신선한 꽃 냄새, 생생한 꽃, 밤새 젊어진 꽃 향기를 풍기고 있다.
저녁이 되면 ― 모네는 수없이 그것을 보았던 것인데 ― 이 젊은 꽃은 잔물결 밑에서 밤을 지내기 위해 사라져 버린다. 꽃꼭지가 오므라들어 진흙의 어두운 밑바닥에까지 꽃을 다시 불러들인다는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새벽마다, 여름밤의 편안한 잠을 자고 나서 커다란 미모사 수련꽃은 이렇듯 언제나 생생한 꽃, 물과 태양의 순결한 처녀로서 빛과 함께 되살아나는 것이다.
그토록 많이 되찾아진 젊음, 낮고 밤의 리듬에 대한 그토록 충실한 복종, 새벽의 순간을 알리는 그 정확성, 이것이야말로 수련으로 하여금 바로 인상주의의 꽃이 되도록 한 이유인 것이다. 수련은 세계의 한 순간이다. 그것은 두 눈을 지닌 아침이다. 그것은 또한 여름 새벽의 놀라운 꽃이다.
수련이 피어난 여름 새벽은 경이로 가득 찬다. “물과 태양의 순결한 처녀”는 여름 새벽에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새벽의 차고 시린 공기 속에 “밤새 젊어진 꽃 향기”를 퍼뜨린다. 그 꽃이 어제 저녁 빛이 사라진 물의 정원에서 꽃꼭지를 오므리고 진흙의 각박함 속에 제 존재를 숨겼던 바로 그 꽃이라는 사실은 쉽게 망각된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을 일이다. 수련은 흐리고 어두우니 꽃을 거두고 맑고 환하니 꽃을 내민다. 창랑의 물은 내 마음 속에 찰랑인다. 우주는 낮과 밤, 위와 아래, 양과 음, 수컷과 암컷, 탁한 것과 맑은 것으로 나뉘어져 있다. 흐린 창랑은 양이 위로 밀려나고 음이 아래에서 차고 올라올 때의 형상이다. 빛은 건괘에 속하고, 진흙 바닥은 곤괘에 속한다. 하늘이 빛을 거둘 때 수련은 곤괘의 리듬에 맞춰 저를 낮추고 하강하며 제 존재를 밑으로 끌어당긴다. 이는 난세에 군자가 취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주역』에 이르기를 난세에는 “큰 것은 가고 작은 것이 온다. 大往小來.”라고 했다. 물의 은둔자에게 합당한 지위를 찾아준 것은 여름 새벽이다. 새벽은 곤괘의 시간이 가고 건괘의 시간이 도래하는 때다. 흐린 창랑의 시간에 진흙 바닥으로 제 존재를 거뒀던 수련은 빛이 터지는 새벽에 태양의 부름을 받는다. 맑은 창랑의 시간이니 기어코 물 위로 제 존재를 밀어 올리는 것이다. 이 은둔자의 초탈한 마음은 여름 새벽에 비로소 형통한다. 그 꽃 위에 브라마가 앉아 있다.
수련은 여름새벽에 소생하는 젊음이며, 우주에 작용하는 낮과 밤의 리듬이고, 그것에의 말없고 충실한 복종이며, 내일 아침에도 세계는 고스란히 거기 있으리라는 신뢰의 확고함이다. 여기저기서 찬탄이 솟아난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 수련은 물의 기적이다. 그 기적은 눈부신 빛에 의해 마무리된다. 바슐라르에 따르자면 “수련은 세계의 한 순간이다.” 그 순간은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기도 하다. 바라보는 눈과 그 바라봄의 대상이 뜨고 있는 눈 ! 나의 눈과 너의 눈 ! 물 위에 떠 있는 그 많은 수련들은 물의 눈동자들이다. “깃이 네 개 달린 녹색 꽃받침 위로 드러난 목이 하얀 꽃은 달걀형의 수 개의 꽃잎을 오므려 잠들고, 눈을 환히 뜨듯 깨어나 자기를 바라보는 눈동자를 마주 응시한다.”(채호기, 「(수련 1)」) 그 눈동자를 시인은 “물속 비밀을 물 밖 세계에 알리는 메신저”라고 한다. 수련은 한 번도 그 사정이 알려지지 않는 저 카오스의 딸들이 살고 있는 거처, 어둠과 밤에 의해 지배되는 지하세계의 사정을 알리는 내적 안내자이다.
물과 빛과 공기가 서로의 몸을 비비며 섞는 관능의 자리에 피어나는 꽃이 수련이다. “눈부신 물결이 반짝이 연못가 생기발랄한 수련 위로 / 떨어지는 따뜻하고 뜨겁고 뾰족한 입술들이여 !”(채호기, 「햇빛 !」) 보라, 시인은 생기발랄한(바슐라르는 이 꽃을 “되찾아진 젊음”이라고 했다 !) 수련 위에 떨어지는 햇빛을 “뜨겁고 뾰족한 입술들”이라고 말한다. 그 뜨겁고 뾰족한 입술들을 “수련이 그 하얀 입술”(「8월」)을 벌려 받는다. 이렇듯 갈망으로 타는 수련과 햇빛이 한 몸이 되는 동안, 공기는 육감적으로 부풀어 오르고, 물은 젖은 몸을 뒤채며 신음을 내뱉는다.
눈부셔라, 포옹의 흔적, 물의 팽팽한 배 위에서
튀어 오르는 크리스털빛의 섬광들, 지난밤
격렬한 마찰의 뜨거운 여운이 폭발 뒤의
포연처럼 물의 육체를 감싸는구나 !
채호기, 「햇빛 !」
여름 새벽의 이면은 물과 빛과 꽃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비비고 빨고 핥으며 지새운 관능이 폭발했던 “지난밤”이다. 그 물 위에는 암수한몸으로 놀아난, 후끈 단 몸들의 뜨거운 포옹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포옹은 이미 지나간 것이지만 아직도 “물의 팽팽한 배 위에서”는 섬광들은 튀고, “격렬한 마찰”의 여진은 포연과 같이 “물의 육체를 감싸”안고 있다. 이렇듯 세계를 성애의 풍경으로 치환하는 일은 저 금욕주의의 억압 밑으로 조용히 잠복해버린 생명됨의 기쁨들을 불러내기 위함이다. 사랑의 순간들에 생명 에너지들은 용암처럼 바깥으로 분출되는데, 그것은 격앙된 몸 안에서 일어나는 격한 해일이다. “성애는 육체의 향연이다.” 내가 너의 몸을 만질 때 너의 몸은 뜨거운 불길로 타오르며 그 불길은 몸속의 물들을 끓어오르게 만들며 마침내 가장 낮은 곳에 고요히 엎드려 있던 용암들이 꿈틀대며 폭발을 시작한다. 내 몸은 네 몸이고, 네 몸은 내 몸이다. 두 몸이 헐떡거리며 애무와 포옹을 할 때 골수에 얌전히 숨어 있던 살아 있음의 환희를 거칠게 터뜨리며 깨어난다.
4. 우포늪 : 황동규와 배한봉의 시
수련은 여름 연못의 대표적 식물이다. 내 상상은 어느 해 여름 새벽에 만난, 온통 초록 수생식물로 뒤덮여 있던 우포늪으로 건너간다. 창녕 우포늪의 여름새벽 풍경은 남해 금산, 보길도 세연정 원림, 거제 해금강, 영주 부석사에서 바라보는 소백산 연봉들과 더불어 나라 안에서 손을 꼽을 만한 빼어난 승경지다. 우리가 우포늪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포늪, 목포늪, 사지포, 쪽지벌 등 네 군데의 늪을 하나로 부르는 명칭이다. 우포늪은 경남 창녕군의 유어·이방·대합면 등 세 개 면에 걸쳐 있고, 둘레는 7.5킬로미터에 전체 면적은 70만평이 이른다. 나라 안에서 가장 너른 면적을 갖고 있는 최대의 자연 늪지다. 이곳에 늪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억 4천만 년 전으로 지금까지 태고의 생태환경이 잘 보존되고 있는 곳으로 이름이 높다. 1997년에 이 늪에 대한 본격적인 생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온갖 풀, 나무, 곤충, 물고기 들이 관찰되었다. 그때 조사된 생태보고서에 따르면 이곳의 식물은 가시연꽃·생이가래·부들·줄·골풀·창포·마름·자라풀 등 168종, 조류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랑부리저어새·큰고니와, 그밖에 쇠물닭·논병아리·청둥오리·쇠오리·큰기러기 등 62종, 어류는 뱀장어·붕어·잉어·가물치·피라미 등 28종, 수서곤충은 연못하루살이·왕잠자리·장구애비·소금쟁이· 등 55종, 패각류는 우렁이·물달팽이·말조개 등 5종, 포유류는 두더지·족제비·너구리 등 12종, 파충류는 남생이·자라·줄장지뱀·유혈목이 등 7종, 양서류는 무당개구리·두꺼비·청개구리·참개구리·황소개구리 등 5종이 서식하고 있는 곳으로 나와 있다. 우포늪은 그 생태적 가치가 인정되어 1997년 7월 26일에 생태계보존지역 중 생태계특별보호구역으로 지정된 데 이어 1998년3월 2일에는 람사조약 보존습지로 지정되었다.
우포에 와서 빈 시간 하나를 만난다.
온 나라의 산과 언덕을 오르내리며
잇달아 금을 긋는 송전탑 송전선들이 사라진 곳,
이동전화도 이동하지 않는 곳.
줄풀 마름 생이가래 가시연(蓮)이
여기저기 모여 있거나 비어 있는
그냥 70만평,
누군가 막 꾸다 만 꿈 같다.
잠자리 한 떼 오래 움직이지 않고 떠 있고
해오라기 몇 마리 정신없이 외발로 서 있다.
이런 곳이 있다니 !
시간이 어디 있나,
돌을 던져도 시침(時針)이 보이지 않는 곳.
황동규, 「우포늪」
황동규의 「우포늪」은 방외인의 눈에 비친 우포늪의 사실적 외관을 스케치한다. 늪의 물속에 줄풀 마름 생이가래 가시연과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고, 그 위 공중에는 잠자리 떼가 떠 있다. 먹잇감을 찾아 여기 날아온 해오라기 몇 마리는 먹잇감을 사냥하는 일도 잊은 채 “정신없이 외발로” 서 있다. 이 자연늪과 마주친 서정적 주체의 놀라움은 “이런 곳이 있다니 !”라는 찬탄에 압축되어 있다. 물론 이 찬탄은 서정적 주체가 이제까지 몰랐던 장소를 새로 알게 된 데 따른 기쁨과 놀라움의 표현이다. 그러나 장소가 불러일으킨 놀라움은 실은 아주 오래된 시간과의 만남에서 오는 놀라움이기도 하다. 우포늪은 1억 4천만 년이라는 시간이 만든 장소이다. 자연 경관이 수려한 장소의 심오함은 경관과 그 경관에 새겨진 시간의 심오함이다. 우포늪만이 아니라 모든 오래된 장소는 시간의 퇴적물, 시간적 지속의 현존인 것이다. 아울러 서정적 주체의 놀라움은 아주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장소와 순간이 마주칠 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섬광이다.
우포늪에 와서 1억4천만 년의 시간과 만나는 순간은 서정적 주체가 잊고 있던 제 존재의 확실성과 만나는 순간이다. 현재-자아-순간이 하나가 되는 이런 순간들은 존재 안에서 경험하는 심리적 전환과 존재 쇄신의 계기적 순간들이다. 이 순간이 전환과 쇄신의 계기적 순간들이 되는 것은 이 순간에 수렴되지 않는, 순간의 바깥에 있는 일체의 사유들이 배제되면서 부정되는 까닭이다. 문득 존재 지속의 시간은 끊기고, 서정적 주체는 막막함 속에 놓이는데, “시간이 어디 있나,”하는 자기를 향한 굳이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 이 자족적 물음은 그 막막함을 독자에게 구체적 실감으로 되돌려놓는다. 우포늪은 서정적 주체를 시간의 連累에서 떼어내 “순간 속에서 정립된 존재자”(서동욱)로 살게 한다. 그를 저편의 세계와 연결·접속시키는 이동전화조차 끊겨버림으로써 이 순간은 보다 완벽해진다.
순간에는 지속이 없다. 순간 속에서 정립된 존재자는 말 그대로 순간의 총아들이다. 문명인들은 저 혼자의 힘만으로 오롯하게 서는 존재자가 되는 순간의 총아가 되기 쉽지 않다. 수없이 많은 문명적인 것의 간섭과 방해 속에 둘러싸여 살기 때문이다. 자연은 거추장스런 문명이 이룬 것들을 단칼에 끊어내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것들은 자연 앞에서 매우 하찮아 보인다. 송전탑이나 송전선, 이동전화 따위의 문명이 만든 사물들은 저 원시의 자연생태를 펼쳐 보이는 70만평의 장관 앞에서 그 쓸모를 잃고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득음은 못하고, 그저 시골장이나 떠돌던
소리꾼이 있었다, 신명 한 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
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로 내리치는
한 대목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항산 솔밭을 다 적시고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 놓는다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
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
늙은 고수라도 만나면
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
필생 동안 그가 찾아 헤맸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
소목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
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
저 왁새들
완창 한 판 잘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
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
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
배한봉, 「우포늪 왁새」
배한봉의「우포늪 왁새」는 우포늪의 정경 위에 “시골장이나 떠돌던 소리꾼”의 불우를 겹쳐 놓는다. “막거리 한 사발”의 대접에도 사양하지 않고 소리를 뽑아내며 이 장터 저 장터를 정처없이 떠돌았을,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의 이 소리꾼은 끝내 득음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 이 떠돌이 소리꾼의 불우함은 얼핏 이중환을 떠올리게 한다. 이중환은 숙종16년(1690) 태어난 사람이다. 경종 때 한 무고사건에 연루되어 영조 원년(1725)에 형을 네 차례나 받고 두 번의 귀양살이를 했으며 말년이 몹시 불우했다. 한 후학은 그의 말년의 불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리하여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어 살 집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말년에는 늙은 농부나 고기잡는 첨지가 되길 원하였으나 그것마저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택리지』를 지은 것이다.” 다시 「우포늪 왁새」의 초점 대상은 소리꾼이 아니라 우포늪을 서식지로 삼고 있는 왁새다. 시인은 자연늪의 생태에 한 소리꾼의 불우한 생애를 겹쳐놓음으로써 이 풍경을 인간화한다. 이 떠돌이 소리꾼의 소리가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항산 솔밭을 다 적시고 /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 놓는다”. 그는 살아서는 불우했으나, 죽어서 행복하다. 왜냐하면 “완창 한 판 잘 끝냈다”고 하늘을 선회하는 왁새 떼에게서 “소리꾼 영혼의 심연”을 보는 시인이 있기 때문이다. 소리꾼이 이루지 못한 득음의 꿈을 우포늪 왁새들이 이룬다. 우포늪에 봄꽃들이 만화방창 자지러지며 무르익은 것은 바로 그 소리꾼의 넋에 빙의된 왁새들의 울음이 우포늪 위로 질펀하게 뿌려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