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요약문)은 입센 전집 번역가 김미혜 교수님과의 인터뷰에 앞서 추천작품인 <페르귄트>, <인형의 집>, <유령>을 쓴 시기를 중심으로 썼습니다. {책(모던연극의 초석 헨리크 입센) 중 생애. 작품생성. 초기수용 중에서 발췌.}
글이 많이 부족하지만 입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질문을 무엇으로 해야할지 함께 의논하여 주세요.
** 인터뷰 일시와 장소 : 2021. 7. 28.(목) 10시 30분. 알트루사 사무실
*** 인터뷰는 줌으로 현장 연결하기로 하였습니다. (원체 강의를 줌으로 안하실 정도여서 고민끝에 결정하셨습니다.) 책을 읽고 참여 부탁드립니다.
알트루사 노트북은 줌 송출이 어렵다고 합니다. 인터뷰를 위해 노트북 빌려주실 분을 기다립니다.
1. 입센의 유소년기 :
장남 요한이 두 살이 채 되지 않고 죽어서 둘째인 입센이 첫째로 자랐다. 입센은 고향 쉬엔의 폭포소리를 여성들의 고통소리로 기억한다. “하루종일 롱 폭포, 클로이스터 폭포, 그리고 온갖 급류와 폭포들의 압도적인 노호소리로 꽉 차 있었다. 그 노호소리는 비명을 지르며 신음하는 여인들의 소리를 실은 채 아침부터 밤까지 뼈에 사무치게 들렸다”며 어린시절을 회상했다. 입센의 여성상에 큰 영향을 끼친 건 어머니 마리엔이었으며, 내성적인 성격의 입센이 부엌 옆 골방에서 책, 특히 성경을 즐겨 읽었고, 이후 성경을 평생 손에 놓지않았다. 그림 솜씨가 좋았고 인형극, 특히 연극을 접한 때가 이때이다.
2. 소도시 그림스타에서의 시기 :
15세에 생활비를 벌기 위한 약국 근무 시작했다. 이때 열살 연상의 여인으로부터 사생아 한스 야콥을 낳아서 아들이 14세 될때까지 생활비를 지급했다. 의학공부와 병행하여 여러 작품을 읽었으며 특히 노르웨이 문학을 주창한 베르겔란에게 영향을 받았다. 18세기 중엽 유럽의 혁명과 전쟁의 시기에 독재에 항거한 헝가리인들에게 연대의 시를 쓰고, 스웨덴과 노르웨이 국왕에게 소네트를 보내려함. 풍자시, 진중한 시를 썼다.
이때의 입센은 주변에 생계에 고군분투하면서 극단적 견해를 가진 젊은이로 인식되었다. 첫 희곡 <카탈리나>를 브뤼뇰프 바르메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출판하는데 두에와 슬러루드 두 친구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특히 슬러루드는 입센의 책 출판에 자신의 유산을 내놓을 정도였다. 입센은 그의 여동생 일네오노라의 이름을 (인형의 집 노라의 본래 이름)으로 기렸고, 첫 손녀의 이름이 되자 아들부부에게 감사했다.
작품 카틸리나는 스칸디나비아 나라 중 문화적으로 뒤쳐지며 덴마크, 프랑스, 독일 작품 위주의 풍토에서 우호적평가 받지 못하여서 자비출판 100부 중 대부분 폐지로 팔렸지만 학생들에게 관심과 흥미를 끌었다. 그럼에도 카틸리나의 의미는 1840년대 이후 노르웨이에서 처음으로 발표된 진지한 희극이었다.
3. 크리스티아니아(현 오슬로)에서의 생활 :
노동자 운동 경험했다. 대학입학자격시험 낙제로 의대를 포기하고 문학과 미학을 독학하였다. 헝가리 연대등 저극적인 행보를 했지만 이후 평생 정치, 정당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입센의 작품들은 보수주의자들의 혐오에 가까운 반대를 받았고, 좌익성향 급진주의자들과 진보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두번째 단막극 (전사의 무덤)을 필명으로 발표하였다. 영웅주의에 열광한 한 여성을 주제로 썼다. 첫작품보다 낫다고 보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화해, 용서, 사랑이 담겨있으며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는 시각성이 돋보이는 소품이었다. 이 작품부터 노르웨이의 이상주의적 미학에 맞추려는 입센의 투쟁이 시작된다.
4. 자의적 망명기 : 이탈리아 거주 (페르 귄트)
페르 귄트 : 노르웨이인들의 실체인 “이기심, 편협함, 자기만족”에 빠져있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한 것으로 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는 노르웨이의 영웅적 과거와의 최종 결별하였다. 둘째는 자신의 과거를 직시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이다. 이 작품에 입센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반영되었다. 페르는 경험과 실수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없으며 알맹이 없는 허풍쟁이, 바람둥이, 몽상가, 위선자이다. 이 같은 내용으로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 환영받지 않았고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입센은 이러한 평가에 괴로워하면서도 미학적 규범의 혁명가, 극예술의 혁신자라는 자신의 입장을 꿋꿋이 주장했다. 그리고 입센에게는 타인에게서 이해받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했기에 이 작품이 근본적으로 진전된 발걸음이라고 밝혔으나 돌아온 것은 몰이해였으므로 분노했다.
페르 귄트는 오늘날 북구의 <파우스트>로 평가된다. 파우스트와 공통점은 구원의 여성이 있다는 점과 자신의 생을 깨닫는 점에서 그렇다.
이탈리아의 예술과 풍광은 입센으로 하여금 노르웨이와 자신의 과거로부터 해방을 맛보았다고 한다.
2차 로마체류 (인형의 집)
1878년 10월 입센의 메모 ‘현대 비극을 위한 노트’는 인형의 집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 작가 자신도 노라를 현실의 인물로 생생하게 보았다. “진지한 극인데 실제로 가정극이며 당대의 상황과 결혼생활의 문제를 다룬다”고 언급했다. 그의 이전 작품들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의 기초 위에 <인형의 집> 노라가 탄생되었다. 노르웨이 여류작가 라우라 킬러의 실제 사건에서 직접 취한 소재이다. 작품은 단 이틀동안에 과거의 일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 정체를 드러내는 입센의 극작술은 이 작품으로 대가적 경지에 이를 만큼 발전시킨다. 초판과 재판이 매진되고 번역본이 전 유럽에서 출판된다. 인형의 집은 폭발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노라의 딜레마에 대한 토론이 뜨거웠다. (예: 자식을 버린 엄마인 노라역을 맡은 배우가 극의 마지막을 연기할 수 없다고 고집을 피워 작가의 승낙없이 끝이 변경되어 공연됨. 1882년 미국 밀워키에서 공연된 작품은 결말이 다름. 1886년 런던에서의 공연은 많이 삭제된 번안물로 노라가 집을 나가지 않는다. 등등)
그럼에도 원작 그대로 공연된 1889년 작품에서 관객들은 공연에 너무 몰입했다. 특히 노라는 각국의 여배우들이 가장 맡고 싶은 역이며 ‘그녀의 범죄적 행위(비평가들의 말)’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관객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3차 로마체류(유령)
<유령> 3막 가족극으로 노라가 집을 나가지 않고 머물렀을 때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제시한 작품으로 부르주아 사회의 인습적인 결혼제도의 폐해에 대해 썼다. 오이디푸스 왕처럼 운명지어진 파국을 향해 나아가는 극적 행동을 지닌 고대 그리스 비극과의 유사성을 있다고 한다. 극은 알빙 부인의 거실에서 벌어진 단 하룻 동안의 일을 다룬 분석극이다. 소재는 알빙가의 비극이고 주제는 한마디로 “옛것의 타파”이다.
<유령>이 초연될때 ‘유령을 반대하는 전쟁’이 일어났다. 입센이 가장 분개한 것은 고국 노르웨이에서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입센은 분개하면서도 의연히 기다렸다. 유령은 사회적 통념을 거스르는 근친상간, 성병, 유전, 자유연애, 여성문제 등을 이유로 영국에서는 1914년까지 공공극장에서 공연이 금지되었고 입센에 우호적인 독일에서도 검열 때문에 몇 번 비공개로 공연되었다. 유령에 대한 격렬한 반대는 그로 하여금 작가로서의 관점에 대해 재고하게 만들었다. 그는 유령보다 더 나아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시인인 자신과 민중이 서로 이해 못한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입센은 27년의 이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고국을 고향으로 느끼지 못했다. 입센은 고독했다. “누구나 헛되이 27년을 밖에서 자유롭고 해방된 문화 환경에서 사는 건 아니오. 여기 안,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저 위 피오르 가에서 난 태어났소. 그러나 그러나 그러나 난 어디서 내 고향을 찾아야 한단 말이오?-입센의 편지 중에서”
입센은 신이 부여한 작가로서의 소명으로 "노르웨이에서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임무인 민족을 크게 생각하게끔 가르쳐야"한다는 소명을 강력하게 느꼈고, 이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고국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오해와 반목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경험하였다. 입센은 <황제와 갈릴리 사람>이라는 작품을 쓰면서 업적은 쌓았지만 백성들에게서 사랑받지 못했던 황제 율리안의 영혼의 변화에 공감했다. 황제 율리안이 죽음의 침상에서 느꼈던 것이 바로 자신이 느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입센은 고국을 떠나 이탈리아와 독일에 머물며 고독감이 쌓여있을 때 자문해다고 1874년 고국에 잠시 들렀을 때 말했다.
‘자유’와 ‘진리’는 작가로서 입센이 내건 모토였다. 거짓과 위선으로 포장된, 적어도 겉으로는 평안함과 질서가 잡힌 듯 보이는 빅토리아 시대 부르주아지의 삶을 예리한 눈으로 관찰하며 권력의 이면을 파헤치고 사회적 지위를 가진 인물들을 의심하며, 질문했다. 이를 위해서 사실주의 극작 기법을 채택했던 것이다. 입센은 사실주의란 “독자들에게 현실의 한 조각을 경험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라 했다. 극의 배경이자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노르웨이의 소도시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국외자였기 때문에 넓은 바깥세계에 속해서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는 예술가로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 작품으로 노르웨이의 보수주의자들은 냉담했고, 진보주의자들은 대환영이었다. “진리의 정신과 자유의 정신-이것들이야말로 사회의 기둥들”이라 썼다.
첫댓글 와~ 공부 많이 하셨네요. 저는 <인형의 집> 김미혜선생님 편으로 다시 읽으려 하고요. <유령>읽고 있어요. <황제와 갈릴리 사람>을 읽는데 중세와 그 시대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해야 소설을 쓰는거구나 좀 놀라면서 보고 있어요.
소설 아니고 희곡 썼어요~
@미미 아이구 소설과 희곡 엄청난 차이가 있지요. 입센의 희곡작품 입니다^^
<황제와 갈릴리 사람>은 로마 체류기부터 시작한 작품으로 9년간 집필하였다. 기독교인들에게 배교자라고 불렸던 로마의 황제 율리안의 마지막 12년을 다루기 위해 입센은 교회의 역사가들이 쓴 책자를 섭렵했다.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중시하고 과거의 역사를 현재와 연계시키려는 의도로 입센은 이 세계 역사극에서 매우 사실적인 글쓰기를 위해 노력했다. 산문시대의 첫 작품이다. 자연주의, 현실적인 작품이다. ('황제와 갈릴리 사람'을 쓸때 무대로 옮겨지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레제 드라마로 썼으니 소설처럼 느꼈을 거에요. 레제드라마는 공연이 아니라 독서용으로 쓴 희곡을 말한대요. 20년이 지나서야 초연이 되었고 상영시간이 5시간이었답니다. 책에서 요약한 부분이에요.)
@한제선 고맙습니다~~~~^^ 중세 루터를 최근에 보는데 <황제와 갈릴리 사람>를 읽으니 중세도 더 쉽게 이해됐어요^^