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 구엔 지압은 1946년 12월 19일 20:00시를 기하여 하노이, 하이퐁 등 베트남 전역에서 기습적인 공세를 취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프랑스군 장교들이 저녁식사를 하고 있는 동안 기습적인 일격을 가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그러나 현대무기로 장비된 63,000여 명의 병력을 전개시켜 놓고 있던 프랑스군은 이미 공세 정보를 획득하여 사전에 충분한 대책을 강구해 놓고 있었다. 베트민군은 소수의 프랑스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전초기지들은 점령할 수 있었으나 도시지역에서는 무참히 패퇴하였다. 빈약한 무장에다 훈련도 안 된 베트민군은 아직 현대식 서구 군대의 적수가 될 수는 없었다.

프랑스군의 방어진지
호치민과 지압은 당시 그들의 전투력으로는 프랑스군과 정면 대결하여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들의 장기혁명전쟁의 이론에 입각하여 제1단계 즉 전력을 보존하고 혁명역량을 배양하는 태세로 전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더구나 프랑스군은 1947년 말까지 약 5만 명의 아프리카 부대와 약 2만 명의 외인부대를 증원하면서 베트민군에게 계속 군사적 압력을 증가시키고 있었다.

베트남에 투입되는 프랑스 외인부대원들

프랑스 원정군의 모로코 구미에 부대
호치민은 그의 정부와 정규군을 이끌고 비엣 박(Viet Bac, 北越)이라고 불리우는 북부 산악지대로 대피하였다. 그들은 자동차, 자전거, 우마차 등 가용한 기동수단을 총 동원하여 필요한 물자를 모두 운반하였다. 철도의 레일도 가용한대로 철거하여 운반하였다. 그들이 통과한 후에는 도로를 차량이 통과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프랑스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산악지대에서 각종 공장들을 세우고 생활필수품을 생산하였다. 병기공장도 세워 수류탄, 각종 지뢰 등을 만들고 조잡하였지만 박격포 같은 포를 제작하였다. 계속 신병을 모집하여 병력을 증원하고 훈련을 시켰다. 수년 내 끝낼 수 없는 전쟁임을 인식하고 호치민은 전력을 증강시키는데 전력하였다.
당시에 베트민은 고립무원이었다.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지도 못했다. 소련과 중국도 베트민 정부를 아직 승인하지 않았다. 중국은 국공내전에 여념이 없었고, 소련도 그 당시로는 베트민이 동남아시아 먼 곳에 떨어져 있는 공산집단으로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베트민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히려 프랑스의 공산당을 강화시키는데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소련은 베트남 문제를 UN에 상정시키지도 않았고 베트민에 대하여 물질적인 지원은 물론 정신적인 지원조차 하지 않았었다.
호치민과 그의 군대들은 산악지대에서 원시생활과 같은 고통을 겪으며 지냈다. 프랑스군의 공격에 따라 자주 이동해야 했고 어떤 때는 호치민과 그의 각료들이 전부 생포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의 식민압제로부터 베트남 인민을 해방시키고 국가와 민족의 독립을 위한 공산투쟁을 전개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고통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들은 산악지역으로 쫓겨 갔으나 패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비록 도시지역은 상실하였으나 그들은 인민들의 마음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장기 항전태세를 갖추면서 그들의 촌락 게릴라나 지방군 게릴라들로 하여금 정규군들이 훈련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도 베트남 전 지역에서 끊임없이 게릴라전을 전개토록 하였다.
베트민군은 민병대(Popular Forces), 지방군(Local Forces)과 정규군(Regular Forces)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민병대는 마을이나 면 단위로 가용병력에 따라 분대 혹은 소대 규모로 조직되어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작전 임무가 부여되면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거나 지방군이나 정규군의 작전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생업으로 복귀하는 준 군사부대였다.
지방군은 대개 1개 성(省)에 대대 규모, 1개 군(郡)에 중대 규모로 조직되어 담당지역 내에서 독자적인 게릴라전을 전개하거나 정규군이 작전시 이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부대였다.
민병대나 지방군 요원은 정규군의 병력 보충원이며 정규군이 담당지역 내에서 작전시 매복, 습격, 교란 등의 군사작전으로 정규군의 작전을 지원함은 물론 정규군에게 필요한 보급을 운반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51년 베트민 정규군 22,000명이 빈 옌(Vinh Yen)을 5일 동안 공격하였을 때 소요되는 5,000톤의 보급을 연 인원 18만 명이 동원되어 맨손 또는 자전거로 운반하였다.
자전거는 앉는 의자나 바퀴를 돌리는 페달을 제거하고 대신 통나무나 대나무를 핸들과 후미에 연결하여 한 손으로는 밀고 한 손으로는 방향을 조절할 수 있도록 변형시켜 산악지형에서도 보급을 운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식량을 운반하는 북베트남 자전거 부대
맨손으로 운반시 베트민군의 보급 운반기준은 1인 25㎏, 1일 평지 24㎞, 산악 15㎞였고 변형된 자전거로 운반시 1일 운반거리 표준은 같으나 운반량은 1인 75㎏ 이상이었다.
베트민의 정규군은 1954년까지 6개 보병사단, 1개 포병사단, 20개 독립연대, 20개 독립대대의 규모로 확장되었다. 당시 베트민군의 사단병력은 10,000명 수준이었으나 장비는 보잘 것 없었다. 사단은 3개 연대와 1개 중화기 대대, 1개 대공화기대대로 구성되고 장비는 일본제, 프랑스제의 개인화기, 소련제 중기관총, 박격포 등으로 화력이 미약한 순수 보병부대였다.

1차 전쟁당시의 베트민군대.. 장비의 대부분은 노획한 프랑스제 무기로 보인다. 기관총은 2차대전 당시 영국군의 유명한 브렌기관총.하지만 정규군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은 그들의 군복과 헬멧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1951년부터 중국과 소련의 원조로 장비가 증강되기 시작하였고 특히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노획장비를 대량 베트민에 원조하였다. 지압은 부족한 화력을 집중 운용하기 위해 351사단에 베트민군이 보유한 대부분의 중포를 편성하여 결정적인 전투에 집중운용을 가능케 하였다.
※ 베트민군 포병사단의 장비
● 75㎜ 곡사포 36문
● 120㎜ 박격포 40문
● 105㎜ 곡사포 36문
● 82㎜ 박격포 40문
● 12.7㎜ 기관총 50정
● 37㎜ 대공포 36문
1946년 말까지 10만여 명이었던 베트민군의 병력은 계속 증강되어 1954년 종전시까지는 정규군 125,000명, 지방군과 민병대 225,000명이었다. 베트민군의 작전을 지도하기 위해서 1950년 이후 소련과 중국의 고문관이 각각 300여 명씩 파견되었고 중국군 2만 명 이상이 단위 전투부대가 아닌 의용군이라는 이름하에 각종 중화기의 사수요원 등으로 참전하였다.
베트민군은 전형적인 게릴라 전법으로 프랑스군을 괴롭혔다. 베트남 전역에 걸쳐 게릴라전이 격화되어 갔다. 게릴라전에 적합한 산악, 정글, 우거진 수풀 등의 지형을 이용한 Hit and Run 전법으로 프랑스군을 곤경에 빠뜨렸다.

프랑스 군 차량을 매복 공격한 베트민 병사들
프랑스군의 공항 수비대는 한 밤중에 갑자기 베트민군의 기습을 받았다. 횃불을 들고 무더기로 공격하는 베트민군에게 맹렬한 사격을 가하였다. 이번에는 비행기 격납고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수비대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사격을 계속하였다. 날이 밝은 후에야 뿔과 머리 부분이 타 버린 물소 떼들이 많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프랑스군은 즉각 병력을 동원하여 인근 마을 지역을 포위하고 수색을 하였으나 적을 발견할 수도 없었고 오히려 저격만 받았다. 이미 베트민군은 도주하였고 마을에 있는 소수의 지방군은 지하 동굴 속으로 자취를 감춘 후였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정예 기계화 부대 3만여 명을 투입하여 베트민군의 근거지인 북부 산악지대를 공격하여 베트민군을 완전히 소탕하려고 하였으나 공격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도로는 형편없었고, 파괴되었거나 장애물, 지뢰가 설치되어 있었다. 적의 저격은 계속되었고 마을은 초토화되어 있었으나 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군의 기계화 부대는 위용은 당당하였으나 완전히 도로의 포로가 되어 도로로부터 떨어진 지역에서는 작전다운 작전을 해 보지도 못하고 베트민군의 간헐적인 공격에 시달려야 했다. 황폐한 마을에서 보급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전의마저 상실하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부 산악지대 소탕을 위해 출동하는 프랑스군
이후부터 프랑스군 장교들은 베트남에서 군사적 승리가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베트민군은 혁명전쟁의 2단계인 균형상태가 조성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게릴라전을 더욱 격화시켜 나가기 시작하였다.
첫댓글 보급수가 18만 ㅎㄷㄷ
구미에병...영국 구르카 용병에 버금가는 용맹성을 떨쳤다던데...
한번은 프랑스인 장교가 농담으로 "독일군 장교에게 지급되는 시계를 갖고 싶다"고 했더니 새벽쯤 태연하게 시계가 채워진 독일군 장교의 팔한쪽을 갖다주더라는;;;
외인부대가 엄청난피해를 본 월남전역이 슬슬 시작되는군요...
ㄷㄷㄷ
게릴라에 프랑스가 무너지기시작하는군요...
과거 본인들이 나치에게 재미를 봤던 게릴라전을 역으로 당하는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